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그동안 거의 은퇴하다시피 살았고, 해바라기 섬에 틀어박혀 실험에 전념했기에 외부의 소식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스터 Q’의 정체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하지만 배경수의 말을 들어보니 미스터 Q는 분명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갑자기 원이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그 살인마라는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주거나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어?”“아니요. 미스터 Q는 저에게 꽤 잘해줬어요. 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줬어요. 엄마 조수로 되어달라고 하니까 동의했고요... 하지만 요즘은 좀 바빠서 외지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바쁜 일이 끝나면 두 사람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할게요.”원이가 두 팔을 끌어안고는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보스가 된 듯이 말했다.차설아가 미간을 구겼는데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너무 이상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임채원과 딜을 했는데 왜 원이를 가만히 둔 걸까? 심지어 원이에게 내 부하가 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배경수가 무심하게 말했다.“왜긴, 우리 원이가 너무 귀여워서겠지. 우리 원이는 상처를 주기도 아까운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잖아. 조수를 약속했다는 건 원이가 아이니까 장난삼아 한 거 아닐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차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야, 분명 내막이 있어. 상대가 절대 호의를 품을 리가 없으니까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어.”“흠. 성심 전당포가 악명이 높은 건 사실이야. 전당포라고는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동안 돈도 많이 벌어서 이제 신분 세탁을 하려는 건가?”배경수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그런데 그때 성대 그룹의 큰 도련님인 성도현이 성심 전당포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성심 전당포는 줄곧 성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아. 4년 전에 쌍방에서 큰 충돌이 일어났고, 성도윤은 하마터면 죽을
하지만 차설아가 아무렇지 않게 반응할수록 배경수는 그런 그녀가 더 걱정스러웠다.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을 풀어야 했다. 계속 쌓아두고만 있다면 언젠간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그래서 배경수는 배경윤과 방법을 찾아 차설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알겠어. 이런 쪽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나한테 맡겨!”얘기를 마친 후 배경윤이 자신 있게 말했다.어차피 배경윤은 겨우 목숨을 건진 강우혁과 결별했기에 마음이 울적했다. 그녀도 마침 우울한 기분을 풀어야 했다!지금 이 시각, 차설아는 천신 그룹 본사 회의실에서 임원들과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그동안 차설아는 명의상 천신 그룹의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회사의 모든 중대한 결정은 대표인 배경수가 내리는 거였지만, 사실 차설아야말로 천신 그룹을 다스리고 있는 진정한 보스라는 걸 임원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차설아가 아이디어를 내고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지 않았다면 천신 그룹처럼 작은 하이 테크 회사는 진작 잔인한 비즈니스계에서 뼈도 못 추린 채 망했을 것이다.물론 임원 중에서도 차설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그중 배경수의 셋째 누나인 배경림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배씨 가문에는 모두 여덟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모두 딸이고, 배경수가 유일한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배씨 가문의 가업을 이어 나가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다섯 명의 누나 중에서 셋째 누나인 배경림이 가장 승부욕이 강했고, 또 상업적인 두뇌가 있어 배경수와 함께 배씨 가문의 가업을 관리해 왔다.처음에 배경수가 어르신에게 천신 그룹을 설립하기 위한 돈을 요구했는데 하이 테크 분야에 진출하겠다고 했다.배씨 가문은 그레이 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가족 비즈니스도 모두 그레이 존과 연관되었다.배경수가 갑자기 하이 테크 분야에 진출하겠다고 하니 가족들의 놀림을 받았다.그가 여자를 꾀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려 한다고 생각해 그 회사는 언젠간 망할 거라고 했다.하
