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혁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사 대표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네요. 오늘 특별 게스트로 오신 거예요? 아니면 촬영 현장이 어떤지 보러오신 거예요? 제작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촬영은 저녁쯤에 끝났기에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온 것인지, 촬영 현장을 보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배경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설 씨를 찾으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윤설 씨를요?”진혁은 윤설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윤설 씨 별명이 백설 공주잖아요. 공주님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윤설 씨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에요?”배경윤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진흙 길을 한참 걸어서 촬영 장소에 왔는데 윤설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지금은 다른 곳에 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진혁이 차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요?”배경윤이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에 방이 많지만 공주님은 이런 누추한 곳을 싫어하거든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호텔로 달려갔어요. 아, 마을로 들어오는 길 중간부터 진흙 길이잖아요? 마을 사람에게 돈을 주고 업혀서 마을을 빠져나갔대요.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좋아하더라고요.”“흠!”하은진이 진혁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눈짓했다. 진혁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윤설 씨는 더위를 잘 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에어컨도 없고 씻기도 불편하니까 좋은 곳에서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죠. 배우로서 컨디션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하니까요.”“하, 꼴에 연예인이라고 잘난 척하는 거잖아요. 뭘 또 그렇게 포장해서 얘기해요?”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윤설 씨를 만나려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네요?”배경윤은 진혁과 하은진한테 물었다.“맞아요. 지금 시간이 늦었기도
“좋아요.”“싫어요!”사도현과 배경윤이 동시에 외쳤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한방에서 자고 싶어 했고 배경윤은 이미 헤어진 마당에 굳이 한방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분이 한방을 쓰신다면 씻고 바로 쉬면 돼요. 내일 아침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 테니 저희랑 같이 식사하면 되고요. 만약 한방을 쓰기 싫다면...”하은진이 마당 구석에 있는 외양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럼 한 분은 외양간에서 주무셔야겠네요. 침대를 갖다 놓고 휴식할 수는 있지만 외양간에 냄새가 나서 잠잘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새벽에 소가 날뛰는 일도 있어서 위험하고요.”“네? 정말 외양간밖에 없어요?”배경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예능 >에서 제작비를 아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외양간에서 자야 할 정도로 방이 적을 줄은 몰랐었다.“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사도현이 배경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보다시피 이분과 평범한 사이는 아니라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분이랑 둘이 잘 얘기해 볼게요.”“누가 너랑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인 줄 알고 오해하시잖아.”배경윤이 사도현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도현은 배경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배경윤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바보야, 내 말이 틀렸어? 난 너랑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곁에서 지켜보던 하은진과 진혁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결정하시면 저쪽 방으로 가면 돼요. 방에 세면용품과 간식도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두 분 모두 좋은 밤 되시고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하은진은 헤벌쭉 웃고 있는 진혁을 끌어당기면서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현과 배경윤이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하은진은 두 사람이 연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방을 쓰는 제안을 했는데 윈스 엔터테인먼
배경윤은 투덜거리면서 사도현의 뒤를 따라갔다. 유일하게 남은 방에는 낡은 나무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새로 산 것 같은 이불이 놓여있었다. 울퉁불퉁한 바닥과 비가 내리면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지붕이었지만 외양간보다 훨씬 나았다.하지만 씻으려면 항아리에 받아놓은 물로 씻어야 했고 수돗물이 없어서 뜨거운 물을 쓰려면 씻을 때마다 물을 끓여서 써야 했다. “나 어쩐지 윤설 마음을 알 것 같아.”배경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이런 환경이면 밖으로 나갈 만도 해. 각오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지낼 수 없을 거야.”“난 오히려 좋은데?”사도현은 피식 웃더니 침대로 올라갔고 두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사도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했다.“이 정도면 좋은 거지. 누우면 하늘의 별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낭만적이야!”“그래? 미안하지만 난 낭만적인 거라면 딱 질색이거든.”배경윤은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감았다.“난 이 자세로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거든.”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이왕 온 김에 편하게 쉬지 그래? 제일 낭만적인 건, 눈만 뜨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거야. 그곳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면 행복해.”“웩! 이상한 말 하지 마. 아무것도 안 먹어서 토할 것도 없단 말이야.”배경윤은 침대에 누워있는 사도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낭만을 추구했다고 저러는 거야.’사도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지금 씻을래? 내가 물 끓여올게.”“좋아.”배경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끓이는 김에 많이 끓여줘. 샤워도 해야 하잖아.”“알겠어.”사도현은 문을 열고 나갔다. 이곳의 조건이 좋지 않았기에 어릴 적부터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은 재벌가 아가씨 배경윤이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도현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배경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주방으로 들어간
