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수는 그동안 한성 그룹을 등에 업고 아주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본인과 강씨 가문의 관계를 들먹이며 주문을 받아냈지만, 제품의 세대교체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또한 제품에 정말로 관심 있는 고객들을 늘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강한서와 이혼을 하자마자 강씨 가문과의 관계도 끝나버렸고 유상수는 떠나가는 고객들조차 붙잡지 못했으니 회사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러나 유씨 가문의 회사는 오랜 기간 기반을 다져온 회사였고 유상수도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었기에 이렇게 쉽게 망할 위기에 처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고 그 일로 인해 유상수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유현진은 아예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이 녹음 기록으로 그녀는 하현주의 저택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주강운에게 문자를 보내 문의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 그녀는 메시지 내용을 쓰다 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이내 내용을 삭제해 버렸다.주강운에게 물어보는 것은 물론 아주 편리했지만, 질투의 화신인 강한서가 알게 된다면 분명 또 난리를 칠 것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미주야, 전에 동창 중에 변호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유산 문제도 해결해 준대?”차미주가 말했다.“아마도 가능할걸? 걔는 사건이라면 다 받아. 근데 왜 주 변호사님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찾는 거야? 주 변호사님 엄청 실력 있잖아. 승소율도 높고.”“계속 주 변호사님께 부탁할 수는 없잖아. 일단 네가 아는 그 변호사 카톡 아이디 알려줘.”차미주는 휴대폰을 보면서 말했다.“너 혹시 강한서가 질투해서 확 엎어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 넌 정말 강한서에게 물러도 너무 물러! 이혼까지 했는데 강한서가 너한테 송민영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는 거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잖아. 그동안 널 가만히 내버려 두다가 왜 인제 와서 다시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너도 얼른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강한서
대표님이 지시한 일이니 그는 하는 수 없이 해체해야만 했다.그는 공구함을 열고 안에서 각종 소형의 공구들을 꺼냈다. 루나가 기계 눈으로 한 무더기의 공구들을 스캔하더니 갑자기 말을 했다.“아저씨, 저를 해체하려면 반드시 원래 있던 공장에서 해체해야 해요. 루나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맘대로 해체하면 다치게 될 거예요.”그 사람은 순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든 공구를 놓칠 뻔했다.“송 대표님, 그래도 해체를 안 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이런 지능이 높고 인간의 행동까지 예측 가능한 로봇을 그가 해체하면 다시 조립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송민준은 다리를 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해체하라면 해체하세요. 말이 많은 것 같으면 당장 전원을 끄시고요.”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루나의 전원 버튼을 눌러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제어판의 위치를 찾은 뒤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제어판 주위에 있던 나사를 제거하자 제어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그가 기계 본체 안으로 손을 뻗자 전원을 꺼둔 루나가 갑자기 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그리고 송민준은 작았던 철 덩어리에 사지가 생기고 변형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120cm 정도였던 작은 철 덩어리는 순식간에 성인 남자의 키만큼 커지게 되었다. 로봇에게 팔을 잡힌 남자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송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찻잔을 몸에 엎어버렸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뭐야 이거? 트랜스포머야?”루나는 이미 방어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고 그 남자의 팔을 놓아주더니 이내 머리를 빙 돌려 송민준을 목표물로 고정하고는 바로 다리를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송민준의 앞까지 온 루나는 그의 손에 있던 찻잔을 뺏어 들고 로봇 팔로 찻잔을 박살 냈다.이윽고 찻잔을 박살 낸 그 로봇 손이 송민준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송민준은 바로 도망쳤다.루나는 그를 쫓아갈 뿐만 아니라 파괴 모드로 전환하더니 자신의 길을 막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그를 쫓아갔다.