그녀의 물음에 차설아는 덤덤하고 여유롭게 대답했다.“그 어떤 하이 테크 회사든 장기적인 이익을 얻으려면 중개인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자체 연구개발센터와 생산기지를 건설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기업이 설립되고 이익을 얻는 데까지 보통은 3년에서 5년의 시간이 걸리죠.”“올해는 천신 그룹이 설립된 4년째 되는 해입니다. 곧 5년째가 될 것인데 제가 여러분과 약속하겠습니다. 올해 우리는 모두 큰돈을 벌어들일 것입니다!”이 야심만만한 말은 오히려 임원들의 반감을 샀다.“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4년 동안 차설아 씨가 한 약속만 몇 개인지 아세요? 언제 약속을 지키실 겁니까?”“지금은 워낙 비수기라 업계 전체가 위태롭습니다. 파산하고 감원하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최대한 비용을 아끼기는커녕 연구센터를 짓기 위해 투자를 늘리겠다니. 정말 돈을 너무 많이 쓰시네요!”“그리고 성대 그룹에서는 곧 G6 칩이 장착된 스마트폰을 출시할 거라면서요? 그러면 시장점유율은 더 내려갈 것인데 큰돈을 벌기는커녕 이윤이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그동안 임원들은 차설아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배경수의 체면 때문에 누구도 감히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배경수는 마침 오늘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배경림이 먼저 차설아의 말에 반박했으니 임원들도 오랫동안 쌓아온 원한을 풀기 시작했다.“차설아 씨는 그동안 회사 일에 신경 쓰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천신 그룹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오늘 오셨던 김에 재무팀 팀장님께서 준비한 진짜 재무 상황을 한 번 제대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배경림이 말하고는 구석에 앉은 재무팀 팀장을 바라봤다.재무팀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사람들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천신 그룹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운영 비용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두 개 센터를 건설하는 데 워낙 많은 인력과 물자가 투입돼 천신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투자를 유치하지 못
여자들은 흥분해서 택이를 옹호했다.차설아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택이가 몸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업계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탱탱한 엉덩이, 얇고 붉은 입술, 마이크를 잡은 긴 손가락... 여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멋져! 택이! 택이! 택이!”차설아는 알코올의 작용으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인격을 방출했다. 주변 여자들을 따라서 무대 위의 남자들을 향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어쩌면 이것이 여자들이 진정 긴장을 푸는 순간일지도 모른다.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린 차설아의 모습에 배경윤은 조금 놀랐다.‘언니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구나... 진작 좀 말하지! 기다려봐!’공연이 끝난 후, 택이는 무대에서 내려왔고 모두 앵콜을 외쳤다.차설아는 너무 열정적으로 뛰어서 이미 숨이 차고 땀이 피어올랐다.그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차설아는 갈증을 풀기 위해 술 한 병을 비웠다. 이미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소파에 주저앉았다.“언니, 저 택이라는 남자 어때?”“죽이지. 완전 매력 있어. 보는데 심장이 뜨거워지더라니까?”“그래? 그럼 기다려!”배경윤은 차설아가 모처럼 성도윤을 제외한 남자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이자, 차설아가 빨리 지나간 사랑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백스테이지로 가서 택이를 찾았다.“거기, 우리 언니가 너한테 관심이 좀 있어. 이 카드에 1억이 들어 있어. 오늘 밤 언니를 잘 위로해주고, 기쁘게 해주되, 절대 몸에 손대면 안 돼. 어때, 해볼래?”배경윤은 카드를 듬직한 남자의 가슴에 갖다 붙이며 패기 있게 물었다.택이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섹시한 입술로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사실 방금 공연할 때 그는 이 두 여자를 주의 깊게 봤었다. 특히 매우 활기차게 뛰어노는 얼음공주 미녀는 왠지 모르게 그를 설레게 했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택이는 카드를 손에 쥐고 물었다.“만약 그분이 저를 만진다면요?”“그것도 안 돼!”배경윤은 조금 취하기는 했지만, 머리는 또렷했다.“난 언니한테
바의 음향 효과는 아주 좋았고 조명 분위기도 일품이었다. 차설아와 배경윤, 자신을 놓아버린 두 여자는 술병을 들고 격렬한 음악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언니는 냉혈인간이 아니잖아. 성도윤의 일에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어. 지금 언니가 아주 슬프다는 걸 알아. 한바탕 크게 울고 싶지? 울고 싶으면 그냥 마음껏 울어. 여기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여자들 천지야. 나도 그중 한 명이고. 애써 참지 마. 여자가 우는 게 뭐 죄도 아니고?”시끄러운 환경에서, 배경윤은 목청을 돋우어 차설아의 귓전에 대고 소리쳤다.“하하하, 난 전혀 슬프지 않고 기뻐. 진심이야!”차설아의 아름다운 얼굴은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 술을 꿀꺽꿀꺽 몇 모금 들이켰다.“그 인간은 나한테 시한폭탄 같은 존재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 그런 인간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나한테는 좋은 거지. 기뻐하기도 모자란 데 내가 왜 슬퍼하겠어?”“자자자, 성도윤 시한폭탄이 터진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건배!”차설아의 소탈한 모습에 배경윤은 순간 자신의 속이 좁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 언니 말이 맞아. 세상에 남자는 널리고 널렸어. 여기 좀 봐. 하나같이 잘생긴 훈남들이야. 한 나무에만 매달릴 필요 없다고!”말을 마친 배경윤은 그들에게 술을 가져다주는 멋진 종업원을 가로막고 말했다.“요즘 여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공연이 아주 핫하다고 들었는데, 어떤 공연이에요?”“두 분 관심 있으신가요?”종업원은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차설아와 배경윤을 바라보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저희 보이 바에는 확실히 특색 있는 공연이 있어요. 바로 다양한 미남들이 나와 춤을 추는 공연이죠. 그중 압도적인 인기를 받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에이스 택이에요.”“매일 택이를 보려고 오는 여자 손님들이 부지기수예요. 택이를 한 번 만지려고 내기를 하고, 택이와 술을 한잔하려고 크게 싸우시고... 아무튼 야단법석이에요.”“에이스 택이?”차설아는
