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음, 그랬던 것 같아요. 물광주사를 맞아야 해서 예약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배경윤 씨도 시술받고 싶으면 원장님을 소개해 드릴게요.”윤설은 턱을 살짝 쳐들고는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요? 안 어울리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요.”배경윤은 윤설의 도발에 넘어갔고 화가 나서 목청을 높였다.“배경윤 씨, 적당히 하시죠? 윤설 씨는 연예인이고 지금 촬영 준비 중이에요.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매니저 이혜정이 윤설 앞을 막아서면서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윤설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도현 씨 취향도 참 특이하네요. 왜 이런 여자를...”“특이하다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배경윤은 씩씩거리면서 윤설을 노려보았고 계속해서 따져 물으려고 했다.“감독님, 촬영 시작하지 않았나요? 왜 다들 여기에 모여있는 거죠?”윤설은 배경윤을 무시한 채 장윤태한테 물었다.“그게...”장윤태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시작해야 하는데 사도현 대표님이 직접 와주셔서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어요. 사도현 대표님의 뜻에 따라 촬영 시간을 정해도 될 것 같아요.”“아니요.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저희 때문에 촬영 시간이 미뤄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작진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촬영을 시작했다. 대본대로 윤설이 고정 멤버의 일원으로서 다른 게스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고 점심에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산을 오르려면 먼저 몇 공리나 걸어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배경윤은 윤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안 돼요!”배경윤이 나서서 장윤태한테 말했다.“장 감독님, 저희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게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좋은 제안인 것 같으니 오늘부터 촬영해도 될까요? 저랑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윤설과 함께
배경윤은 제작진이 전부 사도현의 말에 따른다는 것을 눈치챘다.“같이 출연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사도현은 배경윤의 표정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냈다.“당연하지!”배경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사도현 귓가에 대고 말했다.“왜 이곳까지 왔는지 잊은 거야? 윤설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알겠어. 내가 네 뜻대로 해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내가 뭘 해줘야 해?”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경윤을 쥐락펴락하는 사도현이 밉기만 했다.“별 건 아니고 앞으로 며칠 동안 내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해 줘.”사도현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너무 차갑게 굴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아프든지 말든지!’배경윤은 간신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네 말대로 다 할 테니까 얼른 감독님한테 하겠다고 말해. 넌 이곳의 왕이니까 네 말이라면 전부 들어줄 거야.”“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우리 경윤이는 참 예뻐.”사도현은 애완견을 만지듯이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현장에 있던 제작진은 두 사람이 귓속말하다가 눈만 마주치면 미소 짓는 모습에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배경윤이 사도현의 여자 친구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앞다투어 말했다.“배경윤 씨는 개성 있는 캐릭터라 예능을 잘할 것 같아요.”“이번 촬영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로 인기가 많아질 거예요. 국민 여신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죠!”“배경윤 씨가 투입되면 고정 멤버들과 어떤 케미를 선보일지 궁금해요. 한 프로그램에서 배경윤 씨와 윤설 씨, 두 여자 사이에 있는 사도현 대표님의 삼각관계를 은근슬쩍 드러내면 더 재밌을 것 같고요.”윤설이 인상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설마 특별 게스트로 촬영하려는 건 아니죠? 도현 씨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데 저런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고 이러는 거예요? 도현 씨, 정신 차려요!”“대표도 사람이고 우리랑 똑
출연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컴퓨터 앞에 앉아 실시간으로 촬영 화면을 보고 있던 장윤태는 편집할 수도 없는 회차가 될까 봐 불안해했다. 차라리 배경윤과 사도현을 보낸 뒤에 다시 촬영하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사도현과 배경윤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을 올랐다. 배경윤은 청순한 이미지와 다르게 힘이 세고 활발했다. 그 옆에서 따라 걷는 사도현은 오만하지만 허당인 매력을 선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지켜보던 장윤태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이 느낌대로만 가면 이번에는 시청률이 오를 거야! 이대로 유지해.”장윤태는 잔뜩 흥분한 채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예능 감독을 맡은 지 오래되었고 대박 난 예능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과 어떤 분위기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전에 윤설이 촬영한 여러 회차는 에피소드를 전부 말아먹어서 시청률이 하락했다. 하지만 사도현과 배경윤의 출연은 이 예능을 실시간 검색어로 올려줄 것이다. 산을 오를수록 안개가 자욱해서 톱스타들은 선뜻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산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후에 버섯을 딴다고 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올라갈까요?”신인 여자 아이돌 그룹 리더 민지가 천천히 멈춰서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맞아요. 나쁜 기운뿐만 아니라 독뱀도 있다고 들었어요. 잠시 쉬다가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윤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윤설의 매니저 이혜정과 매니저 보조 박지영은 대기 장소에 남아있었기에 분량을 스스로 따낼 수밖에 없었다.“힐링 예능을 찍는 거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예능을 찍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산에 독뱀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오후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겠다는 말도 웃기네요. 그때 가면 버섯이 아니라 떨어진 나뭇잎조차 없을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고는 그물버섯을 따서 가방에 넣었다. 배경윤은 지금까지 버섯을 제일 많이 딴 사람이었다. 배경윤의 가방에는 산 송
