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사도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울먹이는 배경윤을 위로해 주었다.“네가 어떤 마음인지 잘 알아. 하지만 이 일은 네 생각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아. 일단 윤설과 차성철은 만난 적도 없고 엮일 일도 없었어. 윤설은 목숨과 연예인으로서의 앞날을 잃을 각오까지 하면서 차성철을 해하려 들지 않았을 거야.”“하, 결국 너도 윤설 편이야?”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당장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사도현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배경윤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을 이었다.“그 의사가 수술 전에 윤설과 전화하면서 실수 없이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어! 그런데도 너는 윤설이 그럴 이유가 없다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는 거야? 아니, 그 여자는 네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아! 넌 윤설을 그저 맑고 순진한 첫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은데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잖아.”“아니, 이번에는 네가 틀렸어.”사도현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난 윤설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서 윤설을 내 곁에서 떼어놓은 거야. 난 네가 이성적으로 누가 진정한 범인인지 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사도현은 냉정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성형병원 의사한테 연락한 사람이 윤설이 아닌 다른 사람이더라도 사도현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배경윤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윤설이 범인이든 아니든 이 사고에 연루된 건 사실이야. 그럼 윤설을 찾아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사도현은 턱을 매만지면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랑 같이 가자.”“왜? 내가 네 첫사랑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사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 윤설이 널 해코지할까 봐 그래. 너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을 괴롭히기 좋아하거든.”“내가 단순하다고?”“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일 정도거든. 내가 네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될 것 같아.”사도현은 곧바로 관리팀한테 전화를 걸어 물었다.“윤설 스케줄을
사도현은 지프차를 준비했고 가기 전에 트렁크에 배경윤이 좋아하는 과일과 간식을 가득 사 넣었다. 배경윤은 대표가 되어서도 직접 움직이는 사도현을 보면서 설렜다.배경윤은 차에 기대서 사도현에게 티슈를 건넸다.“이미 헤어진 마당에 뭘 이렇게 잘해주고 그래. 난 네가 나한테 미련 남은 줄 알고 오해할 뻔했잖아!”배경윤은 장난하려다가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장난이니까 오해하지 마. 난 헤어진 후에 전 남자 친구와 잘 지내는 사람 아니야!”“나도 아니야.”사도현은 차갑게 말한 뒤, 배경윤이 제일 좋아하는 과자 한 상자를 트렁크에 던졌다.쾅!‘화나고 짜증 나는데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고 싶은 느낌이 들어. 이 짜릿함을 못 잊어서 사랑하는 거지.’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조수석에 앉은 배경윤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아야, 몸은 어때? 성철 오빠는 괜찮아?”“신경과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가 오빠 수술을 맡았어. 곧 깨어날 것 같아.”“그래, 정말 다행이야.”배경윤은 마음에 걸린 돌멩이가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며칠 동안 연락 못 할 것 같으니까 밥도 잘 먹고 기운 차려야 해. 급해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 성철 오빠 곧 깨어날 거야.”“왜? 어디 멀리 가는 거야?”“응, 촬영장 구경하러 다녀올게.”배경윤은 차설아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했다.“너도 고생 많았는데 푹 쉬어.”“우리 모두 수고 많았어. 곧 다시 만나.”두 사람은 30분 동안 얘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듣던 사도현은 운전하면서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여자들은 어떻게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을까?”“여자는 고급 동물이라 그래. 남자는 신체만 사람이고 사상은 여전히 동물처럼 본성에 따른다니까!”“아니, 왜 말이 갑자기 그쪽으로 튀어?”“내 말이 틀렸어?”배경윤이 말을 이었다.“너랑 성도윤은 둘 다 나쁜 놈이야. 품에 안은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뚫
