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후, 동남아시아의 어느 개인 섬.차설아는 하얀 해먹에 누워 차가운 수박을 여유롭게 먹으며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출산 예정일이 두 달 남짓하여 배가 이미 크게 불렀다.해안을 떠난 후, 차설아는 줄곧 이 섬에 머물면서, 매일 바닷바람을 쐬고, 먹고 마시고, 원격으로 천신 그룹과 법률사무소의 일을 보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냈다.역시, 인터넷에서 말했듯이 남자를 가까이하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맞았다!성도윤의 세계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부터, 차설아는 잘 먹고 잘 자며, 행복하게 지내서 몸도 마음도 좋아져 살까지 올랐다.이 개인 섬은 수년 전, 그녀가 학술 상금과 특허 비용,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모은 돈으로 샀고, 자신이 꿈꾸던 모습으로 만들었다.원래 이 섬을 무릉도원처럼 개조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휴가로 데려오려고 했다.아쉽게도 섬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에 변고가 생겼고, 그녀는 성가로 시집갔기 때문에 한 번도 섬에 온 적이 없었다.최근 몇 년 동안 이 섬은 배경수가 자비를 털어 유지한 덕에 황폐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기지국도 건설되어 자주적으로 신호를 제공할 수 있었다.이것이 바로 차설아가 계속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행적이 전혀 잡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이 작은 섬은 작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섬에는 없는 것이 없었고, 차설아가 마음만 먹으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살기에 충분했다.차설아는 이 섬을 ‘해바라기 섬’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는 섬에 해바라기 꽃을 가득 심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해바라기처럼 영원히 햇빛을 따라 강인하고, 낙천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차설아와 섬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유모 민이 이모였다.민이 이모는 조상의 의술을 물려받아 태아의 발육에 주의를 기울이고 매일 다양한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했다.두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 이 섬에 더 많은 생명력을 가져다줄 것을 더없이 기대하고 있었다.‘다다다’
“알았어! 잔소리 그만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쉬지 않고 말했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빠가 아이 아빠인 줄 알겠어!”배경윤은 짜증스럽게 배경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차설아를 안았지만 이번에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안았다.배경윤은 손으로 차설아의 볼록한 배를 만져보고 생명의 위대함에 감개무량했다.“대박, 언니, 배가 이렇게 커졌어? 너무 신기해. 이 안에 정말 아기가 두 명 있다고?”배경수가 이미 배경윤에게 말한 것을 깨닫고, 차설아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맞아, 이란성 쌍둥이야. 이제 두 달 남았어.”차설아도 생명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섬에 있는 동안, 차설아는 느린 삶을 살며 뱃속에서 두 아이가 조금씩 자라는 것을 몸소 느꼈다.매일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마치 알아들은 듯 꼬물거리며 그녀에게 답해주어서 너무 행복했다.“이란성 쌍둥이라니!”배경윤은 눈알이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언니, 역시 대단해. 한 번 하는 임신 제대로 하네! 성도윤 그 인간이랑 절대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꽤 닭살 부부였나 봐? 아니면 어떻게 한방에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해!”“음...”차설아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난처했다.배경윤의 노골적인 말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가네 집안에는 이란성 쌍둥이 유전자가 없는 거로 아는데. 혹시...”배경윤은 갑자기 흥분하여 펄쩍 뛰었다.“혹시 우리 오빠 아이를 가진 거 아니야? 우리 집에는 이란성 쌍둥이 유전자가 있잖아! 나 고모 되는 거야? 너무 좋아!”차설아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차설아도 오히려 배경수의 아이이기를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있으니 말이다.요즘 배경수는 그녀를 만나러 하루가 멀다 하고 섬에 들락거렸다. 천신 그룹의 상황을 보고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차설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배경수는 올 때마다 차설아와 아이를 위해 선물을 잔뜩 가져오고, 재미있
