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성도윤은 차가운 말투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허청하는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아 눈물이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성도윤의 목을 꽉 끌어안고는 예전처럼 남자의 얼굴을 맞대면서 그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다.“진우 오빠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을 애써 숨기는 거지? 사실 너도 나를 못 잊었잖아, 맞지?”“진우랑은 상관없어.”성도윤의 눈빛은 더 싸늘해졌다. 그는 차가운 손길로 허청하의 손을 자신의 목에서 떼어내며 말했다.“네가 진우랑 연애하지 않았더라도 난 너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이성적으로 행동하길 바라.”“왜?”허청하는 괴로운 듯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는 남자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예전의 너는 그렇게 나를 사랑했잖아. 벗꽃나무 아래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고백했고 키스했던 것까지 다 기억나. 네가 진심이었던 걸 알아. 심지어 나를 위해서 성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도 포기할 수 있다고 했잖아. 해외에 가서 같이 더 공부하기로 했고. 그렇게 깊었던 감정을 이제 내려놓을 수 있다고?”“인정해, 너한테 마음이 뺏겼던 걸. 나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라고. 너도나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해.”성도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는 예전에 허청하를 사랑한 게 맞았다. 심지어 차설아와 결혼하고서도 허청하를 사랑한다고 착각했었다.하지만 차설아와 이혼하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는 문득 깨달았다. 허청하를 사랑하는 게 아닌 진심을 다했던, 순수한 감정을 지닌 그때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것을.“하하,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자고? 그게 누군데?”허청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코웃음을 쳤다.“넌 모르겠지, 진우 오빠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 것을. 사실 진우 오빠는 날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아. 그냥 내 신분이나 배경이 강씨 가문 며느리로서 적합하다고 느꼈을 거야. 강씨
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 허청하와 걸어 나갔다.하지만 곧바로 손에 케익을 쥔 차설아와 마주치게 되었다.“엇...”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분명 숨어야 할 행동을 한 건 그들인데 오히려 차설아가 머쓱해하며 말했다.“저기... 내가 괜한 방해를 한 건 아니지?”그녀가 비굴하게 물었다.“...”성도윤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도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차설아는 또 눈치 없게 물었다,“성공했어? ‘오션 하트’ 작전이 먹혔어? 두 사람 지금 도망을 계획하고 있는 거야?”성도윤의 얼굴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허청하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차설아를 돌아 자리를 떴다.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도도하게 말이다.“도도한 자식, 돈 좀 뜯은 것 가지고 뭘 저렇게 쪼잔하게 굴어!”차설아는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더니 화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투덜댔다.그녀는 너무 졸려서 눈을 붙일 곳을 찾아다녔지만 뜻밖에도 그들의 밀회를 방해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겉으로는 쿨한 척, 성도윤에게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지만, 정말 그렇게 한 성도윤을 보니 차설아는 괜스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차설아는 또 다른 눈 붙일 곳을 찾으러 나섰는데 제자리에 있던 허청하가 그녀를 불렀다.“차설아 씨,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우리 사이에 뭔 할 말이 있어요?”차설아는 곧바로 거절했다.‘성도윤의 첫사랑으로서 실패한 이혼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나 일부러 나를 약을 올릴 생각이면 내가 굳이 그 말을 들어줄 이유도 없잖아?’“설아 씨, 걱정하지 말아요. 너무 많은 시간 뺏지 않을게요. 얘기를 나누면 내 마음도 후련할 것 같아서요. 설아 씨가 도와주길 바라요.”“그게...”차설아는 꽤나 진지한 허청하의 태도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럼 말해봐요, 들어줄게요.”“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방금 깨달았는데 도윤에게 있어서 설아 씨는 엄청 중요한 사람이더라고요.