“당장 꺼져!”배경윤은 사도현이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덮치려고 할 줄 알았었기에 방에서 내쫓은 뒤, 방문을 재빨리 잠갔다. 씻고 나온 배경윤은 졸려서 침대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내일 윤설한테 따질 것이 많았기에 오늘 밤에 제대로 휴식해야만 했다.잠이 들려는 찰나, 사도현이 마음에 걸린 배경윤이 문을 열었다. 사도현은 문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배경윤을 올려다보았고 갈 곳 없는 강아지처럼 불쌍해 보였다.“깨났어?”사도현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경윤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사도현의 두 눈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방으로 들어가서 자. 난 외양간에 가서 잘 거야.”배경윤은 털털한 성격이어서 외양간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재벌가 도련님 사도현을 외양간에 보내려고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고마워!”사도현은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갔고 조금 전 시무룩해 있던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여우 같은 놈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문을 열었더니 웬 늑대가 들어왔구나. 불쌍한 놈이 아니라 무서운 놈이었어. 배경윤, 마음이 이렇게 약하니까 저놈이 자꾸 널 갖고 놀려고 하는 거 아니야!’배경윤은 방으로 들어가서 베개와 이불을 들고 외양간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배경윤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더니 문을 닫았다.“이제는 그만해. 침대가 커서 같이 누울 수 있고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으면 내가 안아줄 테니까 가지 마.”“사도현, 이 손 놓지 못해? 헤어진 여자랑 또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는 거야?”“이상한 짓이라니, 난 네가 무서워할까 봐 손만 잡고 자려고 했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제발 믿어줘.”사도현은 하늘에 대고 맹세하겠다면서 세 손가락을 쳐들었다. 배경윤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대답했다.“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장담했지만 난 장담 못 해. 우린 이미 헤어졌고 같은 방에 단둘이 있는 건 이상해. 이대로라면 또 사귀고 싸우고 헤어지는 악순환에 휘
사도현을 말리기 위해 배경윤은 어쩔 수 없이 독한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네가 이럴수록 내가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잠만 자고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쓰이다가 질리면 헤어지는 쉬운 여자가 된 기분이야.”이 말은 지난번에 싸울 때 했던 말이었다. 홧김에 한 말이지만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아니, 난 여전히 네가 좋아. 앞으로도 질리지 않을 자신 있어.”사도현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배경윤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고는 마음이 가는 대로 배경윤의 몸을 마구 만져댔다. 사도현이 배경윤을 많이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속궁합이 가장 맞는 여자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조차도 넌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구나. 내가 속상해하는 게 보이지 않아? 나랑 얘기를 나누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한테는 내가 도구로 보여서 얘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거겠지.”배경윤이 사도현을 밀어내고는 붉어진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헤어지고 나서 제일 힘들어했던 사람은 배경윤이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려 했지만 사도현은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은 싸우고 나서 매일 울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오늘 단둘이 얘기할 시간이 있어서 속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사도현은 여전히 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배경윤은 문제를 바로 짚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이때 사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배경윤, 꼭 지금 그런 말을 해야 했어? 내가 왜 너랑 사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저 우리 두 사람만 행복하면 돼. 그리고 내가 너랑 속궁합이 좋아서 사귄다고 해도 그게 뭐? 너의 몸을 사랑하는 것도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너의 영혼 그 자체를 사랑하든, 너의 몸을 사랑하든 다 똑같아. 그러니까 괜한 걸로 시비 걸지 마.”사도현은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인간관계가 사도현에게는 그러
배경윤은 사도현을 노려보다가 베개와 이불을 들고 외양간으로 향했다.‘너 같은 바람둥이랑 잘 바에는 소랑 같이 자겠어.’배경윤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걸어갔다. 외양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소 특유의 냄새와 변 냄새가 섞인 강렬한 풀 향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배경윤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도현이 이미 깊은 잠에 빠지고 난 뒤였다.“네가 뭔데 침대에서 자. 넌 바닥에서 자!”배경윤은 베개와 이불을 바닥에 놓고는 사도현을 발로 찼다. 사도현이 바닥에 굴러떨어지자 배경윤은 침대에 편히 누워 잤다. 새벽에 잠이 깬 사도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눈을 비비면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배경윤을 안으면서 잠꼬대했다.“경윤아, 이리 와.”사도현은 곧바로 잠들었고 다시 사도현을 걷어차려던 배경윤은 꼼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같은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잤다.“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이런 꼴을 당하는 거지.”