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의 맞춤 제작이 사치품에서 어떤 레벨인지, 패션계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벤에셀의 맞춤 제작 가방은 그녀의 방을 가득 채운 가방들 다 해도 모자랄 만큼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이 가방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서 소장 가치가 어마어마한 패션 아이템이었다.유현진의 손에 든 가방이 정품이라면 방이진이 그녀에게 가방을 선물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방이진은 아직도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진품 인증 코드도 조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인터넷에 올라온 에벤에셀의 가방 중 열에서 아홉은 짝퉁이라고 소문났는데, 이것도 짝퉁인지 아닌지 어떻게 장담한단 말입니까?”조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이진 씨, 손목에 있는 까르띠에 팔찌 말인데요, 그거 장 여사님한테서 산 거죠?”방이진은 흠칫 놀랐고 무의식적으로 팔찌를 움켜쥐고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무슨 헛소리에요? 이번에 매장에서 새로 산 팔찌예요!”조 사장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 팔찌는 한주시에는 두 개밖에 팔리지 않았어요. 하나는 주씨 가문의 아가씨가 사 가셨고, 다른 하나는 장 여사님께서 사 갔다고 들었어요. 장 여사님 집안에 최근 자금 회전에 문제가 생겨서 얼마 전에도 저한테 와서 많은 물건을 처분했었죠. 그때 제가 최대 5,200만 원까지 이 팔찌를 사들일 의향이 있다고 하자 장 여사님은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팔지 않으셨어요. 이 팔찌의 모양이나 퀄리티를 보니, 그녀는 아마 퀄리티를 보완해서 되팔았을 것 같네요. 이진 씨한테서 적어도 6,000만 원은 받으셨을 테지요?”조 사장은 말을 마치고 방이진의 손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보완한 후에는 확실히 퀄리티가 좋아진 것 같아 보이지만, 한 번 퀄리티를 보완한 팔찌는 다시 팔 때 제값을 받기 어려워요.”그의 뜻은 방이진에게 손해를 봤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방이진은 계속해서 발뺌하려고 했지만 들으면 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촬영을 시작하던 그날의 거대한 망고 외에, 유현진은 촬영장에서 조용한 편이었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과 똑같이 밥차에서 끼니를 때우거나 도시락을 먹었는데, 한 번도 반찬 투정을 한 적이 없었다.반면 촬영장에서 무릇 약간의 명성이 있는 배우라면 모두 조건 좋은 집안에서 응석받이로 자랐다. 촬영이 끝나면 그녀들은 곧바로 재벌가 아가씨로 돌아왔다.송민영과 방이진이 바로 대표적인 예였는데, 그녀들은 절대로 촬영장에서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그녀들은 커트 소리만 나면 매니저들에게 둘러싸여 파라솔을 쓰고 벤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정교하게 만든 특급 도시락으로 식사했다. 더욱이 출장 마사지사까지 불러 차에서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이렇게 비교해 보면, 유현진이 하는 행동은 무명 배우나 다름없었고 그녀는 늘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아무도 그녀가 메고 다니는 가방이 모두 고가의 명품, 리미티드 에디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유현진이 어떤 가문 출신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그건... 전 남자친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순식간에 사람들의 주의력은 유현진의 가문에서 그녀가 조금 전에 언급한 “전 남자친구”에게로 옮겨갔다.‘이런 가방을 선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전 남자친구와 어떻게 헤어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이별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막장이에요. 어떤 여자가 제 전 남자친구한테 한눈에 반하더니,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서 안달이 났거든요. 그 여자가 제 전 남자친구가 바람이 났다고 부추겼고 저는 바보같이 그 말을 진실로 믿고 그와 헤어졌었죠.”말을 마치며 그녀는 송민영을 담담하게 흘겨보았다. 그러자 송민영은 소름이 돋았고 뒤이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어머, 어떻게 이렇게 징그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뻔히 내연녀가 될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되려고 애를 쓰는 천한 여자가 있단 말이에요?”“
그때의 유현진은 사치품에 눈을 뜨지 못했던 지라 이 가방이 얼마나 비싼 가방인지 몰랐다. 다만 강한서가 선물한 가방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감동하게 했다. 그 때문에 유현진은 늘 어디를 가도 그 가방을 잘 메고 다녔다.결국 유현진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행동은 의도치 않게 상류 사회의 아가씨들과 사모님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머릿속이 텅 빈 개념 없는 여자, 돈 자랑과 과시욕에 찌들어 사는 이른바 된장녀라고 수군거렸다.그녀는 뒤늦게 이 가방의 가격을 알게 되고 나서는 그 가방을 잘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안 좋은 시선도 자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또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내어 트집 잡기 시작했다.차츰 유현진은 그녀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도, 그녀의 과시적인 행동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그녀가 분명히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별 볼 일 없는 여자인 주제에 홀가분하게 한주 강씨 가문으로 시집가 남들이 꿈꾸던 보통의 서민에서 상류 사회에 몸을 담게 되는 계급의 도약을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것을 알게 된 후로, 유현진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기분이 좋을 때는 SNS에 비싼 명품 주얼리를 올렸고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날에는 또 다른 종류의 진귀한 보석을 피드로 올렸다. 그녀의 기분이 어떻든지를 떠나,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혈압이 거꾸로 치솟게 하는 것은 확실히 그녀를 속 시원하게 했다. 