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윤은 냉랭한 기색으로 차설아에게 물었다.“여긴 아무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 사람 어디에 있어? 빨리 나에게 넘겨, 그들은 내 심장과 같아. 난 그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 설사 너희 성씨 가문과 함께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 나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차설아는 손을 꽉 쥐고 죽을 각오로 눈앞의 이 남자와 끝까지 싸우려고 했다.원이와 달이는 그녀가 목숨과 맞바꿔 낳은 아이들이고 하루하루 힘들게 견디며 키운 애들이다.그들은 그녀의 목숨일 뿐만 아니라, 차씨 가문의 미래이기도 하다.성도윤이 이때 와서야 가만히 앉아서 남이 고생해서 얻은 성과를 누리는 것은 그야말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녀는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성도윤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어리둥절해했다.“당신이 말한 ‘사람’이라는 게 누구야?”“아직도 시치미를 떼다니!”차설아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그녀는 성도윤이 알면서 모르는 체하고 일부러 그녀와 심리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차설아는 화가 나서 두세 걸음 앞으로 나서서 그의 멱살을 잡고, 말로 위협하였다. “내가 셋 셀 테니, 당신이 사람을 순순히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당신의 목을 비틀어 죽일 거야. 당신,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거 알아야 해.”“내 목을 비틀어 죽인다고?”성도윤은 갑자기 웃더니 아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시늉을 하며 도발했다.“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내가 못 할 것 같아?”차설아의 눈빛이 독해졌다. 그녀는 장미처럼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숫자를 셌다.“셋, 둘, 하나...”다만 그녀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서재의 불이 탁하고 꺼졌다.이때는 밤이었는데 별장 주변의 모든 등불도 다 꺼졌다.“뭐야?”차설아는 좀 당황했다.‘설마 내가 저들의 덫에 걸려든 건 아니겠지? 맞아, 그런 걸 거야!’성도윤이 먼저 원이와 달이를 데려간 후 그녀를 유인해 아무도 모르게 죽인다면 그들은 공
선로 고장으로 인한 정전이라면 성씨 가문이 그녀를 살해하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었다.차설아는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성도윤의 목에서 손가락을 떼었고, 몸도 의식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하지만 웬걸, 남자의 단단한 팔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긴 다음, 힘을 주어 그들의 몸을 한없이 밀착시켰다.차설아는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온몸이 굳어져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물었다.“다, 당신 뭐 하는 짓이야?”성도윤은 잠자코 있다가 다른 한 손도 들어 올려 커다란 인형을 안듯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차설아는 완전히 마음이 흐트러져 버둥거리면서 경고했다.“성도윤, 날이 어두워졌다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얼른 날 놔줘.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가만있어!”성도윤은 놓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꽉 껴안았다. 그는 마치 코알라처럼 차설아를 안았다.“너 이 녀석,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보아하니 너 팔을 원하지 않는구나, 나...”차설아가 힘을 주어 한 발로 성도윤을 걷어차려고 하는데, 귓가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성도윤이 울고 있었다.차설아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녀는 외계인이 코딱지를 파고 있는 걸 본 사람처럼 완전히 충격에 빠졌다.‘믿기지가 않아!’ “당... 당신 왜 그래?”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은 아마 모를 거야. 나 사실 PTSD가 있어. 어둠 속에 있으면 형이 살해당한 일이 생각나서 온몸이 긴장되고 의지할 곳이 절실해져.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면... 결과가 매우 심각해.”성도윤은 그녀의 귀에 대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다고?’차설아는 반신반의하며 계속 물었다.“만약 의지할 곳이 없으면 얼마나 심각한데?”“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다가 결국 오장이 쇠약해져 죽어.”과장된 말이었지만 성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의심이 가지 않았다.차설아는 꿈쩍도 하지 못하고 성도윤이 껴안게 놔두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지