여자들은 흥분해서 택이를 옹호했다.차설아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택이가 몸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업계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탱탱한 엉덩이, 얇고 붉은 입술, 마이크를 잡은 긴 손가락... 여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멋져! 택이! 택이! 택이!”차설아는 알코올의 작용으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인격을 방출했다. 주변 여자들을 따라서 무대 위의 남자들을 향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어쩌면 이것이 여자들이 진정 긴장을 푸는 순간일지도 모른다.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린 차설아의 모습에 배경윤은 조금 놀랐다.‘언니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구나... 진작 좀 말하지! 기다려봐!’공연이 끝난 후, 택이는 무대에서 내려왔고 모두 앵콜을 외쳤다.차설아는 너무 열정적으로 뛰어서 이미 숨이 차고 땀이 피어올랐다.그들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차설아는 갈증을 풀기 위해 술 한 병을 비웠다. 이미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소파에 주저앉았다.“언니, 저 택이라는 남자 어때?”“죽이지. 완전 매력 있어. 보는데 심장이 뜨거워지더라니까?”“그래? 그럼 기다려!”배경윤은 차설아가 모처럼 성도윤을 제외한 남자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이자, 차설아가 빨리 지나간 사랑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백스테이지로 가서 택이를 찾았다.“거기, 우리 언니가 너한테 관심이 좀 있어. 이 카드에 1억이 들어 있어. 오늘 밤 언니를 잘 위로해주고, 기쁘게 해주되, 절대 몸에 손대면 안 돼. 어때, 해볼래?”배경윤은 카드를 듬직한 남자의 가슴에 갖다 붙이며 패기 있게 물었다.택이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섹시한 입술로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사실 방금 공연할 때 그는 이 두 여자를 주의 깊게 봤었다. 특히 매우 활기차게 뛰어노는 얼음공주 미녀는 왠지 모르게 그를 설레게 했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택이는 카드를 손에 쥐고 물었다.“만약 그분이 저를 만진다면요?”“그것도 안 돼!”배경윤은 조금 취하기는 했지만, 머리는 또렷했다.“난 언니한테
차설아는 남자의 품에 안겨 가녀린 두 팔로 남자의 목을 껴안으며 흐리멍덩하게 말했다.“아, 역시 프로야. 꽤 야성미가 있는걸? 이렇게 날 안아주다니! 역시 여자의 맘을 잘 알아!”여자는 여세를 몰아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만졌다.그의 강인한 턱은 아주 멋있었다. 그 위에 푸르스름한 턱수염은 좀 뜨거웠지만, 남성호르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차설아는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눈빛을 받으며 남자에게 안겨 바의 고급스러운 개인 룸으로 들어갔다.이 룸의 인테리어와 조명은 모두 야릇하고 한가운데에 큰 원형의 물침대가 놓여 있었다. 부자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곳이었다. 룸에 들어온 차설아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너 혹시 몸까지 파는 애였어? 누나가 오늘 돈을 안 챙겨왔어. 이만 내려줘.”차설아는 취한 듯 안 취한 듯 남자의 품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의 강직한 이미지도 챙겼다.“누나는 정도가 있는 사람이야. 네가 아무리 내 스타일이긴 하지만, 절대 공짜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누나는 보통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 만약 함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으면... 넌 당해내지 못할걸?”여자는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남자의 완벽한 얼굴을 꼬집고, 바보처럼 웃었다.“너처럼 얼굴이 희고 예쁜 남자는 밖에서 여자를 조심하라고 엄마가 안 알려줬어?”“작작 하세요.”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했지만, 부드러움을 띠고 있었다. 차설아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물었다.“목 안 말라요? 물 따라 줄까요?”남자가 일어서자마자, 차설아는 코알라처럼 남자의 기다란 팔을 껴안고 칭얼댔다.“엄마, 가지 마. 나 목 안 말라. 나 술 마시고 싶어.”‘엄마?’남자의 얇고 차가운 입술이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켰다.‘이 여자가...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그는 차갑게 물었다.“날 당신 엄마로 착각한 거예요?”“뭐야? 왜 갑자기 무섭게 말을 해. 떽! 착하지.”남자는 어이가 없었다.차설아는 흐리멍덩한 눈