배경윤은 한숨을 내쉬고는 사도현과 함께 잠들었다. 두 사람은 마을로 오는 길 내내 체력을 소모했기에 다음 날 점심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제작진이 촬영 준비를 시작할 때쯤, 사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너 왜 침대에서 잤어? 어제 외양간에 가서 잔다고 하지 않았어?”사도현은 품에 안은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배경윤이 외양간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사도현을 걷어찬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내가 왜 거기서 자겠어. 외양간은 너한테 어울리는 곳이잖아.”배경윤은 눈을 번뜩 뜨고는 옷을 갈아입었고 재빨리 씻었다. 사도현도 옷을 갈아입고는 칫솔질했고 얼굴을 대충 씻은 채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작진과 감독이 굽신거리면서 인사했다.“사 대표님, 안녕하세요. 촬영 현장을 보러 오신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 사 대표님이 오신 걸 이제야 알게 되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감독 장윤태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윈스 엔터테인먼트는 ‘힐링 공간’ 최고
장윤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다음 시즌을 촬영하는 마을에 큰 집을 짓고 사 대표님을 특별 게스트로 모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파리를 쫓아내듯이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으니까 각자 할 일 하러 가보세요. 내가 예능까지 참가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잖아요.”“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사 대표님께서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저희 예능에 참가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봤어요. 사 대표님이 촬영 장소에 오신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사 대표님을 만나서 기쁜 마음에 욕심을 부렸어요.”배경윤은 아부하는 장윤태를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연예계에서 지위 높은 사람한테 굽신거리고 아부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이 진절머리 났다.배경윤은 ‘힐링 공간’ 지난 시즌이 끝난 뒤에 방송된 메이킹 영상이 떠올랐다. 여러 연예인이 장윤태 감독을 에워싸고 아부하는 모습이 담겼는데 장윤태는 올곧고 정직한 모습을 보여줘서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오늘 직접 본 장윤태는 연예계의 다른 연예인과 다름없었다. 장윤태가 뒤돌아 가려고 할 때, 배경윤이 입을 열었다.“장 감독님,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장윤태는 사도현과 같은 방에서 나온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배경윤과 사도현이 연인이라면 사도현이 밀어주려는 연예인이 배경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럼요. 궁금하신 건 전부 다 물어보세요. 사 대표님이 직접 데려온 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섭외한 연예인보다 실물이 훨씬 예뻐요. 시청자들이 이 특별 게스트를 아주 좋아할 것 같네요.”“저... 윤설 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윤설 씨랑 얘기를 나누려고 왔거든요.”“아, 윤설 씨는...”장윤태는 윤설이라는 말에 낯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돈을 주고 강제적으로 투입된 윤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장윤태는 고정 멤버와 마찬가지로 윤설이 하차하길 바랐다.“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는 촬영이 시작된 후에야 마
윤설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음, 그랬던 것 같아요. 물광주사를 맞아야 해서 예약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배경윤 씨도 시술받고 싶으면 원장님을 소개해 드릴게요.”윤설은 턱을 살짝 쳐들고는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요? 안 어울리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요.”배경윤은 윤설의 도발에 넘어갔고 화가 나서 목청을 높였다.“배경윤 씨, 적당히 하시죠? 윤설 씨는 연예인이고 지금 촬영 준비 중이에요.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매니저 이혜정이 윤설 앞을 막아서면서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윤설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도현 씨 취향도 참 특이하네요. 왜 이런 여자를...”“특이하다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배경윤은 씩씩거리면서 윤설을 노려보았고 계속해서 따져 물으려고 했다.“감독님, 촬영 시작하지 않았나요? 왜 다들 여기에 모여있는 거죠?”윤설은 배경윤을 무시한 채 장윤태한테 물었다.“그게...”장윤태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시작해야 하는데 사도현 대표님이 직접 와주셔서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어요. 사도현 대표님의 뜻에 따라 촬영 시간을 정해도 될 것 같아요.”“아니요.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저희 때문에 촬영 시간이 미뤄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작진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촬영을 시작했다. 대본대로 윤설이 고정 멤버의 일원으로서 다른 게스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고 점심에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산을 오르려면 먼저 몇 공리나 걸어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배경윤은 윤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안 돼요!”배경윤이 나서서 장윤태한테 말했다.“장 감독님, 저희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게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좋은 제안인 것 같으니 오늘부터 촬영해도 될까요? 저랑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윤설과 함께
