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유현진 그 재수 없는 계집애 때문이야. 걔만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오늘 밤에 송가람 씨랑 친분을 쌓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허탕이네. 방금 병원에 실려갔대.” 가슴이 철렁한 강민서가 말했다.“호텔에서 소문이 퍼지는 걸 막는 건 송씨 가문의 뜻일 거야. 함부로 소문내고 다니지 마.” 만약 강한서가 알게 된다고 해도 절대 인정하지 않겠노라 재차 다짐했다.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원고를 수정한 차미주는 침대에 눕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모르는 번호에 배달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전화를 받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유현진 어디 있어?” “너, 너, 너 또 무슨 짓이야?” 지긋지긋한 강한서의 목소리에 차미주는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강한서가 다시 물었다.“유현진 어디 있냐고.” 차미주는 움찔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랑 파티에 간다고 했잖아?” “없어. 전화도 안 받아.”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나 보지!’ 강한서의 기세에 생각을 입 밖에 내뱉을 수 없었던 차미주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전화해 볼까?” “부탁할게.” 강한서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들렸다.차미주는 유현진에게 연락을 했지만 강한서의 말대로 신호는 연결이 되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강한서는 더욱 세게 미간을 찌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이때 한성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강운이 왔대. 가서 여자친구 구경 좀 하자.” 강한서가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너나 가.” 한성우는 그의 폰을 빼앗고 말했다.“유현진 씨는 성인이야. 안 잃어버려. 일단은 강운이 좀 놀리고 함께 찾아줄게.” 말을 마친 한성우는 강한서의 어깨를 잡고 그를 끌고 갔다....유현진은 씻고 호텔 직원이 건넨 드레스를 입었다.흰색의 어깨 라인이 드러나는 드레스였는데 피시테일 스타일의 드레스는 심플하면서 격식을 갖추었다.복도에서 그녀를
몇 초의 적막이 흘렀다.노련한 분위기 메이커인 한성우마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친구의 여자친구가 다른 친구의 와이프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내 와이프는...” 강한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주강운의 팔짱을 낀 그녀의 손에 머물고는 입꼬리를 씰룩하더니 말했다.“차현진 씨에게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유현진은 묵묵히 주강운의 팔짱을 낀 손을 빼고 살짝 거리를 두었다.주강운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이 해명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홱 감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강한서는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유현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유현진 사모님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차현진 씨라고 부를까?” 유현진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강한서가 그녀를 향한 소유욕을 과시한다고 느꼈다.주강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한서야, 그게 무슨 얘기야?” 강한서는 유현진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유현진, 네 남자친구에게 남편 좀 소개하지 그래.” “무슨 남자친구?” 유현진은 그의 손에 잡힌 허리에 통증이 느껴져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강한서 너 미쳤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강한서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유현진, 우리 서류상으로 부부가 된 지 3년이 넘어. 네가 차 씨인 줄은 몰랐는데?” 유현진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주강운에 대한 경계심으로 인해 그에게 가명을 알려 줬다고 하면 곁에 있는 그에게 실례가 아닌가.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주강운이 말했다.“오해가 있었네. 유현진 씨의 소개로 소송 하나를 맡았어. 직업병이 도졌지 뭐야. 유현진 씨가 의뢰인의 친척이라고 생각하고 같은 차 씨인 줄 알았어.” 유현진은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의 한 거짓말을 피해자가 수습하는 꼴이라니.한성우는 이때다 싶어서 끼어들었다.“오해였구나. 그럼 내가 다시 소개할게. 형수님, 이쪽은 나랑
"네 동생한테 물어보지 그래?” 강한서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민서는 네가 드레스를 빼앗긴 일로 언짢아져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몰래 도망쳤다고 했어.” 유현진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며 답했다.“동생 말 들으면 알겠네. 나한테 왜 또 물어?” 강한서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안 믿었어. 난 네가 하는 말 듣고 싶어.” 유현진이 멈칫하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물었다.“강민서가 날 화장실에 가뒀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녀는 강한서를 보지 않고 말했다.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강민서가 밖에서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다니든 강한서와 강씨 집안에서 그녀는 그저 철이 없는 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악의 없는 천방지축 아가씨로 말이다.이렇게 순진한 아가씨가 어떻게 사람을 화장실에 가둘 수 있을까.그녀는 이미 강한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들려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너는 어떻게 나왔어?” 유현진은 멈칫했다.오늘따라 강한서는 평소와 달랐는데 그의 모든 반응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유현진은 도무지 강한서의 속을 알 수 없었다.“창문을 넘었어.” 유현진은 화장실에서 사람을 구출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인 데다가 맨손으로 변기에서 약을 꺼냈다는 얘기를 비위가 상하게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자랑할 거리도 아니었다.“창문을 넘었다고?” 그녀의 대답에 강한서가 적잖이 놀랐다. ‘12층 창문을 넘다니. 네가 무슨 닌자라도 되는 줄 알아?’ 유현진은 강한서의 표정을 캐치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밖으로 나가서 문턱을 따라 옆에 창문으로 갔어. 마침 주강운 변호사가 화장실에서 날 발견하고 도와준 거야.” 강한서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그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주강운이 화장실에서 뭘 했는데?” 이상한 걸 묻는다고 생각하며 유현진이 답했다.“화장실에서 뭘 해?