진흙 길인 데다가 비가 내려서 사람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질퍽거렸기에 차로 들어갈 수 없었다.“이럴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사도현은 진흙 길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고 차를 돌리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재벌가 아가씨 배경윤이 이런 험한 길로 걸어가려고 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가고 뭐 해?”배경윤은 고민도 없이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도현의 예상과 달리 배경윤은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런 진흙 길에서 언제 또 걸어보겠어? 영화에서만 보던 길 위를 걸을 수 있는데 돌아가라니... 왔던 바에 진흙 길이 어떤지 직접 들어가 보겠어!”배경윤은 곧바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진흙 길로 들어섰다.“아니, 너 정말 여자 맞아? 흙이 묻어서 더러울 텐데, 넌 괜찮은 거야?”사도현은 멀리까지 걸어간 배경윤의 뒷모습을 보면서 머뭇거렸다.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맨 발로 질퍽한 진흙을 딛고 가려고 하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거기서 뭐 해? 남자라는 놈이 약해빠져서는... 빨리 와! 진흙이 묻으면 나중에 씻으면 되는데 뭘 망설이는 거야?”배경윤이 100미터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사도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뭇거리는 사도현의 모습을 보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예전에는 왜 저놈이 이렇게 약해빠진 놈인 줄 몰랐었지?’성별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나약한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배경윤이 아는 사도현과 지금 눈앞의 사도현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도현이 진흙 길을 맨 발로 걷지 못해서 쭈뼛거리자 배경윤은 콩깍지가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저런 놈을 뭐가 좋다고 따라다녔는지 몰라. 난 남자 보는 눈이 없다니까.’“거기 약해빠진 분, 셋 셀 때까지 안 오면 나 혼자 갈 거야. 하나!”배경윤은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너 딱 기다려! 그 마을에 도착하면 아주 혼을 내줄 거야. 지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서 잠
“난 강아지가 제일 무섭단 말이야! 강아지가 벌써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사도현은 배경윤의 뒤에 숨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성인 남자가 드라마 속 청순가련 여주인공보다도 연약했다.배경윤은 입술을 깨문 채 겨우 웃음을 참더니 말했다.“우리 도현이 무서웠어? 괜찮아. 이 누나가 있는 한, 강아지는 널 어쩌지 못할 거야. 누나 따라 빨리 와야 해. 또 소리 지르면 강아지들이 한 번에 몰려올 거야.”배경윤은 사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걷기 힘든 진흙 길을 걸었고 예능 >의 촬영 장소에 겨우 도착했다.“드디어 다 왔어! 드디어...”사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지옥에서 도망친 것 같은 사도현의 모습에 배경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엄살 부리지 마.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면 도시처럼 잘 닦인 길이 없을 수도 있어. 이런 마을에서 강아지와 진흙 길은 아주 흔한 거라고!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 왜 나 따라온 거야?”“그걸 몰라서 물어?”사도현은 강가로 가서 발에 묻은 흙을 씻었고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널 따라온 것 같아?”“그런 것 같은데?”배경윤의 말에 사도현은 어이가 없었다.“난 누가 또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닐까 봐 옆에서 보살펴 주려고 했어. 그런데 이 고생을 하고도 듣는 말이 죄다 잔소리라니... 잘해줘도 소용없나 봐. 나만 바보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바쳤지!”“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가 널 보살폈어! 네가 소리 지르고 징징대지 않았으면 난 진작에 촬영 장소에 도착했을 거라고!”“그래.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너한테 민폐 끼쳤어. 정말 미안하다. 됐어?”사도현은 화가 솟구쳐 올랐다. 배경윤을 돕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직접 운전해서 마을까지 왔는데 배경윤한테서 고맙다는 말 대신 빈정 상하는 말만 듣게 되었다.
