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두 여자를 향해 말했다.“이혼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이혼했다고 해서 당신들보다 레벨이 낮은 건 아니죠.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게다가...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은 앞으로 이혼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죠. 저를 비하하면서 언젠가 당신들도 똑같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 안 하셨나요? 아마 저보다 더 비참할지도 모르죠.”“당... 당신.”두 어린 여자는 목까지 빨개져서 할 말을 잃었다.주위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특히 차설아의 말에 공감하는 기혼 여성들은 손바닥이 저릴 정도였다.“그래요. 아주 맞는 말이에요. 여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교활한 남자들을 상대해야지, 여기서 암투를 버리면 안 되죠!”검은 볼테 안경을 쓰고 포니테일을 높이 올린 한 여자가 허를 찌르는 발언을 했다.차설아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지금 세대에 이런 여자가 많아져야 직장에서 여자의 지위가 높아지는 법이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차설아는 턱을 들고 등을 곧게 펴고는 여왕의 자태로 도도하게 들어갔다.주위에는 아무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유독 검은 볼테 안경 여자만 용감하게 따라 들어갔다.“몇 층 가세요?”차설아가 먼저 그 여자에게 물었다.“28층이요. 감사합니다.”여자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차설아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어머, 동료네요.”차설아는 미간을 치겨올리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여자는 머리를 정리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아직은 아니에요. 최종 면접 보러 왔어요. 하지만 꼭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자신감 있는 여자가 제일 멋져요. 화이팅!”차설아는 여자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두 사람은 선후로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차설아는 마침 소란을 피우러 온 배경림과 마주쳤다.차설아를 본 배경림은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만난 듯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이 으르렁거렸다.“차설아 씨, 드디어
대표 사무실 안.차설아는 사무용 가죽 의자에 앉아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맞은 편에 앉은 배경림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말해보세요. 절 며칠 동안이나 기다리셨다고 했는데, 원하는 게 뭐죠?”“당연히 내 지분을 돌려받는 거죠!”배경림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했다.차설아는 어깨를 으쓱했다.“좋아요. 부대표님의 지분은 다시 돌려드리죠...”“아니, 아니, 아니. 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배경림은 안경을 밀더니 예리한 눈으로 말했다.“지금 천신 그룹 처지를 우리 모두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제 명의로 변경할 필요 없이 현금으로 달라는 거예요.”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아주 재밌네요. 하지만 천신 그룹이 지금 어떤 처지이기에 부대표님이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꼭 말해야 알아요?”배경림은 진작 불만이 쌓였던지라 하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최근 몇 년 동안 계속 적자가 났던 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계속 연구 개발 센터를 건설하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그룹은 점점 부담이 커지고 있어요. 게다가,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당신과 성대 그룹 성도윤 대표가 원수지간이라는 걸 아는데, 성대 그룹에 밉보인 당신과 누가 감히 손을 잡겠어요?”“가장 짜증 나는 부분은, 어리석은 내 동생 놈까지 도망친 마당에 내가 계속 천신 그룹의 주식을 갖고있는 건 바보 아니에요?”여자의 불만을 들은 차설아는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모두 맞는 말씀이시네요. 확실히 천신 그룹이 회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요.”배경림은 입을 삐죽거리고 등을 곧게 세우더니 당당하게 말했다.“요즘 돈 좀 마련했다면서요? 어리석은 동생 놈이 은행에 빚진 돈까지 다 갚아줬다고 하던데, 꽤 능력은 있나 보죠. 그럼 좋은 일 끝까지 한다 치고, 내 구멍도 함께 메꿔줘요. 몇조도 마련하는 설아 씨에게 그 정도 잔돈은 아주 쉬울 거 아니에요?”차설아는 차갑게 말했다.“부대