“정말 예상도 못 했어. 분명히 조치를 다 했는데 말이야.”차설아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미 찾아온 생명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키울 생각이었다.“이건 운명이야! 아무리 막아도 올 아이는 오게 돼 있다니까!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성 대표, 또 아빠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배경윤이 진심으로 차설아를 축하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할 게 뭐가 있어... 사실, 지금 우리 상황은 아이를 가질 때가 아니야.”차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지금은 그녀와 성도윤에게 가장 큰 압박이 몰려오는 시기였다.정확히 말하면, 성도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밖으로는 성대그룹 대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했고 안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돌봐야 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까지 생긴다면 그는 혼자서 네 사람의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이 부담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감정적인 부담이 더 컸다.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적들에게 잡힐 약점도 많아지는 법이었고 지금의 그들에게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미 온 생명인데, 어쩌겠어? 애초에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지금 얼마나 사랑스럽니? 후회해?”“당연히 후회 안 해.”“그럼 됐잖아!”배경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태어날 아기가 달이랑 원이 장점만 쏙 빼닮았다고 생각해 봐! 완벽하지 않겠어?”“그러게... 그러면 정말 좋겠다.”차설아는 두 아이를 떠올리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야 이 갑작스러운 생명이 조금씩 기대되기 시작했다.“임신 초기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칼슘 보충해야 하나? 엽산도 챙겨야 하고, DHA도 먹어야 하지?”배경윤이 이미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폭풍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뱃속 아이를 챙기며 태어나기도 전에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근데 이번 아기는 아들일까, 딸일까? 아니면 또 쌍둥이일 수도 있
“임신이라고...?”차설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더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정말 그런지 아닌지, 테스트해 보면 알겠지.”배경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내가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올게. 잠깐만 기다려!”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곧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배경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가정부 현이가 커피에 무언가를 섞고 있었다.“현이 씨, 그게 뭐예요?”배경윤이 커피잔을 흘끗 보며 물었다.“어... 아무것도 아니에요!”현이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커피를 쏟으며 말했다.“설아 씨가 커피가 많이 쓰다면서 설탕을 좀 많이 넣으라고 해서요.”“그래요?”배경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설아가 단 커피를 좋아한다고? 입맛이 바뀌었나?’분명 차설아는 블랙커피만 선호했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차설아를 찾으러 갔다.차설아는 처음엔 테스트하기를 꺼렸다.어차피 임신일 리가 없는데 뭐 하러 하냐고 거절했지만 배경윤이 끈질기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결국 마지못해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그리고 얼마 후,“꺅!”배경윤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진짜 임신이잖아! 내가 뭐랬어! 네가 원래 그렇게 활기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축 처지고 졸린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라니까!”차설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배경윤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지난번에 네가 달이랑 원이 가졌을 때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잖아. 이번엔 달라! 내가 반드시 널 전적으로 돌볼 거야. 꼭 좋은 대모가 되고 말겠어!”배경윤은 차설아의 팔을 붙잡고는 벌써 세 아이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설레했다.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들떠서는 말을 이었다.“근데 성도윤 그놈, 이번엔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우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해야지. 아이
만약 할아버지마저 성진의 꾀에 넘어갔다면 앞으로 가문에서 그의 발언권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지위도 그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될 터였다.이런 일들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지만 차설아까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도윤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나에겐 당신과 아이들만 있으면 돼.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자, 이제 자자.”성도윤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설아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예민한 차설아는 그의 말투에서 나는 실망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되던 그를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다음 날 아침성도윤은 또다시 성대그룹으로 향했고 배경윤은 집에 머물며 차설아를 돌보기로 했다.“다시는 설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마. 또 어제 같은 일이 생기면 이번엔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성도윤은 떠나기 전에 배경윤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알았어, 알았다고! 절대 안 데리고 나갈게. 설령 데리고 나가더라도 걱정 마, 이제 내 목소리도 돌아왔잖아. 누가 감히 어제처럼 날 괴롭히면 정말 지 엄마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 줄 거야.”배경윤이 우유를 마시면서 신나서 떠들어댔다.성도윤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차라리 말 못 하는 게 나았을지도... 대체 사도현은 어떻게 견디는 거야?’성정엽이 떠난 후, 배경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차설아가 어젯밤 몰래 방문한 오두막으로 향했다.차설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아직도 안 일어났어? 요즘 너 왜 이렇게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 않네.”배경윤이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차설아를 보며 감탄했다.“으음... 몰라. 요즘 너무 졸려. 너무 여유롭게 지내서 그런가 봐. 자꾸 나태해지네.”차설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활력이 넘치던 그녀였는데 요즘은 마치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것조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