하지만 무엇보다 차설아를 화나게 만든 건 성도윤의 반응이었다.그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차설아를 지나갈 때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분위기가 삽시에 어색해져 사도현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설아 쨩, 너무 화내지 마. 도윤이 형을 설아 쨩도 잘 알잖아. 완전 도도해. 방금 자기한테 화를 냈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그러니까...”“상관없어요.”차설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성도윤과 서은아가 떠난 뒷모습을 보며 차갑고도 덤덤하게 말했다.“나 아까 말했잖아요. 성도윤과 더는 얽히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내가 왜 화나겠어요.”“정말 화 안 나?”사도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진 것 같은데?”“...”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솔직히 사도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차설아는 방금 화가 난 게 맞았다. 하지만 성도윤 때문이 아니라 서은아 때문이었다.‘저 여자 정말 연기 잘하네. 겉으로는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척 털털해 보이면서 성도윤과 스스럼없이 지내지만 사실 남몰래 처음 본 나를 도발한 거잖아. 특히 방금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내 옆을 지나갔는데, 내가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지?’“서은아라는 저분, 성도윤 좋아하죠?”차설아는 다정한 서은아와 성도윤의 사이를 보이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뭐? 야크샤와 도윤이 형?”사도현은 마치 무슨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배를 움켜쥐고 깔깔 웃었다.“그럴 리가 있겠어? 두 사람 의형제 사이인데. 도윤이 형은 야크샤를 전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마 야크샤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걸?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면 진작 사귀었겠지. 그럼 설아 쨩이 도윤이 형과 결혼했을 리도 없고...”차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여자의 마음을 모르잖아요. 저런 사람이야말로 머리를 잘 쓴 거죠.”“아니야, 설아 쨩. 야크샤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차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동의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았다.“하하, 알겠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설아 쨩의 마음은 알겠으니까. 오늘은 얌전히 내가 시킨 대로만 해.”사도현은 기꺼이 두 사람을 도울 생각이었다. 도도한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한 번 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상관할 생각도 없었다!그릴 앞에서, 성도윤과 서은아는 고기를 굽고 있었다.두 사람은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고, 게다가 생각도 비슷했기에 줄곧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죽마고우라고 할 수 있었다.성도윤은 서은아를 형제처럼 생각했지만 서은아는 사춘기 때부터 이미 성도윤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서은아가 성도윤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려고 할 때, 마침 성도윤과 차설아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전체 해안시를 놀라게 했다.그래서 서은아는 어쩔 수 없이 유학을 이유로 외국으로 간 것이었다.최근이 되어서야 그녀는 성도윤과 차설아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다시 귀국한 것이다. 성도윤에게 고백하려고 단단히 마음 준비를 했다.그녀는 친구 신분으로 계속해서 성도윤 옆에 붙어 있으며 성도윤이 그녀의 존재를 익숙하게 하고, 또 그녀를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고백하려고 했는데, 차설아가 돌아온 것이다.그래서 서은아는 차설아를 그야말로 원수라고 생각했다. 차설아는 그녀의 ‘눈엣가시’였다.차설아의 추측은 완전히 정확했지, 괜히 그녀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지어낸 망상이 아니었다.하지만 아쉽게도 단순한 남자들은 전혀 서은아의 속셈을 모르고 그녀를 굳게 믿고 있었다.“도윤아, 전처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두 사람 재결합하는 거 아니야?”서은아는 고기에 기름칠을 하며 무심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성도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한참 고기를 굽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재결합할 수가 없지. 서로 마음이 없는데.”“하긴, 그때 두 사람 결혼하게 된 것도 서로 사
사도현은 난처해서 뭔가 설명하려 했지만 차설아는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저랑 도현 씨는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특별한 인연이고, 가치관과 취미도 일치하니 당연히 친하죠.”성도윤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지더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은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차설아를 가리키며 정의감 넘치게 말했다.“설아 씨, 듣기 거북하겠지만 오늘은 제가 한마디 해야겠어요. 무정하고 의리 없는 건 알겠지만, 적당한 선은 지켜야죠. 설아 씨의 행동들은 같은 여자로서 제가 다 부끄럽네요.”“네? 뭐라고요?”차설아는 화가 나서 웃음이 절로 났다.역시 서은아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차설아가 그녀의 가식적인 얼굴을 까발리기도 전에 선제공격을 해오다니.역시나... 똘똘한 악역 캐릭터였다!“방금 두 사람의 친밀한 행동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헷갈리네요. 만약 연인이라면 우리 도윤이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건가요?”