배경림은 거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고민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600억을 가져야죠. 천신 그룹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계속 남겠어요?”“연말 주식 배당금이라니, 이 회사가 연말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연말에 파산이라도 하면 저만 손해죠!”배경림은 천신 그룹을 하찮게 여기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4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는 반면, 업계 경쟁사들은 해마다 규모가 커지고 있으니, 회사가 번창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좋아요.”차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말을 이었다.“이 주식 양도서에 서명하면, 잠시 후 재무팀에서 돈을 보내드릴 겁니다.”차설아는 주식 양도서를 그녀에게 넘겼다. 마치 이 순간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설아 씨 이렇게 시원시원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배경림은 주식 양도서에 재빨리 서명하고는 도도하게 일어섰다.“나 갈게요. 하지만... 우리 곧 만나게 될 거예요.”배경림이 사무실을 나오자, 인사팀 직원이 우물쭈물 밖에 서 있었다.“대... 대표님.”차설아는 문서를 챙기고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게. 말씀드리기 곤란해서요. 잠깐 나와보시겠어요?”인사팀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차설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공공 사무구역에서 한 무리의 직원들이 모여 외치고 있었다.“보상해! 보상해! 보상해!”차설아는 그 소리에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했고, 크게 소리쳤다.“다들 그만 해요! 웬 소란이에요!”“대표님이 드디어 나오셨어!”맨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구호를 외치던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저희는 전에 경수 대표님과 경림 부대표님을 따랐지만, 두 분 모두 가셨으니 저희도 남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에 우리에게 주식과 배당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왜 저희는 한 푼도 받지 못했죠?”“지금 회사 책임자로 부임하셨으니, 저희가 가기 전에 계약 조항을 이행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저희는 소송을 걸 수밖에 없습니
여자는 검은 볼테 안경을 밀더니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전 천신 그룹의 발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 비록 지금은 규모가 크지 않고 수익도 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사업 구도가 아주 전위적이라고 생각해요. 자체 연구 개발 센터까지 설립할 계획이라고 들었어요. 해안 전체에서 감히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동종 회사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고, 성대 그룹이 그중 하나죠...”“그래서 앞으로 천신 그룹은 성대 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큰 회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기에 제가 들어오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여자의 말은 고참직원들의 비웃음을 샀다.홍보팀 책임자는 심지어 대놓고 차설아의 체면을 구겼다.“아가씨, 아직 어려서 대표님을 잘못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잘 모르나 봐요. 우리 대표님은 기댈 수 있는 덕목이 못 돼요. 그저 비참한 운명을 가진 재벌가에서 쫓겨난 이혼녀일 뿐이죠. 지금은 계속 밀어주던 경수 대표님과 경림 부대표님도 돈을 빼돌리고 도망쳤는데, 이것이 무슨 신호인지 모르겠어요?”“여러분들이 떠나는 건 안목이 없어서죠. 전 제 안목을 믿고 설아 대표님의 능력을 더더욱 믿어요!”볼테 안경 여자는 고참 직원의 말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확고한 말투였다.퇴직 절차를 마친 직원들은 차설아가 보는 앞에서 짐을 싸고 바로 떠났다.원래 백여 명의 직원이 있었던 천신 그룹은 지금 십여 명만 남아 있어 보기에 조금 초라했다.“대표님,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저희는 꼭 대표님 곁에 남을 거예요. 저희를 해고하지 않는 이상, 평생 대표님을 위해 일할게요!”마케팅 부서 책임자 장기용은 주먹을 들어 야심 차게 선서했다.그의 행동에 차설아는 아주 감동적이었다.“네, 고마워요 여러분,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그리고, 시선을 검은 볼테 안경 여자에게 돌려 부드럽게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제 이름은 서윤입니다. 윤이라고 부르시면 돼요.”“어느 부서에 지원했죠?”“저는 대표님 비서직에 지원했