물론 그렇게 SNS를 통해 재력을 과시한 일들로 인해 그녀는 “돈 지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도 했다.그녀의 이런 “돈 자랑”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강한서에게서 물든 것이었다. 그렇게 비싼 가방을 주면서 오다가 길가에서 대충 샀다고 했고 작은 액세서리 같은 선물은 고객사에서 선물 받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유현진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강한서는 차마 그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잔을 들고 걸어갔다. 상인회 회장이 그에게 소개한 사람들은 모두 올해 막 해외 각지에서 돌아온 화교들이었고 막 한주시에 정착한 비즈니스맨들이었기에 앞으로 오다가다 마주칠 사람들이었다.상인회 회장은 강한서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소개하지 않더라도, 이 사람들은 강한서에 대해 익히 들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한성 그룹 비즈니스는 일찍이 해외에 진출했기에, 그는 많은 글로벌 합작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매년 고액 연봉으로 직접 해외 각지에서 인재를 채용했기 때문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매우 유명했다. 모두 술잔을 기울이며 인사말을 나누었다.이때, 강한서는 조금 전보다 더 심한 컨디션 난조를 겪었다. 헛구역질은 오히려 조금 완화되었지만,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눈앞이 침침했고 사지가 무기력한 증상은 오히려 심각해졌다. 이러한 증상 외에, 몸속에서 불씨가 타오르는 듯, 그는 목이 말랐고 계속되는 갈증을 느꼈다. 그의 상태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강한서는 버티고 있다가 마침내 상인회 회장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회장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강한서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면서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전화가 채 걸리기도 전에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쳐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휴대폰은 마침 얼음이 반쯤 녹은 얼음통에 떨어졌고 그렇게 물에 반쯤 잠겼다.웨이터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허겁지겁 다가와 죄송하다며 거듭 사죄했다.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눈앞에 무언가가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웨이터를 밀어내고 터벅터벅 걸어가 휴대폰을 얼음통에서 건져냈다. 이미 물에 흠뻑 젖은 휴대폰은 이미 고장 났고 더 이상 전화를 걸 수 없게 되었다. 강한서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지끈 감았고 순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을 느꼈다.“한서 오빠?”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차미주가 소개한 변호사가 하필이면 강운 씨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였던 거야? 왜 나한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던 걸까? 진작 알았더라면 차라리 바로 강운 씨한테 자문을 구할 걸 그랬네... 그렇게 알게 됐으니, 오히려 더 난처하게 됐잖아...’그녀는 머리를 움켜쥐고 열심히 어떻게 상황을 모면할지 머리를 굴렸다.“그냥... 작은 문제라서, 그리고 강운 씨가 요즘 워낙 바쁘셔서야 말이죠. 게다가 그저 자문했을 뿐인걸요. 만약 소송까지 가게 된다면 당연히 강운 씨를 찾아갔겠죠.”주강운은 그녀가 혹시나 말실수하여 자기를 민망하게 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현진 씨를 탓할 뜻은 없습니다. 우리 법률사무소 직원의 전문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니, 오히려 저를 대신하여 트레이너 역할을 해주신 셈이시죠.”유현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만약 주강운의 표정이 진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주강운이 그녀를 조롱하는 것으로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도석문은 유현진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유현진은 다름 아닌 그의 애인이 혼쭐 내달라고 부탁했던 그 여자인 것 같았다. 그는 어쩐지 유현진이 눈에 익었다. 지난번에도 이곳에서 그녀를 마주쳤던 것 같았다.주강운의 차갑고 도도하던 얼굴이 그녀를 본 순간 사르르 녹아내린 것을 보고 도석문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돈을 줘도 여자를 소개해 줘도 씨알도 안 먹히던 양반이.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었던 거였구나... 그럴 만도 하지, 이렇게 예쁜 여자라면 혹할 만도 해.’도석문은 사람이라면 모두 욕망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껏 먹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주강운의 욕망을 제대로 타겟팅 하지 못했던 이유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를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혀를 찼다. 그리고 방이진을 지나칠 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틈을 타서 그녀의 엉덩이를 한 움큼 뭉켜 쥐었다. 그러고 나서 주강운과 몇 마디 인사