“그리고 도현이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어요. 그런데도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건 염치없는 제삼자가 아닌가요? 이건 선을 넘은 행동이에요!”서은아는 듣기 거북한 말들을 쏟아냈다.“누나, 사실...”사도현은 그녀의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차설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는 듯 마는 듯 물었다.“대체 무슨 근거로 저희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흥, 그렇게 친밀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얼굴까지 붙을 지경인데, 이게 커플이 아니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어요!”서은아는 일부러 거친 말투로 차설아를 공격했다.성도윤은 옆에서 꼬치를 뒤적거리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사실이면 그냥 인정해. 죄 지은 사람처럼 숨지 말고.”차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사도현의 어깨를 감싸고는 웃었다.“우리가 커플이라고 누가 그래요? 우리는 순수한 우정이라고요!”서은아는 차갑게 비웃었다.“흥, 남녀 사이에 절대 순수한 우정은 없어요. 입은 아니라고 하지만 몸이 말해주죠...”“그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자, 사도현은 어쩔 수 없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그만, 그만. 내가 깔끔하게 정리할게. 나랑 설아는 순수한 우정일 뿐 다른 지저분한 관계는 없어. 도윤이 형과 은아 누나는 샘물보다 더 순수한 사이이고, 나랑 윤설도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 않아. 다들 싱글이니 아무나 좋아해도 돼!”“오늘 모처럼 모였으니 제발 재밌게 놀자. 초딩처럼 말싸움하지 말고. 내 말에 동의한다면 주먹이라도 부딪쳐서 화해하자고!”사도현은 말을 마치고 주먹을 내밀었다.서은아가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응답했다.만약 지금 상황에서 계속 차설아를 겨냥한다면 너무 소심해 보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설아 씨, 오해였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방금 제가 무모했어요. 미안해요...”“전 쿨하고 친구 사귀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도현이와 친한 사이라면 저 서은아의 친구이기도 해요.”서은아는 상냥한 얼굴로 차설아를 향해 러브콜을 보내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손을 내밀어 그들의 주먹과 부딪쳤다.“좋아요. 친구가 많으면 길이 많은 법이죠. 친구 하죠!”성도윤의 차례가 되자, 그는 차갑게 재미없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남은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사도현이 입을 열었다.“도윤이 형이 생리를 하나 봐. 조금 예민해. 다들 이해해 줘.”서은아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이 자식 버르장머리하고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차설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뭐 한 두 번도 아니고.”서은아는 사도현을 보며 말했다.“나랑 설아 씨가 남아서 꼬치를 구울 테니 넌 가서 얘기 나누고 있어. 첫 만남에 싸웠으니 오늘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그래. 나도 두 사람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앞으로 우리 거친 남자들의 모임이 더 부드러워지겠네?”사도현은 차설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안심해. 우리 누나 별명만 끔찍할 뿐 사실 좋은 사람이야. 두 사람 터놓고 얘기
“악, 아파!”뜨거운 숯이 서은아의 발등에 떨어졌고, 그녀는 아파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천막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왔고, 모두 서은아를 빙 둘러쌌다.“무슨 일이야? 그릴이 왜 엎어졌어? 고기를 구우라고 했더니 왜 자기 살을 굽고 있어!”사도현은 혼란스러운 현장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나 발 데인 거 안 보여? 빨리 처리해 줘. 흉터라도 남으면 어떡해!”서은아는 발을 껴안고 아파서 이를 악물고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추이준은 두들겨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했다.“은아 누나에게도 이렇게 연약한 모습이 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 숯불이 참 우리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했군!”서은아는 주먹을 휘두르며 이를 갈았다.“너, 그게 지금 사람이 할 소리야? 딱 기다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모두들 상황을 보고 서둘러 말렸고, 모두들 하나같이 긴장해서 서은아의 화상 상태를 확인했다.강진우는 묵묵히 관찰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은아야, 상처가 심각해 보여.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그러니까요, 오빠. 제 발등 좀 봐요. 다 타버렸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걸을 수 있겠어?”“아니요. 움직이기만 해도 아픈데 어떻게 걸어요? 누가 나 좀 업어줘!”말을 마친 서은아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성도윤을 가리키며 말했다.“도윤아, 이 녀석들 중에 너랑 진우 오빠가 가장 믿음직스러워. 진우 오빠를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네가 나 좀 업어줘!”성도윤의 시선은 줄곧 차설아에게 향했고, 그의 차가운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서은아가 부르자 그는 마치 부정행위를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거두더니 허리를 굽혀 서은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덤덤하게 말했다.“가서 약 발라 줄게.”나머지 사람들도 긴장한 상태로 그 뒤를 따라갔다.처음부터 끝까지 사도현 말고 그 누구도 차설아를 관심하지 않았다.“설아 쨩, 진짜 안 다쳤어?