강한서는 정말 좋은 능력을 타고났다. 말 한마디로 그녀 하루의 좋은 기분을 망쳤으니까.눈앞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그녀를 화나고 억울하게 하였다.“그래, 나 바보야. 배리어 프리 화장실을 가본 적이 없는데 호출 버튼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헛디뎌 죽기를 바란 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재산 분할도 적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도 내줄 수 있었겠네, 일석이조네”그녀가 빨갛게 상기된 눈으로 쏘아붙이자 강한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유현진이 이를 악물며 대답하였다.“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내가 뭘 아는데?”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다시 끌어당겨 나머지 반창고도 붙여 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성질만 나빠서는. 긴급 버튼 누를 줄 모르면 핸드폰은? 핸드폰으로 연락할 줄 몰라?”유현진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답하였다.“네 여동생이 밀치는 바람에 망가졌어. 아니면 내가 바보도 아니고 창문으로 나가겠어?”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의 표정은 전보다 누그러들었으며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의 화난 얼굴을 보자 강한서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마저 낮아지고 있었다. “내가 잘 못 짚은 거지?”유현진은 콧방귀를 뀌며 받아쳤다.“사리 구분 못 할 때가 한두 번이야?”사실 강한서는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점을 보호해 주는 쪽이지. 그러나 정말로 그의 인내심을 건드린다면 아무리 낳아준 엄마라도 인정사정 안 봐주는 인간이 바로 강한서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 인내심들도 그의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의외로 강한서는 그녀의 반박에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이따가 새거 사줄게.”유현진은 뭐에 홀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의 말이 마치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들렸다.강한서가 과연 그녀를 달래 줄 수 있을까?그녀의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그가
그 사람은 강한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흥 인터넷 회사의 사장인데 20대 중반에 집에서 준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 꽤 잘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는 화를 참으며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속 사정을 알리 없는 남자는 강한서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강한서의 표정은 너무도 담백하여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가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동창이에요, 회포 풀고 있었어요.”남자가 웃으며 말했다.“동창?” 강한서가 유현진을 바라보았다.남자는 강한서가 그에게 묻는다고 생각하여 재빨리 대답하였다.“이쪽은 유현진 씨예요. 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죠.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현진아 이분은 한성 그룹의 강대표야.”유현진은 뻘쭘했다.동창은 열정만 넘쳐흘러 눈치는 없는 모양이었다.강한서가 사악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오랫동안 연락 안 하셨나 봐요.”강한서가 유현진의 허리를 감싸며 천천히 눈을 들어 온화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동창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결혼한 것도 모르잖아.”이 남자가 제주도에 갔다 오더니 연기만 늘었어.유현진은 자신의 연기도 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강한서의 옆에서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동창은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당황하였는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결혼?”유현진은 강한서의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여기는 내 남편이야.”동창은 어딘가 서운해하는 눈치였다.“결혼 일찍 했네.”본인도 어색한 걸 느꼈는지 이어 말하였다.“내 말은 그러니까 강 대표님이 네 남편일 줄은 몰랐어. 그때 유학할 때 친구한테 사고가 났다고 들었었거든. 널 지켜 줄 사람 빨리 찾은 것도 나쁘지는 않지.”유현진과 그녀 모친의 교통사고는 당시 너무 충격적이라 그해 1면 톱기사를 도배하였었다.자가용과 택시 한 대가 충돌하여 2명이 죽고 3명이 다친 큰 사고였다.택시 운
유현진은 웃던 얼굴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소리 난 쪽을 보았다.송민영은 블루 큐빅이 박힌 스커트를 입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정교한 화장에 펄감이 살아있어 표정이나 몸매 모두 한 번쯤은 돌아 볼 만큼 화려한 외모였다.요즘 가장 인기 있는 젊은 여배우 중 한 명이라 그런지 확실히 분위기가 남달랐다.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일 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가‘한서야’라고 다정하게 부른 덕분에 주위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하였다.강한서과 송민영의 열애설은 이전부터 떠들썩했지만 이후 다른 소식은 전해지지 않아 다들 해프닝으로만 여겼다.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소문을 좋아하는 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는 듯싶다.