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원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보호는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은 거나 다름없었다.그런 남자한테 설렌 감정을 느꼈으니 차설아는 자신이 한심했다.“그럼 두 분 천천히 얘기를 나누세요.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차설아는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사도현의 상황이었다.그녀는 두 걸음 나아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성도윤에게 말했다.“도윤 씨, 채원 씨를 숨기려면 잘 숨겨. 만약 나한테 들킨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사라지게 만드는 건 법에 어긋나지 않으니까.”물론 이건 차설아의 경고뿐이었다. 임채원이 다른 짓을 더 못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경고였다.하지만 그녀의 이 한마디 경고는 결국 일파만파를 일으키게 되는데...차설아가 떠난 후, 소영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저 재수탱이 말을 들어보니, 채원이는 아직 안 죽은 거야?”“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의 얼굴색은 한껏 어두워졌다.그는 아직도 차설아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왜 임채원을 향한 차설아의 원한이 그렇게 깊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다행이야, 그럼 내 손주도 아직 살아있다는 거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성씨 가문의 아이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소영금은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두 손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성도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어이가 없었다.“제가 죽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기회도 많을 거잖아요.”“흥, 네가 살아있으면 뭐 해, 여자에게 손도 대지 않으면서. 네가 스님이랑 다를 게 뭐야? 채원이가 재주 좋아서 네 아이를 임신해 그렇지, 네가 채원이한테 마음이라도 있어? 만약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이가 생기긴 힘들 거야...”소영금은 성도윤을 잘 알고 있었다.어려서부터 워낙 차갑고 도도했기에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니 차설아와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했어도 그녀에게 손 한 번 대지 않았던 거고.임채원이 그의 아이
“나도 오죽하면 이러겠어, 정말 사람이 없단 말이야!”소영금은 한숨을 푹 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너 이 녀석, 거의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여자를 거의 만나보질 못했으니. 채원이는 꿍꿍이가 너무 많아서 다스리기 쉽지 않아. 또 허청하는 진우랑 얽혀졌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히려 차설아가 적임자인 것 같아. 집안이 좀 뒤떨어진 것 빼고는 다른 문제 없잖아.”“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차설아가 그렇게 재주가 좋다며? 회사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하이 테크 협회 회장직까지 맡고, 또 법률사무소도 잘 꾸려나가고 있다며. 게다가 성대 그룹의 가장 큰 클라이언트를 뺏어갔으니... 내가 생각했던 무능력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나 소영금은 원래 능력 있는 여자를 좋아하거든. 지금 생각해 보니 성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잘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성도윤은 소영금이 모처럼 차설아를 칭찬하니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고부갈등은 예로부터 존재한 것이다. 만약 이 갈등이 해결된다면 그는 차설아와 정말 다시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다시 잘해본다고?’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성도윤 본인마저 깜짝 놀랐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한껏 차가워졌다.“엄마, 어디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지금은 차설아가 성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잘 소화해 내는지가 문제 아니에요, 오히려 차설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지가 문제라고요.“왜? 그 자리가 싫대?”소영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랑 밀당하는 거 아니야?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성씨 가문에 시집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차설아라고 싫겠어? 정말 싫었으면 왜 성씨 가문에 4년이나 있었겠어?”성도윤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차설아가 그렇게 성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를 욕심냈으면 왜 이혼하겠다고 했겠어요? 심지어 이혼을 하자고 저를 재촉했는데요.”“그게...”소영금은 고민에 잠겼다. 아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아까 상황으로 봤을 때, 성도윤은 옷을 걸치지도 않고