“됐어요.”주강운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유현진은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녀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강운의 손수건을 힐끔 쳐다보더니 너무 놀란 나머지 험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악! 제기랄 뭐야!”주강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여치 한 마리였는데, 주강운이 있는 힘껏 움켜잡고 있음에도 여치는 다리를 파닥거렸고 머리 위에 달린 가늘고 긴 더듬이 두 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것을 본 유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고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빨리 저리 치워요!”그녀는 더는 자기 이미지를 고려할 여유가 없었고 주강운에게 벌레를 빨리 처리하라고 그의 팔뚝을 밀어냈다. 그러자 주강운은 가볍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 여치를 숲으로 보내주었다.주강운이 돌아왔을 때, 유현진은 웨이터가 건네준 물티슈를 건네받고 머리를 닦고 있었는데, 그녀의 안색이 여전히 창백한 것을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방금 그녀와 함께 있던 여배우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아마 모두 위층으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주강운이 돌아온 것을 본 유현진은 그에게 물티슈 두 장을 건네주며 손을 닦으라고 했다. 주강운은 그녀가 건네주는 물티슈를 받고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여치는 독이 없거니와 사람을 물지도 않아요.”“하지만 너무 무서운걸요.”유현진은 조금 전에 봤던 여치를 떠올리자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다리가 길고 더듬이가 머리카락처럼 긴 곤충을 가장 무서워했다. 여름에 집에 그런 곤충 한 마리가 날아들면 그녀는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곤충을 싫어했고 한밤중에라도 강한서를 깨워 그 곤충을 잡게 해야 비로소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한 번은 강한서가 집에 들어온 곤충을 잡고 나서 그녀에게 보여 주려다 실수로 놓쳐서 곤충이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달려든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강한서에게 평생 다 못할 욕설을 퍼부었고, 일주일 내내 강한서를 침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유현진은 순간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주강운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지난번에 제가 유상수 씨와의 소송에서 패소한 것 때문에 더 이상 저에게 믿고 맡길 수 없다고 하는 건가요? 그래서 저보다는 차라리 수습 기간 변호사 한 명에게 자문하려는 건가요?”유현진은 서둘러 아니라고 하며 오해를 풀려고 했다.“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 소송은 우리가 진 것도 아니고, 고소를 취하한 것뿐입니다. 절대로 강운 씨를 탓할 수 없어요. 누가 저와 유상수가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주강운은 고개를 들고 머뭇거리다 물었다.“그러면 왜 저를 피하는 거죠?”유현진은 어안이 벙벙했다.“피한 적 없어요...”유현진은 갑자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단도직입적으로 강한서가 질투한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아직 재결합하지 않았거니와 재결합하더라도 그녀는 남들에게 굳이 시시콜콜 알리고 싶지 않았다.“제가 이 사건을 의뢰하게 되면 강운 씨에겐 깨알만큼의 수임료밖에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강운 씨가 주로 맡는 재벌가의 이혼 사건 수임료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될 겁니다. 저는 그저 강운 씨의 시간과 정성을 뺏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에 그렇게 제안한 것뿐입니다. 강운 씨는 순전히 친구로서 저를 도와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강운 씨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주강운은 한참 동안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지금까지 현진 씨의 일에 귀찮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저는 줄곧 현진 씨를 도와 어머님의 유산을 되찾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어요. 만약 이번 기회에 현진 씨를 도울 수 있다면 저의 무력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니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톱클래스 변호사의 자신감인가? 절대로 패소의 굴욕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일까?’주강운은 유현진 어머니의 뒷일을 처리해 준 것부터 시작하여 유현진을 도와
유현진은 그의 말에 잔뜩 감동했다.‘이렇게 만취할 정도로 마시고도 나를 걱정해 주다니...’유현진은 내심 흐뭇했지만 담담하게 대답했다.“이제 택시 부르려고 합니다. 이 근처에서는 택시가 잘 잡히거든요.”안창수는 알았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내일 늦지 말고요.”유현진은 그의 말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누가 늦을지는 모르는 일이죠.’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나서 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어 카카오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카카오택시 앱을 켜자마자, 회색 랜드로버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고 기사가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저기요, 택시 불렀어요?”유현진이 대답했다.“아닌데요, 전 아직 안 불렀어요.”기사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고객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멀리서나마 기사가 욕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객이 일방적으로 예약을 취소한 것 같았고 기사는 헛걸음했다며 그 사람과 말다툼했다. 곧이어 기사는 욕설을 퍼붓고 전화를 끊더니 다시 유현진에게 물었다.“아가씨, 어디로 가세요? 보다시피 빈 차인데 태워다 드릴게요, 저도 헛걸음하지 않을 겸...”유현진은 휴대폰을 들여다봤고 적어도 20분은 기다려야 배차가 될 수 있다는 알림을 보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클라우드 아파트로 가줄 수 있으시겠어요?”“당연하죠, 타세요.”유현진은 차 쪽으로 걸어가서 기사의 택시 회사 사원증을 확인하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기사는 차를 돌리면서 계속해서 푸념했다.“카카오 택시는 예약 차량 취소라는 기능을 없애야 해요. 고작 몇 푼 안되는 보상으로 이게 말이나 됩니까? 여기까지 온 기름값도 안 되네요!”차 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유현진은 불편한 기색을 숨지지 못하고 창문을 열었다.기사가 한참 동안 투덜거린 뒤에야 유현진이 물었다.“미터기는 없나요?”기사가 웃으며 말했다.“휴대폰에 미터기 앱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조금도 더 받거나 그런 거 없을 테니까요.”유현진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