“그런 상황은 우리 실험 단계에서도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송민준은 당연히 자신이 사람을 불러 루나를 해체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내가 로봇한테 무슨 짓을 했겠어? 그냥 너희들이 만든 로봇에 버그가 생긴 거겠지!”이내 송민준은 그를 재촉하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이거 어떻게 멈추는지나 알려줘 봐!”강한서는 가볍게 피식 웃더니 속으로 송민준도 참 고집이 세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지하게 답했다.“기다려 봐.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 테니까.”“얼른!”전화를 끊은 후, 송민준은 바닥에 엎드렸다.그의 두 팔은 이미 루나에 의해 뒤로 잡혀있었다. 로봇은 인간처럼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송민준은 자신의 두 팔이 곧 탈골될 것 같은 느낌에 아프고 저렸다.“오빠, 이 로봇 한서 오빠가 만든 거야?”송가람은 계단 위에 멀찍이 앉아 궁금한 듯 물었다.송민준은 불쾌한 기색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걔 아니면, 누가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겠어!”“한서 오빠 정말 대단하네.”“대단하긴 뭐가! 정말 그렇게 대단했다면 이 철덩이가 통제를 벗어났겠어?”송가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송민준은 그렇게 그 자세로 10여 분간 엎드려 있었지만, 여전히 연락 없는 강한서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물어는 봤냐? 이걸 어떻게 멈춰!”“방금 물어봤어.”강한서가 말했다.“연구개발팀 직원이 그러는데 방어 시스템이 작동된 거 같대.”사실 강한서는 애초에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아까 송민준의 연락을 받고도 의자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무슨 시스템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래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멈춘다는 거냐!”그는 지금 강한서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의심했다!강한서는 아주 느긋하게 대답했다.“아, 그래. 그건 아직 설정 안 해줬는데.”송민준의 안색이 파래졌고 그는 이를 빠득 갈면서 말했다.“뭐라고?”“아직 강제 종료시키는 시스템을 설정해 두지 않았다고. 어쨌든 아직도 연구개발 중
강한서는 당연히 송민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루나의 공격을 멈추게 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루나의 방어 시스템이 피동적으로 작동된 경우에는 배터리 소모량이 아주 높았기에 방어 시스템이 유지되는 시간을 짧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 기껏해야 2시간뿐이었다.물론, 이 2시간은 송민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의 창피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예를 들면, 집으로 돌아간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먼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렸다.한열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송민준의 사진에 “현생과 나”라는 글귀를 적어 이모티콘으로 만들어 한씨 가문의 가족 단톡방에 보냈고 그렇게 송민준은 그들에게 한 해 동안 놀림을 당하게 되었다.오후 회의가 끝난 후,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다른 업무를 내려주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민경하가 바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밸런타인데이인데 사모님이랑 같이 안 보내세요?”강한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죠.”그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고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민경하가 말했다.“예전에도 제가 말해드린 적은 없습니다. 다 사모님께서 대표님께 말해드린 겁니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민경하를 쓱 쳐다보며 흡사 눈빛으로 “그럼 왜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는 인제야 말해주는 겁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민경하가 말했다.“제가 두 분을 위해 영화표 두 장을 예매해 두었습니다. 듣기론 커플이라면 반드시 함께 봐야 하는 영화라더군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모시고 영화관 데이트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순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강한서는 바로 표정을 풀고 시계를 확인하면서 물었다.“몇 시에 시작하는 영화죠?”“영화는 저녁 8시에 시작하고 2시간 뒤에 끝납니다. 그리고 오늘 밤 능강에서 유등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영화가 끝나면 바로 가서 유등축제로 가시면 될
한성우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뭐라고? 신호가 안 좋아서 잘 못 들었는데.”강한서가 말했다.“부가티 빌려줄게.”한성우의 휴대폰 신호도 순간 좋아졌다.“오케이.”이윽고 유현진과 차미주가 준비를 마치고 외출하려던 차에 멋지게 차려입은 한성우가 9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문을 연 차미주는 한성우임을 확인하고 어두워진 낯빛으로 문을 닫으려고 했다.한성우는 급하게 문 사이로 발을 끼워 넣었다.“에이, 그러면 안 되지. 난 네가 날 골탕 먹이려는 거 알고도 네가 해준 거 다 먹었잖아. 그런데도 화가 안 풀린 거야?”차미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래, 아주 쌤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젠 공평해졌으니 앞으로도 우리 집엔 그만 찾아와.”그녀가 다시 문을 닫으려고 하자 한성우는 바로 차 키를 꺼내 보였다.“내가 사죄하는 의미로 부가티 태워줄게, 어때?”차미주의 눈동자가 빠르게 한성우의 손에 있는 차 키로 돌아갔다.솔직하게 말해서.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너 설마 가짜 차 키를 만들어 날 속이려는 건 아니지?”한성우는 속으로 그 두 가지 일로 이미 차미주 마음속 그에 대한 신용도가 0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반드시 강한서의 부가티 어느 한 곳을 망가뜨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차는 이미 지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어. 네가 나랑 같이 내려가서 확인해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 되잖아? 내가 정말로 널 속였다면 그럼 앞으로 나 무시해 버려.”차미주는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난 원래부터 너랑 말 섞고 싶지 않았어! 난 널 내 친오빠처럼 여겼는데 그동안 나한테 그런 짓이나 하고!”한성우는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알았어. 화내지 마. 내려가서 확인하자. 정말 거짓말이면 날 바닥에 내리꽂아도 괜찮아.”유현진이 옷을 갈아입을 새로 차미주는 그렇게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곧이어 그녀는 차미주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현진아,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영화 보러 못 갈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같이 보러 가자고 물어봐.
