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가 고개를 숙여보니 자신의 발바닥이 성지훈을 발등을 꾹 찍어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연신 사과를 했다.“미안, 방금 딴생각하느라.”성지훈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랑 춤을 추고 있는데 무슨 딴생각을 해? 나한테 집중했어야지.”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 또다시 성지훈을 힘껏 밟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왜 이래?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더 난처해지길 바라는 거야?”‘누가 봐도 뻔한 일을 왜 자꾸 물어? 당연히 성도윤이 신경 쓰여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걸 몰라서 묻나?’이때, 음악이 끝나고 불빛이 어두워졌다.성지훈은 갑자기 차설아의 허리에 올린 손을 내려놓고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딱 성도윤이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호흡이 안 맞아서야. 파트너를 한 번 바꾸는 건 어때요?”“뭐야? 왜 갑자기 파트너를 바꾸겠대?”차설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지훈은 윤설에게 걸어가더니 윤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저랑 같이 춤 한 번 추실래요?”“그게...”윤설은 어색해서 볼이 발그레해졌다.그녀는 성도윤과 비슷한 얼굴의 성지훈을 보더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두 사람은 모두 잘생긴 얼굴을 가졌고, 각자 다른 매력이 있었으니 선택하기 쉽진 않았다.클럽 여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은 순식간에 차설아에서 윤설로 바뀌었다.이때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파트너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그러고는 윤설의 손을 놓더니 곧바로 차설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며 카리스마 있게 말했다.“같이 춤 추자.”차설아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내민 손을 보고는 귀신에 홀리듯 저도 모르게 손을 얹었다.이번의 선곡은 자유로운 왈츠였다.차설아는 왈츠라면 자신 있었기에 곧바로 허리를 곧게 펴고는 여유롭게 성도윤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사실 두 사람이 왈츠를 추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비록 서로 눈에 거슬렸지만 호흡 척척 춤을 잘 췄고, 멀리서 보
차설아는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을 애써 피하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성도윤은 공격을 퍼붓는 맹수처럼 밀어붙였다.“대답 안 하면 그렇다는 걸로 알고 있을게. 역시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었구나? 아직도 나 때문에 괴로운 거 맞지?”차설아는 머리가 하얘졌는데 몇 번이나 스텝이 꼬여 성도윤의 발을 밟았다.‘나 왜 이렇게 찌질하지? 정말 못났어!’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뾰족하고 앙증맞은 턱을 치켜들며 용감하게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정말 자기애가 넘치는구먼. 난 당신한테 마음이 있은 적도 없어, 그러니까 당신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겠지.”“아닌척하긴...”성도윤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을 차설아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차설아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고 재빨리 부인하려고 했다.하지만 음악은 이때 멈췄다.성도윤은 갑자기 열정이 식어버린 듯이 차설아를 놓아주고는 평소 차갑던 모습으로 돌아왔다.두 사람은 방금까지 찰싹 붙은 파트너였지만 지금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리고 차설아를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성도윤은 또다시 윤설을 찾아가 모처럼 요청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같이 술 한잔할래요?”윤설은 방금 성지훈과 춤을 출 때부터 정신을 딴 데 팔았다. 그녀는 온갖 신경을 성도윤과 차설아에게 집중했다.성지훈도 충분히 매력 있었지만 그녀는 성도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설렘을 느꼈다.윤설은 이대로 성도윤과 끝내기 싫어 마음속으로 계속 성도윤과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그래서 성도윤의 말을 들은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쁜 마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럼요, 저야 영광이죠.”그렇게 두 사람은 차설아가 보는 앞에서 나란히 자리를 떴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차설아의 가슴은 비수에