성도윤은 별 감흥이 없는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방금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뒤돌아보는 게 아니라고요.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거예요? 부끄럽지도 않아요?”소영금은 도도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부끄럽긴 하지만 엄마는 네가 좋은 여자를 놓치지 않길 바라. 그리고 엄마가 두 사람을 그렇게 반대했던 건, 네가 차설아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네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결혼 생활을 하는 게 싫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어디가요?”“네가 차설아한테 마음이 있잖아!”소영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여자는 정말 흔치 않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 네 마음을 움직인 여자를 만났으니 당연히 붙잡아야 할 거 아니야!”“차설아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에요!”성도윤이 차가운 얼굴로 부인했다.“그런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 거야. 날 설득할 필요 없어...”소영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엄마로서 성도윤이 답답했다.“물론 그 재수탱이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만 좋아한다면 난 괜찮아. 그리고 약속할게, 다시는 눈치를 주지 않고 ‘재수탱이’라고 부르지도 않을게. 네가 원한다면 차설아랑 잘 지낼 수도 있어. 나...”“그럴 필요 없어요!”성도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랑 차설아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병원에서.사도현은 응급실에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뼈를 바로 맞추고 깁스를 했다.보름 동안 병상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했다.차설아는 사도현이 있는 병실에 도착했는데, 강진우도 자리에 있었다.“진우 씨.”차설아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강진우는 차설아를 보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설아 씨, 시간 내서 설아 씨한테 사과드리려던 참이었어요!”강진우는 차설아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사과요?”차설아는 어리둥절했다.“청하는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한때 약혼자로서 사과를 드려요. 그날 분명 정신이 혼미해서 설아 씨를 모
“청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강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단지, 제가 아는 설아 씨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 만한 동기도 없고, 설아 씨에게 의미도 없는 일이죠.”차설아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저한테는 동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인데, 진우 씨도 아는 이 뻔한 사실을 성도윤만 모르네요.”“도윤이는 단순해서 복잡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요.”“맞아요, 단순하다 못해 아주 무식하네요.”서로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은,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사도현은 병상에 누워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전혀 움직이지 못해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강진우와 차설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두 사람 마침 잘 왔어. 나 좀 데리고 나가 줘. 이 감옥 같은 곳에서 1분도 더 있기 싫어!”강진우는 미간을 구기고 엄숙하게 말했다.“다리가 부러졌어. 가만히 있어.”“가만히 못 있어!”사도현은 침대를 두드리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나 지금 먹고, 화장실 가는 것까지 전부 낯선 사람이 도와주고 있어. 너무 창피하단 말이야. 가장 화나는 건 게임을 하고 싶은데 간호사가 못하게 하잖아! 이게 사람 사는 거야?”“안 되겠어. 퇴원할 거야! 염라대왕이 와도 난 지금 당장 퇴원해야겠어!”“그건...”강진우는 조금 걱정되었다.사도현은 타고난 고집불통이라 일단 무엇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누가 와도 소용이 없었다.“움직이지 말아요!”차설아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아이처럼 떼를 쓰던 사도현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멍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차설아는 천천히 물을 한 잔 따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도현 씨도 다 큰 성인이에요. 뭐든 멋대로 하려고 하지 마세요. 낯선 사람이 시중을 드는 게 불편하다면 앞으로 제가 할게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자연스럽게 사도현의 입가에 물컵을 들이대며 온화하지만 강력하게 말했다.“물 좀 마셔요. 입술이 다 말랐어요.”“...”사도
