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길은 해안 대학의 전설적인 인물, 모든 학생들의 우상이자 여신인 차설아 선배님을 위해 장학 재단에서 만들어 준 거예요. 원래는 ‘설아 길’이라고 지으려 했는데 설아 선배님께서 사양하셔서 지금의 ‘홰나무 꽃길’로 불리게 된 거죠.”남자 대학생은 말할수록 흥분하더니 차설아를 신처럼 한바탕 칭찬하기 시작했다.“우리 차설아 선배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실 거예요. 그분이 이끈 실험팀은 수많은 국제 물리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국제 저널에 발표한 학술 논문은 심지어 일부 대학의 교재에 실리기도 했어요.”“콜록!”차설아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자신의 명성이 아직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계속 칭찬을 받기 무안해서 서둘러 남자의 말을 끊었다. “알았어요, 설아 선배님은 아주 우수한 분이시네요.” “우수하긴 우수하죠. 그런데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요!”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설아 선배님은 전성기 시절에 물리계를 떠나고 바보같이 시집을 갔어요. 그것도 성도윤 같은 나쁜 남자랑 결혼을 했어요. 저랑 제 친구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역시나, 남자한테 배신당하고 이미 이혼했대요. 선배님이 빨리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성도윤의 얼굴은 이미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차설아는 자신을 대신하여 불평하는 대학생을 서둘러 떠나보냈다.만약 속 좁은 성도윤한테 찍힌다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내 말이 맞지? 내가 만들었다니까! 그러니 내가 걷지 말라고 하면, 당신은 못 걷는 거야!”차설아는 턱을 치켜들고 득의양양해서 까불었다.성도윤도 얼빠진 차설아가 진짜 물리 천재라고 하니 너무 의외였다.이 남자 대학생만 억울할 뿐만 아니라, 성도윤도 차설아가 전성기 시절에 자기와 결혼한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 이 길이 장학재단에서 만들어줬다고 쳐. 그럼 해안대학 장학재단 배후의 발기인이 누군지 알아?”성도윤은 갑자기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표정으로 차설아를 보았
목에 큰 리버스 카메라를 든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인플루언서 사진작가 미스터 정입니다. 최근 가족애를 테마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방금 세 분이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이 너무 화목해서 참지 못하고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혹시 이 사진을 온라인에 올려도 될까요?”“안 돼요!”성도윤은 차갑게 거절했다. 그 차가운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하기 그지없었다.사진작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서둘러 말했다.“죄송합니다. 그럼 지울게요.”말을 마친 그는 방금 찍은 사진을 지우려고 고개를 숙였고, 얼굴에는 안타까운 표정이 가득했다.방금 화면은 정말 아름답고 따뜻했다. 주인공의 비주얼과 스타일이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독특해서 그는 단숨에 10여 장을 찍었다. 모두 하나같이 완벽했고 인터넷에 올린다면 틀림없이 히트가 날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 완벽한 작품들을 삭제해야 하니, 그는 자신의 살을 베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성도윤은 남자의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더니 또 차갑게 말했다.“삭제하기 전에 제 핸드폰에 먼저 보내주세요.”“네?”사진작가의 표정이 어색해졌다.‘공짜로 내가 찍은 사진을 달라고?’성도윤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사진작가의 생각을 바로 알아차렸다. 늘 그렇듯이 과감하게 말했다.“가격은 말만 하세요.”이 말을 들은 사진작가의 눈이 번쩍이더니 급하게 말했다.“네, 그럼 블루투스 연결해 주세요. 제가 당장 전송해 드리죠.”그렇게,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 서서 주위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사진을 전송하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사진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서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편했다.이 두 사람은 차설아의 허락도 없이 그녀의 사진을 소장하고, 심지어 거래까지 하고 있었다. ‘나의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잖아? 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안 돼요!”차설아는 기회를 타서 성도윤의 핸드폰을 낚아채고 화가 나서 말했다.“난 당신이랑 사진 찍고 싶은 마음 없거든? 당장 지워!”“내놔