“맞아, 전기가 오기 전에는 켜지지 않아.”차설아의 표정이 굳어졌다.“뭐? 그럼 만약 밤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당신과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거야?”“괜찮아, 고작 하룻밤이잖아. 나 참을 수 있어.”성도윤은 아주 담담했다. 아까 약하고 무기력해서 흐느끼며 껴안으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차설아는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성도윤이 굳이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당신 PTSD 때문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도 가빠지며 오장이 쇠약해져 죽는다며?”그녀는 남자에게 질문했다.“당신이 안아주면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말한 참을 수 있다는 건 당신이라면 참을 수 있다는 뜻이었어.”“???”차설아는 눈을 희번덕거렸다.“이봐, 당신은 나를 참을 수 있어도 나는 당신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오늘 반드시 나가야 해.”그녀는 휴대전화 불빛을 빌려 문 자물쇠를 비틀어 열려고 했다. 그런데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휴대폰이 자동으로 꺼졌다.서재 전체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젠장!”차설아는 눈이 먼 사람처럼 아무렇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무력으로 열려고 이리저리 힘을 썼다.그러다가 결국... 이상한 걸 잡은 것 같았다.“콜록콜록, 당신 이게... 뭐하는 짓이야?”성도윤은 꼼짝도 못하고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문 손잡이를 잡고 싶은데, 이거 왜... 촉감이 이상하지?”차설아는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주물렀다.“헉, 설마 이거 당신꺼...”반응이 오자 그녀는 감전된 듯 얼른 손을 풀었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미,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난 그저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차설아는 혀가 꼬여 온전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렇게 공교롭게도 그의 거시기를 잡다니. 이게 고의가 아니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성도윤은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덤덤한 척했다.“변태는 많이 봤어도 당신처럼 대담한 사람은 처음 봐. 정말 놀라워.”“아니야, 나 정말 고의가
어둠 속, 차설아는 이미 키스로 인해 머리가 텅 비었고 이성을 잃었다.본능이 이끄는 대로 남자의 옷깃을 잡고 다짜고짜 말했다.“잔말 말고 키스하려면 똑바로 해!”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이토록 친밀한 행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신이 혼미했던 그 날 밤, 그들은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다만, 그날은 성도윤이 술에 취해 알코올을 핑계로 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 선을 넘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그래서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멈추었다.차설아는 문짝을 따라 카펫 위에 앉아 옷을 정리하면서 짜증스럽게 머리를 만졌다.“미쳤어. 진짜 미쳤어. 내가 방금 미쳤었나 봐. 잊어버려. 그건 단지... 동물적인 본능이야!”성도윤의 잠긴 목소리는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는 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했다.“이해해. 나도 마찬가지야.”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차설아에게 다가가 앉았고, 두 사람은 바닥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그러자 차설아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또 뭐 하려고?”“외상 스트레스라고 했잖아. 좀 기대게 해주면 나중에 보상해줄게.”성도윤이 말하고는 당당하게 차설아의 어깨에 기대었다.차설아는 이를 악물었고, 작은 얼굴은 화가 나서 이그러졌지만,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어느덧 몇 시간이 지났지만 서재는 여전히 캄캄하고 사방은 고요했다.“고장 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처리 못 한 거야? 성씨 가문의 일 처리 능력이 겨우 이 정도였어?”차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거칠게 말했다.성도윤은 이미 잠이 든 듯 나른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아직도 모르겠어? 이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일부러 고장낸거야. 그냥 안심하고 자. 어차피 오늘 밤은 못 나갈 테니까. 정 나가고 싶다면 방법이 있긴 하지...”“무슨 방법?”차설아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서둘러 캐물었다.“우리가 그들의 목적을 이루게 한다면.”“무슨 말이야?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이
“성도윤, 당신 어머니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해?”차설아는 과거를 회상하며 힘없이 말했다.“내가 처음 시집왔을 때, 여사님은 나를 짐승 취급하면서 절대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 자기 아들이 더러워질까 봐 전전긍긍하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가축처럼 가두다니! 이게 대체 뭐야? 동물 짝짓기야?”“맞아, 지금 우리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은 당신이 손자를 낳는 거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축처럼 가두기만 한 게 어디야. 최정약을 먹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많이 참으신 거야.”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차설아를 향해 암시했다.“오늘은 어머니가 문을 열 때까지 견딘다고 해도, 내일 더 미친 방식으로 우리를 엮어주려 할거야. 그러니 우리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것 같아.”“시... 시도? 뭘 시도하는데?”차설아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혀가 꼬였다.“소리라도 좀 내서 일찍 여기를 나가는 거지.”남자는 느릿느릿 말했다.차설아는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더듬더듬 말했다.“당... 당신 지금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그런 일도 연기가 가능해? 난... 난 못해!”“몰라도 돼. 