“하지만 난 더...”사도현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게임 하고 싶다고요? 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흥, 안 되면 안 되는 거지!”사도현은 희망이 사라지자 화가 나서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쿨쿨 잠이 들었다.센 척하지만 또 겁먹은 사도현의 모습은 왠지 좀 귀여웠다.차설아와 강진우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른 이불을 벗어 던지고 물었다.“차설아. 방금 나 돌봐준다고 한 말. 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죠.”차설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했다.“제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전 인내심이 없어요. 아까처럼 말도 안 듣고 떼만 쓴다면 전 폭력을 사용할지도 몰라요.”“안심해. 네가 돌봐준다면 당연히 말을 잘 들어야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강진우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표정이 좀 복잡했다.“진우 씨, 근처 슈퍼에 가서 도현 씨한테 필요한 물건 좀 사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차설아는 강진우를 보며 물었다.사도현을 돌보겠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도현을 극진히 잘 보살펴서 생명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먼저 가세요. 전 도현이한테 할 말이 있어요.”“네.”차설아는 궁금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강진우는 사도현의 침대 옆에 다가가 뒤집어쓴 이불을 벗기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이 자식, 대체 뭐 하는 거야?”거의 잠이 들 뻔했던 사도현은 갑자기 놀라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왜 그래, 형? 아직 안 갔어?”강진우는 굳은 안색으로 차갑게 말했다.“시치미 떼지 말고 똑바로 말해. 너랑 설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무슨 일이라니?”사도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설아 집에 가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잖아. 내가 구하려다가 다리를 다친 거야...”“그게 전부야?”“맞아! 이게 전부야.”“왜 난 네가 설아 씨를...”“아니
강진우와 사도현은 순간 말을 멈추고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습을 보였다.“형,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들어와?”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움직이는 빙산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는 사도현의 앞에 다가가 매달린 깁스 발을 두드리며 물었다.“아파?”사도현의 이목구비는 즉시 한군데로 몰리더니 고통스럽게 외쳤다.“악, 아파. 형 나 죽이고 싶어? 내가 목숨을 바쳐서 전처를 구해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야?”“정신이 멀쩡한 걸 보니 큰 문제는 없네. 사람을 구했다는 말, 자꾸 입에 달고 있지 마.”성도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마치 사도현이 차설아를 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듯했다.생명의 은인이라는 신분은 너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라면 몸을 바쳐 은혜를 갚는 경우도 있어, 성도윤은 기분이 불쾌했다.“그러게 말이야!”강진우도 기회를 타서 말했다.“이 자식 그 핑계로 설아 씨한테 병간호해달라고 하잖아. 뻔뻔하기도 하지.”“병간호를 해?”성도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말을 되새겼다.이때 차설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비 죽을 들고 말했다.“도현 씨, 일어나서 야식 먹어요. 갈비 죽이 상처 회복에 좋대요. 제가 먹여줄게요.”차설아는 병실에 들어서서야, 성도윤과 강진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당황했다.“당신들... 아직 안 갔어요?”성도윤은 차설아 손의 죽을 흘겨보고는 비꼬아 말했다.“우리가 있는 게 정상 아니야? 그러는 당신은? 한밤중에 죽까지 들고 와서, 너무 부지런하네?”차설아는 성도윤이 또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하여, 그를 지나쳐 가버렸고,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차설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죽을 손에 들고 숟가락으로 떠서 살살 불어준 다음 사도현의 입에 대고 말했다.“뭐해요? 얼른 입 벌려요. 간호사가 그러는데, 마취가 풀려서 간단한 음식을 먹어도 된대요.”“난...”사도현은 당연히 입을 벌리고 싶었다.지금 그는 정말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다만, 성도
사도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서둘러 말했다.“병원에 전문 간병인이 있어. 그분한테 맡기면 되니까 나 신경 쓰지 마.”“진심이야. 네가 이 사람을 구했으니, 내가 뭐라도 해야 마음이 놓여. 거절하지 마!”성도윤은 경건한 태도로 말했고, 사도현을 재촉했다.“얼른 입 벌려. 죽 먹어!”사도현은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그의 말대로 했다.한 입을 다 먹기도 전에 성도윤은 또 한 입 건네주며 사도현은 배가 터질 정도로 죽을 먹게 되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고 있는 거야. 사람을 구하고, 다리까지 부러졌는데, 지금은 두 사람의 사랑싸움 도구가 되었으니. 누가 나보다 더 비참할까!’차설아는 죽을 거의 다 먹은 것을 보고, 얼른 사과를 하나 가져와 껍질을 깎고 건넸다. “밥 먹은 후에 과일을 먹으면 소화에 도움이 돼요.”성도윤은 또 재촉했다.“얼른 과일 먹어.”사도현은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 참 고맙다. 지금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빨리 이 난리 통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사과를 다 먹고 난 후, 차설아는 또 작은 케이크를 건넸다. 