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비록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너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해. 네가 일부러 방해하고 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강한서가 되물었다.“만약 내가 다른 여자한테 키스했으면, 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거야?”유현진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 들어갔다. 상상만 해도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고 여전히 강한서를 설득하려고 했다.“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난 직업상 어쩔 수 없는 거고 모두 다 연기잖아.”“나도 알아.”강한서는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하지만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건 사실이야.”유현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녀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촬영하는데 무조건 키스신 찍어야 해? 안 찍으면 안 돼?”유현진은 쉽게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었고 잔뜩 풀이 죽은 강한서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그건... 아마 대본에 따라 다를 거야. 하지만 감독님들은 이것저것 안 된다고 하는 배우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을 거야.”“그건 그 감독이 실력이 안 되는 거야. 실력이 안 되니까 괜히 선정적인 장면을 넣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거잖아.”“...”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 바로 감독님을 실력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네.'“모든 감독님이 다 그러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장르가 로맨스인데 어떻게 그런 신이 없겠어?”“로맨스라고 해서 무조건 그런 신을 찍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전에 유하나라는 작가가 쓴 로맨스 소설에도 그런 선정적인 내용은 없다고 했잖아. 그것처럼 네가 찍는 드라마에도 똑같이 없애면 안 돼?”유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거랑 같아? 게다가 그 작가가 안 쓰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그런 내용을 쓰면 바로 윗분들에게 불려 가니까 그런 거 아니야.”강한서가 나직하게 말했다.“이치가 같아. 솔직히 내가 이기적인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도 사회에서는 여성 직장인에 대한 엄격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휴대폰 알림이 떴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유상수가 그녀에게 1000만 원을 입금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자도 함께 보내왔다.「좋은 거 먹고 다녀, 필요한 거 있으면 아빠한테 말하고.」‘??? 유상수가 뭘 잘못 먹었나?'그녀가 결혼한 후에 유상수는 더는 그녀에게 용돈을 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돈을 썼던 기억은 주얼리 전시회에서 사람들의 분위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가치가 2억이나 하는 팔찌를 사주게 된 것이었다.“왜 그래?”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에 강한서가 물었다.정신을 차린 유현진이 말했다.“유상수가 나한테 1000만 원을 입금했어.”강한서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그 사람이 너한테 돈을 줬다고?”“응, 전에도 나한테 전화 온 적이 있었거든. 날 수양딸로 받아들이고 싶다고.”유상수의 위선적인 말에 유현진은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돈으로 지금 끊어졌던 연줄을 이으려고 하네. 정말 ‘통도 크셔라'.”강한서는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그래서 넌 하겠다고 했어?”“그럴 리가 있겠어?”유현진은 바로 눈을 번뜩이었다.“난 바보가 아니야. 그 사람이 나한테 돈을 쓴다는 건 우리 둘이 다시 재혼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계속 한성 그룹의 이득을 보려는 속셈이고. 그 사람은 내가 지금 사생아 신분이니까 다시 너랑 결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그럴싸한 신분을 나한테 만들어 주려고 나보고 수양딸 하라는 거고. 나에게 유씨 가문의 아가씨 신분을 주면 내가 분명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웃기지 않아? 지금도 내가 얼른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고 있을걸. 그런 엿 같은 신분 그냥 줘도 안 가져. 결혼 못 하면 안 하면 되잖아. 누가 그런 신분이 필요하대?!”강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입술을 말아 물고 말했다.“그래도 결혼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법적으로 보장도 받을 수 있잖아.”“... 난 지금 진지해
도석문이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자신의 스폰서를 발견한 방이진은 바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이 사람이 멍청하게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잖아요.”“넌 왜 이 더운 여름날에 얘한테 뜨거운 물을 가져다줘?”방이진은 당연히 자신이 일부러 매니저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다 달라고 시켰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제가 생리 왔거든요. 그래서 차가운 거 먹으면 이상하게 생리통이 느껴지거든요.”도석문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당연히 그런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리한다는 말에 순간 흥미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그럼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푹 쉬어. 내가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올게.”