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다음 시즌을 촬영하는 마을에 큰 집을 짓고 사 대표님을 특별 게스트로 모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파리를 쫓아내듯이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으니까 각자 할 일 하러 가보세요. 내가 예능까지 참가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잖아요.”“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사 대표님께서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저희 예능에 참가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봤어요. 사 대표님이 촬영 장소에 오신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사 대표님을 만나서 기쁜 마음에 욕심을 부렸어요.”배경윤은 아부하는 장윤태를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연예계에서 지위 높은 사람한테 굽신거리고 아부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이 진절머리 났다.배경윤은 ‘힐링 공간’ 지난 시즌이 끝난 뒤에 방송된 메이킹 영상이 떠올랐다. 여러 연예인이 장윤태 감독을 에워싸고 아부하는 모습이 담겼는데 장윤태는 올곧고 정직한 모습을 보여줘서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오늘 직접 본 장윤태는 연예계의 다른 연예인과 다름없었다. 장윤태가 뒤돌아 가려고 할 때, 배경윤이 입을 열었다.“장 감독님,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장윤태는 사도현과 같은 방에서 나온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배경윤과 사도현이 연인이라면 사도현이 밀어주려는 연예인이 배경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럼요. 궁금하신 건 전부 다 물어보세요. 사 대표님이 직접 데려온 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섭외한 연예인보다 실물이 훨씬 예뻐요. 시청자들이 이 특별 게스트를 아주 좋아할 것 같네요.”“저... 윤설 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윤설 씨랑 얘기를 나누려고 왔거든요.”“아, 윤설 씨는...”장윤태는 윤설이라는 말에 낯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돈을 주고 강제적으로 투입된 윤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장윤태는 고정 멤버와 마찬가지로 윤설이 하차하길 바랐다.“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는 촬영이 시작된 후에야 마
윤설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음, 그랬던 것 같아요. 물광주사를 맞아야 해서 예약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배경윤 씨도 시술받고 싶으면 원장님을 소개해 드릴게요.”윤설은 턱을 살짝 쳐들고는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요? 안 어울리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요.”배경윤은 윤설의 도발에 넘어갔고 화가 나서 목청을 높였다.“배경윤 씨, 적당히 하시죠? 윤설 씨는 연예인이고 지금 촬영 준비 중이에요.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매니저 이혜정이 윤설 앞을 막아서면서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윤설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도현 씨 취향도 참 특이하네요. 왜 이런 여자를...”“특이하다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배경윤은 씩씩거리면서 윤설을 노려보았고 계속해서 따져 물으려고 했다.“감독님, 촬영 시작하지 않았나요? 왜 다들 여기에 모여있는 거죠?”윤설은 배경윤을 무시한 채 장윤태한테 물었다.“그게...”장윤태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시작해야 하는데 사도현 대표님이 직접 와주셔서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어요. 사도현 대표님의 뜻에 따라 촬영 시간을 정해도 될 것 같아요.”“아니요.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저희 때문에 촬영 시간이 미뤄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작진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촬영을 시작했다. 대본대로 윤설이 고정 멤버의 일원으로서 다른 게스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고 점심에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산을 오르려면 먼저 몇 공리나 걸어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배경윤은 윤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안 돼요!”배경윤이 나서서 장윤태한테 말했다.“장 감독님, 저희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게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좋은 제안인 것 같으니 오늘부터 촬영해도 될까요? 저랑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윤설과 함께
배경윤은 제작진이 전부 사도현의 말에 따른다는 것을 눈치챘다.“같이 출연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사도현은 배경윤의 표정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냈다.“당연하지!”배경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사도현 귓가에 대고 말했다.“왜 이곳까지 왔는지 잊은 거야? 윤설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알겠어. 내가 네 뜻대로 해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내가 뭘 해줘야 해?”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경윤을 쥐락펴락하는 사도현이 밉기만 했다.“별 건 아니고 앞으로 며칠 동안 내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해 줘.”사도현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너무 차갑게 굴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아프든지 말든지!’배경윤은 간신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네 말대로 다 할 테니까 얼른 감독님한테 하겠다고 말해. 넌 이곳의 왕이니까 네 말이라면 전부 들어줄 거야.”“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우리 경윤이는 참 예뻐.”사도현은 애완견을 만지듯이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현장에 있던 제작진은 두 사람이 귓속말하다가 눈만 마주치면 미소 짓는 모습에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배경윤이 사도현의 여자 친구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앞다투어 말했다.“배경윤 씨는 개성 있는 캐릭터라 예능을 잘할 것 같아요.”“이번 촬영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로 인기가 많아질 거예요. 국민 여신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죠!”“배경윤 씨가 투입되면 고정 멤버들과 어떤 케미를 선보일지 궁금해요. 한 프로그램에서 배경윤 씨와 윤설 씨, 두 여자 사이에 있는 사도현 대표님의 삼각관계를 은근슬쩍 드러내면 더 재밌을 것 같고요.”윤설이 인상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설마 특별 게스트로 촬영하려는 건 아니죠? 도현 씨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데 저런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고 이러는 거예요? 도현 씨, 정신 차려요!”“대표도 사람이고 우리랑 똑