결국 차설아는 서로 밀치는 게 싫어 억지로 목걸이를 받았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진 허청하에게 손을 내밀고는 어쩔 수 없는 듯이 말했다.“알겠어요. 목걸이는 받을게요. 하지만 청하 씨가 말했어요,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라고. 이따가 바로 쓰레기통에 버릴 거예요.”허청하는 화를 내기는커녕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버려요. 난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겠던데요. 그러니까 설아 씨가 대신 버려줘요... 아까 말했듯이 설아 씨한테 지는 거면 깔끔하게 인정할게요.”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이상하단 말이야. 두 사람 야간도주를 꾸미던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날 끌어들이는데? 나한테 진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하지만 그녀는 허청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녀는 신부로서 도주를 할지 아니면 예정대로 식을 치를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많은 걸 물어보면 오히려 신경 쓰이는 티가 날 것이다.‘쳇! 나 하나도 신경 안 쓰인다고!’해질녘이 다가오자 해가 조금씩 지고, 바닷물과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푸른 지붕의 하얀 성당은 사방이 유리 벽으로 되어 성당 안에 있어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고 낭만은 극에 달했다.이때, 종은 ‘쨍그랑’ 몇 번 울리더니 곧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었다.목사는 손에 십자가를 들고 이미 준비를 마쳤고 하객들도 차례차례 자리에 앉아 신랑 신부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자리를 안배한 사람이 차설아와 원한이 있는지, 그녀가 성도윤과 이혼한 걸 분명 알면서도 그녀를 성도윤의 옆자리에 앉혔다.더 화가 나는 것은, 그녀의 오른쪽에 성도윤이 앉은 것도 모자라, 왼쪽에는 오랜 원수인 소이서가 앉았다. 좌우로 원수들이 앉았으니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오른쪽에 앉아 있는 빙산같이 차가운 얼굴을 보고, 또 왼쪽에 앉아 있는 전 시누이를 보더니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바꾸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 목사는 신랑 강진우의 입장을 알렸다.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목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인생의 파트너는 항상 늦게 오는 법이죠. 하지만 기다릴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신부 허청하 양을 모시겠습니다!”음악이 다시 흘러나왔다.하지만 음악이 끝날 때까지 허청하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양가 부모님은 다급한 마음에 상황을 알아보러 사람을 보냈다.하객석에서도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고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되었다.차설아는 팔꿈치를 성도윤을 툭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짓이야? 신부를 어디에 숨겼어?”어두운 얼굴색을 보인 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혀가 잘려 나간 걸 보기 싫으면 입 다물어.”“...”차설아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 쪼잔한 사람 아니랄까 봐!’사도현이야말로 가장 마음이 다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대로 뛰어가더니 사람들을 진정시켰다.“다들 진정하세요. 진우 형이랑 청하 누나는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분명 결혼식을 색다른 방식으로 꾸몄을 테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사도현은 허청하를 오랫동안 짝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혼식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바삐 움직였는데 그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이 좋은 사람과 원만한 결혼식을 치르는 걸 바랄 뿐이었다.갑작스런 상황에 사도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잔뜩 흥분한 사도현과는 달리 가장 급해야 할 신랑 강진우는 오히려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그는 점잖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고 온화한 얼굴에는 별 표정이 없었다.마치 이 일이 그와 아무 상관이 없듯이 말이다.“큰일 났어요. 허청하 씨가 사라졌어요. 휴게실에는 웨딩드레스만 남아있어요!”곧 누군가가 소식을 전했다.“사라졌다고?”사도현은 소식을 전한 사람의 옷깃을 덥석 잡더니 분노의 얼굴로 말했다.“헛소문 내지 마. 청하 누나가
그 말은 일파만파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방금 말을 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떠오르는 여배우, 지난번의 골든 피쉬 여우 주연상의 수여자 조여빈이었다.조여빈은 소이서의 옆자리, 즉 성도윤과 차설아 두 사람과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줄곧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성도윤과 차설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다른 사람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서로 원수처럼 보이겠지만, 조여빈은 배우로서 날카롭게 두 사람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성도윤과 차설아는 분명 심상치 않은 사이이고, 서로 질투심에 티격태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봤다.그녀는 질투심에 반드시 차설아를 쓰러뜨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굳혔다!사도현은 빠르게 조여빈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다급하게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죠? 신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요?”“허청하 씨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허청하 씨의 실종이 누구와 관계되는지는 알 것 같아요...”조여빈은 역시 배우였다. 우수에 찬 아름다운 얼굴로 차설아를 힐끔 보더니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눈빛을 따라 차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차설아는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뭐예요? 왜 다 저를 보는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조여빈이 말했다.“차설아 씨, 연기 그만하시죠. 아까 허청하 씨랑 싸우고 있는 걸 휴대폰으로 똑똑히 찍었거든요...”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현장은 이내 다시 떠들썩해졌다.사도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여빈을 보며 재촉했다.“증거 있나요? 일분일초 다급한 상황이에요. 만약 신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지금이라도 구하러 가야 한다고요!”역시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허청하는 분명 사고를 당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이다...차설아는 갑자기 누명을 쓰게 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조여빈을 향해 말했다.“맞아요, 증거가 있으면 꺼내봐