방이진은 당연히 그를 못 가게 막았다. 그가 그녀에게서 떠나자마자 바로 다른 여자를 찾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먹고 있는 것, 입고 있는 것, 쓰고 있는 것은 모두 눈앞에 있는 뚱뚱한 남자가 준 것이었기에 그녀는 당연히 그를 잘 대접해 줘야 했고 다른 여자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스르륵 안겼다. 손으로 그의 허리를 쓸면서 야릇하게 말했다.“비록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은 상태지만 오빠까지 몸이 안 좋으면 안 되잖아요.”도석문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지고 눈빛도 야릇해졌다.매니저는 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방에서 나가 문까지 꼭 닫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는 낯 뜨거운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소리가 멈추고 남자는 잔뜩 기분 좋은 얼굴로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쓸면서 물었다.“누가 또 널 화나게 했어? 누구 때문에 매니저한테 화풀이하고 있었던 거야?”“이건 다 유현진 그년 때문이에요!”유현진을 떠올린 방이진은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과장하여 그에게 들려주었다.“걔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피를 토하는 데 내가 때려서 그런 거라고 말하잖아요. 만약 정말 제가 때려서 피가 난 거라면 저도 인정했을 거예요. 하
여자는 어안이 벙벙하였다.“네, 맞는데요. 누구시죠?”민경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희 대표님께서 최연서 씨를 찾으십니다. 혹시 시간 됩니까?”최연서는 다소 경계하는 듯했다.“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답했다.“오늘 점심, 유 대표님이 메일을 보낸 상대가 바로 우리 회사 대표님이십니다. 들어는 보셨겠죠?”최연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전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말을 마친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민경하는 운전을 천천히 하며 그녀를 따라잡았다.“최연서 씨, 23세 맞으시죠? 인하공업대학교 나오셨고 지난해에 명성대 대학원에 합격하셨네요. 하지만 입학 신청을 하지 않고 바로 취업을 선택하셨죠. 최연서 씨 동생 최연지 씨가 여름 방학에 누군가에게 성추행을 당하던 도중에 실수로 상대를 찔러서 다치게 했다면서요? 듣자 하니 상대가 합의금 6억을 내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하던데, 당신은 동생을 감방에 보내지 않기 위해 유상수에게 본인을 파셨죠. 그래서 대학원 가는 것도 포기한 거 아닌가요?”최연서는 걸음을 멈추고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민경하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도대체 뭘 원하시는 거죠?”민경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타세요. 최연서 씨. 어쩌면 우리 회사 대표님께서 최연서 씨의 상황을 해결해 주고 다시 학교로 갈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이미 상대에게 모든 걸 들킨 최연서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는 듬직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얼굴도 아주 잘생겼다. 그러나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니 다소 차가운 오로라가 느껴졌다.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타세요.”얼른 차에 탄 최연서는 문 쪽으로 바짝 기대어 앉았다.민경하는 차를 돌려 다시 출발하였다. 강한서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훑어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녀는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해 황급히
최연서는 머뭇거리면서 받았다. 그녀는 서류에 적힌 액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그것은 2억 6천만 원이 이체된 영수증이었고 돈을 받은 사람은 바로 그녀의 동생이 찔러 다치게 만든 성추행범이었다.민경하는 또 다른 한 장의 손으로 쓴 서류를 내밀었다.“배상금은 이미 저희 대표님께서 청산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이 사람이 다시는 최연서 씨를 찾아와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대학원도 다시 다니고 싶으면 다시 신청하셔도 됩니다. 물론 신청하고 싶지 않으면 저희 대표님께선 명성대 학장님과 아는 사이이시니 사정을 말해주면 휴학 처리를 해드릴 겁니다. 그럼 그냥 다시 복학하면 됩니다.”최연서의 손이 덜덜 떨리더니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그녀가 유상수의 제안을 받은 후에도 다시 학교 다닐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동생이 다치게 만든 그 사람의 배후엔 세력이 존재했고 당시에 많은 목격자가 있었지만, 그 목격자들은 모두 친구랑 장난치는 것으로 보였다며 말을 바꿨다. 증거 영상도 없어 소송을 걸어도 이길 수가 없었다.게다가 상대는 오히려 그녀의 동생을 상해죄로 고소를 했고 변호사가 말하길 상대는 6억의 배상금만 내면 바로 고소를 취하해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감방에 보내겠다고 했었다.그녀의 동생은 기껏해야 20살이었고 이제야 인생이 시작되는 나이였기에 그녀는 언니로서 절대 감방 가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6억이라는 돈은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이 갚기에는 아주 큰 돈이었다.그리고 유상수는 마침 이때 나타나 그녀에게 “썩은 동아줄”을 내밀었다. 별다른 선택이 없었던 그녀는 그 썩은 동아줄을 꽉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줄 알았다. 더는 이런 역겨운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다.최연서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전 확실히 사진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그 사람은 제 동생이 일하는 가게로 찾아가 뭐 보낼 거 있다면서 휴대폰을 빌렸거든요. 그리고 사진을 몇 장 전송하더라고요. 비록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 또한 조마조마해졌다.