출연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컴퓨터 앞에 앉아 실시간으로 촬영 화면을 보고 있던 장윤태는 편집할 수도 없는 회차가 될까 봐 불안해했다. 차라리 배경윤과 사도현을 보낸 뒤에 다시 촬영하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사도현과 배경윤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을 올랐다. 배경윤은 청순한 이미지와 다르게 힘이 세고 활발했다. 그 옆에서 따라 걷는 사도현은 오만하지만 허당인 매력을 선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지켜보던 장윤태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이 느낌대로만 가면 이번에는 시청률이 오를 거야! 이대로 유지해.”장윤태는 잔뜩 흥분한 채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예능 감독을 맡은 지 오래되었고 대박 난 예능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과 어떤 분위기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전에 윤설이 촬영한 여러 회차는 에피소드를 전부 말아먹어서 시청률이 하락했다. 하지만 사도현과 배경윤의 출연은 이 예능을 실시간 검색어로 올려줄 것이다. 산을 오를수록 안개가 자욱해서 톱스타들은 선뜻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산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후에 버섯을 딴다고 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올라갈까요?”신인 여자 아이돌 그룹 리더 민지가 천천히 멈춰서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맞아요. 나쁜 기운뿐만 아니라 독뱀도 있다고 들었어요. 잠시 쉬다가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윤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윤설의 매니저 이혜정과 매니저 보조 박지영은 대기 장소에 남아있었기에 분량을 스스로 따낼 수밖에 없었다.“힐링 예능을 찍는 거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예능을 찍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산에 독뱀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오후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겠다는 말도 웃기네요. 그때 가면 버섯이 아니라 떨어진 나뭇잎조차 없을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고는 그물버섯을 따서 가방에 넣었다. 배경윤은 지금까지 버섯을 제일 많이 딴 사람이었다. 배경윤의 가방에는 산 송
배경윤은 윤설의 말에 소름이 돋아서 윤설의 손을 떼어내고는 말했다.“윤설 씨가 이 산의 지형을 모를 리 없죠. 저녁에 마을 밖에 있는 호텔에서 편하게 쉬고 마을 사람한테 업혀서 마을을 나갔다고 들어오니 알 수밖에 없었겠네요.”그러자 윤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배경윤 씨, 장난이 심하네요. 저는 매일 저녁 칠순이랑 놀아주다가 방에 들어가서 자거든요.”“우리 솔직해져요. 배우로서 좋은 곳에서 대본을 검토할 수도 있는 거죠. 윤설 씨가 마을에서 자지 않는 걸 알아도 시청자들은 분명 이해해 줄 거예요!”배경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제작진은 나서서 말리는 대신,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세 대의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제작진은 매일 지각하는 윤설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 스태프는 마을 사람과 함께 윤설을 호텔에서 데리고 와야 했다. 아무도 윤설한테 뭐라고 하지 못했고 꾹 참기만 했다.그런데 특별 게스트로 투입된 배경윤이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얘기할 줄 아무도 몰랐다. 제작진은 속이 시원해졌다. “배경윤 씨, 카메라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요?”윤설이 이를 악문 채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가 배경윤을 보면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배경윤 씨,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 감독님이 전부 편집할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더니 윤설을 향해 말했다.“어차피 편집될 텐데,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저랑 같이 가겠다고 했죠? 조금 더 빨리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러 연예인은 뒤처져서 보이지 않았고 사도현은 몇십 미터 떨어져서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무,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윤설은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버섯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려고요.”배경윤은 윤설을 붙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도 배경윤을 따라잡지 못했다.“빨리 가요. 앞에 예쁜 버섯이 많으니까 우리 둘이 다 따