차설아는 숨을 죽였다. 혹여나 배경수가 정말 이성을 잃어 성도윤을 한 대 칠까 봐 무서웠다.보는 눈도 많고, 두 사람은 명문 가문의 도련님이었으니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두 가문에게 좋을 것 없었다.차설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배경수를 끌어오고 싶었는데 배경윤이 그녀를 말렸다.“걱정하지 마, 언니.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런 충동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재밌는 구경이나 하자고.”“그렇긴 해!”차설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는 자리에 앉았다.배경수는 유명한 배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해안시에서도 영리하기로 소문나 여우라는 별명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많은 거물까지 그에게 당한 적이 있으니 그는 절대로 제멋대로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손해는 더더욱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점점 가까이 오는 배경수를 본 성도윤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덤덤한 얼굴을 보였다.사도현은 워낙 거침없는 성격이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호시탐탐 배경수를 노려보며 불친절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배경수가 씩 웃더니 살갑게 말했다.“형님들, 긴장하지 마시고. 저는 악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후배로서 항상 형님들을 우러러보는 존재였지요.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술 한잔하고 친해지는 건 어떤가요?”사도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차 없이 거절했다.“누가 당신 형님이야? 당신보다 나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부르면 사람들이 나 늙었다고 오해한다고.”사도현과 달리 강진우는 훨씬 우호적인 태도를 선보였다. 그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배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참 유명하죠. 최근 몇 년 동안 배씨 가문을 잘 이끌어나갔잖아요. 아버지도 줄곧 경수 씨를 칭찬하셨고, 저도 진작 뵙고 싶었어요. 얼른 앉아요.”“진우 형님,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겠습니다.”배경수는 술병을 든 채 바로 성도윤의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분위기는 삽시에 어색해졌다.차설아는 성도윤와 이혼한 뒤로 배경수와 가까운
배경수는 두 잔을 들고 잔 안에 술을 가득 담았다. 한 잔은 자기가 들고 다른 한 잔은 성도윤에게 넘기며 말했다.“선배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습니다. 설아 누님을 놓아줘서 감사합니다. 이제 자유를 회복하고 환골탈태한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 더 당당하고 능력 좋은 여자로 말이에요. 그만큼 접할 수 있는 세상도 더 넓어졌고요. 이 모든 게 다 선배님 덕분입니다!”배경수가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술을 쭉 들이켰다.그의 말은 형식적이 아닌 진심이 우러나온 듯했다.성도윤이 계속 차설아의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차설아는 이혼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온갖 수모와 미움을 받는 성씨 가문의 며느리로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성도윤은 배경수가 건넨 술을 보고, 또 방금 배경수가 한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누가 들어도 배경수가 한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하지만 성도윤도 마음속으로는 배경수의 말에 매우 동의하였다.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성도윤은 배경수가 건넨 술을 받고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맞아요, 그 사람이 날 떠난 뒤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더군요.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간 것처럼, 새가 하늘로 돌아간 것처럼 그녀만의 세상을 찾은 것 같더라고요.”“그 사람처럼 재미없는 여자가 성씨 가문의 보호 없이는 아주 힘들게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좋아할 남자도 없다고 생각했죠. 이제 와서 보니...”성도윤은 배경수를 보고는 또 맞은편에 있는 조카 성지훈을 보더니 복잡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생각보다 인기가 참 많네요, 진심으로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캑캑!”배경수는 사레들려 하마터면 술을 뱉어낼 뻔했다.매정하고 차갑기만 하던 배경수가 이렇게 인간적인 말을 뱉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꽤 진정성 있게 들렸다.오히려 성도윤을 돌려 깠던 그가 속 좁게 보이기도 했다.“하하, 선배님 말씀이 빈틈없네요.