배경윤은 윤설의 말에 소름이 돋아서 윤설의 손을 떼어내고는 말했다.“윤설 씨가 이 산의 지형을 모를 리 없죠. 저녁에 마을 밖에 있는 호텔에서 편하게 쉬고 마을 사람한테 업혀서 마을을 나갔다고 들어오니 알 수밖에 없었겠네요.”그러자 윤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배경윤 씨, 장난이 심하네요. 저는 매일 저녁 칠순이랑 놀아주다가 방에 들어가서 자거든요.”“우리 솔직해져요. 배우로서 좋은 곳에서 대본을 검토할 수도 있는 거죠. 윤설 씨가 마을에서 자지 않는 걸 알아도 시청자들은 분명 이해해 줄 거예요!”배경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제작진은 나서서 말리는 대신,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세 대의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제작진은 매일 지각하는 윤설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 스태프는 마을 사람과 함께 윤설을 호텔에서 데리고 와야 했다. 아무도 윤설한테 뭐라고 하지 못했고 꾹 참기만 했다.그런데 특별 게스트로 투입된 배경윤이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얘기할 줄 아무도 몰랐다. 제작진은 속이 시원해졌다. “배경윤 씨, 카메라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요?”윤설이 이를 악문 채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가 배경윤을 보면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배경윤 씨,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 감독님이 전부 편집할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더니 윤설을 향해 말했다.“어차피 편집될 텐데,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저랑 같이 가겠다고 했죠? 조금 더 빨리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러 연예인은 뒤처져서 보이지 않았고 사도현은 몇십 미터 떨어져서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무,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윤설은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버섯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려고요.”배경윤은 윤설을 붙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도 배경윤을 따라잡지 못했다.“빨리 가요. 앞에 예쁜 버섯이 많으니까 우리 둘이 다 따
윤설은 그 틈을 타서 뒤로 일부러 넘어졌고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윤설, 괜찮아?”따라오던 사도현이 재빨리 윤설 곁으로 달려갔다. 윤설은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다가 바위에 머리가 부딪쳐서 피가 흘렀고 발목을 접질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도현 씨, 너무 아파요... 다리가 끊어진 건 아니겠죠?”“괜찮을 거야. 발목을 접질린 것 외에는 괜찮은 것 같아.”사도현은 윤설의 발목을 살펴보더니 외투를 벗어 짧은 나뭇가지를 다리에 묶어주었고 윤설을 등에 업었다. 배경윤은 윤설한테 따져 묻고 싶었을 뿐, 뒤로 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장면을 보면 배경윤이 일부러 윤설을 밀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괜, 괜찮은 거야?”배경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저리 비켜!”사도현은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늘 일은 정말 실망이야. 네가 이럴 줄은 몰랐어.”“내가 그런 거 아니야...”배경윤이 설명하려는데 사도현이 윤설을 업고 멀리 가버렸다.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면서 사도현은 윤설을 본체만체했고 배경윤한테 신경을 쏟아부었다.‘어쩌면 사도현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윤설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사도현의 행동을 보니 나조차도 내가 너무 우스워. 내가 어떻게 윤설을 대체할 수 있겠어. 사도현은 날 그저 윤설과 밀당하는 도구로 썼던 거야. 도구로 이용당하는 주제에 사도현의 마음을 얻었다고 확신하다니... 나 같은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사도현뿐만 아니라 여러 연예인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친 윤설을 등에 업고 가는 사도현을 보면 윤설을 포기한 것 같지 않았다. 게스트들은 윤설이 회사에서 버린 카드가 되었다는 것은 소문일 뿐이고 여전히 지지해 주는 연예인은 윤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경윤을 칭찬하던 게스트들이 윤설 편에 서서 입을 모아 배경윤을 비난했다
윤설이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바람에 녹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사도현과 제작진이 윤설을 데리고 마을 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 상태가 심각한 건가요?”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사도현이 다급히 다가가서 물었다.“골절하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일주일 정도 깁스하면 될 것 같아요. 심하게 다친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의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윤설은 골절이 아니라 발목을 접질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윤설은 사도현과 제작진이 얘기를 나누는 틈을 타서 의사의 계좌로 돈을 이체했고 의사는 윤설의 말대로 골절이라고 거짓말했다. 거액의 돈이 아니라면 의사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요즘 젊은이들은 돈만 있으면 별짓을 다 하네. 발목을 접질렸으면서 골절이라고 거짓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다행이에요.”사도현은 한시름을 놓았다. 