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다음 시즌을 촬영하는 마을에 큰 집을 짓고 사 대표님을 특별 게스트로 모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사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파리를 쫓아내듯이 손을 내저었다.“그럴 필요 없으니까 각자 할 일 하러 가보세요. 내가 예능까지 참가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잖아요.”“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사 대표님께서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저희 예능에 참가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봤어요. 사 대표님이 촬영 장소에 오신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사 대표님을 만나서 기쁜 마음에 욕심을 부렸어요.”배경윤은 아부하는 장윤태를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연예계에서 지위 높은 사람한테 굽신거리고 아부하면서 이득을 얻으려는 모습이 진절머리 났다.배경윤은 ‘힐링 공간’ 지난 시즌이 끝난 뒤에 방송된 메이킹 영상이 떠올랐다. 여러 연예인이 장윤태 감독을 에워싸고 아부하는 모습이 담겼는데 장윤태는 올곧고 정직한 모습을 보여줘서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오늘 직접 본 장윤태는 연예계의 다른 연예인과 다름없었다. 장윤태가 뒤돌아 가려고 할 때, 배경윤이 입을 열었다.“장 감독님,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장윤태는 사도현과 같은 방에서 나온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배경윤과 사도현이 연인이라면 사도현이 밀어주려는 연예인이 배경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럼요. 궁금하신 건 전부 다 물어보세요. 사 대표님이 직접 데려온 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섭외한 연예인보다 실물이 훨씬 예뻐요. 시청자들이 이 특별 게스트를 아주 좋아할 것 같네요.”“저... 윤설 씨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윤설 씨랑 얘기를 나누려고 왔거든요.”“아, 윤설 씨는...”장윤태는 윤설이라는 말에 낯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돈을 주고 강제적으로 투입된 윤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장윤태는 고정 멤버와 마찬가지로 윤설이 하차하길 바랐다.“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는 촬영이 시작된 후에야 마
윤설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음, 그랬던 것 같아요. 물광주사를 맞아야 해서 예약하려고 전화한 거예요. 배경윤 씨도 시술받고 싶으면 원장님을 소개해 드릴게요.”윤설은 턱을 살짝 쳐들고는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요? 안 어울리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요.”배경윤은 윤설의 도발에 넘어갔고 화가 나서 목청을 높였다.“배경윤 씨, 적당히 하시죠? 윤설 씨는 연예인이고 지금 촬영 준비 중이에요.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 있으세요.”매니저 이혜정이 윤설 앞을 막아서면서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윤설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도현 씨 취향도 참 특이하네요. 왜 이런 여자를...”“특이하다고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배경윤은 씩씩거리면서 윤설을 노려보았고 계속해서 따져 물으려고 했다.“감독님, 촬영 시작하지 않았나요? 왜 다들 여기에 모여있는 거죠?”윤설은 배경윤을 무시한 채 장윤태한테 물었다.“그게...”장윤태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시작해야 하는데 사도현 대표님이 직접 와주셔서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어요. 사도현 대표님의 뜻에 따라 촬영 시간을 정해도 될 것 같아요.”“아니요.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저희 때문에 촬영 시간이 미뤄지면 안 되죠.”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도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작진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촬영을 시작했다. 대본대로 윤설이 고정 멤버의 일원으로서 다른 게스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고 점심에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산을 오르려면 먼저 몇 공리나 걸어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배경윤은 윤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안 돼요!”배경윤이 나서서 장윤태한테 말했다.“장 감독님, 저희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게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좋은 제안인 것 같으니 오늘부터 촬영해도 될까요? 저랑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윤설과 함께
배경윤은 제작진이 전부 사도현의 말에 따른다는 것을 눈치챘다.“같이 출연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사도현은 배경윤의 표정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냈다.“당연하지!”배경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사도현 귓가에 대고 말했다.“왜 이곳까지 왔는지 잊은 거야? 윤설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알겠어. 내가 네 뜻대로 해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건데?”“내가 뭘 해줘야 해?”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경윤을 쥐락펴락하는 사도현이 밉기만 했다.“별 건 아니고 앞으로 며칠 동안 내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해 줘.”사도현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너무 차갑게 굴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아프든지 말든지!’배경윤은 간신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네 말대로 다 할 테니까 얼른 감독님한테 하겠다고 말해. 넌 이곳의 왕이니까 네 말이라면 전부 들어줄 거야.”“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우리 경윤이는 참 예뻐.”사도현은 애완견을 만지듯이 배경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현장에 있던 제작진은 두 사람이 귓속말하다가 눈만 마주치면 미소 짓는 모습에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배경윤이 사도현의 여자 친구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앞다투어 말했다.“배경윤 씨는 개성 있는 캐릭터라 예능을 잘할 것 같아요.”“이번 촬영을 통해 청순한 이미지로 인기가 많아질 거예요. 국민 여신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죠!”“배경윤 씨가 투입되면 고정 멤버들과 어떤 케미를 선보일지 궁금해요. 한 프로그램에서 배경윤 씨와 윤설 씨, 두 여자 사이에 있는 사도현 대표님의 삼각관계를 은근슬쩍 드러내면 더 재밌을 것 같고요.”윤설이 인상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설마 특별 게스트로 촬영하려는 건 아니죠? 도현 씨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데 저런 여자의 마음을 얻겠다고 이러는 거예요? 도현 씨, 정신 차려요!”“대표도 사람이고 우리랑 똑