소이서의 말은 차설아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모두 등 돌리게 했다.차설아는 갑자기 모든 사람의 타깃으로 되었다.성도윤과 강진우를 뺀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악독하다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다 조용히 하세요!”강진우는 모처럼 진지한 얼굴을 드러내고는 천천히 차설아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허청하에게 줄 반지를 꺼내 성도윤에게 건네고는 말했다.“도윤아, 이 반지를 설아 씨한테 끼워줘.”성도윤은 워낙 똑똑했기에 곧바로 강진우의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는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우려고 했다.차설아는 긴장한 마음에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 반지를 함부로 끼면 안 돼. 얼른 가져가!”“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충돌이 있는 것처럼 서로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땡땡땡.”길시의 종소리가 울렸고 노을은 해면에 더 번지더니 성당에는 예언이 울리기 시작했다...해질녘에 두 남녀가 반지를 서로 끼워준다면 두 사람은 바다의 여신의 축복을 받아 서로를 영원히 떠나지 않고 백년해로한다고 한다.성도윤은 성공적으로 반지를 차설아의 약지에 끼웠고, 차설아는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성도윤을 멀리 밀어버렸다.성도윤은 여세를 몰아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강진우는 이 순간을 즉시 휴대폰으로 촬영했다.그가 찍은 사진은 충분히 차설아와 허청하가 서로 밀고 당기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 차설아의 말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여러분들도 보셨듯이, 두 사람이 꼭 충돌이 있어야만 서로 밀고 당기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차설아 씨의 말대로 본인이 목걸이를 사양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차설아 씨의 말이 꼭 거짓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강진우가 사람들을 향해 설명하면서 차설아의 편을 들어줬다.차설아는 그제야 두 사람의 정성을 깨닫고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성도윤을 바라봤지만 차마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는 없었다.성도윤은 도도한 표정을 짓고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스태프한테 옮겼다.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성인리... 성인리 쪽의 절벽에 허청하 님의 신발이 있습니다. 아마 허청하 님이 바다에 빠진 것 같습니다!”성인리는 이 구역의 유명한 곳이었다. C자형 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세가 높고 험난했다.“바다에 떨어졌다고요?”사도현은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청하 누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얼른 사람 구하러 가요.”그는 앞장서서 달려 나갔고, 강진우와 성도윤은 그 뒤를 따랐다.차설아가 흠칫하고는 호기심 많은 하객들과 함께 따라갔다.성인리의 바닷물은 비교적 잔잔했다.해는 이미 뉘엿뉘엿 졌기 때문에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들은 허청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차설아는 벼랑 끝에 가지런히 놓인 웨딩화를 보고는 추측하기 시작했다.“혹시 허청하 씨가 하이힐 때문에 힘들어해서 일부러 벗어둔 건 아닐까요? 아직 이 주위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조여빈은 작정하고 차설아를 물고 늘어졌다.“모두들 알다시피 허청하 씨는 사리가 밝은 사람입니다. 본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게 말이 돼요? 사람들이 자기를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위를 돌아볼 마음이 있을까요? 정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오히려 차설아 씨가 도둑이 제 발 저려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게 아닌가요? 우리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린 후에 차마 입밖에 내뱉을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닐까요?”“차설아 씨가 허청하 씨를 절벽으로 밀어낸 건 아닌가요? 허청하 씨에게 무슨 사고가 났다면 당신은 가장 혐의가 큰 용의자예요!”조여빈의 말은 일파만파를 일으켰다.“맞아요! 저 사람일 거예요!”허청하의 어머니는 눈이 빨개진 채 차설아에게 달려들고는 그녀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이 악독한 년, 왜 우리 딸을 해치려는 거야? 우리 딸 돌려내!”차설아는 충분히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화를 내지도 않고 반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쩔 수 없는
“4년 동안 결혼생활을 보냈는데 어떻게 아무 상관이 없겠어?”성도윤의 차가운 눈빛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황당하게 들리는 말도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다.성도윤의 뒤에 선 차설아는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성도윤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나한테 차갑고 매정하게 굴던 사람이 누군데? 4년 동안 결혼생활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강진우가 입을 열었다.“도윤이 말이 맞아요. 지금 설아 씨가 청하를 바다에 밀어 넣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요. 함부로 추측하지 말자고요. 폭력을 쓰면 더더욱 안 되고요. 이럴 시간 있으면 따로 움직여서 바다를 따라 찾아보는 건 어때요?”사람들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저마다 바다를 따라 허청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성도윤도 따라나섰고 차설아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방금 성도윤의 도움에 감동하여 차설아는 기회를 봐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하지만 성도윤은 허청하를 많이 걱정한 듯했다. 발걸음은 조급했고 애타는 표정으로 찾고 있었다.역시 허청하는 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아무리 결혼식을 망치지 않았다고 해서 허청하를 완전히 내려놓은 건 아닌 듯했다.“그게, 도윤 씨...”차설아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남자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지금의 성도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빨리 허청하를 찾고 싶었기에 차설아에게 귀찮은 듯이 차갑게 대답했다.“무슨 일인데?”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차설아는 몸 둘 바를 몰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줘 고마워.”“고마워할 것 없어.”성도윤은 바다를 샅샅이 뒤지고 있어 차설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만약 정말 당신이 한 짓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의 얼굴색은 한껏 어두워졌고, 마음도 씁쓸해졌다.‘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