“도대체 뭘 얘기하고 싶은 거죠?”유현진이 말했다.“최연서 씨,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전 별다른 뜻은 없거든요. 그냥 아무래도 이 일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내일 신리단길 근처에 있는 카페로 와주세요. 만나서 얘기해요. 만약 저희가 만난 후에도 제가 하는 얘기에 흥미가 안 생기면 바로 거절하셔도 돼요.”최연서는 망설이고 있었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입 모양으로 최연서에게 말했다.“만나세요.”최연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그래요. 그럼 내일 봬요.”전화를 끊은 최연서는 강한서에게 시선을 옮겼다.“왜 만나보라고 한 거죠?”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그 쪽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제 애인이에요.”“...”최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뭐야, 부부가 상의도 없이 날 찾아온 거야?'강한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내일 약속 시간대로 도착하세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수락하시고요. 그러면 제가 말한 조건 그대로 해결해 드릴 겁니다.”이렇게 좋은 조건을 최연서는 당연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다른 한편, 클라우드 아파트.유현진이 전화를 끊자마자 차미주가 황급히 물었다.“뭐래, 만나주겠대?”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오전에 만나기로 했어.”“내가 같이 가줄까?”유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런 일은 사람이 많을수록 상대가 얘기하기 더 어려워할 거야.”탐정 케이가 그녀에게 보낸 소식엔 유상수에게 최연서라는 내연녀가 있다는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고 최연서는 유현아보다도 나이가 어렸다.유현진은 원래 이 사건을 빌미로 백혜주를 괴롭힐 생각이었고 유상수와 백혜주를 사이를 이간질하게 해 개처럼 싸우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최연서의 상황을 알게 되고 최연서의 사진 또한 보게 된 그녀는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최연서를 이용하여 백혜주를 괴롭히기엔 최연서는 너무 어렸다.그녀가 원한 건 그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유현진이 말했다.“동생분이 작년 여름 방학에 성추행을 당하고 상해죄로 되레 고소당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억대의 배상금을 원했을 거예요, 맞죠?”어젯밤 불쑥 찾아온 강한서 덕에 그녀는 이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유현진이 천천히 말했다.“최연서 씨는 아마 돈이 급했을 거예요. 그리고 마침 유상수가 최연서 씨를 찾아갔겠죠. 돈을 빌려주겠다면서 스폰을 제안하고 내연녀가 되면 매달마다 연서 씨한테 2000만 원씩 주면서 빚도 갚아주겠다고 했을 거예요. 연서 씨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물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죠. 그렇게 3년간 유상수의 내연녀가 되었고, 맞죠?”떠오르는 그간의 기억에 최연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학교 세미나 때, 그녀는 룸메이트를 따라 면접을 하러 가다가 우연히 유상수를 만나게 되었다.그리고 취업 강연을 할 때 그녀는 누군가가 무대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강연을 마치자마자 유상수가 바로 무대 위로 올라와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했었다.당시 그녀의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대학원까지 갈 생각이었기에 그녀는 당연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그러나 당시 그녀는 취업 설문지에 그녀의 정보를 적었기에 이틀 후에 바로 유상수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그녀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최연서는 이런 그의 행동에 엄청난 반감을 느끼고 있었고 게다가 유상수는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기에 그는 유상수를 역겹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상수의 번호를 차단 설정해 놓았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동생에게 일이 생겼고 기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유상수의 내연녀가 되어버렸다. 그간 일들을 떠올리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그녀는 다소 날이 선 어투로 말했다.“그래서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죠?”유현진이 천천히 말했다.“최연서 씨, 왜 하필이면 당신에게 돈이 필요할 때 마침 유상수가 연락했는지
최연서는 카드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유현진에게 물었다.“제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죠?”유현진은 고개를 떨구고 사진을 쳐다보았다.“연서 씨도 봤으니 아실 거예요. 연서 씨가 저보다 제 돌아가신 엄마를 더 닮았다는 것을요. 유상수는 우연히 당신을 찾은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돌아가신 제 엄마와 닮은 연서 씨 얼굴을 보고 일부러 접근한 거예요.”최연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그 사람이 유현진 씨 어머니에게 미련이 남았나 봐요.”유현진은 차갑게 웃었다.“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 사람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자신의 욕심만 채우면서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연서 씨가 절 도와서 유상수와 백혜주가 저희 엄마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증거만 찾아주시면 돼요. 전 그들에게 꼭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거든요.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게 말이죠.”그녀의 눈빛에서 느낀 원망과 증오의 감정에 최연서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유현진의 눈빛이 다소 풀어졌다.“제가 알려드릴게요...”