역시나... 성도윤은 또 재촉했다.“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내가...”차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도윤은 수건 한 장을 들고 사도현의 세수를 ‘시중’하기 시작했다.성도윤은 차설아에게 그 어떤 ‘보답’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불쌍한 사도현은 돌상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성도윤이 자신의 얼굴을 씻겨주고, 몸을 닦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무 괴로웠다.강진우는 옆에서 점점 기괴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도현아, 너 참 행복하구나. 도윤이가 이렇게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건 처음일 테니 마음껏 즐겨.”사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에는 살려달라는 메시지가 가득했다.드디어 모든 ‘시중’이 끝나고 차설아는 병실을 나왔고, 성도윤도 따라 나왔다.“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화를 내. 괜히 도현 씨 괴롭히지 말고!”차설아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차설아는 병원을 떠났지만,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화가 들끓었다.“저 자식 진짜 재수 없어. 자기 친구가 무슨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아? 내가 해칠까 봐 저렇게 걱정되나? 그렇게까지 날 경계할 필요 있냐고? 진짜 화가 나!”차설아는 택시를 타고 성가의 본가로 향했다.민이 이모는 이미 오래 기다리고 있었고, 줄곧 초조한 얼굴로 손을 비비고 있었다.차설아가 돌아오자 멀리서 달려왔다.“아가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제가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집에 불이 나고, 저더러 성가네 집에서 기다리고 한 건, 또 무슨 뜻이죠?”차설아는 민이 이모를 보고 코끝이 찡해 났고, 오래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마치 어린아이처럼 민이 이모의 품에 안겨 울었다.“이모, 왜 이제야 왔어요. 집이 없어졌어요. 우리 집이, 없어졌다고요!”“울지 마세요. 아가씨 울지 말아요!”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괜찮아요. 아가씨가 있고, 제가 있는 이상 우리 집은 사라지지 않아요. 타버리면 어때요, 다시 지으면 되죠. 울지 말아요!”“진짜 없어졌어요...”차설아는 눈물 콧물 범벅으로 흐느껴 울었다.“집은 확실히 다시 지을 수 있지만, 할아버지, 엄마, 아빠랑 같이 살았던 흔적은 다시 지을 수 없잖아요. 풀이며 나무며 벽돌 하나까지 전부 없어졌어요!”“아니에요. 불에 타버렸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늘 존재하고 있잖아요. 아가씨 진정하세요. 재건하면 되니까, 별로 큰일이 아니에요. 우리 강한 아가씨, 절대 이런 일에 좌절해서는 안 돼요!”“맞아요, 난 좌절해서는 안 돼요!”차설아는 뭔가 생각난 듯, 울음을 그쳤다.할아버지는 눈물은 패배자의 전유물이고, 강자는 눈물을 동력으로 삼는다고 말했었다.지금 좌절하기보다는 분발하여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우선이다!“이모, 전 절대 무너질 수 없어요. 전보다 더 큰 힘을 가져야 해요. 지금은 일단 이 집에서 머무르고, 차씨 저택을 재건하는 일은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요. 다시 태어난 차씨 저택은 반드시 온 해
성씨 가문 대저택.성주혁의 건강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그는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고 영양 수액 없이는 버틸 수조차 없었다.그날 밤, 그는 성도윤과 성진을 자신의 병상 앞으로 불렀다.“도윤아.”성주혁이 쇠약한 목소리로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보며 손짓했다.“이리 와, 할아버지한테 가까이 오너라.”“할아버지!”병약한 모습의 할아버지를 보며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네 어머니한테 들었다. 요즘 설아 곁에 붙어 있다고 하더구나. 이제야 내 손자가 사람 구실 좀 하는구나...”성주혁이 힘없이 손을 뻗어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이미 노쇠해진 눈빛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가장 걸렸던 사람이 차설아였고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도 그녀였다.“예전에 말이다, 내 평생 전우이자 가장 친한 형님이 자신의 손녀를 내게 맡기면서 반드시 손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부탁했었지.”“난 굳게 약속했지만 넌 내 기대를 저버렸고 그 애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아느냐? 도대체 몇 번을 울렸는지,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이제 와서 그 형님을 볼 면목이 있을지...”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한평생 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차설아에게만큼은 크나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이제라도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속 깊이 안도감이 들었다.“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이전엔 제가 철이 없었고 설아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제 남은 인생은 설아와 아이들을 지키는 데 바칠 겁니다.”성도윤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진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지루한 듯 문가에 기대어서 있었다. 애초에 왜 노인이 자신을 부른 건지도 모르겠는데 성도윤의 고해성사를 들으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뭐가 그렇게 웃긴데?”성도윤이 뒤돌아보며 성진을 차갑게 노려봤다.평소라면 굳이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피했을 것이었다.그는 지금 더 중요한 것들