차설아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실망스럽기도 하고 약간 의외였다.“진우 씨?”강진우는 마치 소설 속 백마 탄 왕자처럼 빛을 거슬러 자상하게 말했다.“이 연고 효과 좋아요. 얼른 처리하세요.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제가 다친 걸 어떻게 아셨어요...”차설아는 약간 난처하고 낭패한 표정이었다.방금 그녀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자신이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긴 것은 심리소질이 좋아서도 아니고,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도 아니었다.다만, 모두가 서은아 옆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보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방금 표정이 어색해서 설아 씨도 화상을 입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티를 내지 않으니 설아 씨만의 생각이 있겠구나 했죠.”강진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다정한 오빠처럼 큰 안정감을 주었다.차설아는 한숨을 쉬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어느새 남자에게 마음을 열고 말했다.“다들 은아 씨 챙기느라 바쁘니 저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엄살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몇 년 전,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살 때, 그녀도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기 좋아했다.하지만 요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녀는 이미 강인함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참 바보네요. 울 줄 아는 아기가 젖을 먹는 법인데. 여자는 너무 강하면 삶이 힘들어요...”강진우는 차설아 옆에 앉아 따스한 봄바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은아 봐봐요. 겉으로는 남자처럼 왈과닥해도, 똑똑해서 연약함을 표현할 줄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잘 표현하기 때문에 애들도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공주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거예요.”“진짜 공주님 대접을 받고 있던데요? 전 그런 성격이 참 부러워요. 어딜 가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잖아요. 저한테는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에요.”“맞아요, 설아 씨는 아주 착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져요. 도윤이와 부부로 지냈던 몇 년 동안 우리 무리들은 자주 만났
차설아는 성씨 저택을 떠난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어젯밤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 그리고 팔에 입은 화상 때문에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두 아이와 민이 이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컨디션을 조절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이모, 요 며칠 일이 너무 바빠서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요.”차설아는 민이 이모에게 안부를 전한 후, 주소록을 열어 누군가와 마음속의 우울함을 털어놓고 싶었다.하지만 주소록을 다 뒤져보았지만 배경윤 외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그리고 공주 대접을 받던 서은아를 떠올리니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배경윤은 실연당한 상처로 타히티로 휴가를 떠나, 적어도 보름은 지나야 돌아올 것이다.주소록을 뒤적거리다가 차설아는 머릿속에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참, 그 친구가 있었지! 이 방면으로는 전문가잖아!”저녁 8시, 화려한 등불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밤 생활이 시작되었다.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시크한 자태를 뽐내며 여자들을 위한 ‘보이 바’로 향했다.술집 내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활기가 넘쳤다.무대에서 섹시한 춤을 추는 미남들을 둘러싸고 여자들은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차설아는 술집 구석구석을 보았지만, 에이스 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앞에서 가장 신나게 뛰는 한 소녀를 툭툭 치며 물었다.“오늘 택이 공연 있어요?”“당연하죠. 택이는 보이 바의 기둥인걸요. 택이가 공연을 안 하면 보이 바가 어떻게 돈을 벌겠어요? 저희 모두 택이 보러 왔어요. 이 잘생긴 남자들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해 전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어요!”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매일 밤 공연하나요?”“맞아요. 매일 공연하기도 힘들겠네요.”다른 여자들도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했다.“들어보니 택이 가정 형편이 별로 안 좋대. 원래는 모범생이었는데 부모님
술집 사장은 아마 차설아의 요구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웃고 떠들게 하는 건 결국 돈 벌기 위함이잖아요. 그 돈을 제가 지금 한꺼번에 드리겠다는건데, 뭘 고민하는 거죠?”차설아는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돈에 눈이 먼 이런 인간들에게 돈은 특히 효과가 좋았다.“설아 씨 말씀이 맞지만, 택이를 파는 건 저희가 잘 상의해봐야겠어요. 제가 동업자와 상의한 후에 대답을 드려도 될까요?”술집 사장은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동업자와 상의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성도윤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택이를 산다고요?”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흥미를 느꼈다.잠시 고민하더니 술집 사장에게 명령했다.“팔 수는 있지만 조건이 있다고 하세요...”“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성도윤의 지령을 받은 술집 사장은 재빨리 휴게실로 돌아갔다.차설아는 이미 기다리다 지쳐서 재촉했다.“어떻게 됐어요? 되는지 안 되는지 한마디만 하세요.”“동업자에게 물어보니 돈을 받지 않고 택이를 팔아도 되지만, 설아 씨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군요.”“돈을 안 받는다고요?”차설아는 좀 뜻밖이었다.‘이 술집 사장 의외인데? 돈 벌 수 있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한다고?’“말씀해보세요. 제가 어떤 약속을 지켜야 하죠?”차설아는 궁금해서 물었다.“첫째, 택이는 우리 보이 바의 기둥으로 술집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니, 저희도 택이에게 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택이를 데려가시면 잘 보살펴주세요. 절대 힘든 생활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거야 당연하죠.”“둘째, 택이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아이입니다. 설아 씨가 아무리 택이를 키운다고 하셔도, 택이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강요하시면 안 됩니다.”차설아는 어이가 없었다.“안심하세요. 저는 그저 택이가 젊은 나이에 술집에 발목을 잡히는 것이 아까울 뿐 그 몸을 탐내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