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강아지가 제일 무섭단 말이야! 강아지가 벌써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사도현은 배경윤의 뒤에 숨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성인 남자가 드라마 속 청순가련 여주인공보다도 연약했다.배경윤은 입술을 깨문 채 겨우 웃음을 참더니 말했다.“우리 도현이 무서웠어? 괜찮아. 이 누나가 있는 한, 강아지는 널 어쩌지 못할 거야. 누나 따라 빨리 와야 해. 또 소리 지르면 강아지들이 한 번에 몰려올 거야.”배경윤은 사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걷기 힘든 진흙 길을 걸었고 예능 >의 촬영 장소에 겨우 도착했다.“드디어 다 왔어! 드디어...”사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지옥에서 도망친 것 같은 사도현의 모습에 배경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엄살 부리지 마.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면 도시처럼 잘 닦인 길이 없을 수도 있어. 이런 마을에서 강아지와 진흙 길은 아주 흔한 거라고!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 왜 나 따라온 거야?”“그걸 몰라서 물어?”사도현은 강가로 가서 발에 묻은 흙을 씻었고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널 따라온 것 같아?”“그런 것 같은데?”배경윤의 말에 사도현은 어이가 없었다.“난 누가 또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닐까 봐 옆에서 보살펴 주려고 했어. 그런데 이 고생을 하고도 듣는 말이 죄다 잔소리라니... 잘해줘도 소용없나 봐. 나만 바보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바쳤지!”“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가 널 보살폈어! 네가 소리 지르고 징징대지 않았으면 난 진작에 촬영 장소에 도착했을 거라고!”“그래.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너한테 민폐 끼쳤어. 정말 미안하다. 됐어?”사도현은 화가 솟구쳐 올랐다. 배경윤을 돕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직접 운전해서 마을까지 왔는데 배경윤한테서 고맙다는 말 대신 빈정 상하는 말만 듣게 되었다.
가수 진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저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데뷔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 봐요! 마을에서 마음 편하게 있으면서 힐링하는 촬영인데 윤설은 마을의 물도 마시지 않고 고급 브랜드 물만 마시겠다잖아요. 아니, 이 마을에 그런 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일부러 저를 난처하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진혁은 요리를 맡았고 고정 멤버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다. 모두의 인정을 받으면서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윤설이 투입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쌀이 덜 있었다거나 야채에 벌레가 있다면서 트집을 잡더니 고급 브랜드 물로 지은 밥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했다.“데뷔한 지 오래되었다고 기강 잡는 선배는 봤어도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지금은 사람들한테 잊혔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저도 인기가 많은 가수였다고요! 그런데 저런 여자 때문에 촬영 분위기가 흐려지고 저의 요리가 지적받는 건 말도 안 돼요. 윤설이 하차하지 않으면 제가 하차하겠어요!”진혁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씩씩거렸다. 진혁이 윤설을 못마땅해하다가 결국 하차하겠다고 하자 사회자 하은진이 나서서 말렸다.“진혁 씨, 그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요. 윤설은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밀어주는 연예인이라서 갑자기 투입된 거예요. 그런데 내쫓겠다고 해버리면 윈스 엔터테인먼트와 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윈스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계를 주름잡는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괜히 건드렸다가 소리 소문 없이 묻힐 바에는 가만히 있는 게 나아요.”“제가 듣기로는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윤설을 버린 카드 취급 한대요. 이 예능에서 활약하지 못하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다던데요? 어차피 회사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니 내쫓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배우 강지훈도 윤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잠시만요. 진정하고 제 말부터 들어봐요.”하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주주들이 윤설 대
진혁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사 대표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네요. 오늘 특별 게스트로 오신 거예요? 아니면 촬영 현장이 어떤지 보러오신 거예요? 제작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촬영은 저녁쯤에 끝났기에 사도현이 특별 게스트로 온 것인지, 촬영 현장을 보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배경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설 씨를 찾으러 왔어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윤설 씨를요?”진혁은 윤설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윤설 씨 별명이 백설 공주잖아요. 공주님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겠어요.”“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윤설 씨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에요?”배경윤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진흙 길을 한참 걸어서 촬영 장소에 왔는데 윤설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지금은 다른 곳에 있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이곳에 나타날 거예요.”진혁이 차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요?”배경윤이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에 방이 많지만 공주님은 이런 누추한 곳을 싫어하거든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호텔로 달려갔어요. 아, 마을로 들어오는 길 중간부터 진흙 길이잖아요? 마을 사람에게 돈을 주고 업혀서 마을을 빠져나갔대요. 마을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좋아하더라고요.”“흠!”하은진이 진혁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눈짓했다. 진혁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윤설 씨는 더위를 잘 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에어컨도 없고 씻기도 불편하니까 좋은 곳에서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죠. 배우로서 컨디션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하니까요.”“하, 꼴에 연예인이라고 잘난 척하는 거잖아요. 뭘 또 그렇게 포장해서 얘기해요?”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윤설 씨를 만나려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네요?”배경윤은 진혁과 하은진한테 물었다.“맞아요. 지금 시간이 늦었기도
“좋아요.”“싫어요!”사도현과 배경윤이 동시에 외쳤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한방에서 자고 싶어 했고 배경윤은 이미 헤어진 마당에 굳이 한방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분이 한방을 쓰신다면 씻고 바로 쉬면 돼요. 내일 아침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 테니 저희랑 같이 식사하면 되고요. 만약 한방을 쓰기 싫다면...”하은진이 마당 구석에 있는 외양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그럼 한 분은 외양간에서 주무셔야겠네요. 침대를 갖다 놓고 휴식할 수는 있지만 외양간에 냄새가 나서 잠잘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새벽에 소가 날뛰는 일도 있어서 위험하고요.”“네? 정말 외양간밖에 없어요?”배경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예능 >에서 제작비를 아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외양간에서 자야 할 정도로 방이 적을 줄은 몰랐었다.“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사도현이 배경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보다시피 이분과 평범한 사이는 아니라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분이랑 둘이 잘 얘기해 볼게요.”“누가 너랑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인 줄 알고 오해하시잖아.”배경윤이 사도현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도현은 배경윤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배경윤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바보야, 내 말이 틀렸어? 난 너랑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곁에서 지켜보던 하은진과 진혁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결정하시면 저쪽 방으로 가면 돼요. 방에 세면용품과 간식도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두 분 모두 좋은 밤 되시고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하은진은 헤벌쭉 웃고 있는 진혁을 끌어당기면서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현과 배경윤이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하은진은 두 사람이 연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방을 쓰는 제안을 했는데 윈스 엔터테인먼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