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강한서와 송민영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 모두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유현진은'한서'라는 소리가 들릴 때 잠시 멈칫하였지만 이내 마치 모르는 사람이 온 것처럼 손에 든 주스를 삼켰다.강한서는 더욱 냉담하였다. 분명히 그녀가 온 걸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유현진은 코 웃음을 치고 말았다.개 자식,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니.송민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다."강 대표님, 현진 씨 여기서 다 뵙네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강한서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가볍게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유현진은 그 모습이 너무 역겨웠다.오기 전에 분명히 한서는 송민영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는데 지금 여기에서 무슨 청춘 드라마 주인공인 척하고 있는 것인지.송민영은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오늘 행사 자선 게스트로 초대돼서 왔어.”파티에는 연예인을 초청하여 자선 공연을 하긴 하나 모두 주최자가 회사에서 임시로 선별하여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예술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이 주로 와서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곤 하였다.
유현진은 손에 있는 과일 주스를 당장이라도 상대방의 얼굴에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사실 결혼 3년 차에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기가 불편 한 건 신미정이 최근 몇 년 동안 여기저기 의사를 찾아다니며 밀방을 구해주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겉으로는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녀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강한서에게 중매를 들어오는 이유이기도 하다.송민영이 말을 꺼내자 모두가 그녀에게 원래부터 관심이 있은 것 마냥 물어보기 시작했다.그들의 관심사는 그녀가 임신했는지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이야기가 웃음거리가 될 순간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그녀가 임신을 못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송민영은 그녀의 약점을 찔러 그녀를 난감하게 하여 그녀가 추태를 부리길 바라였다.정인월은 강 씨 가문의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데 유현진이 이런 자리에서 추태를 부려 강 씨 가문에 먹칠을 한다면 할머니가 그녀를 계속 보호해 줄 수 있을까?할머니만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가 강 씨 집안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송민영이 원한 것이 바로 이거였다.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화를 내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하였다.“발표할 때가 되었을 때 말하려고 하였는데, 어떤 일은 먼저 말하면 될 일도 안되더라고요.”다들 그녀의 발언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뭐야 임신했다는 소리야?어쨌든 첫 3개월 동안은 안정을 취할 때라 보통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강한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를 마셨고 유현진의 말을 다 들었지만 유현진의 대답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임신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이어 사람들의 축하의 말들이 들렸고 유현진은 만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지만 송민영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그녀도 사람들을 따라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현진 씨, 정말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그녀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가려고 하였을 때에 어린 연예인은 이미 돈을 받고 도망간 뒤였다.이 일은 언제 밥을 먹을 때 강민서에게 들은 것이었다.이 일 때문에 전 여사는 연예인들이라면 치를 떨었기에 그녀가 송민영을 도와줄 일은 없다.전 여사는 겉으로는 자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좁다. 지난번 놀음 자리에서 강한서의 등장으로 그녀를 처절하게 패배 시켰으니 그녀가 어떻게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강한서의 미움을 사지는 못하지만 배경도 없는 그의 아내는 두렵지 않았고 유현진이 사람들 앞에서 그를 무안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었다.유현진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전 여사는 송민영이 아니었다. 송민영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면 기껏해야 강한서와 다툼이 있을 뿐이지만 전 여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신미정은 아마 또 그녀를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유현진 자신도 잘 모르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 강한서가 송민영 때문이라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전 여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농담이 적절 하지가 않았네요. 