“확실히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키우는 고양이가 중성화 수술을 했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서 걱정돼서 빨리 돌아가 돌보고 싶어요...”“그래요, 어서 가봐요!”서윤은 두 발자국 걷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돌아와 차설아에게 주의를 주었다.“대표님, 오후에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으니 이 건물에 변태가 자주 나타난다고 했어요. 안전을 생각해서 너무 늦게까지 야근하지 마세요.”“걱정하지 말아요. 변태가 날 만난다면 위험한 건 변태니까요.”“하하하, 대표님은 꽃처럼 아름다우시니까 조심하셔야죠. 이상한 유형의 변태일 수 있으니 그래도 피하는 게 좋죠.”“알겠어요. 고마워요.”차설아는 고개를 들어 서윤을 향해 웃었다. 그녀의 관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서윤이 떠나고 24층 전체에는 차설아 혼자만 야근하고 있었다.각 사무실의 불은 모두 꺼졌고, 오직 차설아의 사무실에만 불이 켜져 있어 썰렁하고 캄캄했다.“드디어 끝났다!”차설아는 기지개를 켜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역시 효율이 높단 말이야!’그녀는 일어나 불을 끄고 회사를 나와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이미 졸려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엘리베이터는 거침없이 내려가더니 6층에서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검은 볼테 안경에 컴퓨터 크로스백을 멘 남자가 들어왔다.차설아보다 키가 작았고, 다크서클은 짙게 내려와 눈빛도 흐리멍덩한 것이 딱 봐도 늘 코드와 전쟁을 펼치는 프로그래머 같았다.그는 차설아와 함께 지하 1층 주차장으로 갔다.두 사람은 말이 없다가 지하 1층에 거의 도착할 때 남자가 갑자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죄...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네?”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눈썹을 치켜올리며 남자를 보았다.“휴대폰이 없어졌어요. 지금 집에 전화하지 않으면 다들 걱정하실 텐데,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남자는 보기에 아주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아마 큰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일
서윤은 집에 돌아와서야 열쇠를 회사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다시 천신 그룹으로 돌아갔다.건물 아래에 도착했을 때, 야외 주차장에 짙은 슈퍼카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와, 애스턴마틴 one-77이라니! 이건 전세계에 단 세 대 밖에 없는 차인데, 왜 여기 있지?”서윤은 보기에는 평범하고 책벌레처럼 얌전한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반항적인 성격으로 어릴 때부터 스포츠카, 록,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것을 좋아했다.그래서 이 차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서 전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고, 얼른 휴대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찍으려 했다.수십 장 정도 찍고 보니 차 안에는 주인이 있는 것을 보았다.서윤은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그녀가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차창이 내려지더니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혹시 천신 그룹 직원이에요?”“어떻게 아셨어요?”서윤은 자신이 아직도 천신 그룹 직패를 달고 있다는 것을 잊고 열정적으로 대답했다.“전 천신 그룹 직원이에요. 오늘 처음 입사한 차설아 대표님 비서예요.”갑자기 서윤은 눈을 반짝이며 남자를 가리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혹시 성대 그룹 대표, 성도윤 씨?”“대표님. 늘 존경해왔어요. 언젠가 꼭 뵙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보게 되었네요!”성도윤은 입을 비쭉거리며 조금 어이가 없었다.“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뭘 그렇게 오버해요.”“아닙니다. 대표님은 연예인보다 훨씬 빛나죠! 연예인은 해마다 수도 없이 생기지만 대표님은 유일무이한 존재시잖아요. 그야말로 완벽한 존재예요!”서윤은 입에 꿀 발린 말을 잔뜩 하더니 갑자기 말끝이 날카로워졌다.“하지만 어린 나이에 눈이 멀어 우리 대표님처럼 완벽한 여자를 놓치고 말았죠. 머리가 이상한 게 분명해요.”사실, 서윤은 성도윤을 아주 숭배했지만, 오늘 차설아와 함께 하루를 보낸 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만약 성도윤과 차설아
