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룻밤이 지나자 차설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이불을 걷어보니 자신은 잠옷 차림이었고 방에서는 성도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이상하네,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또 몽유병이 발작했던 건가?”어렴풋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는데 그 기억 중 대부분은 자신이 성도윤과 뜨겁게 얽히는 장면이었다.지나치게 뜨거웠던 나머지 차설아는 그 장면들이 어젯밤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상상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몽유병이 한 번 도지면 그 상태가 꽤 심각했던 차설아는 몽유병 증상이 도진 날이면 항상 현실과 꿈의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에이, 모르겠다. 잤으면 잔 거지, 뭐. 어차피 한두 번도 아닌데.”한참을 생각해도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자 차설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그저 화려한 꿈을 꿨다고 여기기로 했다.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차설아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호텔 뷔페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아침을 다 먹은 차설아는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성도윤과 서은아가 있는 방으로 뻔뻔하게 찾아가 마구 초인종을 눌러댔다.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만약 성도윤이 계속 자신의 오빠와 송지아의 일에 관해 얘기해주지 않는다면 완전히 끝장을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만약 차설아가 완전히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든다면 상황 자체가 보기 흉해질 것이다.하지만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보아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이상하네, 10시면 이미 일어날 시간인데. 설마 어젯밤에 너무 격렬하게 해서...”차설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혹시 어젯밤에 너무 격렬하게 한 나머지 둘 다 완전히 기절해버린 건 아닐까?!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데,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이 소리가 안 들릴 리 없지 않나?“아줌마, 안녕하세요. 혹시 이 방 청소하러 오셨어요?”차설아는 청소부를 발견하자 예의를 갖춰 질문했다.“네, 손님분들이 아침 일찍 퇴실하셔서
“성도윤, 당장 나와!”차설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성대 그룹 본사로 직접 쳐들어갔다. 그녀의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하지만 대표의 전 부인이었던 차설아에게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보안 요원이나 직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결국, 성도윤의 비서인 진무열이 차설아의 길을 막아섰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누가 당신 사모님이에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이미 분노가 극에 달한 차설아는 진무열의 체면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소매를 걷어붙였다.“셋 셀 동안 도윤 씨 안 나오면, 저 진짜 성대 그룹 다 엎어버립니다. 셋, 둘...”“이, 이건 좀...”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알... 알겠습니다, 사모님. 제가 지금 바로 대표님께 말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차설아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진무열은 여러 번 고민한 끝에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성도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성도윤도 똑같이 성가신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차설아의 성격에 비하면 “조금 더 부드러운” 편에 속했으니 둘 중 덜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성도윤은 마침 공격당한 성심 전당포의 화물선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분명 그가 시킨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의 화살은 다 성도윤에게로 쏟아졌고 언론에서도 무차별적으로 그를 비판하고 있는 데다가 회사 주주들까지 그를 비꼬며 개인이 이익을 위해 회사의 이익을 무시한 대표라는 오명까지 씌웠다.“대표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진무열은 무수한 거물들의 살벌한 시선을 견뎌내며 회의실의 문을 열고 잠시 중단을 요청하는 사인을 보내고는 몸을 낮게 숙여 성도윤의 옆으로 다가가 속삭였다.“사모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셋 셀 때까지 안 나가보시면 그때는 성대 그룹 아예 엎어버릴 거랍니다.”성도윤은 놀라운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성심 전당포’ 같은 삼류 조직도 이제 우리 성대 그룹의 머리 위에서 똥을 싸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목적은 우릴 무너뜨리고 천신 그룹이 우리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는 거겠죠. 이렇게 미적거리다가는 성대 그룹에 더 큰 손실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성 대표님, 대표님께서는 현명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왜 갑자기 이렇게 관대해진 거죠? 설마 ‘자정의 살인마’에게 약점을 잡힌 건 아니겠죠?”주주들은 양쪽에서 성도윤을 몰아붙이며 거의 책상이라도 엎어버릴 기세로 그를 공격했지만 성도윤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중, 유일한 주주가 나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설마 대표님께서 차설아 양을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일부러 희생양이 되려는 건가요? 모든 책임을 다 떠안게 됐는데도 왜 반항 한 번 안 하십니까?”성도윤은 그 말에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닥쳐. 내 결정에 언제부터 당신들이 함부로 간섭했지? 당신들이 내 대표 자릴 대신하려고 드는 건가?”“...”성도윤이 정색하고 화를 내자 주주들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진무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을 나와 차설아에게 손을 내저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정말 너무 바쁘셔서요. 어디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으면 마음껏 부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모님 기분 풀리실 때까지요.”“???”그 말에 차설아의 분노는 더 커졌다. 성도윤 이 자식, 지금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정말 내가 못 부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좋아요, 오늘 내가 차설아 진짜 성격 한 번 제대로 보여줄게요.”그렇게 말한 차설아는 성도윤의 사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사무실부터 부술 거예요. 도윤 씨 나올 때까지 안 멈출 거라고.”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진무열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천천히 하세요, 손 다치니까 조심하시고요. 필요한 도구 있으면 말씀만 해