민영 씨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전 여사의 불쾌함이 순식간에 없어질 정도로 그녀의 사과는 빨랐다. 유현진 도대체 뭐 하는 애지?송민영도 전 여사가 자신을 도와준 것에 놀랐지만 유현진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에 그녀는 상당히 만족한 듯 일부러 너그럽게 말했다.“현진 씨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다 농담이잖아요, 괜찮아요.”그녀의 이 대답은 너무도 멍청하여 그녀를 도와준 전 여사마저도 괜한 일에 휩쓸렸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전 여사의 혈색은 아니나 다를까 안 좋아 보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이어서 인자한 말투로 말하였다.“현진아, 아줌마가 괜한 소리 했다고 탓하지 마라. 너의 시어머니와는 둘도 없는 자매 같은 사이야. 너도 내 딸 같아서 그래. 아줌마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다 너를 위해서야. 너도 알지?"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었다.“알
양시은이 쯧 혀를 찼다. “우리 사이에 제가 현진 씨에게서 돈을 왜 받겠어요. 계약금 없이 식장 예약해 드릴 수도 있어요. 현진 씨가 저희 호텔이 마음에 드신다면요. 이젠 배가 제법 나와서 더는 숨기기 어려울 것 같아요.”“전엔 강 대표님이 기억을 잃어서 다들 두 집안의 연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진 씨가 임신을 했으니 얘기가 다르잖아요.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가 있는 한 송씨 가문은 강 대표님의 힘이 되어줄 수 있어요.”“강 대표님은 지금 강단해 대표님과 치열한 권력 다툼 중이잖아요.”양시은이 말하며 한현진의 배를 쳐다보았다.“전 그 인간들이 강 대표님과 송씨 가문의 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현진 씨 배속의 아이를 노리고 있을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이렇게 숨기기보단 차라리 공개를 해 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그 인간들도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할 거예요.”한현진이 떠보듯 물었다.“언니 혹시 뭐 들으신 거 있으세요?”양시은이 대답했다.“요즘 송민희 씨가 저희 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요. 아들에게 좋은 짝을 소개해주려는 것 같던데 명문가의 딸만 고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댁 아드님이 워낙 소문이 많잖아요.”“강현우 무능력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위엔 강 대표님처럼 능력 있는 사촌 형이 있으니 강현우와 결혼하면 한성 그룹 후계자는 꿈도 못 꿀 텐데, 누가 그런 집안과 연을 맺고 싶어 하겠어요.”“강단해 대표님도 이 권력 다툼에서 언젠가는 질게 뻔한데 한성을 위해 30여 년을 바치신 분이 그렇게 쉽게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겠어요?”“만약 저라면 힘을 실어줄 뒷배를 찾지 못한 상황에 절대 상대방이 다른 가문과 힘을 합쳐 절 내쫓을 기회는 주지 않을 거예요.”아이는 두 집안을 이어줄 근원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한현진을 지키지 못해 아이를 잃게 된다면 동맹은커녕 그 일로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현진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송씨 가문의 도움이 없다고 해서 강한서가 강단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젊었을 때 그저 잠깐 알고 지낸 적이 있었어요. 홍혜림 씨는 결혼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홍혜림 씨의 선배가 당시 서화계에서 꽤 인지도가 있었어요. 이름이... 박안수.”“박안수는 서해금의 전남편이예요. 홍혜림 씨와 서해금은 그 반안수라는 분 때문에 서로 알게 된 사이였고요. 홍혜림 씨가 아마 서해금의 과거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박안수...”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한현진이 갑자기 말했다. “송가람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겠네요. 전남편 집에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예요?”양시은이 말했다. “사람이 있어야 신경도 쓰죠. 그 전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이라고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전부인데 남동생은 지능 장애가 있는 것 같았어요.”“형이 사고로 세상을 뜬 후 집을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요. 여동생도 결혼했다고 하던데... 저도 전부 전해들은 얘기라 아마 홍혜림 씨에게 직접 물어야할 거예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남편이 예술 종사자일 줄은 몰랐네요.”양시은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부자가 많잖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예술을 배워줘요. 설마하니 서해금이 박안수 씨 재능에 반했겠어요? 웃기지도 않는 얘기죠.”‘부자? 정말 부자였다면 그때 서해금은 왜 깔린느에 그 정도밖에 투자하지 못했던 거야? 부자였다면 왜 몇 년 동안 최문희의 병수발을 들었던 거야? 설마 아빠 외모와 재능에 반했다는 거야?’서해금은 송가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있었다. 한아람의 출산 당일 일어난 사건의 모든 단서는 전부 서해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서해금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송가람은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공범의 신분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서해금과 그런 짓을 꾸밀 수 있