그 사진은 바로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걸린, 옥쟁반처럼 휘영청 밝은 달, 그날 밤 낯선 사람이 보낸 사진과 똑같았다!설마... 성도윤이 ‘미스터 문’?차설아는 그 사진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멍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가문의 후계자이자 글로벌 대기업의 대표인 성도윤이, 왜 한밤중에 다른 번호로 전처에게 달 사진을 보냈을까?성도윤은 기회를 타서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은 다음 잠금 버튼을 길게 눌렀다. 강한 압박감을 가진 차가운 눈을 하고 말했다.“함부로 보지 마!”차설아는 잠시 머리가 복잡했다.성도윤이 자신을 몰래 촬영한 것도 충분히 놀랍지만, 낯선 번호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은 놀라울 뿐만 아니라 공포스러웠다!“당신이... 미스터 문이야?”차설아는 단념하지 않고 남자에게 확인했다.성도윤이 낯선 번호로 자신과 대화를 나눈 동기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게 무슨 말이야?”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차설아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모르는 척하지 마. 사진첩에 있는 그 달, 미스터 문이 나한테 보낸 사진이랑 똑같아...”“달이 다 비슷비슷하지! 웃기고 있네!”성도윤은 하찮다는 듯 반박했다.“성도윤!”차설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래, 인정 안 하시겠다? 내가 인정하게 만들어 주지!”차설아는 말을 마치고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어 미스터 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성도윤의 핸드폰은 바로 ‘뚜뚜뚜’소리가 났다.“아직도 아니야?”차설아는 핸드폰을 흔들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성도윤은 태산처럼 끄떡없는 표정을 지었고, 차갑게 말했다.“나면 또 어때서? 도현이가 여심 공략 비법을 전수해 줬는데, 당신한테 실험해 본 것뿐이야. 그런데 당신 생각보다 수다스럽더라고. 낯선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속마음을 털어놓다니, 너무 쉽잖아!”차설아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그 늦은 밤, 그 많은 밤들을 미스터 문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 생긴 의존감, 그리고 그에게 느낀 안전
차설아는 바로 흥미를 느끼고, 턱을 괴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오 교수를 바라보았다.오 교수는 안경을 밀고 사실대로 말했다.“해안 대학 경영권의 절반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나랑 상의하려고 왔어.”“네? 해안 대학을 인수해요?”차설아는 너무 황당해서 흥분되었다. “해안 대학은 전국에서 제일가는 공립대학이에요. 특히 해안 대학의 공과는 세계 대학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죠. 성도윤 이 인간이 감히 공립대학에도 손을 뻗다니!”오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오해야. 도윤이는 해안 대학이 더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현재 공립대학은 과학 연구 자금에 한계가 있어서 많은 실험 프로젝트 연구가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란다...”“만약 도윤이의 말대로 성대 그룹이 해안 대학 경영권의 절반을 인수해, 해안 대학을 반 사립 학교로 만든다면 앞으로 해안 대학은 연구비 걱정도 없고 권위도 잃지 않으니 양쪽 다 좋은 일이 아니냐?”오 교수의 말은 듣기에 일리가 있었다. 해안 대학의 교직원과 학생들에게는 분명 설레는 일이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너무 잘 알고 있다.이 인간은 철두철미한 사업가이다.사업가라면 절대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을 것이고, 엄청난 이득을 내주는 이면에는 분명 더 깊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교수님, 제 생각에는 절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성도윤이 얼마나 교활한 인간인데. 절대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해안 대학의 지갑이 되겠다고 자처할 리가 없어요. 분명 민감한 조건을 제시했죠? 맞죠?”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조건을 제시하긴 했지만, 그렇게 민감한 건 아니었지. 나는 괜찮다고 봐.”차설아는 서둘러 물었다.“어떤 조건을 제시했는데요?”“해안 대학을 인수한 후, 해안 대학에 건축비, 실험비, 장려비 등 한도 없이 경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어. 조건이라면, 앞으로 해안 대학의 모든 연구 성과를 성대 그룹과 공유하고, 물리 전자 분야의 연구 성과는 성대 그룹이 소유하게 된다고...”