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하얀색 정장을 입은 윤설은 진한 화장을 했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톱스타의 느낌이 물씬 났다. 윤설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더니 배경윤한테 눈웃음을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하지만 배경윤은 미소로 화답할 생각이 없었다.“윈스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마주칠 일이 없죠. 그리고 같은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어쩌다 한 번 마주칠 수도 있는 거고요. 우리 친하지 않으니 다음부터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세요.”배경윤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나약한 척, 불쌍한 척, 착한 척하는 여자를 제일 싫어했다. 더군다나 윤설은 사도현이 오랫동안 아끼고 보살펴준 여자였다. 그런 윤설이 눈에 거슬렸고 질투 난 배경윤이 윤설한테 친절할 리가 없었다.“저기요, 말 가려서 하세요.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설 씨가 인사해 준 걸 영광으로 아셔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윤설 씨 팬들한테 공격당할걸요?”윤설의 매니저가 씩씩대면서 말했다. 윤설은 인기가 많았기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기고만장해졌으니 쌀쌀맞게 말하는 배경윤이 거슬렸을 것이다. 아무리 배씨 가문 아가씨라도 윤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윤설은 극성팬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암암리에 소문을 내면 소문 상대를 물고 뜯어서 매니저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어머, 정말 무섭네요. 연예계에서 윤설 씨 팬들은 팬덤 중에서 제일 악질이라던데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욕해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는데, 멀리하려고 하니까 또 이렇게 마주치네요. 그럼 또 욕해보시던가요.”배경윤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에게 몇 배로 갚아주는 성격이라 반격하기 시작했다.“내 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요. 애초에 청순한 이미지로 뜬 내 친구를 따라 해서 인지도를 쌓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돈을 빨아먹으면서 극성팬을 제외하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정말... 내가 만약 이 회사 대표였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예요. 돈은 돈대로 쓰면서 수익이라고는 쥐꼬리만큼 벌었으니, 차라
윤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도현 씨, 왔어요? 난 배경윤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저한테 욕해서... 하지만 저는 연예인이기 전에 한낱 사람이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배경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고 차갑게 말했다.“그럼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사연 많은 윤설 씨. 위대한 톱스타 윤설 씨한테 무례하게 굴고 모욕한 저는 정말 나쁘고 미친년이에요. 이러면 기분 좋아요?”“배경윤 씨, 저는 그런 뜻이 아닌데 왜 이러세요...”윤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도현을 쳐다보았다.“내가 누구한테 먼저 시비 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도현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요.”사도현이 윤설을 흘겨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드라마 촬영 때 그렇게 연기했더라면 진작에 돈을 벌었을 텐데...”“도현 씨!”윤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늘 윤설을 예뻐해 주었던 사도현이 다른 여자를 위해서 윤설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풉!”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참지 못하고 배를 끌어안은 채 웃었다.‘회사 대표도 멍청한 여자한테 투자했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사도현은 배경윤이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에 걸렸던 돌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고 곧바로 윤설을 향해 말했다.“마침 잘 왔어, 너랑 할 얘기가 있었거든.”윤설은 두 눈이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현 씨, 나도 도현 씨한테 할 얘기가 있었어요. 같이 사무실로 갈까요?”윤설은 사도현의 마음이 진작에 변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만회하려고 무진장 애썼었다. 하지만 냉철하고 똑똑한 사도현한테 그런 유치한 수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현은 윤설만 보면 구역질이 나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단둘이 얘기하자고 하니 윤설은 다시 마음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했다.“따라와.”사도현은 배경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윤설을 향해 말했고 뒤돌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 사도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이때 매니저가 눈치 있게 대답했다.“아, 아니에요. 대표님과 윤설 씨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전달하실 사항이 있으면 조금 있다가 윤설 씨한테서 들으면 되니깐요.”매니저는 윤설이 사도현과 다시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회사 대표 사도현이 윤설을 계속 밀어주지 않는다면 얼마 가지 못하고 연예인으로서의 가치를 잃기에 사람들한테 잊힐 것이고 다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들어오라면 들어와. 담당 연예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매니저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사도현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고 인상을 찌푸렸다. 배경윤의 모진 말에 상처받아서 짜증 났는데 세 사람이 눈앞에서 수작질을 부리고 있으니 당장 발로 걷어차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그, 그럼...”두 매니저는 윤설을 힐끗 쳐다보며 지시하기를 기다렸다. 매니저는 윤설이 충견처럼 부려 먹어서 행동하기 전에 윤설이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조금 전에 배경윤과 말싸움이 일어난 것도 윤설이 암묵적으로 허락했기에 매니저가 나섰던 것이다. “도현 씨 말대로 해요. 