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은 마침내 잠이 들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는데 안심하고 달콤한 표정이었다.그는 어린아이처럼 차설아를 그의 삶의 전부로 삼았다.차설아가 있을 때는 하늘도 맑고 바람도 부드럽고 공기도 달았다.하지만 차설아가 사라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는 살아갈 의욕조차 없었다.그는 자신이 병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중독되어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설아는 잠든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힘든가?당연히 힘들지, 어떻게 안 힘들 수가 있겠는가.몸만 힘든 게 아니라 마음도 피곤했다.성진은 원래 미치광이여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극단적이었는데 예전에도 너 죽고 나 죽자는 가치관을 내세워 항상 질서정연한 국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지금은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는데 더 이상 날뛰지 않고 미친 듯이 비판하지도 않고 오직 그녀만을 하늘로 여기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성진이 그럴수록 차설아의 심리적 압박은 더욱 커졌다.어쩐지 그가 너무 불쌍하고 그런 억압 속에 있는 소심함이 안쓰러웠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초래한 것이다.그러다 낮에 성도윤을 우연히 만난 장면이 떠올라 괜히 짜증이 났다.왜 분명히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그녀의 평온한 삶에 침입하여 그녀의 평온한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말이다.결국은 그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을 뿐이다... 정말 가증스럽다.차설아는 병실을 나와 어두컴컴한 복도 입구에 이르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이따금 피어오르는 불은 엷은 연기와 함께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니코틴 냄새가 그녀의 뇌를 좀 풀어주었다.지난 반년 동안 심리적 압박감이 컸는지 그녀는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다.그녀는 이것이 좋은 습관이 아니라 그녀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참을 수 없었다.있어서는 안 되는 감정처럼 일단 생기면 재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그러다 간호사 두 명이 와서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잡담을 하기
“오, 그러네. 제인 이네?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두 간호사 모두 차설아한테 유난히 다정하고 따뜻했다.병원 전체에서 차설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설아는 반년 동안 자주 성진을 데리고 병원에 왔기 때문에 모두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그들과 또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더니 이번에는 서은아의 수술실이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서은아와 성도윤이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까지 알게 됐다.“얘기하고 있어요. 전 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갈게요.”차설아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두 간호사에게 인사를 한 후 복도를 떠났다.그녀는 원래 성진이 있는 층으로 가려고 했는데 귀신같이 서은아의 수술이 있는 층으로 오게 되었다.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는 성도윤이 눈에 들어왔다.낮에 우연히 만났을 때의 캐주얼한 흰 셔츠에는 얼룩덜룩한 핏자국이 물들었고 그의 손에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씻을 틈이 없었던 것 같았다.그가 정말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따지고 보면 그가 서은아를 병원에 데려온 후 지금까지 대여섯 시간이 흘렀다.그 뜻인즉슨 대여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얘기다...이 녀석도 겨우 나은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또 몸을 망치기 시작하다니... 그녀는 그런 그를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차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하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녀가 자주 찾는 근처 중식당으로 달려가 해물 완탕 한 그릇을 포장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완탕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 특히 해산물 냄새를 맡으면 식욕이 돋울 것이다.수술실 문 앞에 성도윤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시간은 1분 1초가 지났고 안에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다 내 탓이야!”만약 그가 서은아에게 그 컵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컵을 주우러 가기 위해서 차에 치이지 않았을 것이다.달콤한 신혼여행을 위해 두 사람은 가장 낭만적인 도시를 골라 세기의 결
복도 모퉁이에서 차설아는 혼돈을 다 먹어치운 성도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사람은 밥심인데 아무리 애타는 일이라도 굶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는가그렇게 또 몇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오자 성도윤이 쏜살같이 의사를 맞았다.“안심하세요, 수술은 잘 됐습니다. 다만 허리와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어서 한동안 누워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의사가 성도윤을 향해 말을 이었다.“그동안은 가족들이 잘 돌봐줘야 할 겁니다.”“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순간적으로 성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속의 큰 돌멩이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구석의 차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서은아도 허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공교롭게 말이야...더욱 공교로운 일을 차설아는 모르고 있었다. 바로 정형외과 병실이 모두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뜻은 성진과 서은아의 병실이 같은 층에 있다는 거다.그러면 그녀와 성도윤은 조만간 곧 만나게 될 것이다.