출연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컴퓨터 앞에 앉아 실시간으로 촬영 화면을 보고 있던 장윤태는 편집할 수도 없는 회차가 될까 봐 불안해했다. 차라리 배경윤과 사도현을 보낸 뒤에 다시 촬영하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사도현과 배경윤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을 올랐다. 배경윤은 청순한 이미지와 다르게 힘이 세고 활발했다. 그 옆에서 따라 걷는 사도현은 오만하지만 허당인 매력을 선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지켜보던 장윤태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이 느낌대로만 가면 이번에는 시청률이 오를 거야! 이대로 유지해.”장윤태는 잔뜩 흥분한 채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예능 감독을 맡은 지 오래되었고 대박 난 예능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과 어떤 분위기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전에 윤설이 촬영한 여러 회차는 에피소드를 전부 말아먹어서 시청률이 하락했다. 하지만 사도현과 배경윤의 출연은 이 예능을 실시간 검색어로 올려줄 것이다. 산을 오를수록 안개가 자욱해서 톱스타들은 선뜻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산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오후에 버섯을 딴다고 해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올라갈까요?”신인 여자 아이돌 그룹 리더 민지가 천천히 멈춰서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맞아요. 나쁜 기운뿐만 아니라 독뱀도 있다고 들었어요. 잠시 쉬다가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윤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윤설의 매니저 이혜정과 매니저 보조 박지영은 대기 장소에 남아있었기에 분량을 스스로 따낼 수밖에 없었다.“힐링 예능을 찍는 거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예능을 찍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산에 독뱀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오후에 올라가서 버섯을 따겠다는 말도 웃기네요. 그때 가면 버섯이 아니라 떨어진 나뭇잎조차 없을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고는 그물버섯을 따서 가방에 넣었다. 배경윤은 지금까지 버섯을 제일 많이 딴 사람이었다. 배경윤의 가방에는 산 송
배경윤은 윤설의 말에 소름이 돋아서 윤설의 손을 떼어내고는 말했다.“윤설 씨가 이 산의 지형을 모를 리 없죠. 저녁에 마을 밖에 있는 호텔에서 편하게 쉬고 마을 사람한테 업혀서 마을을 나갔다고 들어오니 알 수밖에 없었겠네요.”그러자 윤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배경윤 씨, 장난이 심하네요. 저는 매일 저녁 칠순이랑 놀아주다가 방에 들어가서 자거든요.”“우리 솔직해져요. 배우로서 좋은 곳에서 대본을 검토할 수도 있는 거죠. 윤설 씨가 마을에서 자지 않는 걸 알아도 시청자들은 분명 이해해 줄 거예요!”배경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제작진은 나서서 말리는 대신,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세 대의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 제작진은 매일 지각하는 윤설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 스태프는 마을 사람과 함께 윤설을 호텔에서 데리고 와야 했다. 아무도 윤설한테 뭐라고 하지 못했고 꾹 참기만 했다.그런데 특별 게스트로 투입된 배경윤이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얘기할 줄 아무도 몰랐다. 제작진은 속이 시원해졌다. “배경윤 씨, 카메라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요?”윤설이 이를 악문 채 배경윤한테 경고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가 배경윤을 보면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배경윤 씨,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 감독님이 전부 편집할 거예요.”배경윤은 피식 웃더니 윤설을 향해 말했다.“어차피 편집될 텐데,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저랑 같이 가겠다고 했죠? 조금 더 빨리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러 연예인은 뒤처져서 보이지 않았고 사도현은 몇십 미터 떨어져서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무, 무슨 얘기를 하려고요?”윤설은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버섯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려고요.”배경윤은 윤설을 붙잡고 미친 듯이 달렸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스태프도 배경윤을 따라잡지 못했다.“빨리 가요. 앞에 예쁜 버섯이 많으니까 우리 둘이 다 따
