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동생한테 물어보지 그래?” 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민서는 네가 드레스를 빼앗긴 일로 언짢아져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몰래 도망쳤다고 했어.” 유현진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며 답했다.“동생 말 들으면 알겠네. 나한테 왜 또 물어?” 강한서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안 믿었어. 난 네가 하는 말 듣고 싶어.” 유현진이 멈칫하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물었다.“강민서가 날 화장실에 가뒀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녀는 강한서를 보지 않고 말했다.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강민서가 밖에서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다니든 강한서와 강씨 집안에서 그녀는 그저 철이 없는 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악의 없는 천방지축 아가씨로 말이다.이렇게 순진한 아가씨가 어떻게 사람을 화장실에 가둘 수 있을까.그녀는 이미 강한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들려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너는 어떻게 나왔어?” 유현진은 멈칫했다.오늘따라 강한서는 평소와 달랐는데 그의 모든 반응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유현진은 도무지 강한서의 속을 알 수 없었다.“창문을 넘었어.” 유현진은 화장실에서 사람을 구출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인 데다가 맨손으로 변기에서 약을 꺼냈다는 얘기를 비위가 상하게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자랑할 거리도 아니었다.“창문을 넘었다고?” 그녀의 대답에 강한서가 적잖이 놀랐다. ‘12층 창문을 넘다니. 네가 무슨 닌자라도 되는 줄 알아?’ 유현진은 강한서의 표정을 캐치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밖으로 나가서 문턱을 따라 옆에 창문으로 갔어. 마침 주강운 변호사가 화장실에서 날 발견하고 도와준 거야.” 강한서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그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주강운이 화장실에서 뭘 했는데?” 이상한 걸 묻는다고 생각하며 유현진이 답했다.“화장실에서 뭘 해?
강한서는 정말 좋은 능력을 타고났다. 말 한마디로 그녀 하루의 좋은 기분을 망쳤으니까.눈앞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그녀를 화나고 억울하게 하였다.“그래, 나 바보야. 배리어 프리 화장실을 가본 적이 없는데 호출 버튼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헛디뎌 죽기를 바란 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재산 분할도 적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도 내줄 수 있었겠네, 일석이조네”그녀가 빨갛게 상기된 눈으로 쏘아붙이자 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유현진이 이를 악물며 대답하였다.“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내가 뭘 아는데?”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다시 끌어당겨 나머지 반창고도 붙여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성질만 나빠서는. 긴급 버튼 누를 줄 모르면 핸드폰은? 핸드폰으로 연락할 줄 몰라?”유현진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답하였다.“네 여동생이 밀치는 바람에 망가졌어. 아니면 내가 바보도 아니고 창문으로 나가겠어?”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의 표정은 전보다 누그러들었으며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의 화난 얼굴을 보자 강한서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마저 낮아지고 있었다. “내가 잘 못 짚은 거지?”유현진은 콧방귀를 뀌며 받아쳤다.“사리 구분 못 할 때가 한두 번이야?”사실 강한서는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점을 보호해 주는 쪽이지. 그러나 정말로 그의 인내심을 건드린다면 아무리 낳아준 엄마라도 인정사정 안 봐주는 인간이 바로 강한서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 인내심들도 그의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의외로 강한서는 그녀의 반박에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이따가 새거 사줄게.”유현진은 뭐에 홀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의 말이 마치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들렸다.강한서가 과연 그녀를 달래 줄 수 있을까?그녀의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그가
그 사람은 강한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흥 인터넷 회사의 사장인데 20대 중반에 집에서 준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 꽤 잘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는 화를 참으며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속 사정을 알리 없는 남자는 강한서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강한서의 표정은 너무도 담백하여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가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동창이에요, 회포 풀고 있었어요.”남자가 웃으며 말했다.“동창?” 강한서가 유현진을 바라보았다.남자는 강한서가 그에게 묻는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대답하였다.“이쪽은 유현진 씨예요. 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죠.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현진아 이분은 한성 그룹의 강대표야.”유현진은 뻘쭘했다.동창은 열정만 넘쳐흘러 눈치는 없는 모양이었다.강한서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오랫동안 연락 안 하셨나 봐요.”강한서가 유현진의 허리를 감싸며 천천히 눈을 들어 온화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동창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결혼한 것도 모르잖아.”이 남자가 제주도에 갔다 오더니 연기만 늘었어.유현진은 자신의 연기도 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강한서의 옆에서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동창은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당황하였는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결혼?”유현진은 강한서의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여기는 내 남편이야.”동창은 어딘가 서운해하는 눈치였다.“결혼 일찍 했네.”본인도 어색한 걸 느꼈는지 이어 말하였다.“내 말은 그러니까 강 대표님이 네 남편일 줄은 몰랐어. 그때 유학할 때 친구한테 사고가 났다고 들었었거든. 널 지켜 줄 사람 빨리 찾은 것도 나쁘지는 않지.”유현진과 그녀 모친의 교통사고는 당시 너무 충격적이라 그해 1면 톱기사를 도배하였었다.자가용과 택시 한 대가 충돌하여 2명이 죽고 3명이 다친 큰 사고였다.택시 운