양시은이 말하며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가 이젠 성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니면 그 개자식 대신 양육비까지 지불할 뻔 했다니까요. 면회가 되면 제일 먼저 그 소식부터 알려주려고요.”“너무하시네요.”감탄하듯 말하던 한현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전태평 씨가 만약 최고 형량을 받는다면 아마 70세 전에는 나오지 못할 거예요. 전씨 가문에서는 대가 끊는 걸 지켜보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전태평 씨 부모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잖아요.”양시은은 순간 한현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전태평의 부모님과 가족 모두 그 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양시은을 속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곧 가스라이팅을 해왔었다. 전태평이 구속된 후 조급해진 그들은 양시은의 호텔이나 집에 들이닥치며 그녀가 돈을 써서라도 전태평을 꺼내주길 바랐다. ‘그렇게 손자가 좋으면 손자를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양시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괜찮은 곳으로 지낼 곳 알아봐줘요. 기사님도 한 분 보내주고요. 부족한 게 있으면 뭐든 해줘요.”그 여자는 줄곧 전태평의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계속 전태평의 부모님을 부추겨 양시은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 한현진의 말에 양시은은 전엔 생각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왜 굳이 내 손을 더럽혀? 개들끼리 물어뜯으라고 해. 내 손에 피 묻히지 않는게 상책이지.’전화를 끊은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가람이 신미정에게 속아 돈을 빌려준 것도 현진 씨가 유도한 거죠?”한현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돈 때문에 저도 마음이 아파요. 누가 뭐라든 우리 집안 돈이잖아요.”양시은의 눈빛이 한현진을 향한 존경으로 가득 찼다. “송가람이 열 명이 있어도 현진 씨에겐 상대가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서해금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녜요.”한현진이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언니는 그분에 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양시은이 한
양시은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에게 강한서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강 대표님 12살 쯤 되었을 때 일이예요. 신미정은 강 대표님에게 야외 생존에 관련한 학원을 등록해줬었어요. 하지만 승인을 받은 학원이 아니었고 선생님과 스텝들도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그 탓에 산에서 내려와서야 낙오된 학생이 있다는 걸 발견했죠.”“강 대표님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집안은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때의 전 막 신미정과 안면을 튼 사이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강 대표님을 찾는 일에 뛰어들었죠. 깊은 산은 아니었지만 나무가 무성했고 날도 빨리 어두워져 수색이 어려웠어요.”“하지만 다행이도 산에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강 대표님을 발견했어요. 당시의 강 대표님은 발을 다쳐 걸을 수도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 신미정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달려가 안아주지도, 위로하지도 않더니 날 잡더니 그러더라고요.”“부르지 마요. 겪어봐야 잘못한 걸 알죠.”“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력함과 공포에 떠는 강 대표님을 한 시간 반 가까이 지켜봤어요. 그러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에 신미정이 강 대표님 앞에 나타났죠.”“그땐 신미정이 왜 그렇게 아들을 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죠. 그건 아들을 조련하고 있다는 걸. 강 대표님이 제일 나약한 순간에 나타나 본인을 향한 의지와 순종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거예요.”“회장님께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단한 대표님이 돌아가신 후 강 대표님을 바로 곁으로 데리고 오셨어요.”“회장님 덕분이 아니었다면 썩은 사상으로 가득한 신미정이 강 대표님처럼 훌륭한 아들을 뒀을 리가 없어요.”말을 마친 양시은이 한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진 씨 덕분에 강 대표님이 알게 된 거예요. 진심을 자길 위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러다보면 언젠가 신미정의 조련에서 벗어나게 되겠죠. 아들이 자기 통제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을까요?”“신미정 그 여자에게 진심이라는 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쌍둥이라니!]그 글귀를 본 한현진 역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는 이처럼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행복 가득한 웃음 밑에는 전과는 다른 펜으로 쓴 글이 있었다. 아마 나중에 따로 더 적어둔 글 같았다. [뭘 좋아해! 얼마나 고생인데!]강한서는 산부인과에 다녀올 때마다 아이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노트 작성을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트엔 한현진의 변화로 가득 했다. 한현진의 입덧이 심해질수록 그의 기분도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한현진은 그동안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임신한 한현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욕실 문이 열리자 한현진이 얼른 노트를 덮어 서랍에 넣었다. 