차설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의심이 가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원칙이었다.현이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든, 최소한 지금 그녀를 계속 곁에 둘 수는 없었다.“설아 씨, 제발 절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제 월급을 안 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제발, 제발 저를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만약 제가 쫓겨나면... 저희 엄마의 목숨이 위험해져요!”현이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그 여자는 계획이 실패하면 평생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었다.그렇기에 현이는 절대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없었다.“그래서 누군가 현이 씨 어머님을 인질로 잡고 나를 해치라고 협박한 건가요?”차설아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으며 예리하게 물었다.“그게...”“다시 말하지만, 지금 말해 주면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차설아의 차분한 말에 현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집 밖을 살폈다. 그 여자가 근처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를 악물며 말했다.“며칠 전, 한 여자가 저를 협박했어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도 몰라요. 항상 가면을 쓰고 있었고 굉장히 신비롭고 무서운 사람이었어요.”“매일 설아 씨가 마시는 음료에 약을 한 봉지씩 넣으라고 했어요. 총 열 봉지를 넣어야 하는데 오늘이 다섯 번째였어요. 만약 계획이 실패하면 그 여자가 저희 엄마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설아 씨, 정말 죄송해요!”“역시나 그랬군요.”차설아는 주먹을 살짝 쥐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구일까? 여자라면... 설마 서은아?’하지만 서은아는 오히려 정면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이었고 이렇게 몰래 음모를 꾸미는 수법은 그녀답지 않았다.‘그렇다면... 대체 나와 어떤 깊은 원한이 있는 여자가 이런 수고를 들여 날 해치려 하는 걸까?’“설아 씨, 저를 신고하세요. 제가 이런 짓을 한 건 범죄라는 걸 알아요. 저도 죄책감에 너무 괴로워요!”현이는 완전히 무너진 듯 흐느끼며 말했다.차설아에 대한 죄책감과
“아무것도 아니야.”차설아는 배경윤의 성격을 잘 알기에 당장은 이 이상한 점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현이는 최근 차설아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였다.성실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차설아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함께 지내며 그녀가 꽤 선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렇다면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걸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결국 배경윤을 적당한 이유로 돌려보낸 후, 현이를 방으로 불렀다.“부르셨나요?”현이는 부엌일을 마치고 손을 깨끗이 닦은 뒤 서둘러 방으로 올라왔다.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성실한 그녀였기에 차설아도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오늘 제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고 하던데요?”차설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아, 그거요? 제가 착각했어요. 그건 설탕이 아니라 프림 같은 거예요.”현이는 이미 배경윤이 그 일을 차설아에게 전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그래서 부엌에서 일하면서도 미리 변명할 내용을 준비해 두었고 심지어 실제로 ‘커피 첨가제’라고 할 만한 것까지 마련해 두었다.“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차설아는 현이의 태연한 반응을 보고 오늘은 더 캐물어 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했다.그래서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했다.“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할 일이 많아서요.”현이는 서둘러 방을 나가려 했다.예전에는 차설아와 대화할 때 항상 친근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달랐다.마치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반응이 차설아에게는 더 의심스러웠다.차설아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달랐고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우리가 현이 씨한테 그래도 잘해줬다고 생각했어요.”차설아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아, 네! 설아 씨도 대표님도 그리고 민이 이모도 저한테 정말 잘해 주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