윤설이 크게 다쳤다면 배경윤은 네티즌의 질타와 폭언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라서 배경윤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합의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현은 병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윤설을 내려다보았다.사도현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께서 골절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일주일 정도 입원하면 된대.”윤설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손을 내밀었다.“도현 씨, 제 곁에 오기도 싫은 거예요? 우리 정말 사랑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정말 속상해요.”사도현은 머뭇거리다가 윤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윤설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달래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상해서 배경윤한테 화풀이할 것이 뻔했다. 배경윤을 위해서라도 윤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예전에 있었던 일은 별로 회억하고 싶지 않아. 오늘 일어난 일은 내가 배경윤 대신 사과할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거만하게 굴던 사도현은 진심으로 윤설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기분이 풀릴 줄 알았던 윤설이 차갑게 웃더니 화를 냈다.“이건 저랑 배경윤
사도현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윤설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미안해요. 저도 그 일이 도현 씨에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어요. 저는 그저...”“하, 그럴 줄 몰랐다고?”사도현은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더니 말을 이었다.“누구보다 더 사랑하고 아껴준 여자가 드라마 여주인공 역을 맡고 싶어서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굴렀는데... 그게 나한테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숨겨두었던 상처가 다시 수면 위에 드러났다. 그 일 뒤로 사도현은 남녀 관계는 애초에 불순한 것이라고 여겼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도현은 순정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우습다고 여겼다.“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준 첫 번째 여자였어. 갓난아기보다 더 조심스럽게 널 돌보면서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어. 너를 위해서 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고 해안시에서 윤설한테 끌려다니는 멍청이라고 불렸어도 신경 쓰지 않았어. 널 사랑해서 한 짓들을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제일 잘 알 거라고 믿었는데, 내 마음에 감동해서 너도 날 더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뒹굴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이래도 널 꺾은 사람이 나인 것 같아?”사도현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고 배신당했을 때부터 생겨난 증오의 불씨가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사도현이 윤설의 턱을 붙잡고 차갑게 노려보았다.“사람은 역시 겉만 봐서는 몰라.”“그, 그게 아니에요! 도현 씨, 내 말 좀 들어봐요.”윤설은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먹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드라마 배역을 위해 일부러 도현 씨 아버지한테 접근한 건 맞아요. 내가 인기를 얻고 유명해져야만 당신 곁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씨 가문처럼 거대한 규모의 가업을 이어오는 가문에서 일개 무명 연예인을 며느리로 받아줄 리 없잖아요. 그래서 가문에 도움이 될 정도로 유명해지면 당신의 여자로
사도현은 누군가에게 협박당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윤설이 배경윤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으로 협박하자 어이가 없었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아직도 내가 만만해 보여? 우리가 친구로 지낼지 말지는 내가 정하는 건데, 왜 네가 주도권을 쥔 것처럼 말하는 거지?”“제가 도현 씨를 협박할 리 없잖아요.”윤설이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저는 그저 도현 씨랑 친구로 지내고 싶었는데 협박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마음이 좀 아프네요.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안 볼 사이는 아니잖아요. 평생 저를 미워하는 마음만으로 살아갈 건가요?”사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 사심이 담겨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반박하지 못했다.“그래, 친구로 지내자. 하지만 방금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영영 날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약속 지킬게요.”윤설은 애써 미소를 짓더니 사도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친구로서 저를 안아줄 수 있어요?”“선 넘지 마.”사도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윤설이 손을 피했다.“친구끼리 포옹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인데, 이런 저를 위로해 줄 수는 있잖아요.”윤설이 울먹이면서 말했다.“예전에 말을 타는 장면을 촬영할 때, 제가 말한테 차인 거 기억나요? 도현 씨는 그날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저를 보러 병원까지 왔었죠. 그러고는 앞으로 위험한 장면을 찍을 때 대역을 쓰라고 했었죠. 그때는 많이 걱정해 주었으면서 오늘 죽을 뻔한 저를 한 번 안아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과거는 과거일 뿐이야.”“하지만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했잖아요. 친구끼리 안아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사도현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윤설을 안아주었다. 만약 안아주지 않으면 윤설은 다른 부탁을 해서라도 사도현과 닿으려고 할 것이다.“이번만 안아줄게.”두 사람은 예전처럼 끌어안았다. 사도현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윤설을 떼어놓으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