한서 오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천천히 다시 몸을 움직여 휴대폰을 보는 척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시죠?”“???”그녀도 알아들은 목소리를 강한서가 못 알아듣자 유현진은 순간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하지만 강한서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3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상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한서 오빠, 저 가람이에요. 전에 카톡도 추가하고 문자도 보냈었는데 답장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한 건데, 혹시 방해되었나요?”그녀가 이름을 말하자 강한서는 그제야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카톡 답장을 하지 않은 이유도 사실 그는 루비 팔찌를 사고 송가람에게 계좌이체를 해준 뒤 바로 송가람의 카톡 알림 끄기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당연히 송가람이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강한서는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인데?”송가람이 말했다.“한주시 근처를 좀 구경하고 싶은데 제가 길을 잘 몰라서요. 오늘 하루만 제 여행가이드 해주시면 안 될까요?”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던 송가람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전에 같이 식사하실 때 구경시켜 준다고 하셨잖아요.”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강한서는 그런 그녀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심지어 송가람이 왜 굳이 밸런타인데이 저녁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송가람이 말을 마치자마자 강한서가 답했다.“저녁에 한주시를 구경해봤자 볼 수 있는 건 가로등밖에 없을 텐데.”송가람이 말했다.“가로등도 괜찮아요. 도시 외곽에서 풍등 축제를 한다는 소식도 있길래 저도 가서 소원 빌고 싶었거든요.”유현진은 속으로 강한서가 또 본인의 전문 분야를 들먹이며 송가람에게 안전 지식 수업을 한바탕할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강한서는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 송가람에게 풍등의 위험성 같은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지금 어디야
유현진은 강한서가 송가람을 강현우에게 맡길 줄 몰랐다. 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강현우에게 가람 씨를 부탁하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유현진의 뜻을 알아차린 강한서가 말했다.“걱정하지 마. 강현우는 절대 감히 그럴 생각하지 못할 거야.”둘째 삼촌 내외는 송씨 가문과 혼인을 맺고 싶어 했기에 강현우는 당연히 송가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쓸 것이었고 절대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었다.“그러다 정말 두 사람이 결혼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들이 똘똘 뭉쳐서 널 한성 그룹에서 내쫓으면 어떡해?”유현진은 비록 이런 분야에 대해 잘 몰랐기만 강현우가 만약 송씨 가문의 송가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강한서에게 얼마나 불리할지는 잘 알고 있었고, 그녀는 강한서가 멍청하게 그 기회를 만들어 줬다고 생각했다.강한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만약 정말로 결혼이 소용이 있었다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미 둘째 삼촌의 손에 내쫓겼을 거야.”송민희의 친정은 신미정의 친정보다 더욱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곰곰이 생각하던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널 쫓아내지는 못한다고 해도 어쨌든, 너에게 불리한 건 맞잖아?”“응.”강한서가 가볍게 대꾸하였다.확실히 그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었다. 여하간에 둘째 삼촌 내외가 송씨 가문과 혼인을 맺게 된다면 자금과 인맥 방면에서 분명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유현진은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만약 그 두 사람이 정말 결혼하게 된다면, 넌 어쩔 생각이야?”강한서는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열심히 점수를 채워야지. 난 절대 제일 마지막에 결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유현진의 귀가 순간 붉게 물들었다.“... 내 말은 회사 말이야! 어떻게 할 거냐고!”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아무리 궁지에 몰린다고 해도 내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까 봐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너랑만 결혼하고 싶거든.”안전벨트를 잡고 있던 유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민경하는 당연히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밸런타인데이 당일에 예매한 영화표였기에 다른 영화를 예매할 수가 없었다.‘도 아주 힘들게 예매한 건데, 그거라도 만족해야 하는 거 아닌가?'유현진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한참이나 전화를 하는 강한서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그냥 내가 가서 다른 영화로 바꿀 수 없나 물어볼게.”이윽고 두 사람은 직원에게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민경하가 예매한 영화표는 당일 특가로 나온 영화표라서 환불도 불가능하다고 그들에게 말했고 게다가 새벽 시간대 빼고는 지금 시간대에 남아있는 영화표가 없다고 했다.새벽 시간대는 이미 밸런타인데이가 지난 시간대였기에 당연히 사람들이 적었다.망설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직원이 설득했다.“사실 이 영화에도 로맨스가 포함되어 있어요. 커플끼리 보기에도 아주 적합한 영화예요. 오늘만 벌써 여러 번 매진되었거든요. 커플에게 인기도 아주 많았어요.”유현진은 밸런타인데이에 공포 영화가 매진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직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보지 않으셔도 저희가 환불해 드릴 수 없어요. 일단 두 분께서 먼저 들어가 보시다가 그래도 재미가 없으시면 중도에서 빠져나와도 됩니다. 영화표를 그냥 낭비하는 것보단 낫잖아요.”유현진은 살짝 설득당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낭비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영화표 두 장을 꼭 쥐고 강한서를 보며 말했다.“한 번 가서 볼래?”어차피 이미 영화관에 왔고, 영화표도 힘들게 줄을 서서 출력했으니 영화를 보지 않고 그냥 가는 건 너무 낭비인 것 같았다.강한서는 애초에 어떤 영화를 보든 딱히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유현진이 보고 싶다고 하니 그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밸런타인데이 밤 이라는 국산 공포 영화를 보게 되었다.확실히 직원의 말에 거짓이 없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영화를 보러 들어왔을 땐 이미 절반 이상의 좌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스위트박스였고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