차설아는 사무실 내부를 샅샅이 뒤졌고 예전에 성도윤한테 선물해 준 물건을 전부 박살 냈다. ‘내가 사준 거니까 박살 내도 상관없겠지?’“아, 망했어요! 정말 어쩌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사모님이 박살 낸 물건은 전부 대표님이 아끼는 것들이라고요. 대표님이 보면 엄청나게 화낼 텐데, 지금이라도 도망치세요. 대표님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화낸다고요?”차설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건을 내팽개치고는 말했다.“그러라고 하세요. 저를 건드렸으니 저도 그 사람 심기를 건드리려고요.”예전에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성도윤한테 비싼 선물을 하루가 멀다 하게 주는 바람에 물건을 박살 내는 것도 힘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치고 부숴도 끝이 없었다.차설아가 한숨을 돌리면서 성도윤에게 선물한 커피 머신을 어떻게 박살 낼지 고민하다가 집어 들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성도윤이 나타나서 차설아의 손목을 잡고는 차갑게 물었다.“언제까지 미친 척할 건데?”“어머, 도윤 씨가 왔으니 이쯤까지 하죠.”차설아는 커피 머신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흩어진 조각을 본 성도윤은 화가 솟구쳐 올랐고 진무열을 노려보며 말했다.“넌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사람 하나 말리지 못해?”진무열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며 말했다.“대표님이 차설아 씨가 물건을 박살 내든 말든 내버려두라고 하셨잖아요. 차설아 씨가 그것으로 화를 풀 수만 있다면 괜찮다면서요!”“그건 맞지만 내가 참을 수 있는 범위까지 허용하는 거야. 이 여자가 박살 낸 것들은 전부 은아가 선물해 준 거라 내가 아끼는 건데... 넌 옆에서 보고만 있었어?”“저... 저는...”진무열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성도윤이 뇌수술한 뒤부터 차설아에 관한 기억을 서은아로 착각했지만 아무도 잘못된 기억이라고 알려주지 못했다.뇌수술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기억해 내려고 할수록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더 심각한 건 완전히 기억을 잃어 머릿속
성도윤이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뭘 잘못 기억했고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구라고? 이 여자가 어떻게 나한테 선물을 준다는 거야?”“사실 이 물건들은 전부 차설아 씨가...”“큼!”차설아는 진무열이 사실을 알려주기 전에 말렸다. 사실을 알게 되면 성도윤의 뇌에 무리가 갈 수 있기에 일부러 헛기침했고 성도윤을 쳐다보며 말했다.“도윤 씨는 정말 똑똑해요. 저처럼 물질적인 여자가 어떻게 원수한테 선물할 수가 있겠어요? 다른 목적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죠.”“하,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다니... 완전히 미친 건 아닌가 봐?” 성도윤은 차설아한테서 손을 떼면서 차갑게 말했다.“망가뜨린 물건들을 똑같은 것으로 전부 사와. 그럼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해줄게.”성도윤은 어젯밤에 그 냄새 때문에 차설아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기에 오늘 일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 아니라면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그럴게요. 이깟 물건들은 얼마 하지도 않으니까요.”차설아가 통쾌하게 대답했다. 이 물건들을 사준 장본인이 차설아이기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도윤 씨, 저는 화가 아직 덜 풀렸는데 뭐라도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성도윤은 턱을 쳐들고는 오만하게 말했다.“당신이 나랑 조건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날 기쁘게 해주었으니 특별히 기회를 주지. 뭘 해줬으면 하는데?”“송지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만 알려주세요. 저한테 무척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고 도윤 씨가 저한테 송지아 씨와 저의 오빠에 관한 일에 대해 전부 알려준다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꼭 듣고야 말겠어요.”“송지아는 지금 성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 알다시피 그 병원은 세계 제1 의료진과 환경을 갖추었기에 치료받으면 곧 회복할 거야. 그리고 당신 오빠와 송지아의 일은...”성도윤이 진무열을 쳐다보며 말했다.“먼저 나가봐.”“네, 대표님.”진무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고 사무실은 온전히 차설아와 성도윤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
성도윤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의자에 앉아 한숨만 내쉬었다.“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오빠는 어떤 사람이지?”성도윤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차설아는 친오빠라 차성철이 아닌 사람 차성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오빠가 그동안 미친 짓만 해온 걸 보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가야 할 때가 있었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을 거예요.”성심 전당포에서 법에 어긋나는 행위가 존재했었지만 무법 지역인 공해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 법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하, 이유도 가지가지군. 당신이 나쁜 사람의 편에 서서 말하는 건, 당신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나쁜 짓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성도윤의 말이 정곡을 찌르자 차설아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차갑게 받아쳤다.“네, 도윤 씨 말대로 저랑 오빠는 뼛속까지 나쁜 놈이라 그런 짓만 저지른다고 쳐요. 그럼 도윤 씨는 착한 사람인가요? 여자를 유혹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당신도 저랑 다를 바 없는 나쁜 놈인 것 같은데요.”“당신은 내가 송지아를 유혹해서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송지아 입장은 달라. 내가 송지아를 구해줬거든.”“구해줬다고요?”차설아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랑 송지아 씨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알아요?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서로를 아꼈고 오빠는 송지아 씨를 공주 대접해 줬거든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송지아 씨는 오빠 곁에서 행복했을 거라고요!”“가족처럼 서로를 아꼈다고?”성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차설아의 천진난만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당신은 자정 살인마라고 불린 사람의 연기에 속아서 몰랐던 거야.”차설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고 진상이 곧 드러날 것을 예감했지만 본능적으로 차성철의 편을 들고 싶어졌다.“그래서 당신한테 물어보려고 찾아온 거잖아요. 오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알려줘요.”“당신 오빠는 송지아한테 진심으로 잘해줬어. 하지만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