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는 그 언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오빠를 겁주려는 거예요.”가을은 수줍게 배경수 옆에서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알아, 사부님은 말은 거칠어도 속으론 따뜻한 분이잖아.”배경수는 마음이 온통 차설아에게 가 있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오빠한테 그 언니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요. 근데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돼요. 아빠를 화나게 하면 진짜 큰일 나니까, 머리를 써야 해요.”“머리를 써야 한다고?”배경수는 그제야 옆에 있던 가을에게 시선을 돌렸다.달빛 아래, 가을은 사롱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맑고 큰 눈을 갖고 있는 그녀는 매우 청순하고 연약한 느낌을 주었다.“음. 내게 지혜롭게 구출해 낼 방법이 있어요.”가을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배경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빛나는 두 개의 흑요석 같았다.“그래? 말해봐.”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얼굴이 금방 붉어지는 아이였으니 배경수는 그녀가 뭔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가을은 뒤따라오는 경비들을 보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두 분, 그만 좀 따라다니죠.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요.”“하지만 가을 씨, 두목님께서 꼭 아가씨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혹시라도 뭐요?”가을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그게... 그게...”경비는 배경수를 힐끔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변강섭 그 늙은 여우는 배경수를 철저히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오빠가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오빠는 들어올 때 무기도 다 반납했고, 그럴 사람도 아니에요. 난 그냥 오빠랑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안 되냐고요?”“아, 네... 됩니다.”경비는 처음으로 부드럽고 연약한 가을이 이렇게 화를 내
배경수는 다소 의외였다. 평소에는 어린아이처럼 순하고 여리게만 보였던 가을에게 이런 단호한 면이 있을 줄이야.그는 급히 단검을 거둬들이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이런 농담 하지 마. 내가 진짜로 널 인질로 삼으면 어쩌려고?”가을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인질이 되어서라도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멍청한 소리. 네 가치는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야.”배경수는 가을을 위험한 상황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물러났던 두 명의 경비병은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모든 출입구에도 사람들의 감시가 있었다. 이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맨손으로 차설아를 구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가을아, 인질은 됐고. 나를 감옥에 데려가 내 여자 친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배경수는 더 이상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가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신 편인 사람은 가을뿐이었으니까.“감옥은 정말 위험해서 아빠는 내가 근처에 얼씬하지도 못하게 하셨거든요. 그래도 정말 가고 싶다면 데려다줄게요...”가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큰 결심한 듯 배경수를 이끌고 감옥으로 향했다.그녀도 아빠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큰 벌을 내릴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배경수를 도울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감옥은 아주 외진 곳에 있었고, 사방은 경비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여긴 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변강섭이 처형하거나 팔아넘길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었다.현재 송지아와 차설아는 모두 이곳에 갇혀 있으니, 앞으로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마침, 달도 없는 어두운 밤, 두 경비병은 약간 피곤해져 잡담을 시작했다.경비 A: “야, 들었냐? 두목님이 오늘 밤 송지아를 분해해서 팔아버린대.”경비 B: “어휴,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질 거라는 차설아의 예상과 달리 순간 단단하고 늘씬한 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페퍼민트처럼 상쾌한 향기가 코끝에 닿자, 그녀는 한순간에 매료되었다.“몸이 엄청 뜨겁네? 열이 나는 건가?”성도윤은 품에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평소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이렇게 말랐을 줄이야! 깃털처럼 가벼운 몸은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너랑 상관없어.”차설아는 중심을 잡고 이를 꽉 악물더니 애써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자고로 이혼은 깔끔하게 해야 한다. 전 남편한테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여줘야 후련하기 마련이니까.따라서 그녀는 감성팔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실비실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말은 세게 할 수 있어도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미 기력을 다한 차설아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이내 성도윤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차설아는 아픈 것도 있지만 민망한 나머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우린 이미 이혼했다고, 잊었어?”“숙려기간 동안 넌 여전히 내 아내야.”단호하고 강압적인 남자의 말투는 차설아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두 사람을 보자 임채원은 발을 동동 굴렀다.이건 결코 그녀가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곧이어 잽싸게 허리를 짚고 힘든 척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도윤아, 잠깐만. 나 배가 슬슬 불러와서 걷기 불편하다고.”“거기서 기다려. 진무열한테 픽업하러 오라고 할 테니까.”말을 마친 성도윤은 품에 안긴 차설아를 내려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이에 차설아는 기가 막혔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 임신한 애인 데리고 이혼을 강요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자상한 척 챙겨주겠다는 건가?이렇게 뻔뻔스러운 남자가 있을 줄이야! 관계는 끝냈어도 남 주기 아깝다는 뜻인가?여우 같
세상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어가던 배경수는 병실에 떡하니 서 있는 만년설 같은 성도윤을 발견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그는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었고, 성도윤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병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둘이 알아?”성도윤은 차설아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남자와 재벌가 며느리로 조용한 삶을 사는 여자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 않은가? 교집합이 전혀 없을 텐데...“그게...”차설아는 골치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그녀가 배경수한테 병원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전남편과 외간 남자의 만남이라니, 어딘가 수라장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뭐지?“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무려 저의 여신이라고요.”배경수는 노란색 해바라기 꽃다발을 들고 한껏 들뜬 걸음걸이로 차설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도윤을 바라보았다.“성도윤 씨는 모를 테지만, 당시 설아 누나는 우리 학교의 아이돌이었죠. 누나한테 대시하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지경이니까. 물론 전 수많은 추종자 중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팬이었죠. 오늘은 누나가 이혼을 신청한 경사스러운 날인데, 찐 팬으로서 당연히 제일 먼저 축하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말을 마친 배경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싹 지우고 정중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으로 차설아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나의 여신이여, 이 해바라기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해바라기는 누님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죠? 갖은 역경에도 오로지 햇빛만 보고 자라나라는 것이 꽃말이잖아요. 누님한테 해바라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꽃은 없을 거예요.”물론 차설아가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다만 해바라기의 꽃말은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한결같은 사랑이다. 마치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여태껏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할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