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는 성도윤의 답을 듣고 마음속의 큰 바위를 마침내 내려놓았고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이 남자는 아직 냉혹하고 무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비록 시간이 촉박하고 임무가 막중하지만 적어도 열흘 동안은 성도윤이 차성철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니 안심하고 해안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대표실을 나서자 복도에 하나둘씩 그녀를 쳐다보는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사모님!”한 직원이 차설아를 보고 마치 팬들이 아이돌을 본 것처럼 손짓했다.“어, 오랜만이네요.”차설아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칭을 바로 잡았다.“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미 이혼했거든요...”그것도 두 번이나...성도윤과의 두 번째 이혼은 모두 차성철의 소행으로 당시 성도윤이 미스터 Q로 가장해 혼인신고를 한 것처럼 당사자로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진행됐다.그때 차성철은 성도윤이 눈이 멀어 전당포에 잡혀 있는 틈을 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게 했고 그렇게 그녀는 성도윤과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되었다.“괜찮아요, 저희 마음속에서 당신은 영원히 우리의 사모님인걸요. 앞으로 자주 저희 보러 와주세요.”인사를 하던 직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차설아를 향해 말했다.성도윤과 차설아의 사랑과 전쟁 스토리를 줄곧 봐온 사람으로서 그들은 이미 두 사람의 사이에 과몰입 중이었다.“맞아요, 맞아요...”다른 몇몇 직원들도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그러다 갑자기 떠들썩한 장면이 한순간 얼어붙었고 모두를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오므리며 전전긍긍했다.“어머나, 성대 그룹에 무슨 귀한 손님이 왔길래 전 직원이 영접을 하나 했더니... 차설아 씨였네요?”한정판 명품 가방을 멘 채 직원 뒤에서 냉소를 흘리며 차설아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질투와 도발로 가득했다.“은아 씨, 오셨어요?”직원들이 작은 소리로 서은아에게 안부를 전했다.서은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커피와 디저트 좀 사 왔는데... 다들 고생이 많아요.”“감사합니다.”“고맙긴, 당연
“아까 직원들이 당신을 뭐라고 불렀는지 못 들었어요? 계속 이렇게 되면 도윤이는 조만간 모든 것을 생각해낼 거예요. 그때 도윤이의 병이 또 재발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년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겪었는지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당신과 나는 잘 알잖아요. 이제야 조금 안정되었는데 또 그 사람 마음을 흔들 속셈이에요? 당신 때문에 그가 매번 다치고 있는데 정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거예요?”“저... 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어요.”차설아는 서은아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1년 전 성도윤은 그녀의 손에서 거의 죽을 뻔했고 그녀도 평생 남자와 재결합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그래서 그녀는 성도윤과의 감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다만, 그녀 자신만 잘 통제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일은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니 말이다.예를 들어 차성철과 성도윤의 원한으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이 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녀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서은아는 말하다 눈물을 흘렸다.“은아 씨, 미안해요. 나랑 도윤이 지금까지 함께 헤쳐오느라 힘들었어요. 우리의 감정이 겨우 안정되었는데 당신이 다시 나타났으니... 내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물론 도윤이랑 내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관대함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도 당신의 부탁대로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타나자 도윤이는 마치 줄이 끊어진 연처럼 보였고 난 전혀 잡을 수 없다고요... 미안해요, 미안해요...”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고개가 점점 내려갔고 차설아를 향해 굽신했다.그러다 마침 문을 열고 나오는 성도윤의 눈에 띄었다.“뭐해?”남자는 서은아를 뒤로 감싸며 차설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우리 얘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내 약혼녀한테 뭐 하는 거야?”차설아는 그토록 긴장해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걱정 마세요. 여