유현진은 웃던 얼굴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소리 난 쪽을 보았다.송민영은 블루 큐빅이 박힌 스커트를 입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정교한 화장에 펄감이 살아있어 표정이나 몸매 모두 한 번쯤은 돌아 볼 만큼 화려한 외모였다.요즘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여배우 중 한 명이라 그런지 확실히 분위기가 남달랐다.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일 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가‘한서야’라고 다정하게 부른 덕분에 주위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하였다.강한서과 송민영의 열애설은 이전부터 떠들썩했지만 이후 다른 소식은 전해지지 않아 다들 해프닝으로만 여겼다.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소문을 좋아하는 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는 듯싶다.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강한서와 송민영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 모두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유현진은'한서'라는 소리가 들릴 때 잠시 멈칫하였지만 이내 마치 모르는 사람이 온 것처럼 손에 든 주스를 삼켰다.강한서는 더욱 냉담하였다. 분명히 그녀가 온 걸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유현진은 코 웃음을 치고 말았다.개 자식,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니.송민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다."강 대표님, 현진 씨 여기서 다 뵙네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강한서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가볍게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유현진은 그 모습이 너무 역겨웠다.오기 전에 분명히 한서는 송민영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는데 지금 여기에서 무슨 청춘 드라마 주인공인 척하고 있는 것인지.송민영은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오늘 행사 자선 게스트로 초대돼서 왔어.”파티에는 연예인을 초청하여 자선 공연을 하긴 하나 모두 주최자가 회사에서 임시로 선별하여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예술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이 주로 와서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곤 하였다.
유현진은 손에 있는 과일 주스를 당장이라도 상대방의 얼굴에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사실 결혼 3년 차에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기가 불편 한 건 신미정이 최근 몇 년 동안 여기저기 의사를 찾아다니며 밀방을 구해주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겉으로는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녀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강한서에게 중매를 들어오는 이유이기도 하다.송민영이 말을 꺼내자 모두가 그녀에게 원래부터 관심이 있은 것 마냥 물어보기 시작했다.그들의 관심사는 그녀가 임신했는지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이야기가 웃음거리가 될 순간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그녀가 임신을 못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송민영은 그녀의 약점을 찔러 그녀를 난감하게 하여 그녀가 추태를 부리길 바라였다.정인월은 강 씨 가문의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데 유현진이 이런 자리에서 추태를 부려 강 씨 가문에 먹칠을 한다면 할머니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줄 수 있을까?할머니만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가 강 씨 집안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송민영이 원한 것이 바로 이거였다.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화를 내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하였다.“발표할 때가 되었을 때 말하려고 하였는데, 어떤 일은 먼저 말하면 될 일도 안되더라고요.”다들 그녀의 발언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뭐야 임신했다는 소리야?어쨌든 첫 3개월 동안은 안정을 취할 때라 보통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강한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를 마셨고 유현진의 말을 다 들었지만 유현진의 대답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임신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이어 사람들의 축하의 말들이 들렸고 유현진은 만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지만 송민영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그녀도 사람들을 따라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현진 씨, 정말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그녀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가려고 하였을 때에 어린 연예인은 이미 돈을 받고 도망간 뒤였다.이 일은 언제 밥을 먹을 때 강민서에게 들은 것이었다.이 일 때문에 전 여사는 연예인들이라면 치를 떨었기에 그녀가 송민영을 도와줄 일은 없다.전 여사는 겉으로는 자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좁다. 지난번 놀음 자리에서 강한서의 등장으로 그녀를 처절하게 패배 시켰으니 그녀가 어떻게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강한서의 미움을 사지는 못하지만 배경도 없는 그의 아내는 두렵지 않았고 유현진이 사람들 앞에서 그를 무안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었다.유현진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전 여사는 송민영이 아니었다. 