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은 매니저와 함께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배경윤이 문을 열고 굴러들어 왔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굳었고 정적이 흘렀다.“아, 망했어.”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했고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아,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배경윤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려고 먼저 입을 열었다. 수치스럽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당장이라도 다른 도시로 이사 가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본 윤설은 거만하게 배경윤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배경윤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리가 하는 말 엿듣고 있었나 보죠?”“그럴 리가요! 제가 엿들을 게 뭐 있다고요. 저는 절대로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지나가다가 하필 이 앞에서 발이 미끄러졌어요.”배경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저는 배경윤 씨가 재벌가 아가씨라서 암묵적인 원칙 같은 건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한 사람의 소양과 출신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남의 말을 엿듣는 무식한 짓은 한 적이 없거든요.”윤설은 이미 사도현 앞에서 진실한 모습을 드러냈기에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배경윤을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뭘 또 그렇게 말하세요. 저는 무식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제 말이 틀렸나요? 분명 엿들은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에 부모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저, 저는...”배경윤은 입을 삐죽 내민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는 것은 확실히 비도덕적인 행동이었다. 배경윤이 기세에서 밀리자 사도현이 나서서 차갑게 말했다.“엿들으면 뭐 어때? 난 경윤의 남자 친구니까 경윤은 내가 다른 여자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을 권리가 있어. 난 경윤이가 엿듣기만 해서 좀 섭섭한걸? 보통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있으면 들이닥쳐서 내 남자 친구를 건드리지 말라고 할 텐데 말이야.”“남, 남자
배경윤의 말에 화가 단단히 난 사도현이 차갑게 물었다.“날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거야?”“너도 날 그렇게 생각했다면서?”배경윤이 피식 웃으면서 반문했다.“난 너랑 함께하면서 나의 진심이 느껴졌을 거라고 여겼는데, 다른 사람 말 한마디에 내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거야?”사도현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사도현은 배경윤을 윤설과 다른 여자라고 여겼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아무도 흔들지 못할 거라고 여겼지만 윤설의 말에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사도현은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과 행복이 배경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경윤의 말에 더 크게 실망했다.“그래, 난 적어도 윤설 씨가 나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해. 네가 윤설 씨한테 해준 거랑 나를 대하는 걸 보면 너무 차이 나서 내가 불쌍해 보여. 하긴, 윤설 씨는 네가 애지중지 아낀 장미꽃이고 나는 너의 여러 소문 상대와 다름없는 한낱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하겠지.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솔직해지자.”배경윤은 자존심이 강했고 감정적인 면에서는 유독 까다로웠다. 사도현과 만나면서 사업에 더 집중한 것도 불안감을 제어하지 못해서였다. 사도현은 이름난 바람둥이었고 곁에 수많은 여자가 따라붙었기에 사도현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으려면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배경윤은 노력만 하면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여겼지만 자기기만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사도현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윤설이었고 배경윤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네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없어.”사도현은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그래, 난 피도 눈물도 없는 바람둥이고 너랑 만난 것도 심심하고 외로워서, 윤설 때문에 구겨진 내 자존심을 다시 찾고 싶어서 그런 거야. 맞아, 너는 그저 하룻밤 자고 다시 안 보는 그런 여자야.”“
사도현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네 목적에 도달했으니 이제는 내 눈앞에서 꺼져 줄래?”“도현 씨!”윤설은 화가 나서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뒤따라간 매니저가 고민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배씨 가문 아가씨를 진심으로 좋아한 게 맞나보네요. 그래서 이사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윤설 씨를 멀리 보내려고 한 거고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앞으로 골치 아파질 거예요.”“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골치 아픈 년을 치울 생각이나 해.”윤설은 립스틱을 바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혹시...”매니저는 윤설의 표정을 보고 바로 눈치챘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갓 데뷔한 윤설은 밝고 순진해서 하얀 꽃 같았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고 남동생의 도박 빚을 청산하기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군말 없이 지금까지 버텨내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윤설은 어느샌가 연예계의 어둠 속에 갇혀서 권력과 돈을 탐내고 자아를 잃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첫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없었다. 사도현을 이용해서 더 높은 자리에 갈 수 있었지만 스스로 그 기회를 버린 셈이었다.