차설아는 성대 그룹에서 나와 성심 전당포로 돌아왔다.차성철은 배경수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배경수와 배경윤한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초대했다.한편 차설아는 밤 10시 출발하는 금변시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했다.식탁 위에 푸짐한 요리가 놓여 있고 모두 모여 잡담을 나누며 매우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였다.“자, 건배. 내년 이맘때, 내후년 이맘때, 앞으로 매년 이맘때 우리 모두 이곳에서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기를!”차성철은 잔을 들며 기분 좋게 말했다.“건배!”모두 일어나 잔을 들자 원이와 달이도 음료수를 따라놓은 잔을 들고 흔들었다.차설아는 분위기가 좋아지자 차성철한테 말했다.“오빠, 오늘 기분이 좋으니까 나랑 한 가지 약속해 줄 수 있어?”“너는 내 친동생이야. 한 가지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열 가지, 백 가지라도 약속할게.”“나 떠나...”“뭐?”차성철은 안색이 변하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돌아왔는데 왜 또 떠나려고 하는 거야? 이번에는 또 어느 자식을 위해 떠나는 건데?”원이와 달이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한 손씩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엄마, 가지 말아요. 나랑 오빠가 슬플 거예요.”“엄마 어디 가요? 나도 따라갈래요.”차설아는 달이와 원이의 머리를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원이 달이 착하지? 이번에는 엄마가 짧은 출장을 가는 거야. 늦어도 일주일, 빠르면 3~5일만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그래요, 엄마.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두 녀석은 그제야 잠잠해져서 얌전히 앉아서 밥을 먹는다.사실 차설아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아이가 아니라 충동적이고 과격한 차성철이었다.“오빠, 내가 없을 동안 다시는 성도윤을 도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 사람도 열흘 안에는 복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길 바래.”차성철은 얼굴이 더욱 차가워져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 자식 찾아갔어?”“응.”차설아도 숨기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오빠
“잘됐다, 오빠. 오빠가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차설아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성철에게 큰 포옹을 해주었다.배경윤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설아야, 너랑 오빠는 어디 갈 건데 우리한테 안 알려줘? 나도 가고 싶게.”배경수는 닭 다리를 집어 배경윤의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어린애가 무슨 소란이야. 고기 많이 먹고 키나 더 커.”배경윤은 화가 나서 죽겠다는 듯 배경수를 노려보았다.“배경수, 내가 너보다 고작 몇 분 늦게 태어났거든? 애긴 누가 애야?”“우리 애가 이렇게 철이 없어요.”배경수의 말에 다들 참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그러자 배경윤은 더욱 화가 났다. “아니, 말 좀 해봐. 원이 달이는 이렇게 보기 좋은데 왜 이 자식만 이렇게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그러니까 너 자신을 잘 반성해봐.”배경수의 말에 다들 또 한바탕 웃었다.“그래, 알았다.”배경윤은 눈알을 굴리며 무언가 문득 깨닫고 배경수를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해. 너 우리 설아랑 다시 만나는 거야? 그래서 우리를 속이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거 아니야?”배경수는 좀 어색했다.“글쎄...”“맞아, 신혼여행 가는 거야.”차설아는 소탈한 표정으로 농담하듯 진지하게 말했다.“좋아, 좋아. 이 혼사는 내가 제일 먼저 동의해.”차성철도 손뼉을 치며 동의를 표했다.시끌벅적하고 오붓한 만찬이 끝난 뒤 차설아와 배경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랐다.목적지가 민감해 비행기 안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비즈니스석은 그들 두 명뿐이었다.차설아는 잡지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아주 홀가분한 듯싶었다.오히려 옆에 있는 배경수가 아주 반듯했다.이 녀석은 줄곧 말이 가장 많았는데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이상하게 침묵을 지켰고 표정은 무거웠다.“경수야, 괜찮아? 나는 왜 네가 걱정이 많은 것 같지?”차설아가 남자 앞에서 손을 흔들며 물었다.“내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정말 걱정이야. 내가 너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너를 해치는 걸까 봐...”“그게