서윤은 매우 비협조적으로 대꾸했다.“전 설아 대표님의 비서이지 그쪽 비서가 아닌데 왜 제가 그쪽 말을 들어야 하죠?”“만약 당신 대표에게 별일 없길 바란다면 내 말대로 하세요. 시간을 더 지체하면 일이 번거롭게 될지도 몰라요.”성도윤은 절대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압박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남자의 살기를 느낀 서윤은 이내 겁을 먹고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알림음뿐이었다.“왜 연결이 안 되지? 이 빌딩 신호가 안 좋나? 아니면 대표님 배터리가 다 되었나?”서윤은 좀 이상했다.만약 아직 회사에 있다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었을 리가 없다. 그럼 지금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까?“답답해!”인내심을 잃은 성도윤은 스포츠카의 문을 열고 나와 곧장 빌딩 입구로 향했다.서윤은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뒤를 쫓았다.“저희 대표님 찾으러 가시는 거예요? 제 생각에는... 아마 집에 도착하셨을 거예요. 회사 불도 다 꺼졌어요.”“집에 갔을 리가 없어요. 날개가 달렸다면 모를까.”성도윤은 자신이 꽤 좋은 눈썰미를 가졌다고 자부한다. 절대 차설아가 나오는 것을 놓쳤을 리가 없다.서윤은 자신의 직원 카드로 엘리베이터를 열었고, 두 사람은 곧 24층에 있는 천신 그룹에 도착했다. 처음 천신 그룹에 온 성도윤은 눈썹을 찌푸렸다.“회사가 왜 이렇게 작아. 성대 그룹의 한 사무실 구역에도 못 미치잖아.”남자는 하찮은 말투로 비웃었다.“당신네 대표, 고작 이 정도 구멍가게로 성대 그룹을 상대하겠다고 큰소리친 거예요? 이 작은 회사는 핑계고, 나에게 접근해 다시 내 마음을 얻으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닌가 싶네요.”“풉!”서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서둘러 부인했다.“정말 오해세요. 저희 대표님은 단지 순수하게 사업을 하고 계시지, 그 쪽에게 다가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넣어두시죠.”“흥, 나에게 딴 마음이 없다는 사람이 굳이 성대 그룹의 맞은편에 회사를 차려요?
서윤은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차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미 집에 돌아갔을 거로 생각해 차설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저희 대표님은 이미 댁으로 돌아가셨어요. 여기는 천신 그룹이니 외부인이 오래 머무는 건 곤란해요. 회사 문을 잠가야 하니 이만 일어나 주시죠.”성도윤은 긴 손가락을 맞잡고 턱을 괴고는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니요.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요.”만약 차설아가 집에 갔다면, 성도윤이 못 봤을 리가 없다.“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 가신 거죠?”어이가 없는 서윤은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지금 나가지 않으시려는 건 회사 영업 비밀이라도 훔치려는 목적인가요?”성도윤은 하찮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구멍가게 영업 비밀을 굳이 제가 직접 나서서 훔칠까요?”그의 한 마디에 서윤은 반박할 길이 없었고 난처해서 말했다.“그러네요. 우리 회사가 아직 성대 그룹이 비밀을 훔치러 올 정도는 아니죠. 훔친다고 해도 대표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도 없으시고. 그러니 지금 안 나가고 계속 앉아 계시는 건 사실... 우리 대표님을 잊지 못해서죠?”성도윤은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그럼 설아 대표님 댁의 전화번호라도 있으세요? 가족분들께 전화해서 집에 도착했는지 물어보면 되잖아요.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이미 성도윤의 마음에 감동을 한 서윤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집 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겠어요? 그리고 설아는 혼자예요. 연락할 가족이 없다고요.”성도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슬픔이 잠겼다.평소 소탈하고 왈가닥한 모습이지만 사실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은 차설아였다.요 몇 년 동안 혼자 분투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아, 깜빡했네요. 저희 대표님은 확실히 팔자가 기구해요. 가뜩이나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힘든데 당신 같은 배신자한테 시집가서 어린 나이에 이혼했죠.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에게 이혼녀라고 무시나 당하시고!”“그런 일이 있었어요?”“당연하죠. 세상에 입 더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