회사에서 새로운 제안을 하려는 것 같으니까 함께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윤설이 매니저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자 두 매니저는 재빨리 대표 사무실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사도현은 손으로 턱을 괴고 편하게 앉아 있었지만, 대표로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사도현 앞에만 서면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다 모였으니 본론만 얘기할게. 요즘 인기가 많은 컨셉은 걸크러시지만 윤설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이사회에서 윤설에게 지원하던 것의 일부분을 철회하라는 의견을 제출했고 윤설은 곧 A 국에 가서 연기를 배우게 될 거야. 앞으로는 스케줄 없이 출국할 준비만 하면 돼.”사도현은 회사의 입장을 간략하게 말했고 윤설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뭐, 뭐라고요?”매니저는 적잖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냐고?”사도현은 피식 웃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윤설을 노려보았다.“네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당장 네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은데 감히 뭘 더 욕심내는 거지?”윤설은 눈시울을 붉히고는 사도현의 팔을 붙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난 도현 씨가 그 일 때문에 나랑 멀어진 줄 알았는데, 사실 아직 나를 사랑하는 거죠? 그렇다면 나한테 기회를 줘요,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요.”“그럴 일 없으니까 가식 떨지 마.”사도현은 윤설의 손을 내치고는 차갑게 말했다.“예전에는 정말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고 너랑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네가 한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난 욕심 많은 여자라면 끔찍해서 치를 떠는 사람이야. 널 죽이고 싶을 만큼 싫지만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떠난다면 좋은 기억만 가져갈 수 있게 해주지.”윤설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만 도현 씨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도현 씨 아버지랑...”“닥쳐!”사도현은 윤설의 말을 끊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 두 사람 진짜 역겹고 더러워.”“도현 씨,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날 아껴주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도현 씨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러니 저를 외국으로 보내지 말고 조연이라도, 예능이라도 다시 출연하게 해주세요. 처음부터 다시...”“넌 처음부터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아.”사도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윈스 엔터테인먼트는 자선 사업 같은 건 하지 않아. 손해 볼 장사도 하지 않으니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줘. 되돌릴 수 없고 넌 꼭 떠나야만 해.”“그래요, 당신의 결정 때문에 내가 어떻게 변할지 두고 봐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부 당신 탓일 거예요.”윤설은 연약한 척, 불쌍한 척해도 사도현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자 사도현보다 더 많은 권력을
윤설은 매니저와 함께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배경윤이 문을 열고 굴러들어 왔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굳었고 정적이 흘렀다.“아, 망했어.”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고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아,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배경윤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 수치스럽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당장이라도 다른 도시로 이사 가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본 윤설은 거만하게 배경윤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배경윤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가 하는 말 엿듣고 있었나 보죠?”“그럴 리가요! 제가 엿들을 게 뭐 있다고요. 저는 절대로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지나가다가 하필 이 앞에서 발이 미끄러졌어요.”배경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저는 배경윤 씨가 재벌가 아가씨라서 암묵적인 원칙 같은 건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사람의 소양과 출신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남의 말을 엿듣는 무식한 짓은 한 적이 없거든요.”윤설은 이미 사도현 앞에서 진실한 모습을 드러냈기에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배경윤을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뭘 또 그렇게 말하세요. 저는 무식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제 말이 틀렸나요? 분명 엿들은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에 부모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저, 저는...”배경윤은 입을 삐죽 내민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는 것은 확실히 비도덕적인 행동이었다. 배경윤이 기세에서 밀리자 사도현이 나서서 차갑게 말했다.“엿들으면 뭐 어때? 난 경윤의 남자 친구니까 경윤은 내가 다른 여자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을 권리가 있어. 난 경윤이가 엿듣기만 해서 좀 섭섭한걸? 보통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있으면 들이닥쳐서 내 남자 친구를 건드리지 말라고 할 텐데 말이야.”“남, 남자