한편, 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돌아온 차설아는 사도현이 준 명함을 가지고 차성철 방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대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차성철은 방에서 바람과 함께 바둑을 두었고 그 덕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차설아와 싸운 며칠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차성철이 그동안 여러 시련을 견디면서 다져진 성격 때문에 쉽게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차성철은 차설아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 매일 바람과 함께 바둑을 두었고 혹시나 차설아가 찾아왔을 때 자거나 방에 없어서 화해하지 못할까 봐 밤을 새웠다. 그래서 차설아가 먼저 찾아와줘서 기분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하지만 여전히 거만하게 굴었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바둑을 두다가 담담하게 말했다.“전 남편이랑 얘기하지, 여기는 왜 온 거야? 난 너 같은 동생을 감당하지 못하
상자 안에는 검붉은색이 나는 버섯 젤리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차설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육영지라는 건데 태세라고 불리기도 해. 천년이라는 시간을 머금고 자란 태세는 드물고 보통 하얀색을 띠거든. 상자 안에 있는 건 만년 태세라서 검붉은색을 띠는 거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알려져서 전 세계 재벌가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사고 싶어서 찾는 중이래. 그런데 그게 성심 전당포에 있다니,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바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에 컴퓨터뿐만 아니라 보물에 관한 서적을 보면서 육영지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오늘 보게 되어 무척 신이 났다. “성철 형은 여동생밖에 몰라서 이런 귀중한 걸 선물로 주는구나... 스파크의 혼수가 육영지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차씨 가문의 문턱이 닳도록 많은 사람이 오겠네. 난 이 육영지를 위해서라도 스파크를 유혹해야겠어!”바람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차설아는 바람을 노려보며 말했다.“고맙지만 입 좀 다물어줄래?”차설아는 육영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오빠, 너무 귀중한 물건이고 보물 중의 보물이라 오빠한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나한테는 과분한 선물이야.”차설아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귀중한 물건은 있어야 할 곳 즉 성심 전당포에 있어야 했다. 성심 전당포는 보안 요원과 시설이 갖춰졌고 수장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 보물을 놓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차성철은 손을 내저었다.“성심 전당포에 보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거 하나쯤 너 준다고 큰일 나지 않아. 네가 직접 이 물건을 보관해, 그리고 누가 아프면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하지만 오빠, 이건...”“됐어, 넌 내 여동생이자 내 모든 것을 물려받을 상속자나 다름없어. 미리 주는 건 그전에 너한테 모진 말을 해서 사과하는 의미라고 받아들여. 네가 안 받으면 날 용서하지 않은 걸로 알고 화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할게.”차성철이
바람은 식겁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차설아와 차성철은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차설아는 갑자기 명함이 생각나서 은근슬쩍 차성철을 떠보았다.“오빠, 가면을 너무 오래 끼고 있어서 불편하지 않아?”“예전에는 무거워서 불편했는데 지금은 적응해서 괜찮아.”“나 인터넷에서 오빠 예전 사진 봤는데 진짜 잘생겼더라? 눈은 엄마를 닮았고 얼굴형은 아빠를 닮았고 분위기는 할아버지랑 비슷해. 역시 우리 차씨 가문의 장남, 완벽해!”“당연하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데 만약 얼굴이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외모로 해안시에서 먹고 살았다니까? 사실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에 내 잘생긴 외모가 한몫했어.”차성철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넘쳤다. 잘생긴 얼굴로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었고 아무도 차성철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가면을 벗고 추악한 반쪽 얼굴을 볼 때마다 성도윤에 대한 원한이 깊어져서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만약 차설아가 없었더라면 목숨 걸고 성도윤과 싸웠을 것이다.“만약 오빠를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아니, 백 퍼센트는 아닌데 그래도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어떨 것 같아?”차설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다정하던 차성철이 정색한 채 물었다.“설마 성형하라는 뜻이야?”“아니, 성형은 아니고 회복 수술이야. 오빠의 완벽한 얼굴이 사고로 그렇게 되었으니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렇게 두기에는 아깝잖아.”“싫어!”차성철은 단번에 거절했다.“복수하기 전까지는 내 얼굴에 손대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침을 꿀꺽 삼켰고 식은땀을 흘렸다. 차성철이 거절할 줄은 알았지만 단번에 거절할 줄 몰랐고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당황했다.“왜 복수하기 전에는 얼굴에 손대지 않는 건데?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 거절하는 거야?”차설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흉터는 치욕스러운 과거와 같아. 회복 수술을 한다면 내 정신을 해이하게 해서 싸우려는 마음이 줄어들 거야. 그럴 때마다 이 흉터