강한서가 머리의 물기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 맡에 기대앉은 한현진을 본 그가 침대로 걸어왔다. “안 자?”“자려고.”한현진이 웃었다. “너랑 같이.”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만 말리고 바로 올게.”“응.”몇 분 후, 강한서가 돌아오자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던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와 강한서의 품에 기댔다. “강민서 약혼식에 정말 어머님 안 부를 거야?”“오면 다들 불편하기만 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엄마는 민서를 본인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해. 민서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자라면서 말을 잘 듣던 아니었어. 그런 애가 엄마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으니 절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민서는 엄마를 닮아 도도해 보이지만 사실은 겁이 많고 주견도 없는 애야. 엄마가 와서 민서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걔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고 할까봐 걱정이야, 난.”“그럼 아까 민서가 어머님을 모시고 싶다고 대답하면 어떡하려고 그랬어.”강한서가 말했다.
시선을 내리고 노트를 작성하던 강한서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는 계속 펜을 끄적이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넌 참석했으면 좋겠어?”잠시 침묵하던 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하지만 굳이 오겠다고 하면 우리도 못 말리겠지.”강한서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싫으면 못 오게 하면 돼. 넌 걱정 말고 약혼식 준비나 해. 전화든 뭐든,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강민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민경하를 보내고 샤워를 마친 한현진이 침대에 누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지루함을 느낀 그녀가 강한서가 자는 곳으로 옮겨가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뒤적였다. 한현진이 임신한 후 강한서의 머리맡에 늘 놓여있던 전공 관련 서적들은 어느 샌가 출산과 육아 관련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 강한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많은 일에 무관심하지만 한 번 꽂힌 건 끝장을 보는 타입이었다. 그는 책과 관련 자료를 읽어볼 뿐만 아니라 그의 휴대폰 속 알고리즘 역시 전부 출산 육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머리맡에 놓은 책은 이미 절반 정도를 읽은 상태였다. 심지어 어떤 곳엔 표기까지 해두었다. 그는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물론 틈만 나면 한현진에게도 배워주려고 했다. 물론 한현진 역시 차근차근 알아보며 배우고 있었지만 진심을 담아 열심히 노력하는 강한서의 모습이 좋았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한 가지라도 더 임신과 출산 과정에 참여하기를 자랐다. 아이와 엄마는 자연적으로 이어진 관계였지만 아빠라는 존재는 늘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강한서는 한현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빠가 된다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손을 들어 서랍에서 펜을 꺼낸 한현진은 강한서가 표기해둔 틀린 부분을 수정했다. 서랍 속에는 노트가 하나 있었고 그 가운데 펜이 꼽혀있었다. 펜을 꺼내며 노트 내용을 힐끔 쳐다본 한현진이 멈칫했다. [131일. 어제와 다름없이 토는 하지 않았다. 입덧이 잦아들었지만 눈물이 많아졌
지금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산후우울증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한현진은 늘 다른 사람을 통해 재미를 찾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쓸데없는 고민은 사절했다. 강민서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두 사람 앞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이건 어때?”길게 늘어진 드레스자락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청소도 되고 좋네.”강민서는 강한서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드레스로 무대를 쓸어도 되겠어.”강민서: ...“오빠가 뭘 알아.”한현진이 강한서를 쳐내며 칭찬했다. “예뻐. 잘 어울려. 하지만 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는 아닌 것 같아. 약혼식은 주로 친구를 초대해 넌 민 실장님과 인사를 다녀야 할 텐데 드레스가 너무 길면 움직이기 불편할 거야.”강민서는 순간 강한서가 한현진에겐 과분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자신은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늘의 뜻도 거슬러 강한서를 선택해준 한현진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저렇게 독침만 내뱉는 입으로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그럼 좀 짧은 거로 입어?”강민서는 아예 강한서를 무시한 채 한현진의 의견을 물었다. “너무 짧은 것도 안 돼. 그래도 무릎은 넘기는 게 좋아. 너무 복잡한 스타일의 드레스도 필요 없어.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하고 컬러는 화이트나 아이보리 계열이면 돼.”강민서는 정인월이 보내준 드레스 중 몇 가지를 골라 수도 없는 피팅을 거쳐 한현진과 강한서가 만장일치도 예쁘다고 해준 아이보리 컬러의 드레스로 결정했다. 그 드레스를 본 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입만 안 열면 단아한 부잣집 딸내미 같아.”그 말을 들은 강민서는 더 이상 강한서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후, 민경하가 도착했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강한서가 부를 필요도 없이 강민서가 먼저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강한서는 불만 가득한 말투로 한현진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땐 저렇게 반갑게 맞아준 적이 없어.”한현진이 그런 강한서