“말도 안 되는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성도윤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차설아의 옆에 앉았다. 마치 방금의 언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차설아는 성도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남의 집에 손님으로 왔으니, 조용히 밥만 먹었다.밥을 먹는 동안 분위기는 꽤 유쾌했다.닭 날개를 뜯고 있는 연아의 작은 손과 입은 온통 소스 범벅이 되어 꽤 귀여워 보였다.차설아는 그 모습에 마음이 녹아버렸고, 티슈를 꺼내 닦아주려는데 성도윤이 한발 앞서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먹보. 이 기름 좀 봐.”차설아는 흠칫 놀라서 복잡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처럼 부드럽고 인내심이 강한 성도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성도윤이 아니라, 인간미가 넘치는 성도윤이었다.순간, 차설아는 화가 반쯤 풀렸다.연아의 작은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성도윤을 올려다보며 귀엽게 말했다.“아저씨, 참 예쁘게 생겼네요. 연예인보다도 잘 생겼어요.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게요. 그래야 설아 언니랑 어울리니까!”“하하하, 드디어 깨달았구나. 말 한번 잘했네, 요 녀석.”오준수 부부는 연아의 말에 껄껄 웃었다. “보아하니, 아이를 좋아하나 봐? 자네는 딸이 좋은가? 아니면 아들이 좋은가?”오준수는 청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성도윤과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성도윤은 모처럼 차가운 대표의 모습을 거두고 성실하게 대답했다.“딸이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럽죠. 제가 만약 연아처럼 귀여운 딸이 있다면 공주 대접을 할 거예요.”“하지만, 아들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랑 함께 등산도 하고, 농구도 하고, 사업도 같이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맷집이 좋잖아요!”늘 차갑던 성도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마치 아들과 딸이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듯했다.이때 장수진이 말했다.“그럼 자식을 두 명 낳아야겠네요. 임신하고 낳고 하면 몇 년은 걸리니, 두 사람 서둘러야겠어요.”“그럴 필요 있어? 차라리 이란성 쌍둥이를 한 번에 낳는
“푸!”차설아는 국물을 내뿜었고, 얼굴이 붉어지며 당황한 눈으로 말했다.“교수님, 애가 뭐 그렇게 쉽게 생겨요? 마치 사실인 양 말씀하시네요.”장수진은 차설아의 배를 훑어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오 교수가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 네 배가 전에 비해 확실히 좀 부풀어 오른 것 같은데...”“에이, 사모님, 교수님 장단에 맞춰주지 마세요.”차설아는 태연한 척 말했다.“이혼하고 너무 행복해서, 식단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결혼 생활할 때는 배불리 밥을 먹은 적이 없으니 당연히 말랐죠.”차설아의 설명이 오준수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맞네. 여자는 식단 조절을 하지 않으면 살이 찌기 쉽지!”성도윤은 옆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차설아를 지켜보았다.차설아의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녀의 숨길 수 없는 당황스러움은 그에게 포착되었다.‘과분한 설명은 오히려 뭔가를 감추기 위한 것이지. 진짜 뭔가 있나?’하지만 성도윤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차설아에게 휴지를 건네고 차갑게 말했다.“당신도 입 좀 닦아.”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성도윤은 원래 작별 인사를 하려 했지만, 연아의 고집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연아는 성도윤과 차설아와 나가서 놀고 싶어 했다.“오빠, 언니, 나랑 나가서 놀아요. 엄마, 아빠는 몸이 안 좋아서 연아랑 재밌는데 못간단 말이에요. 연아 심심해요!”오준수도 말을 보탰다.“연아도 불쌍하지. 우리 둘 나이도 많고, 평소에 연구만 하느라 늘 집에서 혼자 책만 봤어. 다른 애들처럼 젊은 부모랑 밖에서 신기한 구경 하지도 못하고...”성도윤과 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연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그들은 차를 몰고 근처의 한 쇼핑몰로 갔다.연아는 곧장 게임랜드로 향했다.“오빠, 언니, 나 좀비 게임하고 싶어요!”연아는 말을 마치고 바로 2인용 좀비 게임기 앞으로 달려가 앉았다.성도윤은 성큼성큼 따라나섰지만, 차설아는 밖에서 난처한 모습을 보였다.게임랜드에는 사람도 많고, 통풍도 안 되고, 소리도 너무 시끄러