남자의 가면 아래, 눈동자는 깊고 밝았다. 선을 넘는 말이었지만, 경박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애틋함이 묻어있었다.순간, 차설아는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니 몸에 전류가 흘렀고 취기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휴, 쯧쯧. 역시 프로는 남달라. 말을 예쁘게 하면서 사람 마음을 제대로 홀리네. 하지만... 가짜는 결국 가짜야. 내 전남편은 이미 죽었어. 네가 아무리 그 사람을 닮았다고 해도, 그저 죽은 사람을 닮은 것뿐이야.”남자의 차갑던 입꼬리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변했다.“이렇게 슬퍼하는 걸 보니 전남편을 많이 사랑하나 봐요?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많이 힘든가요?”“그럴 정도는 아니야!”차설아는 술 트림을 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소파에 가서 눕더니,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냥... 너무 갑작스러워. 마치 아주 재밌는 책을 읽고 있는데, 한창 재미있을 때 작가가 사라진 느낌이랄까? 내 전남편은 쓰레기가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결말을 맞을 정도는 아니었어.”“단지 그뿐이에요?”남자는 차설아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에게 한 톨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요? 조금의 안타까움도 없어요?”차설아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더니 눈에 미세먼지가 들어갔는지 시선이 흐려졌다.남자는 위에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고인 영롱한 눈물을 보고 미간을 살짝 구겼다.“우는 거예요?”“천만에!”차설아는 코를 훌쩍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눈에 먼지가 들어갔어.”“그래요?”남자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취하고도 여전히 소고집을 부리다니. 전혀 귀엽지 않네요.”남자의 커다란 체구는 소파에 엎드렸고,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어차피 전 당신 친구가 돈을 주고 산 해어화예요. 모든 안 좋
“눈이 다 나았다고 하길래 특별히 축하해주러 왔지.”서은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선물을 툭 던져주었다.“이렇게 신경 써주니 참 고맙네.”성진은 선물을 받으며 냉랭하게 말했다.“형이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성진아,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 거고.”서은아는 말하다가 화가 나서 소파를 두 번이나 세게 걷어찼다.“성도윤 그 배은망덕한 놈! 양심이 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가 서씨 가문의 미래까지 걸고 도왔는데! 그땐 내가 눈이 멀었어.”“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나도 한때 그랬었어. 너도 그때 나랑 마찬가지인 거고. 이젠 헛된 꿈에서 깨어나 제대로 앞을 봐야 할 때인 거지.”성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진작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근데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 안 와. 너도 전에 그랬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어?”서은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가 성진을 찾아온 건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럼 네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원하는 게 뭔데?”“서씨 가문의 모든 걸 이용해서 널 도울 수 있어. 대신 내가 원하는 건 성도윤이 완전히 무너져서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아니었어?”“내가 독하게 굴지 않으면 성도윤이 깨닫긴 하겠어? 누가 진짜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서은아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모든 걸 잃어 봐야만 내가 도윤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될 거야.”“재밌는 생각이네...”성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그는 서은아 같은 여자를 꽤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거침
민이 이모의 말을 들은 성도윤은 계속해서 물었다.“왜 따라 배우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설아의 부모님이 금슬이 좋다고 들어서 무척 부러웠거든요. 저도 설아랑 알콩달콩 지내고 싶어요.”그러자 민이 이모는 미소를 지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금슬이 좋은 부부로 알려진 건 맞지만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부부마다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굳이 따라 배울 필요 없다고 한 거고요. 설아 아가씨랑 지금처럼만 지내시면 돼요.”“그러면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어떤...”“도련님, 죄송하지만 예전의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력도 나빠졌거든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의 말을 잘랐다.“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련님도 일찍 쉬세요.”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이 이모는 뒤돌아서서 성도윤을 향해 말했다.“혹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해도 밝히지 마세요. 궁금한 게 있더라도 계속 조사하지 마시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바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이 이모가 나간 뒤, 성도윤은 생각에 잠겼다.