차설아는 이런 난처한 상황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한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고 항상 성진과 붙어있었는데 부득이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그 노력으로 2, 3일이 지나도록 그녀는 성도윤과 마주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서은아의 병실.성도윤은 여자에게 사과를 깎아주고 있었고 서은아는 온몸이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달콤했다.간호사가 와서 서은아의 링거를 바꿔주었다.간호사는 성도윤이 서은아에게 사과를 먹여주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서은아 님한테 정말 지극정성이신 것 같아요. 동양인들의 사랑은 모두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가 봐요.”“사랑은 다 따뜻하고 달콤한 것 아녜요? 사랑에 동서양을 나누나요?”서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저도 원래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제가 최근에 만난 또 다른 커플도 동양인이어서요, 아마도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네요...”“저희 마을에는 모범커플이라고 할 수 있
“성도윤 님, 여기 완탕이요. 뜨거울 때 드세요.”간호사가 뜨끈뜨끈한 완탕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에는 이미 군침이 돌았다.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인 것 같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 완탕이 기다려지니 말이다.서은아는 간호사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위기감이 몰려왔다.“어디서 난 완탕이죠? 이건 동양인들이 즐겨 먹는 거잖아요? 저도 한 그릇 주시면 안 돼요?”“그건 안 됩니다.”간호사가 단칼에 거절했다.이 완탕은 제인이 특별히 성도윤한테 사다준 것인데 한 그릇 더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왜 안 되죠? 혹시 제 약혼자를 위해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정말 오지랖도 넓으신 거 아닌가요?”“그... 저...”간호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성도윤이 입을 열었다.“당신이 아직 회복기라 해산물 못 먹는대.”“네, 맞아요.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 해산물을 드시면 염증이 심해질 수 있어요.”간호사는 한숨 돌렸다.“안 먹어도 되는데... 이 완탕이 어디서 났는지는 알려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서은아는 여전히 포기를 몰랐다.지금 성도윤의 곁에 나타난 모든 여자는 다 그녀의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했다.“저희 구내식당에서 만든 거예요. 동양인들을 위해 만든 거죠.”간호사는 어색하게 대답했는데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 보였다.“진짜요?”“그럼요.”“그럼 지금 해물 완탕 하나만 해줘요. 먹지 않고 냄새만 맡으면 되잖아요.”“그, 그게...”성도윤은 서은아가 간호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농담 그만해. 요즘 당신 보살피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그러고는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여긴 내가 있으니까.”간호사가 병실을 나간 후 서은아는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성도윤이 침착하게 그녀를 달랬다.“내가 완탕 한번 먹었다고 화낼 거야? 당신이 내가
그런 의심을 품고 저녁 식사 때 성도윤은 병원 식당을 찾았다.“해물 완탕 하나 주세요.”그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직원들은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해물 완탕 없나요?”성도윤은 영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네, 없어요.”직원들은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모든 음식은 다 여기 있어요.”성도윤은 재빨리 메뉴를 훑어보았고 역시 완탕은커녕 동양 음식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그럼 그 어린 간호사가 거짓말을 하는 건가?성도윤은 병실로 돌아와 매일 완탕을 가져다주는 간호사를 찾았다.“저희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간호사는 약간 긴장했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얘기요?”“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잖아요.”“몰라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어린 간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는 척을 계속했다.그녀는 당연히 성도윤이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고 남자는 분명 그녀에게 완탕을 누가 보냈는지 묻고 싶어 할 것이다.다만 그녀는 일찍이 제인에게 이 비밀을 꼭 지키겠다고 했고 또 하느님에게 맹세했기에 고백할 수 없었다.“이 완탕이 어디서 났는지 솔직히 말해요. 그럼 내가 섭섭하지 않게 줄게요.”성도윤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장사꾼처럼 여유를 부렸다.“안 돼요!”어린 간호사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신에게 말할 수 없다고 하느님께 맹세했어요.”“괜찮아요. 하느님도 다 이해하실 거예요.”“죄송합니다, 더 묻지 마세요. 저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어린 간호사는 가슴에 십자를 그은 후 쏜살같이 달아났다.그녀는 복도에서 연기를 삼키고 있는 차설아를 찾았고 다급하게 말했다. “드디어 찾았네요. 죄송하지만 제인 당신이 부탁했던 일 더는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요.”“왜요?”차설아는 침착하게 담배 연기를 곱게 내뿜었다.“성도윤 님과 서은아 님이 이미 당신이 준 해물 완탕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있어요. 특히 서은아 님은 제가 성도윤 님에게 따로 만들어 그분을 꼬시려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담배꽁초를 눌러 불을 껐다. 곧이어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성도윤은 종일 기다렸지만 그가 고대하던 해산물 만두를 기다리지 못했다.점심때가 아니었기에 그도 꾹 참았다.그렇게 저녁이 되고 야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만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무슨 일이에요? 오늘은 왜 만두가 없는 거죠?”성도윤은 서은아가 쉬고 있는 틈을 타 복도에서 회진을 돌고 있던 간호사를 가로막으며 신문이라도 할 태세였다.“그, 글쎄요...”간호사는 난처한 듯 목을 매만졌다.