내가 가르쳐줄게.”성도윤은 차설아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를 자신의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그녀의 곡선에 따라 야릇하게 움직였다.“악, 변태. 뭐... 뭐 하는 거야!”차설아는 감전된 듯 소리쳤다.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더욱 힘을 주었고 얇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매혹적으로 말했다.“이 소리, 아주 좋아. 딱 그 말투로 계속!”“뭐야. 하지 마... 악!”성도윤은 차설아의 작은 허리를 꼬집었다. 조금 아프고 또 간지러웠던 차설아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몇 번 시도한 후, 그녀의 소리는 그리 서툴지 않았다. 일종의 ‘리듬’을 찾은 듯 여유롭게 연기를 시작했다.“어머, 소리가 나!”소영금은 귀를 문에 대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쾌락을 느꼈다.“그런데 소리가 왜 이렇게 크지? 너무 처참하잖아. 도
소영금은 문 위에 엎드려 소리를 듣더니 표정이 점점 복잡해졌다.“이상한데. 왜 도윤이가 소리를 지르지? 그것도 더 처참한 소리를 내고 있어. 설마... 맞았나?”옆에서 현이가 말했다.“그럴 리가요. 작은 사모님이 얼마나 우아하고 상냥하고 말씀도 조곤조곤 하시는데요. 벌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재벌가 아가씨가 어떻게 그런 폭력적인 일을 하겠어요?”“그건 자네가 설아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요. 겉으로 보이는 부드러움에 속으면 안 돼요. 사실 얼마나 용맹한 여자인데요. 내 젊은 시절을 닮았어...”“그렇다면 더 걱정하실 것 없네요. 작은 사모님이 도련님을 완전히 장악하셨다니. 하하하. 둘째 도련님에게 이런 면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현이는 안의 화면을 떠올리며 민망했는지 얼굴을 가렸다.“맞네요. 이게 바로 능력이죠!”소영금은 문득 깨달은 듯 혀를 내둘렀다.“설아는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보물이네요. 이 방면마저도 훌륭하다니. 아주 완벽해요. 보아하니 손자를 원하는 내 소원이 곧 이루어지겠네요.”두 사람은 끝내 자리를 떠났다.잠시 후, 별장의 전력 시스템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서재도 대낮처럼 밝았다.성도윤과 차설아도 이렇게 빨리 효과를 볼 줄 몰랐다.그래서 불이 켜졌을 때, 두 사람은 여전히 애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을 마주 보며 열심히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불빛은 마치 정지 버튼처럼 이 모든 ‘미친 짓’을 멈추게 했다.“음... 보아하니 연기할 필요 없겠네.”차설아는 머리를 다듬고 난처한 표정으로 남자의 몸에서 내려왔다.성도윤도 어색한 듯 숨을 죽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것 같네.”차설아가 문을 열었더니 곧바로 열렸다.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성도윤에게 말했다.“오늘은 오해했어. 미안해.”“오해라니?”성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다소 강한 어조로 말했다.“당신이 찾으려는 사람이 누군지 아직 말 안 했어.”“찾으려는 사람 없어.”차설아는 절대 인정하
차설아는 굳은 얼굴로 성주혁의 앞에 다가가 진지하게 물었다.“동참하다니? 난 계속 신문을 보고 있었어. 난 아무것도 몰라.”“네, 계속 모르는 척하세요. 방금 전기가 그렇게 오래 끊겼는데 어떻게 신문을 보셨죠? 그리고... 좀 그럴듯하게 연기하시죠? 신문을 거꾸로 들고 계시잖아요.”차설아는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차마 까발릴 수 없었다.“음. 그건... 말이야...”성주혁은 그제야 자신이 신문을 거꾸로 들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억지를 부렸다.“늙어서 눈이 침침해서 말이야, 글을 거꾸로 봐야 더 잘 보여!”“그래요? 그 말씀을 제가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차설아는 원래 화가 났지만 성주혁의 이런 모습을 보니 또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성주혁은 그제서야 신문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말했다.“설아야, 우리 수단이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작은 사고를 만들었어...”“하지만 너희들 연기는 나처럼 서투르더구나. 얼렁뚱땅 도윤이 어미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난 절대 못 속여!”성주혁은 비록 나이가 들었고 눈 주위는 주름투성이지만, 웬만한 젊고 건장한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고 예리했다.연기가 들통난 차설아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도 결혼하신 적이 있으니 결혼 생활에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전에 제가 도윤 씨를 사랑한 건 맞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고, 제 마음은 이미 태양 아래 눈송이처럼 진작 증발해버렸어요. 도윤 씨도 아마 저랑 같은 마음일 거로 생각해요. 저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을 거예요. 서로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부부가 되겠어요?”“아니, 넌 도윤이를 몰라. 너 자신은 더더욱 모르고. 너희는 아직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어. 다만...”“할아버지, 그만 하세요. 제 입장은 이미 분명히 말씀드렸고요. 수고스럽겠지만 여사님께 전해주세요.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저 가만 있지 않아요.”차설아는 차갑게 말하고는