“뭐?”차설아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얼른 다가갔다.배경윤은 영화관에서 찍은 듯한 영상을 보여주더니, 여러 남녀가 스크린 앞에 서서 영화를 홍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이건...”차설아는 남녀 배우의 자기소개를 보고는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외계인을 본 듯 충격을 받았다.“하하, 놀랍지! 영화 ‘차성커플’의 시사회야... 언니 예상이 맞아. 언니랑 성도윤의 팬 픽션을 영화로 만들었어. 내가 봤는데 엄청 재밌는 거야. 얼마나 펑펑 울었다고!”배경윤은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알겠는데, 왜 남자 주인공이... 하필 성도윤이야?”‘이 자식 소문난 워커홀릭 아니었어? 1분에 몇백억의 돈을 버는 재계 엘리트, 재벌가 도련님이 이런 막장 로맨스 영화를 찍으러 갔다고? 한가한 거야? 아니면 투자사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그러니까! 이 영화는 비밀리에 촬영해서 갑자기 개봉했잖아. 출연진이 발표되고, 연예계, 비즈니스계, 재벌계, 네티즌 등등 모두 깜짝 놀라서 바로 실검에 올랐어. 성도윤이 직접 출연하게 된 건 대본의 진짜 작가가 성도윤이기 때문이래. 그러니까 인터넷을 핫하게 달군 팬 픽션은 사실 본인이 쓴 것이고, 영화로 만든 건 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래.”“개소리 치고 있네.”차설아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누가 그 팬 픽션을 성도윤이 썼대? 그 인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의 창작 성과를 멋대로 갈취해? 사람들도 어리석지. 빙산처럼 차가운 냉혈인간이 어떻게 그런 따뜻하고 감정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어?”“참, 언니 일단 진정하고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아기한테 안 좋아.”배경윤은 차설아를 잡고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나도 그 점이 이상하단 말이야. 냉혈하고 무자비한 인간은 절대 그렇게 감동적인 소설을 쓸 수 없어. 하지만 지금까지 원작자가 나타나서 소송을 걸지 않은 거로 보아 성도윤이 맞는 것 같단 말이지.”“게다가... 전에 인터넷에 발표된 소설은 완결되지 않았지만 이
배경윤은 마당발로서 자연히 모든 방면의 찌라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크린에 비친 여배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여자 좀 눈에 익지 않아? 언니랑 많이 비슷한 것 같아!”차설아는 미간을 구겼다.“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네.”“기억력하고는. 바로 성도윤이 술집에서 데리고 나간 그 어린 여자애잖아. 언니랑 엄청 닮은!”“아, 맞다!”차설아는 겨우 생각났고, 마음이 좀 복잡했다.성도윤은 죄책감 때문에 임채원에게만 집중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상대를 바꿀 줄은 몰랐다.‘남자는 역시 똑같아!’“성도윤 진짜 무슨 속셈이야? 왜 이렇게 희생을 해가면서 이 여자를 꼬시는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보고 또 휴대폰 속의 여자를 보며, 너무 닮은 모습에 연신 감탄했다.“혹시, 언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언니를 닮은 여자를 대역으로 삼은 건 아닐까?”“말도 안 되는 소리!”차설아는 흔들림 없이 차갑게 말했다.“나한테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원한이 남은 거지. 나 때문에 그 사람 아이가 죽고, 사랑하는 여자는 자궁까지 적출 했잖아. 날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거야.”“그럼 언니가 그 사람 아이를 가진 건 알아? 만약 알게 된다면 두 사람 혹시...”“그만해!”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고 귀찮은 듯 말했다.“나를 진짜 언니로 생각한다면, 내 앞에서 그 사람 거론하지 마. 이 두 아이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는 내 자식이야. 자꾸 헛소리하면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미안해, 언니. 내 생각이 짧았어. 언니 마음 충분히 이해해. 앞으로 다시는 그 인간 말하지 않을게. 다시 말하면 내 입을 찢어버려!”배경윤은 얼른 손을 들어 맹세했다.배경윤은 영화를 보고 ‘차성커플’의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남편은 없고 자식만 있는 여자가 더 행복할지도 모르니, 배경윤은 당연히 차설아를 지지했다.차설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던 배경수에게 말했다.“서재로 가자. 우리 따로 얘기해!”
