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섭은 차설아의 인사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대꾸도 하지 않는 모습이 뼛속까지 남존여비의 사상이 배어 있었다.차설아는 별탁에 배치돼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변강섭과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하지만 배경수는 변강섭의 왼편에 앉도록 배치되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이 자리에서 변강섭은 배경수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보아하니 그는 배경수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고 배경수 같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얼마나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지 알 수 있었다.배경수는 내내 비위를 맞추며 변강섭을 즐겁게 했다.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을 본 그는 먼 곳의 차설아와 눈길이 마주쳤고 무심한 듯 변강섭에게 물었다. “참, 사부님, 지아는요? 왜 안 보여요?”송지아는 배경수와 함께 유흥가에서 탈출하고 동시에 변강섭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때 송지아는 남기로 선택했고 배경수는 간신히 핑계를 대고 떠났다.그 당시 변강섭은 송지아와 배경수를 똑같이 중시했으니 이쯤 되면 송지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 텐데 이번 환영회 내내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확실히 좀 이상했다.하지만 변강섭의 반응은 더욱 심상치 않았다.그러자 변강섭의 큰 의자 동욱이 황급히 수습했다.“경수야,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 그년 얘기를 해서 뭐해?”“동욱 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아는 우리 동생이었잖아요.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모두를 이렇게 화나 있어요?”그러자 변강섭의 셋째 의자 남하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천한 계집애, 유흥구에서 제일 잘 나갔던 계집애가 뭐가 그리 착하겠어. 나는 그 년을 보자마자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이 났지. 감히 의부를 팔아넘겨 의부는 어쩔 수 없이 물건을 경찰에게 뺏겨서 손실이 막대해.”“아...”배경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문득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변강섭의 잔인한 수법으로 송지아가 정말 마을을 배신하는 일을 저질렀다면 아마 진작 시체가 되었을 거다.차설아는 메인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어 송지아라
명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설아를 바라보았다.“감히 의부의 위세를 의심하는 자는 혀를 자르고 입을 꿰매어 암옥에 가두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이 늙은이는 정말 변태구나, 이런 고문은 차성철이 제정한 형벌과 겨뤄도 될 정도였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처형해.”변강섭은 원래 차설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시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잠깐만요.”배경수는 얼른 일어나 빌었다. “사부님, 제 여자친구는 처음 이곳에 왔으니 규칙을 잘 몰라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예요. 사부님을 너무 존경해서 처음으로 데리고 왔는데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그래, 그러마.”“일단 감옥에 가둬. 언제 나를 기쁘게 하면 그때 풀어주지.”배경수는 차설아를 조금이나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판국에서는 감히 변강섭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으니 거역한다면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사부님. 사부님 말대로 할게요.”일단은 변강섭의 마음을 달래고 나중에 차설아를 구할 생각이었다.배경수는 이런 상황에 마주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당시 차설아가 따라온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하지만 그는 그나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변강섭을 배신한 송지아가 사형당하지 않고 공교롭게도 차설아와 마찬가지로 암옥에 갇혔다는 거다.식사가 끝나자 변강섭의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그는 변가을의 손을 잡아 배경수의 손에 올려놓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우리 딸, 매일 경수 오빠 타령이더니 왜 막상 만나니 부끄러워해? 얼른 경수 오빠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얘기도 좀 하고 그래야지.”“아빠, 이러지 말아요. 경수 오빠 여자친구도 있는데.”변가을은 수줍게 자신의 손을 뺐다.배경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일부러 털털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차설아는 무기를 든 호위대에 의해 마을의 외진 곳으로 끌려갔고 그 주변에도 수많은 호위대원이 지키고 있었다.“감히 어르신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배경수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벌써 혀를 잘렸을 거야, 얼른 들어가서 반성해.”그녀는 호위대원에 의해 사방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들이 암옥이라 칭하는 곳이었다.이 암실은 어둡고 습하고 후덥지근해서 안에 있으면 마치 목이 졸린 것처럼 호흡이 매우 어렵고 괴로웠다.“거기 누구 있어요?”차설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맨 구석에 한 사람이 앉아 침울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신입?”그 사람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어둠 때문에 얼굴 윤곽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유난히 한이 맺혀 있었다.차설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사람을 떠보았다. “당신이 송지아예요?”그녀는 방금 송지아도 감옥에 갇힌 것 같다고 어렴풋이 들었다. 마을 전체의 남존여비 현황과 결합하여 감히 변강섭의 미움을 살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거로 추측하건대 눈앞의 여자는 송지아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새로 왔는데 나를 알다니, 그쪽 신분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야?”송지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희미하고 약간 조롱 섞여 있었다.차설아의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암옥에 갇힐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당신 정말 송지아예요?”차설아는 금세 신경을 곤두세우고 곧장 여자에게 달려갔고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잘됐네요.”“당신 누구야? 난 당신을 모르는 것 같은데...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굴지 좀 말지?”송지아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차설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많은 시련을 겪은 그녀는 이미 굳센 내면을 가지게 되었는데 쉽게 누구한테 마음을 주지 않았다.“날 몰라도 돼요. 하지만... 성심 전당포의 사장, 자정 살인마로 불리는 차성철은 알겠죠?”“오빠...”송지아의 무뚝