윤설은 그 틈을 타서 뒤로 일부러 넘어졌고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윤설, 괜찮아?”따라오던 사도현이 재빨리 윤설 곁으로 달려갔다. 윤설은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다가 바위에 머리가 부딪쳐서 피가 흘렀고 발목을 접질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도현 씨, 너무 아파요... 다리가 끊어진 건 아니겠죠?”“괜찮을 거야. 발목을 접질린 것 외에는 괜찮은 것 같아.”사도현은 윤설의 발목을 살펴보더니 외투를 벗어 짧은 나뭇가지를 다리에 묶어주었고 윤설을 등에 업었다. 배경윤은 윤설한테 따져 묻고 싶었을 뿐, 뒤로 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장면을 보면 배경윤이 일부러 윤설을 밀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괜, 괜찮은 거야?”배경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저리 비켜!”사도현은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늘 일은 정말 실망이야. 네가 이럴 줄은 몰랐어.”“내가 그런 거 아니야...”배경윤이 설명하려는데 사도현이 윤설을 업고 멀리 가버렸다.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면서 사도현은 윤설을 본체만체했고 배경윤한테 신경을 쏟아부었다.‘어쩌면 사도현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윤설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사도현의 행동을 보니 나조차도 내가 너무 우스워. 내가 어떻게 윤설을 대체할 수 있겠어. 사도현은 날 그저 윤설과 밀당하는 도구로 썼던 거야. 도구로 이용당하는 주제에 사도현의 마음을 얻었다고 확신하다니... 나 같은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사도현뿐만 아니라 여러 연예인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친 윤설을 등에 업고 가는 사도현을 보면 윤설을 포기한 것 같지 않았다. 게스트들은 윤설이 회사에서 버린 카드가 되었다는 것은 소문일 뿐이고 여전히 지지해 주는 연예인은 윤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경윤을 칭찬하던 게스트들이 윤설 편에 서서 입을 모아 배경윤을 비난했다
윤설이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바람에 녹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사도현과 제작진이 윤설을 데리고 마을 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 상태가 심각한 건가요?”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사도현이 다급히 다가가서 물었다.“골절하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일주일 정도 깁스하면 될 것 같아요. 심하게 다친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의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윤설은 골절이 아니라 발목을 접질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윤설은 사도현과 제작진이 얘기를 나누는 틈을 타서 의사의 계좌로 돈을 이체했고 의사는 윤설의 말대로 골절이라고 거짓말했다. 거액의 돈이 아니라면 의사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요즘 젊은이들은 돈만 있으면 별짓을 다 하네. 발목을 접질렸으면서 골절이라고 거짓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다행이에요.”사도현은 한시름을 놓았다. 윤설이 크게 다쳤다면 배경윤은 네티즌의 질타와 폭언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라서 배경윤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합의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현은 병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윤설을 내려다보았다.사도현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께서 골절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일주일 정도 입원하면 된대.”윤설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손을 내밀었다.“도현 씨, 제 곁에 오기도 싫은 거예요? 우리 정말 사랑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정말 속상해요.”사도현은 머뭇거리다가 윤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윤설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달래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상해서 배경윤한테 화풀이할 것이 뻔했다. 배경윤을 위해서라도 윤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예전에 있었던 일은 별로 회억하고 싶지 않아. 오늘 일어난 일은 내가 배경윤 대신 사과할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거만하게 굴던 사도현은 진심으로 윤설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기분이 풀릴 줄 알았던 윤설이 차갑게 웃더니 화를 냈다.“이건 저랑 배경윤
사도현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윤설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미안해요. 저도 그 일이 도현 씨에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어요. 저는 그저...”“하, 그럴 줄 몰랐다고?”사도현은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더니 말을 이었다.“누구보다 더 사랑하고 아껴준 여자가 드라마 여주인공 역을 맡고 싶어서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굴렀는데... 그게 나한테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숨겨두었던 상처가 다시 수면 위에 드러났다. 그 일 뒤로 사도현은 남녀 관계는 애초에 불순한 것이라고 여겼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도현은 순정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우습다고 여겼다.“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준 첫 번째 여자였어. 갓난아기보다 더 조심스럽게 널 돌보면서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어. 너를 위해서 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고 해안시에서 윤설한테 끌려다니는 멍청이라고 불렸어도 신경 쓰지 않았어. 널 사랑해서 한 짓들을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제일 잘 알 거라고 믿었는데, 내 마음에 감동해서 너도 날 더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뒹굴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이래도 널 꺾은 사람이 나인 것 같아?”사도현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고 배신당했을 때부터 생겨난 증오의 불씨가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사도현이 윤설의 턱을 붙잡고 차갑게 노려보았다.“사람은 역시 겉만 봐서는 몰라.”“그, 그게 아니에요! 도현 씨, 내 말 좀 들어봐요.”윤설은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먹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드라마 배역을 위해 일부러 도현 씨 아버지한테 접근한 건 맞아요. 내가 인기를 얻고 유명해져야만 당신 곁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씨 가문처럼 거대한 규모의 가업을 이어오는 가문에서 일개 무명 연예인을 며느리로 받아줄 리 없잖아요. 그래서 가문에 도움이 될 정도로 유명해지면 당신의 여자로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