윤설은 그 틈을 타서 뒤로 일부러 넘어졌고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윤설, 괜찮아?”따라오던 사도현이 재빨리 윤설 곁으로 달려갔다. 윤설은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다가 바위에 머리가 부딪쳐서 피가 흘렀고 발목을 접질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도현 씨, 너무 아파요... 다리가 끊어진 건 아니겠죠?”“괜찮을 거야. 발목을 접질린 것 외에는 괜찮은 것 같아.”사도현은 윤설의 발목을 살펴보더니 외투를 벗어 짧은 나뭇가지를 다리에 묶어주었고 윤설을 등에 업었다. 배경윤은 윤설한테 따져 묻고 싶었을 뿐, 뒤로 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장면을 보면 배경윤이 일부러 윤설을 밀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괜, 괜찮은 거야?”배경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저리 비켜!”사도현은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늘 일은 정말 실망이야. 네가 이럴 줄은 몰랐어.”“내가 그런 거 아니야...”배경윤이 설명하려는데 사도현이 윤설을 업고 멀리 가버렸다.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면서 사도현은 윤설을 본체만체했고 배경윤한테 신경을 쏟아부었다.‘어쩌면 사도현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윤설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사도현의 행동을 보니 나조차도 내가 너무 우스워. 내가 어떻게 윤설을 대체할 수 있겠어. 사도현은 날 그저 윤설과 밀당하는 도구로 썼던 거야. 도구로 이용당하는 주제에 사도현의 마음을 얻었다고 확신하다니... 나 같은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사도현뿐만 아니라 여러 연예인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친 윤설을 등에 업고 가는 사도현을 보면 윤설을 포기한 것 같지 않았다. 게스트들은 윤설이 회사에서 버린 카드가 되었다는 것은 소문일 뿐이고 여전히 지지해 주는 연예인은 윤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경윤을 칭찬하던 게스트들이 윤설 편에 서서 입을 모아 배경윤을 비난했다
윤설이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바람에 녹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사도현과 제작진이 윤설을 데리고 마을 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 상태가 심각한 건가요?”의사가 검사를 마친 뒤, 사도현이 다급히 다가가서 물었다.“골절하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일주일 정도 깁스하면 될 것 같아요. 심하게 다친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의사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윤설은 골절이 아니라 발목을 접질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윤설은 사도현과 제작진이 얘기를 나누는 틈을 타서 의사의 계좌로 돈을 이체했고 의사는 윤설의 말대로 골절이라고 거짓말했다. 거액의 돈이 아니라면 의사가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요즘 젊은이들은 돈만 있으면 별짓을 다 하네. 발목을 접질렸으면서 골절이라고 거짓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다행이에요.”사도현은 한시름을 놓았다. 윤설이 크게 다쳤다면 배경윤은 네티즌의 질타와 폭언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라서 배경윤의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합의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현은 병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윤설을 내려다보았다.사도현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께서 골절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일주일 정도 입원하면 된대.”윤설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손을 내밀었다.“도현 씨, 제 곁에 오기도 싫은 거예요? 우리 정말 사랑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정말 속상해요.”사도현은 머뭇거리다가 윤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윤설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달래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상해서 배경윤한테 화풀이할 것이 뻔했다. 배경윤을 위해서라도 윤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예전에 있었던 일은 별로 회억하고 싶지 않아. 오늘 일어난 일은 내가 배경윤 대신 사과할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거만하게 굴던 사도현은 진심으로 윤설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기분이 풀릴 줄 알았던 윤설이 차갑게 웃더니 화를 냈다.“이건 저랑 배경윤
사도현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윤설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미안해요. 저도 그 일이 도현 씨에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어요. 저는 그저...”“하, 그럴 줄 몰랐다고?”사도현은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더니 말을 이었다.“누구보다 더 사랑하고 아껴준 여자가 드라마 여주인공 역을 맡고 싶어서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굴렀는데... 그게 나한테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숨겨두었던 상처가 다시 수면 위에 드러났다. 그 일 뒤로 사도현은 남녀 관계는 애초에 불순한 것이라고 여겼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도현은 순정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우습다고 여겼다.“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준 첫 번째 여자였어. 갓난아기보다 더 조심스럽게 널 돌보면서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어. 너를 위해서 난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고 해안시에서 윤설한테 끌려다니는 멍청이라고 불렸어도 신경 쓰지 않았어. 널 사랑해서 한 짓들을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제일 잘 알 거라고 믿었는데, 내 마음에 감동해서 너도 날 더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아버지랑 침대에서 뒹굴었을 때 무슨 생각 했어? 이래도 널 꺾은 사람이 나인 것 같아?”사도현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고 배신당했을 때부터 생겨난 증오의 불씨가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사도현이 윤설의 턱을 붙잡고 차갑게 노려보았다.“사람은 역시 겉만 봐서는 몰라.”“그, 그게 아니에요! 도현 씨, 내 말 좀 들어봐요.”윤설은 후회의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먹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드라마 배역을 위해 일부러 도현 씨 아버지한테 접근한 건 맞아요. 내가 인기를 얻고 유명해져야만 당신 곁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씨 가문처럼 거대한 규모의 가업을 이어오는 가문에서 일개 무명 연예인을 며느리로 받아줄 리 없잖아요. 그래서 가문에 도움이 될 정도로 유명해지면 당신의 여자로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