차설아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두 아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민이 이모는 인기척을 듣고 잠옷을 입고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아가씨, 어디 가셨어요? 아이들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다가 잠들었어요.”“아, 성씨 저택에 사람을 찾으러 갔더니 오해였더라고요. 성도윤은 물론 성씨 가문 사람들은 원이와 달이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저희가 괜히 오버했어요.”차설아는 어색해서 웃었다.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볼이 저절로 빨개졌다.“확실히 오해였어요. 들어보니 데려간 사람은 아가씨도 아는 사람이더라고요. 바로 며칠 전에 아가씨가 해바라기 섬에 데려간 가면 쓴 미스터 Q라는 사람이었어요. 달이를 수양딸로 인정한 분 말이에요. 그래서 달이가 기뻐하며 따라갔대요.”민이 이모는 아이들에게 들은 모든 것을 차설아에게 말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미스터 Q는 아주 좋은 분 같아요. 두 아이 모두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도 어느 친아버지 못지않게 잘하잖아요.”“그 사람이었군요!”차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제 딸을 유괴해 간 것도 모자라 아들에게까지 손을 뻗다니.저를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안 되겠어요... 더 나대기 전에 시간 내서 제대로 한 번 손 봐야겠어요.”“아가씨, 그럴 필요 없어요. 미스터 Q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원이가 그러는데 그분이 바로 해안의 유명 셰프라고 하더군요. 케이크를 좋아하는 걸 알고, 이번에 특별히 아이들을 데려가 케이크를 배우러 갔어요. 기다려봐요...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아가씨에게 만들어준 케이크가 아직 냉장고에 있어요. 제가 보여줄게요.”민이 이모는 말하면서 냉장고에서 6인치 정도의 케이크를 가져왔다.무스 케이크로 모양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해바라기 섬이었다. 케이크 중앙에는 세 사람이 크림으로 장식한 글자가 차례로 있었다. ‘선녀 엄마, 항상 행복하세요!”차설아는 그제야 며칠 후면 그녀의 생일이라는 것이 생각났다.두 아이의 따뜻한 마음에 차
차설아는 약간 비관적인 태도로 말했다.성도윤이 자신과 아이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만약 성도윤이 이번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을 터였다. 차설아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굳이 우리 곁을 항상 지키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걸로 충분해요.”차설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성도윤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 반드시 돌아와서 너랑 아이들한테 편안한 가정을 만들어 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으며 서로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그러고 나서 성도윤은 차를 몰고 성대 그룹으로 향했다.차설아는 마당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하지만 두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도윤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는 왜 또 가버렸어요? 또 우리를 버리려는 거예요?”달이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를 많이 좋아하는 달이였기에 반복된 이별은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준 듯했다.매번 아빠가 떠날 때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그럴 리가. 아빠는 그냥 일하러 간 것뿐이야. 일만 끝내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차설아는 달이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달이는 아빠가 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주말엔 쉬어야 하는데...”“그렇지만 달이 아빠는 대기업 대표님이시잖아. 많은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어. 아빠가 일을 안 하면 그 직원들은 다 굶을 수도 있다는 거야.”“그리고 말이야. 아빠가 일을 안 하면 달이가 좋아하는 예쁜 원피스는 누가 사주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은 누가 사주겠니?”차설아는 달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성도윤이
전화는 진무열이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매우 엄중하고 다급했다.“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꼭 참석하셔야죠!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오늘?”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렸다.성대 그룹의 주주총회는 매년 연말에 열렸는데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그룹의 운영진들은 이 주주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보름 전부터 철저히 대비했다.성도윤은 성대 그룹의 현직 대표로서 책임지고 연간 운영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총회가 시작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주주들과 운영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진무열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는데 성도윤은 이제야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날짜를 오늘로 변경하셨잖아요. 회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주주들도 그렇고 회사 운영진분들도 그렇고 일정을 조정해서 참석해 주셨는데...”“정작 대표님께서 지각을 하신 데다가 전화도 안 받으시니 다들 기분이 많이 상하셨습니다.”