배경수와 배경윤을 떠나보낸 후,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섬은 다시 평온한 분위기로 돌아왔고, 꽃향기가 잔잔한 파도를 동반하여 더할 나위 없이 쾌적했다.차설아는 이것저것 만지작거렸다. 심지어 새로 키운 고양이 귤에게 통조림을 무려 30분이나 먹이기도 했다. 마치 몸을 바쁘게 움직여 딴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차설아의 촉촉한 눈망울은 틈틈이 서재 컴퓨터 쪽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손을 억누르며 애써 어떠한 욕망을 참는 모습이었다.결국, 차설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컴퓨터를 켰다.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몇 번 만지더니, 차설아는 영화 배급사의 내부 시스템을 해킹해 개봉을 앞둔 ‘차성커플’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다.‘흥, 얼마나 대단하기에 호평이 가득한지 직접 한번 봐야겠어!’영화는 2시간 남짓했고, 차설아는 개인 극장에서 과일과 간식을 준비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감상했다.확실히 훌륭한 영화였다. 일본 순애보 영화의 촬영수법처럼, 매 프레임 모두 세심하게 신경 쓴 것이 보였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삼류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영화의 첫 장면은 단번에 차설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남녀 주인공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한여름에 만난 줄거리를 생생하게 복원했다.차설아는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가 아니라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긴 4년간의 결혼생활이 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이 모두 영화에 녹아 있었다.영화의 후반부는 성도윤이 직접 창작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전반부처럼 슬프지 않고, 주요하게 남녀 주인공이 아이와 함께 행복하고 다정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다.그러던 어느 날, 남녀 주인공은 사소한 오해로 크게 다퉜고, 여자는 홧김에 문을 박차고 나간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남자는 아기를 데리고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자를 찾았고, 한 곳에 도착할 때마다 여자에게 엽서를 썼다.엽서는 점점 더 많아졌고, 트렁크 하나를 가득 채웠지만 남자는 끝내 여자의 소식을 얻지 못했다.마지막에 남자가 잠결에 ‘드디어 돌아
민이 이모는 그제야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이 성도윤인 것을 발견했다.“어머나, 이 나쁜 놈이 왜 영화까지 찍었어요? 성대 그룹이 파산하나요? 높으신 대표님이 왜 연예계에 돈 벌러 가셨어요?”차설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농담하듯이 말했다.“저 여자 주인공을 꼬시기 위해서라고 하네요.”“퉷!”성도윤이 임채원의 일로 차설아를 목졸라 죽일 뻔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민이 이모는 성도윤을 극도로 싫어했다. 매일 남자를 저주하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지금 이 냉철하고 무정한 남자가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매정한 인간은 조만간 여자의 손에 죽게 될 거예요. 이혼 너무 잘하셨어요. 아니면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닐지 몰라요.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서 절대 행복하게 자랄 수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혼은 너무 명확한 선택이었네요.”“...”차설아는 담담하게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민이 이모의 말을 듣고 함께 남자를 마구 욕했을 것이다.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차설아는 욕을 할 수 없었다. 항상 그 차가워 보이던 남자가 생각만큼 그렇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간이 아니고, 그도 섬세한 마음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말을 쓸 수 없을 것이다.“됐어요, 아이도 있으니 더 욕하지 않겠어요.”민이 이모는 심호흡을 하고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민이 이모는 관례대로 차설아의 맥을 짚고, 태아의 건강, 혈당 및 혈압 등을 측정했고, 모든 지수가 정상이었다.“아기들이 참 대견해요. 너무 잘 자라고 있어요.”민이 이모는 기뻐하며 말했다.“아가씨께서 수중 분만을 원하신다는 말을 듣고 경수 도련님이 얼마 전 몰래 디자이너와 일꾼들을 불러 수중 분만실을 수리했어요. 방은 침하 식으로 설계되어 바다 밑까지 뻗어 있고 벽도 모두 유리 재질로 되어 있어요. 출산하시면서 주변에 바닷가 생물들이 헤엄치는