비행기는 다음날 새벽 금변시에 도착했다.출국장에는 일찌감치 차량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는데 큰 인물이 도착했는지 의심할 수 있을 정도였다.“경수야!”선글라스에 꽃무늬 셔츠를 입고 이쑤시개를 입에 문 남자가 멀리서 배경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남자는 온몸이 까맣게 탔지만 몸은 말랐고 키가 크고 팔뚝에 용 두 마리를 문신하고 있어 딱 봐도 깡패 같았다.“주혁 형!”배경수도 남자에게 손짓하면서 작은 소리로 차설아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명해라고 해. 내 사부님이 가장 중시하는 부하지. 지독한 사람이야. 도시 전체에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우리 사부님의 신임을 얻으려면 그의 신임을 얻어야 해.”말하는 사이에 명해는 이미 배경수에게로 다가와 뜨겁게 안으며 등을 두드렸다.“이놈아, 돌아올 줄도 알고 아직 양심이 좀 남아있네. 사부님이 네 얘기 많이 하셨는데 이번에는 사부님께서 기뻐하시겠다.”“당연히 돌아와야죠. 하루 스승은 평생 아버지라고 하잖아요?”배경수는 여유롭게 명해와 교류하며 마치 생사를 함께 한 형제처럼 보였다.“푸하하!”차설아는 옆에서 애써 웃음을 참았다.땅에 떨어지기 10분 전만 해도 배경수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치 지옥 불에 뛰어들려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태세였다.차설아의 웃음소리는 곧 명해의 불만을 자아냈고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는데 마치 그녀의 가죽을 벗기려는 것 같았다.“이 여자 누구야? 방금 그 웃음, 혹시 비웃는 거야?”“이쪽이 바로 내가 형한테 말했던 나의 여신 차설아야. 이제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야. 그래서 형이랑 의부, 그리고 지아한테 소개해 주려고 특별히 같이 왔어...”배경수는 여기까지 말하고 차설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너무 좋아서 웃는 거야, 비웃을 리가 있나.”명해는 반신반의하면서 여전히 험상궂게 차설아를 노려보며 물었다.“정말 그래요? ”“그럼요...”차설아는 뜻밖의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아
“긴장은 무슨, 그냥 좀 재미있네?”그녀가 은퇴한 이후로 이런 스릴 넘치는 장면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으니 갑자기 흥미가 끌려 아드레날린이 자신도 모르게 분비되었다.마을 한가운데가 바로 변강섭이 사는 곳이었다. 큰 응접실은 비록 5성급 호텔의 럭셔리함에는 못 미치지만 웅장한 기운이 풍겼다. 특히 사방에 무기를 든 호위대가 이를 지키고 있어 저도 모르게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응접실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로 변강섭이었는데 겉보기론 매우 선량해 보이는 늙은이로 블레이저 차림에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배경수를 보자마자 빙그레 웃었다.그의 옆자리에는 각기 다른 나이의 남자 다섯 명이 앉아있었는데 이들은 명해와 마찬가지로 모두 변강섭의 의자로 하나같이 범접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응접실에 앉아있는 사람은 모두 사내들인데 오직 한 여인만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현지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흰색의 치파오 같은 두루마기는 몸을 매우 아름답게 감쌌다.차설아는 어느새 이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생겨 배경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경수야, 이게 송지아야?”사진과는 다른 것 같지만 마을 전체에서 지위가 높아 보이는 여자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니, 저 여자는 사부님께서 가장 아끼는 막내딸 변가을이야. 사부님의 유일한 자식이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니 절대 미움을 사서는 안 돼.”“오... 어쩐지 사부님 옆에 앉아있다 했어.”차설아가 여자아이를 훑어보고 있는데 변강섭이 일어서서 씩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하하, 역시 내 제자. 가을이가 얼마 전 네가 돌아올 거라고 말했는데 정말 돌아왔구나. 어서 와 앉아.”“사부님, 요즘 안녕하신지요?”배경수는 공손히 변강섭과 인사를 나누었다.“원래는 안녕하지 않았지. 우리 가을이의 혼사로 고민이 많았는데 네가 돌아왔으니 고민이 좀 덜었어...”변강섭은 분명히 말 속에 말이 있었다.“아빠, 이러지 마세요. 오빠가 놀라잖아요.”변가을은 변강섭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