‘이모님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비밀에 부친 일을 굳이 조사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야. 설아한테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몇 분 후, 성도윤은 진무열한테 전화를 걸었다.“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잠시 멈춰. 아직은 때가 아니야.”한편, 성진의 별장.어두운 불빛과 가라앉은 분위기는 성진의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정말 네가 나한테 두 눈을 기증한 거라고?”성진은 책상 앞에 앉아서 기증자의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청아라는 여자와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도련님께 기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현청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대답했다. 두 눈은 움푹 파였고 성진이 기억하던 그 여자의 목소리와 똑같았다.하지만 성진은 현청아가 수술 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 거라
성도윤은 차가워진 밤공기보다 소영금이 숨긴 사실이 더 궁금했다. 민이 이모는 젊었을 때부터 차씨 가문에서 일했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도 있었다.“조금 쌀쌀해지긴 했어요. 마침 추웠는데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성도윤은 문을 열면서 미소를 지었다.“도련님한테 괜히 제가 더 미안해져요. 설아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뒤끝이 길거든요. 아직도 도련님한테 화가 났는지 계속 오두막에서 지내게 하네요. 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할 거예요.”민이 이모는 침대 위에 이불을 펴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이모님, 차씨 가문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셨어요?”민이 이모는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요.”“이모님처럼 한 가문에서 평생 일하시는 분은 드물잖아요. 게다가 진심으로 차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 주고 보살펴주는 게 대단해서요.”“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회장님과 사모님이 저한테 아주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거고요.”“설아한테서 들었는데 이모님은 대대로 의학을 전공했다면서요? 이모님 아버지는 이름을 날린 의사였고 이모님 실력도 훌륭하다고 들었어요. 사용인이 아니라 의학의 길을 걸으셨다면 더 큰 재부를 누리셨을 텐데, 미래를 포기하고 차씨 가문에 평생을 바쳤다는 게 정말 대단하고 멋져요.”“설아 아가씨가 과장해서 설명한 것 같아요. 저의 실력은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고요. 설아 아가씨는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셨어요. 설아 아가씨와 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민이 이모는 성도윤이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드릴게요.”“역시 이모님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시네요.”성도윤은 어색하게
“무슨 사이냐고?”소영금은 성도윤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몹시 당황했다. 몇 초 후, 소영금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무슨 사이긴, 사돈이지.”“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그저 사돈 관계일 뿐이라고요?”성도윤은 소영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차설아의 아버지가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소영금과 차우진은 애틋한 사랑을 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절대 단순한 사돈 관계가 아니었다.“도윤아, 지금 엄마를 의심하는 거야?”소영금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분노가 깔려있었다.“그저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불안하다고?”소영금은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불안해할 필요 없어. 차설아는 너의 배다른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었다면 내가 너랑 차설아가 잘되게 계속 도와주었을 것 같아? 너도 참 단순하다니까...”“엄마는 내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엄마랑 설아 아버지는 예전에 연인 사이였던 거죠?”성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갔어. 나도 살면 얼마나 더 살까? 시간 앞에서 과거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단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해. 이 일에 대해서 더는 묻지 마.”“하지만...”“도윤아, 늦었으니 너도 일찍 쉬어. 엄마는 늙어서 일찍 자지 않으면 다음 날에 기운이 없어. 너는 그저 설아랑 잘 지내고 차씨 가문과 성씨 가문의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면 돼. 알겠지?”소영금은 성도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소영금은 차우진과 연관된 다른 얘기를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을 거쳐 겨우 아문 상처를 꺼내면 곪아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알겠어요. 엄마, 시간 될 때 원이랑 달이를 보러 오세요.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까 얼마나 행복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