성도윤은 ‘차성 커플’ 영화가 실검에 올라 세계의 이목을 끌면 차설아가 분명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하지만 여자의 반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이 영화는 아직 소규모 개봉일 뿐, 정식 개봉도 하지 않았다. ‘이 여자가 많이 급한가 봐? 쿨하게 떠난 건 아닌가 보네?’사도현은 거들먹거리며 성대 그룹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고, 성도윤의 손에 작은 쪽지를 쥐여 주었다.“형, 잘 챙겨. 내가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놓치면 그건 형 능력 문제야.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일에 열중하고 있던 성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에 든 쪽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이게 뭐야?”“차설아 위치!”사도현은 감격스러워 말했다.“내가 방금 누가 배급사의 내부 시스템을 해킹해서 영화를 복사해 갔다고 했잖아. 내가 거금을 들여 해커를 고용해 그 사람의 주소를 확인했지. 이름도 없는 작은 섬이지 뭐야. 어쩌면 차설아가 지금 그 섬에 있을지도...”“쯧쯧, 어쩐지 우리가 오랫동안 찾아도 소식이 없더라니. 그런 곳에 숨어있을 줄이야.”성도윤의 그윽한 눈동자는 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덤덤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어디에 있든 나랑 상관없어. 나 이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형, 그게 뭔 말이야? 나한테 설아의 움직임을 지켜보라고 했잖아.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직접 출연한 것도 차설아에게 이런 방식으로 사과하려던 거 아니었어? 드디어 차설아가 미끼를 물었는데, 이제 와서 형이랑 상관없다고?”“내가 지켜보라고 한 건, 진짜 미련 없이 쿨하게 떠난 게 맞는지 확인해 보려던 거였어. 이제 확인했으니,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나랑 상관없어.”성도윤은 말하면서 손에 있는 서류를 처리했다. 마치 차설아가 어디 있는지 관심이 없고, 찾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이에 사도현은 크게 당황했다.사도현은 자신이 차설아의 주소를 알아내면 성도윤이 밤새 헬기라도 타고 날아갈 줄 알았다. 차설아를 찾은 ‘공’으로 앞으로 3
그룹 빌딩 전체에는 직원이 거의 없었다.성도윤은 사무실에 앉아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최근 몇 년 동안 성대 그룹은 빠르게 발전함과 동시에 많은 문제와 적들이 생겼다.특히 전자 기술 분야에서 성대 그룹은 R&D 회사인 KCL과 오랜 협력으로 거의 천하무적이었고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었다.따라서 많은 경쟁자들이 암암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전체적인 판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들여 처리해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예를 들어, 최근 누군가 끊임없이 루머를 퍼뜨리고 있었다. 성대 그룹이 새로 출시한 스마트 팔찌는 사용자의 사생활을 도청한다고 하여, 성대 그룹은 많은 컴플레인과 고소를 당했다. 이미지가 계속 손상되고 있어 아주 번거로웠다.“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홍보팀에 알리세요.”“당장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내고, 법무팀에 고소장을 준비해 허위사실 유포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으라고 하세요.”“스마트 팔찌를 일단 회수하고 기술팀에 진짜 허점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세요.”“…”성도윤은 얼마나 많은 화상 통화를 하고, 얼마나 많은 서류에 사인하고,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검토했는지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가서 사도현이 찢어서 버린 쪽지를 주었다.쪽지는 크지 않았지만, 눈송이 모양으로 찢어져서 붙이기 쉽지 않았다.성도윤은 머리를 파묻고 한참이나 붙이더니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가 윙윙거렸다.‘망할 사도현, 전생에 분쇄기였나? 쪽지를 이렇게 찢으면 어떡해!”거의 붙이려던 순간, 비서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대표님.”“콜록!”성도윤은 도둑질한 듯 서둘러 종이를 막았지만, 동작이 너무 커서 그대로 날아가 땅바닥에 너부러졌다.비서는 화들짝 놀라 다가가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움직이지 말아요!”성도윤은 큰소리로 외치며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보며 차갑게 명령했다.“밟지 말아요!”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바닥이 너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