송민영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면 기껏해야 강한서와 다툼이 있을 뿐이지만 전 여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신미정은 아마 또 그녀를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유현진 자신도 잘 모르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 강한서가 송민영 때문이라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전 여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농담이 적절 하지가 않았네요. 민영 씨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전 여사의 불쾌함이 순식간에 없어질 정도로 그녀의 사과는 빨랐다. 유현진 도대체 뭐 하는 애지?송민영도 전 여사가 자신을 도와준 것에 놀랐지만 유현진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에 그녀는 상당히 만족한 듯 일부러 너그럽게 말했다.“현진 씨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다 농담이잖아요, 괜찮아요.”그녀의 이 대답은 너무도 멍청하여 그녀를 도와준 전 여사마저도 괜한 일에 휩쓸렸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전 여사의 혈색은 아니나 다를까 안 좋아 보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이어서 인자한 말투로 말하였다.“현진아, 아줌마가 괜한 소리 했다고 탓하지 마라. 너의 시어머니와는 둘도 없는 자매 같은 사이야. 너도 내 딸 같아서 그래. 아줌마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다 너를 위해서야. 너도 알지?"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었다.“알
모두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는 찬성하는 분위기였다.유현진만이 정중한 얼굴로 되물었다.“남자가 원칙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요? 예를 들어 바람을 피워 내연녀가 배가 불러서 찾아와 도발하는 경우요. 전 여사님이라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 여사의 안색은 크게 어두워졌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송민영의 얼굴도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혹시 이런 일 당하신 적 있으세요?”이 질문은 너무 도발적이라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현진은 주스를 천천히 마시고 나서야 이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제 친구 이야기예요. 그녀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내연녀는 임신하였고 제 친구는 이혼을 원하지 않고 있죠. 친구가 그 여자를 찾아가 유산하고 남편을 떠나라고 하자 10억을 요구했어요. 그러면 유산하겠다고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전업주부라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아요. 며칠 전에 저한테 돈을 빌리러 왔는데 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에요.”“사실 전 그녀의 방법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고 있거든요. 하지만 저 자신도 특별히 좋은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전 여사님은 현명하고 경험도 풍부하니 제 친구 대신 혹시 이런 일을 당하셨다면 어떻게 대처하셨겠어요?”그녀가 말을 마치자 송민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전 여사의 얼굴은 이미 완전히 굳어져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답하고 말았다.“어떻게 이런 경험이 있겠어? 사람 잘 못 봤어!”유현진이 급히 말하였다.“전 여사님, 화내지 마세요. 전 아저씨가 뭐가 있으시다는 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어요.” 전 여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화내는 게 아니라 네 질문엔 도저히 대답할 수 없구나. 화장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유현진은 황급히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전 여사님, 시간 날 때 같이 고스톱 해요.”전 부인은 몸을 떨며 작은 구두를 신은 발은 걸음을
“뭐라고?”유현진이 놀라서 되물었다.강한서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가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 사람도 있고 하니까 할머니 귀에 무슨 소리라도 들어가 봐야 좋을 거 없잖아. 깊게 생각하지 마.”어쩐지.유현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강한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 남자야말로 배우 출신이 따로 없었다. 장소 불문 연기가 가능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협조해야 하는 거야?막 거절하려는 찰나 갑자기 송민영이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쳐다보고는 달려와 그들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였다.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강한서의 어깨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말한 건 지켜.”이어 그녀가 발끝을 세우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였다.강한서의 입술은 약간 촉촉하였고 은은한 와인 향도 같이 퍼져 나왔다.강한서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유혹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그녀가 아무리 감추는 거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강한서는 달랐다. 아무리 친밀한 접촉이라도 그의 얼굴에는 담담함 외에는 다른 표정을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예전에 그런 침착하고 여유로운 강한서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좋아하는 여자를 보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관심이 없다면 여자가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달려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강한서도 마찬가지이고.마지못해 그녀와의 접촉이 있는 날이면 화장실에서 두 시간이나 있었다. 마치 그녀 몸에 균이라도 있는 것처럼!유현진은 갑자기 모든 게 불만스러워졌다. 분명히 이 결혼 생활에서 줄곧 참아온 것은 그녀 자신이었는데!강한서가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건지?그녀는 그녀를 한때는 사랑에 빠지게 한 눈앞의 이 얼굴을 노려보며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었다.강한서의 몸은 굳어지더니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유현진은 한참 후에야 손을 놓았다.이 결벽증 있는 인간아, 한번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