가수 진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저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데뷔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 봐요! 마을에서 마음 편하게 있으면서 힐링하는 촬영인데 윤설은 마을의 물도 마시지 않고 고급 브랜드 물만 마시겠다잖아요. 아니, 이 마을에 그런 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일부러 저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진혁은 요리를 맡았고 고정 멤버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다. 모두의 인정을 받으면서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윤설이 투입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쌀이 덜 있었다거나 야채에 벌레가 있다면서 트집을 잡더니 고급 브랜드 물로 지은 밥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했다.“데뷔한 지 오래되었다고 기강 잡는 선배는 봤어도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지금은 사람들한테 잊혔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저도 인기가 많은 가수였다고요! 그런데 저런 여자 때문에 촬영 분위기가 흐려지고 저의 요리가 지적받는 건 말도 안 돼요. 윤설이 하차하지 않으면 제가 하차하겠어요!”진혁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씩씩거렸다. 진혁이 윤설을 못마땅해하다가 결국 하차하겠다고 하자 사회자 하은진이 나서서 말렸다.“진혁 씨, 그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요. 윤설은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밀어주는 연예인이라서 갑자기 투입된 거예요. 그런데 내쫓겠다고 해버리면 윈스 엔터테인먼트와 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윈스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계를 주름잡는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괜히 건드렸다가 소리 소문 없이 묻힐 바에는 가만히 있는 게 나아요.”“제가 듣기로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윤설을 버린 카드 취급 한대요. 이 예능에서 활약하지 못하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다던데요? 어차피 회사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니 내쫓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배우 강지훈도 윤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잠시만요. 진정하고 제 말부터 들어봐요.”하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주주들이 윤설 대
진혁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사 대표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네요. 오늘 특별 게스트로 오신 거예요? 아니면 촬영 현장이 어떤지 보러오신 거예요? 제작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촬영은 저녁쯤에 끝났기에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온 것인지, 촬영 현장을 보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배경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설 씨를 찾으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윤설 씨를요?”진혁은 윤설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윤설 씨 별명이 백설 공주잖아요. 공주님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윤설 씨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에요?”배경윤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진흙 길을 한참 걸어서 촬영 장소에 왔는데 윤설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지금은 다른 곳에 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진혁이 차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요?”배경윤이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에 방이 많지만 공주님은 이런 누추한 곳을 싫어하거든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호텔로 달려갔어요. 아, 마을로 들어오는 길 중간부터 진흙 길이잖아요? 마을 사람에게 돈을 주고 업혀서 마을을 빠져나갔대요.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좋아하더라고요.”“흠!”하은진이 진혁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눈짓했다. 진혁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윤설 씨는 더위를 잘 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에어컨도 없고 씻기도 불편하니까 좋은 곳에서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죠. 배우로서 컨디션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하니까요.”“하, 꼴에 연예인이라고 잘난 척하는 거잖아요. 뭘 또 그렇게 포장해서 얘기해요?”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윤설 씨를 만나려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네요?”배경윤은 진혁과 하은진한테 물었다.“맞아요. 지금 시간이 늦었기도
“좋아요.”“싫어요!”사도현과 배경윤이 동시에 외쳤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한방에서 자고 싶어 했고 배경윤은 이미 헤어진 마당에 굳이 한방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분이 한방을 쓰신다면 씻고 바로 쉬면 돼요. 내일 아침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 테니 저희랑 같이 식사하면 되고요. 만약 한방을 쓰기 싫다면...”하은진이 마당 구석에 있는 외양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럼 한 분은 외양간에서 주무셔야겠네요. 침대를 갖다 놓고 휴식할 수는 있지만 외양간에 냄새가 나서 잠잘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새벽에 소가 날뛰는 일도 있어서 위험하고요.”“네? 정말 외양간밖에 없어요?”배경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예능 >에서 제작비를 아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외양간에서 자야 할 정도로 방이 적을 줄은 몰랐었다.“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사도현이 배경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보다시피 이분과 평범한 사이는 아니라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분이랑 둘이 잘 얘기해 볼게요.”“누가 너랑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인 줄 알고 오해하시잖아.”배경윤이 사도현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도현은 배경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배경윤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바보야, 내 말이 틀렸어? 난 너랑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곁에서 지켜보던 하은진과 진혁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결정하시면 저쪽 방으로 가면 돼요. 방에 세면용품과 간식도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두 분 모두 좋은 밤 되시고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하은진은 헤벌쭉 웃고 있는 진혁을 끌어당기면서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현과 배경윤이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하은진은 두 사람이 연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방을 쓰는 제안을 했는데 윈스 엔터테인먼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