“오빠, 언니, 연아 영화 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우리 영화 보러 가요!”연아는 힘껏 두 사람을 영화관 쪽으로 끌었다.“영화는...”차설아는 성도윤을 슬쩍 보았다.성도윤처럼 시간이 곧 돈인 재벌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루한 영화를 싫어해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영화 본 지 오래됐어. 요즘 개봉한 애니메이션 ‘소울’이 괜찮을 것 같은데?”“당신도 그 영화를 알아?”차설아는 눈을 반짝이며 급히 말했다.“그 영화 재밌다고 입수문이 자자해서 계속 보고 싶었어. 그런데 배급이 적어서 늘아쉬웠지. 이제 곧 배급이 거의 없어질 거야.”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잖아. 같은 유형의 ‘코코’도 괜찮아.”“맞아, 맞아, ‘코코’도 너무 좋지. 그때 나 영화관에서 펑펑 울면서 봤잖아.”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영화 마니아이고, 본 영화의 99%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평가도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이제야 발견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화 스타일이 비슷했다.차설아는 감탄하며 말했다.“성도윤, 몰라봤네. 당신은 돈 냄새만 풀풀 풍기고, 내면세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본가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영혼이 있었네.”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가운 듯 차갑지 않은 듯 말했다.“마찬가지야. 난 당신을 머리가 텅텅 빈 껍데기로 생각했어.”영화가 곧 시작되려 하자, 두 사람은 영화표를 들고 일어나 개찰구로 가려 했다.검표 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성도윤과 차설아는 앞뒤로 줄지어 곧 보게 될 ‘소울’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줄을 서다 보니 차설아는 뭔가 이상했다.“성도윤,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지 않아?”성도윤은 몸을 살짝 돌려 차갑게 물었다.“뭐가?”차설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크게 소리쳤다. “연아, 연아가 사라졌어!”성도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연아가... 사라졌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차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도망가는 여자를 잡고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에요?”“1층... 로비에서 어떤 미친 사람이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쇼핑몰을 폭파하려고 해요!”“어린 여자아이요?”차설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또 물었다.“그 어린 여자아이가 혹시 노란색 치마를 입고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나요? 나이는 대여섯 살 정도.”“맞는 것 같아요!”그 여자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빨리 나가세요. 이 쇼핑몰이 폭파되면 모두 죽어요!”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1층에서 위층으로 뛰어갔다.차설아는 사람들을 거스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성도윤이 그녀를 붙잡았다.“뭐 어쩌려고?”“당연히 사람 살려야지!”차설아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못 들었어? 어떤 미친 자식이 연아를 납치했다잖아. 지금 구하지 않으면 연아는 죽어!”“구해도 내가 구해!”성도윤은 차설아의 몸을 고정한 채 사람들이 달려가는 비상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너무 위험해, 일단 비상구로 가서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그리고, 성도윤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는 격이었다.남자의 결연한 뒷모습을 보며 차설아는 조금 놀랐다.분명 그렇게 싫고, 나쁜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녀를 감동시켰다.1층 쇼핑몰에서 사람들은 이미 거의 도망쳤고, 총을 든 채 쇼핑몰을 포위한 경찰만 남아 있었다.쇼핑몰 한복판에서 매우 초라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손에 번쩍번쩍한 식칼을 들고 연아의 목에 갖다 댄 채 얼굴을 붉히며 그와 협상하는 전문가에게 말했다.“나 설득할 생각하지 마. 난 이미 죽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당신들이랑 같이 죽을 거야!”중년 남자는 허리에 견인 폭탄을 메고 있었고, 그가 견인 줄을 조금만 당기면 쇼핑몰 전체를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급박한 상황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굴이 창백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선생님, 진정하세요. 이런다고 문제가 해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