진무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그도 요즘 성도윤이 차설아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전화를 걸어 성도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주주총회만큼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설아가 곁에 있으니 권력과 사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듯했다.“오늘 바쁘니까 회의 시간을 다른 날로 바꿀 거라고 전해.”성도윤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주말인지라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로 약속한 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차설아와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아니, 대표님... 바쁘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분들까지 일정 변경을 해야 하는 건 좀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진무열은 용기를 내어 반박했다.
성도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으면 그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체하면 안 돼. 알겠지?”두 아이는 다시 진지하게 밥을 먹는 것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너희 먼저 먹어. 난 배불러서 잠깐 햇볕 좀 쬐고 올게.”차설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가서 햇볕을 쬐었다.성도윤은 차설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김정민더러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죠, 주인님?”그는 차설아 옆에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차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분명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을 텐데... 내가 한번 맞혀볼까?”성도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혹시 두 아이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은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네가 함께 즐겁게 놀아줄 수 없어서?”차설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에는 마치 어른에게 생각을 간파당했을 때의 아이처럼 놀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꽤 잘 숨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성도윤에게 들키고 말았다.그는 차설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잘 알고 있어서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경계해야 할지...’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이해해 버리면 그건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으니 말이다.“오랜 세월을 함께했잖아. 부부이기도 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고 또 연인이기도 했어. 원수였던 적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널 모를 수 있겠어?”성도윤은 차설아 앞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들이랑 뭘 하는지는 중
“그렇다니까?”서은아는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바로 차설아한테로 갔어. 강아지처럼 따라붙더라고. 난 성도윤 얼굴조차 못 봤다니까? 진짜 한심하기도 하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제일 바보인 것 같아. 안 그러면 이렇게 화내면서 극단적인 제안을 할 이유도 없잖아.”“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차설아는 어떤 반응이었어?”성진은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며 계속해서 물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감추려 해도 자신이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어떤 반응이겠어? 당연히 좋아하겠지. 가족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잖아.”서은아는 어이없어하며 성진이 뻔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불만을 쏟아내듯 말을 이어갔다.“두 사람은 처음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 우리가 힘을 합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맞긴 하지만 결국 두 사람 사이를 더 깊이 이어준 셈이지.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바보였던 거야. 어쩌면 우리가 해온 일들도 그들을 돕는 역할밖에 못 했던 거지. 우리는 그저 한낱 도구였을 뿐이라고!”서은아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단순히 속상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성진의 질투심을 자극해 성도윤과 차설아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그렇다고?”성진의 눈빛 속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본때를 보여줘야지.”“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네가 말한 거잖아.”성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었다.“성도윤을 완전히 무너뜨려서 빈털터리로 만들자며?”“그래, 좋아! 또다시 동맹을 맺게 됐네. 솔직히 너라는 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 하나는 잘하니까 말이야. 너랑 손잡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서은아는 기분 좋게 말했다.“너도 만만치 않지.”성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사랑해서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