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아냐, 이건 무효야. 방금 그건 우연이야. 다시 해. 이번엔 나중에 움직이게 한 사람이 강민서 약혼식 비용 전부 내는 거야.”씩 입꼬리를 올린 강한서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좋아. 누가 먼저 할까?”“나!”한현진이 말하며 딸기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가들아, 엄마야.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까?”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가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다. 마치 의심스럽다는 듯 잔잔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태동은 한현진을 흥분시키기엔 충분했다. “봐봐. 이것 보라고.”자신감이 하락한 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 목소리 톤으로 말하면 어떡해? 이건 부정행위잖아.”그렇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연 한현진은 강한서의 목소리로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현진은 단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게 왜 부정행위야. 네가 본인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규정한 건 아니잖아. 이런 건 특기를 발휘했다고 하는 거야.”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걸 꼼수를 부렸다고 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내가 이겼어.”“너 그건 내 노동성과를 표절한 거야.”“내가 이겼어.”“아이들 마음까지 속인 거라고. 태어나지도 않은 애들한테 인간의 사악함을 느끼게 했어.”“내가 이겼어.”강한서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반항했다. “나 아직 도전 안 했어. 아직 진 거 아냐.”한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강 대표님, 게임 룰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셨나봐요. 전 먼저 움직이게 한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제가 이미 먼저 움직이게 했잖아요. 강 대표님이 도전했든 안 했든, 그건 중요한게 아녜요.”“어차피 네가 1등은 아니라는 거지.”“...”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언어유희로 룰에 함정을 파놓은 거야?”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전화를 끊은 전연이 눈을 비볐다. “휴대폰 소리에 깼어요. 미안해요, 오빠. 오래 기다리셨죠? 바로 깨우지 그랬어요.”심원이 말했다. “그리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요.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깼네요.”말하며 시동을 끈 심원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요, 밥 먹어요.”전연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심원의 뒤를 따랐다. 밖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전연이 가방을 머리를 위로 올려 비를 막으려던 그때, 심원이 우산을 들고 나타나 전연에게 씌웠다. 심원은 흔히들 말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직 몇 번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심원은 당연하다는 듯 전연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우산 밖으로 비쭉 튀어나와 비를 맞고 어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제쪽으로 걸어요. 물웅덩이 조심하고요.”전연이 갑자기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모든 여자에게 다 이렇게 다정해요?”멈칫한 심원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자신이 물러선 그 한 걸음 때문에 전연이 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또 얼른 전연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심원은 그렇게 온전히 비를 맞으며 말 한 마디를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말을 더듬던 심원이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미안해요...”전연이 우산 손잡이를 잡고 심원에게 다가갔다. 심원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뒤에 주차된 차 때문에 더는 물러설 곳 없이 전연과 차 사이에 갇혀버렸다. 전연이 우산을 높게 들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 심원을 쳐다본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오빠가 우산 들어요. 키가 커서 이렇게 들고 있으면 팔이 너무 아파요.”“아, 네.”번뜩 정신을 차린 심원이 얼른 우산을 건네받았다. 전연이 심원을 향해 웃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오빠. 전 오빠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오빠가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오빠는 사격 실력도 엄청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