배경수가 차설아한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성도윤은 술을 잘 못 마실뿐더러 게임도 못하는 정도를 뛰어넘었다고 한다.그래서 그는 가장 독한 보드카를 준비하고 성도윤과 게임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 그는 게임에서 져 계속 술을 마시게 될 것이고 추태를 부려 차설아 대신 복수를 성공할 수 있었다.성도윤처럼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한 번 도발하면 넘어오기 마련이다.하지만 일은 배경수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성도윤은 전혀 배경수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훤칠한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강진우와 사도현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그리고 또 옆에 앉은 윤설에게 말했다.“나랑 같이 가죠.”“아, 저... 저요?”윤설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처음 클럽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영화 같은 스토리가 현실에서 일어나 꿈만 같았다.성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니 차가운 얼굴을 하고는 긴 다리로 클럽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기... 기다려요!”윤설은 가방을 들고는 용기를 내어 그를 따라갔다.그녀에게 있어서 성도윤은 백마 탄 왕자보다도 더 완벽한 존재였다. 일말의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그녀는 최선을 다해 꼭 붙잡을 것이다.그렇게 두 사람은 앞뒤로 자리를 떴고,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무조건 성도윤의 편을 들어주던 사도현마저 투덜거렸다.“대박, 도윤 형 오늘 술도 안 마셨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말 저 여자애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게다가 저 여자애가 차설아를 닮은 건 사실이잖아. 왜 차설아를 두고 짝퉁이랑 잘해보려는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강진우는 성도윤과 윤설이 떠난 방향을 보고는 또 맞은편에 있는 차설아를 보더니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도윤이는 지금 꽤 진지해.”“진지하다고? 저 여자애한테?”사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리는 없어!”강진우가 입꼬리를 씩
성도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윤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설도 선 넘은 질문을 한 것 같아 다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었죠? 이런 질문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나중에 제가 다시 필요할 때가 생길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전화번호 주시면 안 돼요?”이는 아마 순진하고 보수적인 윤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성도윤은 조심스러운 여자애의 모습을 보더니 예전의 모든 일에 조심스러워하던 차설아가 생각나 마음이 약해졌다.“휴대폰 이리 줘요.”“네, 네. 알겠어요!”윤설은 얼른 휴대폰을 성도윤에게 건넸다.택시가 앞의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연히 연인으로 착각할 것이다.같은 시각, 차설아와 배경수 일행이 걸어 나오자 마침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차설아의 마음은 비수에 꽂힌 듯 아팠다.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하필 이때 성도윤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남자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가웠다. 심지어 어색함이나 부끄럼의 감정 없이 거만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차설아의 분노를 일으켰다.그녀는 지기 싫어하는 유치한 초딩처럼 배경수의 팔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경수, 다음에 어디로 갈까? 저번에 갔던 바다가 보이는 호텔 말이야. 분위기가 좋던데 거기 또 갈래?”“캑캑!”배경수는 당황하더니 꼼짝하지 못했다.‘보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이런 말을 하면 두 사람은 더는 ‘단순한’ 남녀 사이가 아니잖아!’성도윤의 잘생긴 얼굴은 한껏 어두워졌다.그는 보란 듯이 택시 문을 열고는 택시 기사한테 말했다.“성운 호텔이요.”그리고 윤설과 같이 차에 올라탔고, 차는 곧바로 차설아의 앞을 지나갔다.이후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차설아는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멀어져 가는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배경수는 차설아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있어 조
’소울’은 무명 피아니스트 ‘조’가 곧 꿈을 이루려다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고 시니컬한 영혼 ‘22’와 만나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고 서로 구원해 주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스크린이 부드러운 빛을 뿜어냈고 화면도 훌륭했고 스토리도 따뜻했다.차설아는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이야기가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성도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그냥 이 순간, 울고 싶었다.책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임산부는 호르몬 때문에 많이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쉽게 화가 나고 쉽게 슬퍼지는데 차설아는 본인이 마침 이 상황을 겪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래서 더는 참지 않고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그녀는 손을 배 위에 살포시 얹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가들, 조금만 더 참아. 조금만 더 참으면 엄마는 너희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어!”아니나 다를까, 펑펑 울고 나니 차설아는 가슴이 후련했다. 머리도 맑아지고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마침 영화도 끝나 캄캄하던 영화관은 갑자기 환해졌고, 몇 안 되는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차설아는 앞좌석에서 벌떡 일어난 훤칠한 성도윤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뭐야? 호텔에서 여대생이랑 즐기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차설아는 남자가 그녀를 발견했을까 봐 발걸음을 늦추고는 옆으로 돌아섰다.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입구로 나갈 때, 성도윤은 마침 고개를 돌려봤고, 차가운 눈빛은 그렇게 차설아와 마주치게 되었다.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모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치팅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들키듯이 말이다.“당신...”성도윤은 애써 도도한 척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차설아에게 물었다.“당신 배경수랑 바다 보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여기에 있는 거야?”“아, 그게...”차설아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거짓말을 지어냈다.“밤중에 누가 바다 보러 가? 나중에 가기로 했어.”그러고는 성도윤에게 되물