차성철은 원이와 달이의 말에 수술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차성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 뜻대로 하, 하든지!”차설아의 두 눈에 빛이 반짝였고 신이 나서 차성철을 와락 껴안았다.“오빠, 정말 수술받겠다는 거지?”“내가 거절하면 달이랑 원이를 설득해서 네 편으로 만들 거 아니야. 난 두 아이를 내 목숨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럴 때는 고집을 꺾고 네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았어.”차성철은 억울한 어조로 말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아이는 희망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기에 차성철은 달이와 원이를 친자식처럼 여겼고 두 아이를 끔찍이 아꼈다. 두 아이와 멀어지지 않기 위해 회복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던 것이다.“오빠, 큰 결심이었을 텐데 하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수술받고 나면 오빠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차설아는 너무나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는 성형외과 의사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빠가 마음 바꾸기 전에 바로 예약해야겠어. 아, 내일로 하면 어때?”“네 뜻대로 해.”차성철은 손을 내저었고 차설아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설아와 두 아이만 행복할 수 있다면 차성철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회복 수술은 다음 날 아침 10시로 예약했고 차설아와 배경윤이 함께 가기로 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바람은 무조건 같이 갈 거라고 고집부렸다.“큰 수술도 아닌데 보호자가 왜 이렇게 많아? 나 혼자 와도 된다니까 그러네.”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차성철은 평소에 보던 모습과는 달리 온순했고 편한 이웃 오빠 같았다. 이런 차성철을 보면서 누구도 사람들의 공포를 샀던 자정 살인마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때 금테 안경을 낀 의사가 들어와서 수술에 관한 주의점을 알려주었다.“이 수술은 간단한 시술도 아니고 큰 수술도 아니에요. 제일 중요한 건 마취제인데 용량이 조금만 많아져도 환자는 이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 될 수 있어요.
차설아는 불안한 마음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하지만...”차성철은 차설아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수술 동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어떤 상황이 일어나든 제가 감당할게요. 수술받고 할 일이 많으니 얼른 가시죠.”“그래요, 이쪽 수술실로 오세요.”의사가 차성철을 데리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차설아, 배경윤과 바람은 복도에서 기다렸고 차설아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불안에 떨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깨물더니 손을 덜덜 떨었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을 믿고 성철 오빠의 행운을 빌어줘. 믿고 싶지 않다면 사도현의 인성을 믿어. 사도현이 직접 소개한 의사니까 별문제 없이 수술 잘 끝낼 거야.”배경윤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비록 사도현은 연애할 때 한 여자로 만족하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친구한테는 의리 넘치는 사람이었다.그래서 배경윤은 사도현이 차설아한테 소개해 준 의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 시간 뒤, 차설아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내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아. 바람 말대로 흉터 회복 수술은 간단한 수술이니까 오빠는 분명 수술 잘 받고 나올 거야.”한 시간 뒤, 수술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수술받고 나면 오빠가 잘생긴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돼.”긴장한 채 걱정하던 차설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진작에 오빠를 설득해서 수술받게 해야 했는데, 그러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서 더 행복하게 지냈을 거야.”“좋은 의사를 만나서 수술받았으니 앞으로 행복해질 거야. 만약 수술이 잘 되면 사도현이 좋은 일 하나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번에는 저주하지 않아도 되겠어.”배경윤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팔짱을 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어제 서로 상처 준 뒤,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이별이었지만 미련이 남은 배경윤은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배경윤은 부재중 통화도 문자도 없는 휴대폰만 자꾸 확인했고 사도현을 저주하겠다고 결심했다.‘
차설아가 간호사 곁으로 다가가면서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마취제를 주입한 뒤에 차성철 씨가 갑자기 혼수 상태에 빠져서 위급상황이에요. 응급처치하는 중이고 병세 위급 통지서에 사인해야 하는데, 어느 분이 하실 거예요?”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에서 마취제에 의식을 잃을 가능성은 만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동안 여러 수술을 진행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간호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뭐라고요?”차설아는 머리가 어질했고 간호사의 팔을 잡으면서 덜덜 떨었다.“마취제가 어쨌다고요? 병세 위급 통지서라니,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드라마가 아닌 이상 이럴 리가 없다고요!”“차설아 씨, 죄송하지만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먼저 통지서에 사인하고 마음의 준비를...”“사인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요?”차설아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러고는 수술실로 달려가면서 울부짖었다.“지금 당신들 사람을 죽인 거야! 난 살인마 따위 두렵지 않다고!”“설아야, 아직 수술이 끝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먼저 진정하고...”“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데 진정하라고?”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혔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병세 위급 통지서가 아니라 사망통지서에 사인할까 봐 두려워...”“하, 하지만...”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서 눈물을 흘렸고 차설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배경윤은 수술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바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미친 듯이 울부짖는 차설아를 막아서고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할아버지 수술을 담당한 의사한테 연락했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이야. 제일 대단한 외과 의사니까 걱정하지 마. 형 괜찮을 거야.”“의사고 뭐고 다 믿을 수 없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어! 우리 오빠 멀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