배경윤의 말에 화가 단단히 난 사도현이 차갑게 물었다.“날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거야?”“너도 날 그렇게 생각했다면서?”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반문했다.“난 너랑 함께하면서 나의 진심이 느껴졌을 거라고 여겼는데, 다른 사람 말 한마디에 내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거야?”사도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윤설과 다른 여자라고 여겼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아무도 흔들지 못할 거라고 여겼지만 윤설의 말에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과 행복이 배경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경윤의 말에 더 크게 실망했다.“그래, 난 적어도 윤설 씨가 나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해. 네가 윤설 씨한테 해준 거랑 나를 대하는 걸 보면 너무 차이 나서 내가 불쌍해 보여. 하긴, 윤설 씨는 네가 애지중지 아낀 장미꽃이고 나는 너의 여러 소문 상대와 다름없는 한낱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하겠지.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솔직해지자.”배경윤은 자존심이 강했고 감정적인 면에서는 유독 까다로웠다. 사도현과 만나면서 사업에 더 집중한 것도 불안감을 제어하지 못해서였다. 사도현은 이름난 바람둥이었고 곁에 수많은 여자가 따라붙었기에 사도현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으려면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배경윤은 노력만 하면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여겼지만 자기기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도현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윤설이었고 배경윤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네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없어.”사도현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그래, 난 피도 눈물도 없는 바람둥이고 너랑 만난 것도 심심하고 외로워서, 윤설 때문에 구겨진 내 자존심을 다시 찾고 싶어서 그런 거야. 맞아, 너는 그저 하룻밤 자고 다시 안 보는 그런 여자야.”“
사도현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네 목적에 도달했으니 이제는 내 눈앞에서 꺼져 줄래?”“도현 씨!”윤설은 화가 나서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뒤따라간 매니저가 고민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배씨 가문 아가씨를 진심으로 좋아한 게 맞나보네요. 그래서 이사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윤설 씨를 멀리 보내려고 한 거고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앞으로 골치 아파질 거예요.”“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골치 아픈 년을 치울 생각이나 해.”윤설은 립스틱을 바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혹시...”매니저는 윤설의 표정을 보고 바로 눈치챘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갓 데뷔한 윤설은 밝고 순진해서 하얀 꽃 같았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남동생의 도박 빚을 청산하기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군말 없이 지금까지 버텨내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윤설은 어느샌가 연예계의 어둠 속에 갇혀서 권력과 돈을 탐내고 자아를 잃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첫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없었다. 사도현을 이용해서 더 높은 자리에 갈 수 있었지만 스스로 그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한편,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돌아온 차설아는 사도현이 준 명함을 가지고 차성철 방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대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차성철은 방에서 바람과 함께 바둑을 두었고 그 덕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차설아와 싸운 며칠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차성철이 그동안 여러 시련을 견디면서 다져진 성격 때문에 쉽게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차성철은 차설아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 매일 바람과 함께 바둑을 두었고 혹시나 차설아가 찾아왔을 때 자거나 방에 없어서 화해하지 못할까 봐 밤을 새웠다. 그래서 차설아가 먼저 찾아와줘서 기분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하지만 여전히 거만하게 굴었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바둑을 두다가 담담하게 말했다.“전 남편이랑 얘기하지, 여기는 왜 온 거야? 난 너 같은 동생을 감당하지 못하
상자 안에는 검붉은색이 나는 버섯 젤리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차설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육영지라는 건데 태세라고 불리기도 해. 천년이라는 시간을 머금고 자란 태세는 드물고 보통 하얀색을 띠거든. 상자 안에 있는 건 만년 태세라서 검붉은색을 띠는 거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알려져서 전 세계 재벌가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사고 싶어서 찾는 중이래. 그런데 그게 성심 전당포에 있다니,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바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에 컴퓨터뿐만 아니라 보물에 관한 서적을 보면서 육영지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오늘 보게 되어 무척 신이 났다. “성철 형은 여동생밖에 몰라서 이런 귀중한 걸 선물로 주는구나... 스파크의 혼수가 육영지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차씨 가문의 문턱이 닳도록 많은 사람이 오겠네. 난 이 육영지를 위해서라도 스파크를 유혹해야겠어!”바람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차설아는 바람을 노려보며 말했다.“고맙지만 입 좀 다물어줄래?”차설아는 육영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오빠, 너무 귀중한 물건이고 보물 중의 보물이라 오빠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나한테는 과분한 선물이야.”차설아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귀중한 물건은 있어야 할 곳 즉 성심 전당포에 있어야 했다. 성심 전당포는 보안 요원과 시설이 갖춰졌고 수장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 보물을 놓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차성철은 손을 내저었다.“성심 전당포에 보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거 하나쯤 너 준다고 큰일 나지 않아. 네가 직접 이 물건을 보관해, 그리고 누가 아프면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하지만 오빠, 이건...”“됐어, 넌 내 여동생이자 내 모든 것을 물려받을 상속자나 다름없어. 미리 주는 건 그전에 너한테 모진 말을 해서 사과하는 의미라고 받아들여. 네가 안 받으면 날 용서하지 않은 걸로 알고 화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할게.”차성철이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