“식당은 더 이상 음식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성도윤 씨, 다른 음식을 드시는 건 어떤가요?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같은 음식이요.”“아뇨. 만두가 아니라면 저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습니다.”성도윤은 그룹 회장의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만두를 먹지 않으면 절대 그만두지 않을 태세였다.그의 말을 듣던 간호사는 어이가 없어졌다.“설마 종일 아무것도 안 드신 거예요?”“맞아요. 종일 만두만 기다리는 탓에 지금 배가 고파 가슴이 등에 닿을 기세예요.”성도윤이 대범하게 인정해버렸다.만약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다른 음식은 그저 적당히 배를 채울 용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끼니를 대충 때우고 싶지 않았다.“알겠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식당에 가서 물어볼게요.”간호사는 혹여나 이 고집 센 남자가 배가 고파 무슨 난동이라도 피울까 봐 잠시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좋아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이제 제 생사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성도윤은 농담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엄숙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그렇게 남자가 다시 서은아가 쉬고 있는 병실로 돌아간 후에야 간호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두 발짝 뛰어 같은 층에 있는 성진의 병실로 달려갔다.“제인, 나와 봐요. 상의할 게 있
“마감해도 한 그릇 정도는 더 만들 수 있잖아요. 사장님, 제발요. 한 번만 봐주세요.”차설아는 두 손을 모아 진심으로 사장님께 빌었다.“안 돼. 내일 오렴. 만둣국 한 그릇 안 먹는다고 죽진 않잖아?”“아니, 아니, 사장님, 이번에 안 먹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만둣국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사장님, 저 그래도 단골손님인데 사장님도 분명 저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잖아요.”“아이고, 내가 못 살아 정말.”사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설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냄비를 꺼내 요리를 시작해야만 했다.사실 중국집 사장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차설아를 끔찍이 잘 챙기고 있다. 심지어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첫 번째는 연약한 여자가 사지가 불편하고 눈이 먼 남자를 돌봐야 한다는 사연에 동정심을 느낀 것이다.둘째는 차설아가 성실하고 귀엽고 유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종종 마을의 독거노인을 도와 컴퓨터 수리, 인터넷 쇼핑, 가전제품 설치 등을 해주기도 했다.중국집 사장은 밀가루 반죽을 하며 차설아와 잡담을 나누었다.“만둣국을 먹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설마 성진은 아니겠지? 그 아이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성진이는 아니에요.”차설아도 덩달아 중국집 사장 아주머니의 옆에 서서 만두피를 만들며 부추, 파, 꽃, 새우를 섞은 고기 속을 능숙하게 만두피에 넣어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작은 만두 하나가 만들어진다.“그 사람이 아니라고?!”아주머니의 동작이 멈추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혼이 활활 타올랐다.“어머. 내가 지금 무슨 큰 비밀을 들은 거야? 만둣국을 먹는 사람이 성진이가 아니다니. 그럼 누군데?”“어... 제 고향 친구예요.”차설아의 대답이 모호했다.“그럼 그 친구, 네 마음속 지위가 남다른데? 요 며칠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매일 그에게 만둣국을 사주었단 말이잖아.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늦었는데 그
차설아는 만둣국을 들고 중국집을 나섰는데 도중에 고개를 숙여 만둣국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향을 맡으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고개를 들었을 때, 일찍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키 큰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당신...”차설아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그 우렁각시가 당신이었어요?”1m 떨어진 곳에 서서 착잡한 눈빛으로 차설아를 응시하는 성도윤의 표정은 놀라움과 당혹감 그 자체였다.“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차설아는 당황하여 말을 좀 더듬거렸지만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부정하지 마세요. 간호사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해줬으니까...”성도윤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서며 우뚝 선 자세로 여인에게 캐물었다.“말해요.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차설아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무슨 목적이 더 있겠어요? 단지 당신이 굶어 죽을까 봐 그랬죠.”“내가 굶어 죽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리 아는 사이였나요?”성도윤의 그윽한 눈망울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아니면, 내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하는 겁니까?”“? ? ?”차설아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이 녀석, 성진의 뼈와 피, 그리고 눈을 사용하더니 성격도 성진처럼 나르시시즘이 되고 뻔뻔해진 것인가?“그래요. 제가 당신을 꼬시려고 했다고 쳐요. 그럼 당신은 저에게 넘어온 건가요?”차설아는 가늘고 고운 눈을 들어 여우처럼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그녀를 불순한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도 그에게 불순한 목적을 보여주면 된다. 그래야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완전히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녀와 너무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그래요, 그럼 다시 꼬셔 보세요.”성도윤이 무뚝뚝한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차설아는 그의 감정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하지만 차설아는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