송지아는 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천사도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에요. 천사를 만나면 천국으로 가겠지만, 악마를 만나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죠... 그는,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간 사람이에요!”“송지아 씨, 아니... 잠깐만..”차설아는 헷갈린 표정으로 송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이 그 사람을 배신하고 칼을 꽂았는데도, 그 사람이 당신을 지옥으로 데려간 악마라는 거죠? 맞아요?”“네. 맞아요.”송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회피하지 않았다.“그럼 송지아 씨 말은 좀 앞뒤가 안 맞잖아요. 가해자가 피해자를 악마라고 말하는 게, 도둑이 오히려 도둑 잡으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당신은 몰라요. 나와 오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그에게 이끌려 지옥에 빠졌는지 아무도 모른다고요.”“그러면,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요? 두 사람 모두 큰 상처를 안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차설아는 송지아가 소문처럼 그렇게 몰인정하고 냉혈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 뭔가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다.“당신은 또 누군데요? 나와 그의 비밀을 왜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 거죠?”송지아는 여전히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차설아가 차성철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난...”차설아는 원래 자신이 차성철의 친동생이라고 말하려 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송지아와 오빠 사이에는 많은 앙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오빠를 그렇게 증오하는 걸 보면, 자신에게도 더 경계할지도 모른다.“난 배경수의 여자 친구에요. 당신을 구하러 온 거니까, 절대적으로 나를 믿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경수 선배의 여자 친구라고요?”송지아는 자세를 바로잡고 거의 보이지 않는 미약한 빛을 따라 차설아를 보려고 애썼다. 그녀의 목소리엔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당신이 바로 경
“무슨 말을 그렇게...”차설아는 송지아의 완전히 체념한 듯한 말투를 듣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주변에서 구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당신이 떠나지 않으면, 당신들 두목 성격대로라면 결과는 끔찍할 거예요. 죽지 않더라도 지아 씨를 괴롭혀서 사람도 아닌 꼴로 만들 거라고요. 그 결과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차설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송지아를 설득했다.“당연히 알죠. 근데 이제 다 상관없어요. 내가 정말 죽음이 무서웠다면 그를 배신하지도 않았겠죠. 나는 그의 횡포를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죽기 전에 뭔가 좋은 일이라도 해서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었던 거예요.”송지아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잃은 지 오래였다.과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다시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니, 인생은 이미 엉망이 되어버렸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당신이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고 싶다는 건, 마음속에 아직 포기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나랑 같이 도망쳐요. 알았죠?”차설아는 어둠 속에서 송지아에게 손을 내밀며, 진심으로 설득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같이 떠나면 안 되겠어요?”“싫어요!”송지아는 차설아의 손을 잡지 않고, 여전히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차설아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진 그 순간,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살아있는 건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다.그동안 그녀는 또다시 유흥가를 전전하며 수많은 사람에게 수모를 당했다. 그녀는 이 세상을 증오했고, 한순간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정말... 답답하네.”차설아는 이마를 짚었다. 넌 정말 고집 세고 질긴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 차갑게 물었다.“죽기 전에 정말 아무런 미련도 없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보고 싶은 사람?”“
“경수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는 그 언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오빠를 겁주려는 거예요.”가을은 수줍게 배경수 옆에서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알아, 사부님은 말은 거칠어도 속으론 따뜻한 분이잖아.”배경수는 마음이 온통 차설아에게 가 있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오빠한테 그 언니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요. 근데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돼요. 아빠를 화나게 하면 진짜 큰일 나니까, 머리를 써야 해요.”“머리를 써야 한다고?”배경수는 그제야 옆에 있던 가을에게 시선을 돌렸다.달빛 아래, 가을은 사롱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맑고 큰 눈을 갖고 있는 그녀는 매우 청순하고 연약한 느낌을 주었다.“음. 내게 지혜롭게 구출해 낼 방법이 있어요.”가을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배경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빛나는 두 개의 흑요석 같았다.“그래? 말해봐.”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얼굴이 금방 붉어지는 아이였으니 배경수는 그녀가 뭔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가을은 뒤따라오는 경비들을 보더니,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두 분, 그만 좀 따라다니죠.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어요.”“하지만 가을 씨, 두목님께서 꼭 아가씨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라도...”“혹시라도 뭐요?”가을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그게... 그게...”경비는 배경수를 힐끔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변강섭 그 늙은 여우는 배경수를 철저히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오빠가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오빠는 들어올 때 무기도 다 반납했고, 그럴 사람도 아니에요. 난 그냥 오빠랑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안 되냐고요?”“아, 네... 됩니다.”경비는 처음으로 부드럽고 연약한 가을이 이렇게 화를 내
배경수는 다소 의외였다. 평소에는 어린아이처럼 순하고 여리게만 보였던 가을에게 이런 단호한 면이 있을 줄이야.그는 급히 단검을 거둬들이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이런 농담 하지 마. 내가 진짜로 널 인질로 삼으면 어쩌려고?”가을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인질이 되어서라도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멍청한 소리. 네 가치는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야.”배경수는 가을을 위험한 상황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물러났던 두 명의 경비병은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모든 출입구에도 사람들의 감시가 있었다. 이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맨손으로 차설아를 구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가을아, 인질은 됐고. 나를 감옥에 데려가 내 여자 친구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배경수는 더 이상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가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신 편인 사람은 가을뿐이었으니까.“감옥은 정말 위험해서 아빠는 내가 근처에 얼씬하지도 못하게 하셨거든요. 그래도 정말 가고 싶다면 데려다줄게요...”가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큰 결심한 듯 배경수를 이끌고 감옥으로 향했다.그녀도 아빠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큰 벌을 내릴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배경수를 도울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감옥은 아주 외진 곳에 있었고, 사방은 경비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여긴 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변강섭이 처형하거나 팔아넘길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었다.현재 송지아와 차설아는 모두 이곳에 갇혀 있으니, 앞으로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마침, 달도 없는 어두운 밤, 두 경비병은 약간 피곤해져 잡담을 시작했다.경비 A: “야, 들었냐? 두목님이 오늘 밤 송지아를 분해해서 팔아버린대.”경비 B: “어휴,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