차설아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자, 성도윤은 체면이 구겨진 듯 차가운 얼굴로 오만스럽게 말했다.“싫으면 말고, 어차피 나도 다른 일이 있어서 말이야.”“좋아!”차설아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자신이 너무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귀밑머리를 넘겼다.“그게... 엄청 바쁘지만 야식 먹을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야.”성도윤은 차설아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며 몰래 웃었다.그녀의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두 사람은 영화관을 나와 인근의 유명한 맛집 거리에 도착했다.“뭐 먹고 싶어?”성도윤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차설아에게 물었다.“다 괜찮아. 담백한 거면 돼.”“담백한 거?”성도윤은 눈썹을 찡그렸다.“당신 전에는 입맛이 강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부터 바뀌었어?”차설아는 당연히 임신 중이라 담백하게 먹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남편도 바뀌는데 입맛이라고 안 바뀌겠어?”이 말은 분명 성도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남자는 말을 잇지 않고, 인테리어가 우아한 식당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럼 저기서 버섯 수프 마셔. 담백하고 소화도 잘 돼.”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맛있겠네.”각종 버섯이 자라는 계절이라, 신선한 버섯 수프를 한 모금 마시면 맛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았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골라 마주 앉았다.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뭐... 뭐라도 마실래? 밀크티 같은 거?”성도윤은 모처럼 매너 있게 침묵을 깼다.차설아는 손사래를 치며 드물게 예의를 갖추었다.“괜찮아. 수프 마시면 돼. 미리 배부르면 안 되잖아.”“맞네.”그리고, 또 대화가 끊겼다.두 사람은 방금 사귀기 시작한 커플처럼 마음속에는 무한한 애정이 있지만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고 쭈뼛쭈뼛한 모습이었다.차설아는 성도윤과 조용히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성도윤은 남자친구처럼 여러모로 매너 깊은 모습이었다.부부일 때
이들은 어제저녁 약속한 대로 섬 근처에 있는 청정지역에서 스토클링하기로 했다.이때 감독 최빈이 말했다.“이 섬은 모양이 하트로 되어있어 하트섬이라고 불리는데 물이 맑아 산호초와 열대 물고기를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오늘 운이 좋으면 하트섬 특유의 야맹주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밤이면 빛이 나는 그런 야맹주요.”“정말 야맹주가 있는 거예요?”배경윤이 이번 스노클링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사실 그녀는 일찍 하트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섬 중앙에는 고가의 진주가 들어있는 천연 조개가 많다고 했다. 최빈이 언급한 야맹주는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전설 속에서는 야맹주를 찾은 사람이 평생 행복할 거라고 했다.신난 배경윤은 야맹주를 찾아서 차설아한테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호객행위인지 몰랐다.“당연히 있죠. 수년 전에 섬에서 살던 분들이 발견했대요. 찾을 확률은 낮지만, 없는건 아니에요.”최빈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그럼 뭘 기다려요. 저희 얼른 가요...”조급해 난 배경윤이 이때 대담하게 제의했다.“저희 스노클링하지 말고 아예 다이빙하는 거 어때요? 6미터 가까이 되는 그런 다이빙을 하면 야맹주를 찾을 수 있는 확율이 더욱 높지 않을까요?”“좋아요.”사도현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스노클링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다이빙해야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죠.”“저도 좋아요. 저는 폐활량이 좋아서 물속에서 산소통이 없어도 몇 분씩이나 있을 수 있다고요.”하늘도 찬성의 의미도 손을 들었다.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로서 물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오직 진찬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영 씨는 스노클링하실 거예요? 아니면 다이빙하실 거예요?”최빈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진찬영에게 물었다.“저는 경윤 씨랑 같은 걸 할게요.”진찬영의 표정이 안 좋았던 것은 전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적 있어 수압을 견디지 못해 너무 깊게는 내려가지 못했다. 5미터
배경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렸다.“급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어제저녁 하늘 씨를 선택한 것은 저랑 사도현 씨의 모순을 와해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경윤 씨 마음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진찬영은 배경윤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계속 지금처럼 애매모호하지 말았으면 했다.이런 명분 없는 사이가 싫기도 했고, 사도현의 맹렬한 공격하에 배경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그래서 하루빨리 결정짓고 싶었다.“알았어요.”배경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저녁은 제 마음에 따라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오늘 아침 진찬영과 함께 잠깐 아침햇살을 만끽하면서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생활이 아니라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함께 하산할 때, 사도현도 마침 기상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스코어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경윤과 방을 바꾸기로 하고 짐을 배경윤의 바다뷰 별장으로 옮기기로 했다.