변강섭은 차설아의 인사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대꾸도 하지 않는 모습이 뼛속까지 남존여비의 사상이 배어 있었다.차설아는 별탁에 배치돼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변강섭과는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하지만 배경수는 변강섭의 왼편에 앉도록 배치되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이 자리에서 변강섭은 배경수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보아하니 그는 배경수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고 배경수 같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얼마나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지 알 수 있었다.배경수는 내내 비위를 맞추며 변강섭을 즐겁게 했다.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을 본 그는 먼 곳의 차설아와 눈길이 마주쳤고 무심한 듯 변강섭에게 물었다. “참, 사부님, 지아는요? 왜 안 보여요?”송지아는 배경수와 함께 유흥가에서 탈출하고 동시에 변강섭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때 송지아는 남기로 선택했고 배경수는 간신히 핑계를 대고 떠났다.그 당시 변강섭은 송지아와 배경수를 똑같이 중시했으니 이쯤 되면 송지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 텐데 이번 환영회 내내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확실히 좀 이상했다.하지만 변강섭의 반응은 더욱 심상치 않았다.그러자 변강섭의 큰 의자 동욱이 황급히 수습했다.“경수야,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 그년 얘기를 해서 뭐해?”“동욱 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아는 우리 동생이었잖아요.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모두를 이렇게 화나 있어요?”그러자 변강섭의 셋째 의자 남하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천한 계집애, 유흥구에서 제일 잘 나갔던 계집애가 뭐가 그리 착하겠어. 나는 그 년을 보자마자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들통이 났지. 감히 의부를 팔아넘겨 의부는 어쩔 수 없이 물건을 경찰에게 뺏겨서 손실이 막대해.”“아...”배경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문득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변강섭의 잔인한 수법으로 송지아가 정말 마을을 배신하는 일을 저질렀다면 아마 진작 시체가 되었을 거다.차설아는 메인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어 송지아라
명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설아를 바라보았다.“감히 의부의 위세를 의심하는 자는 혀를 자르고 입을 꿰매어 암옥에 가두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이 늙은이는 정말 변태구나, 이런 고문은 차성철이 제정한 형벌과 겨뤄도 될 정도였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처형해.”변강섭은 원래 차설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시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잠깐만요.”배경수는 얼른 일어나 빌었다. “사부님, 제 여자친구는 처음 이곳에 왔으니 규칙을 잘 몰라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예요. 사부님을 너무 존경해서 처음으로 데리고 왔는데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그래, 그러마.”“일단 감옥에 가둬. 언제 나를 기쁘게 하면 그때 풀어주지.”배경수는 차설아를 조금이나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판국에서는 감히 변강섭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으니 거역한다면 그들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사부님. 사부님 말대로 할게요.”일단은 변강섭의 마음을 달래고 나중에 차설아를 구할 생각이었다.배경수는 이런 상황에 마주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당시 차설아가 따라온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하지만 그는 그나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변강섭을 배신한 송지아가 사형당하지 않고 공교롭게도 차설아와 마찬가지로 암옥에 갇혔다는 거다.식사가 끝나자 변강섭의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그는 변가을의 손을 잡아 배경수의 손에 올려놓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우리 딸, 매일 경수 오빠 타령이더니 왜 막상 만나니 부끄러워해? 얼른 경수 오빠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얘기도 좀 하고 그래야지.”“아빠, 이러지 말아요. 경수 오빠 여자친구도 있는데.”변가을은 수줍게 자신의 손을 뺐다.배경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일부러 털털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