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유현진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동생이 아직 어리다고 들었어요. 계속 학교 다니게 해주세요. 다음 수능 칠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제게 남동생이 있는데 공부 잘하거든요. 원하시면 제가 동생에게 말해 연서 씨 동생에게 과외라도 해드릴게요. 여동생이 아직 어리니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선택지도 많아지거든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거예요.”최연서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네, 제가 동생과 상의해 볼게요.”유현진과 헤어진 후 최연서는 바로 강한서에게 전화를 했고 유현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빠짐없이 강한서에게 알렸다.강한서는 덤덤하게 답했다.“그녀가 시킨 대로 하세요.”전화를 끊자마자 민경하가 말했다.“남의 손을 빌려 복수를 하는 것과 사람 마음을 흔드는 방면에서는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꿇어앉은 주혁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가뜩이나 앙상한 몸이 유난히 허약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눈이 반짝이며 생기가 감돌았다. 무릎을 꿇은 채 한현진 앞으로 다가간 주혁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벌해 주세요.”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 굳은 표정을 한 그녀는 곧바로 주혁을 일으키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일어나세요.”주혁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고 목소리도 조금 갈라졌다. “대표님, 제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도 절 감싸주시고 정말 대표님을 볼 낯이 없어요. 벌해 주세요.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두 눈을 꼭 감은 한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어나라고 말씀 드렸어요. 다른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라고 제 사무실 앞에 무릎 꿇고 계신 거예요?”주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 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면 일어나요!”한현진은 연장자인 주혁에게 말 할 때도 늘 예의를 다했었다. 심지어 조금 전 오일 저장실에서도 최대한 그를 감싸주려 했었다. 그랬기에 주혁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한현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문지르던 주혁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다들 안 바빠요?”화를 내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그 카리스마는 전혀 서해금 못지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현진의 말에 곧 흩어졌다. 주혁을 쳐다보던 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들어와요.”깊은 숨을 들이쉰 주혁이 입술을 꾹 오므리며 한현진의 뒤를 따랐다. 조용히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간 한현진이 의자에 앉았다. 주혁은 그 순간 미세하게 나온 한현진의 아랫배를 보고는 당황했다. 다시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현진이 의자를 책상 쪽으로 끈 덕에 책상에 시야가 막혔다. 시선을 올린 한현진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주혁이 긴장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서 있으면 돼요.”그러자 한현
돈 얘기에 한현진이 잔뜩 신난 말투로 말했다. “그 돈은 내기에서 이겨서 받은 거야. 그 중 2천만 원 정도는 송가람이 베팅한 거야. 송가람 돈을 땄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잖아. 딴 돈을 혼자 가질 수는 없으니까 너에게 절반 줄게.”“감사합니다, 사모님.”강한서가 씩 미소 짓더니 거래 기록을 캡처해 저장하고는 돈을 다시 한현진에게 송금했다. “네가 일단 관리해줘. 나중에 필요하면 너에게 다시 얘기할게.”“그럼 내가 다 써버릴 거야.”강한서가 입꼬리를 예쁘게 올렸다. “그럼 너로 배상해줘.”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은 하지 마.”“...”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민경하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한현진이 말했다. “거 봐. 민 실장님도 그 말은 느끼하다고 생각하잖아.”민경하가 곧바로 해명하듯 말했다. “아뇨. 전 대표님께서 저런 말씀하시는 거 보기 좋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진심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알아요. 절 보면서 말하는 건 괜찮아요. 얼굴을 보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얼굴을 못 보는 상황에 저런 말을 들으면 신고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니까요. 괜히 희롱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민경하는 이번엔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밌어요? 민 실장이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지금부터 웃으면서 운전해요.”“민 실장님 괴롭히지 마.”한현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모님 라인을 탄 보람이 있네. 역시 사모님은 본인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니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민경하의 귓가로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이따 민 실장님이 데이트하러 가서 강민서에게 이르면 네 동생은 돌아와 너한테 복수할 거야.”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아.’강민서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민경하를 쳐다보며 한현진에게 물었다.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