복식 별장에는 방이 네 개나 있었고,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배경윤이 상냥하게 대해준다면 기꺼이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모습만 상상해도 기분이 좋았다.입이 귀에 걸려있을 때, 배경윤과 진찬영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웃으면서 걸어오는 것이다.“어디 갔었어요?”사도현의 안색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어딜 갔든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다 저를 놓칠 수도 있어요. 지금 경윤 씨한테 방을 하나 내어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죠...”사도현이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할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었다.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유치하긴.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지내든 상관없어요. 도현 씨한테는 천장에 별이 가득 붙어있는 저 방이 어울릴 것 같
다음날.아침햇살이 비추는 섬은 몽롱하고 매력적이었다.아침 조깅하는 습관 있는 배경윤은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미 일어나 뛰고 있었다.산 주위를 따라 2킬로 정도 뛰면서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개운한 느낌이었다.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파란 바닷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배경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더니 진찬영이었다.“이런 우연이. 찬영 오빠도 조깅하러 오셨어요?”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게 발그레해졌다.어제저녁 진찬영이 대놓고 고백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이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랐다.“우연이 아니라...”진찬영은 오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어 청춘 로코물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잊지 못하는 킹카처럼 보였다.그는 난간을 잡고 옆모습으로 의미심장하게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번에 경윤 씨가 조깅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어서... 일부러 만나려고 온 거예요.”배경윤과 이곳에서 만나려고 그녀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그때는 아직 날도 밝지 않았던 때였다. 그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와 하늘이 서서히 물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론 배경윤과 함께 이 경치를 보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배경윤이 흔들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제가 이 코스를 달릴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다 못 만나면요?”“만나지 못해도 아쉬운 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봤잖아요.”진찬영은 고개돌려 전방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어떤 일이든 결과를 바라지 않아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된 거예요. 그리고 결국엔 경윤 씨를 만났잖아요.”배경윤은 잘생긴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렇다. 결과보다는 과정만 아름다우면 되었다.이 부분에서는 진찬영과 생각이 똑
“에헴!”하늘을 신경 쓰지도 않던 사도현은 두 사람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길래 질투심을 느꼈다.하늘도 그제야 선을 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입을 닫으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죄송해요. 경윤 씨,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세요.”“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저희 서로 선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늘 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과 셋이 함께 스노클링하면 되잖아요. 둘이든 셋이든 저는 상관없어요.”배경윤이 웃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하늘이 컨트롤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일 안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찬영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고 사도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래요? 경윤 씨는 정말 내일 아침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스노클링할 수 있는 거예요?”하늘은 억울한 강아지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럼요. 저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3각 구도는 제일 안정적이니까요.”배경윤이 익살스럽게 말했다.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입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내일 경윤 씨, 저, 그리고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 세 명이 함께 스노클링하는 거예요. 마음이 변하면 안 돼요.”“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빠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빠지면 평생 짝을 찾지 못할 거예요.”배경윤은 하늘에 대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때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사도현 씨에요. 그리고 오늘 모든 사람 앞에서 사실대로 말했고요.”사도현이 눈썹을 움찔하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배경윤을 쳐다보았다.“저희 내일 봐요.”‘왜 이렇게 된 거지?’배경윤은 흐뭇한 표정의 사도현을 보면서 그가 일부러 함정을 파놓았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진찬영이 입을 열었다.“3각 구도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요.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진찬영은 사도현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은 배경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