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아는 쓰레기를 바닥에 던지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손 씨 아주머니께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고 있잖아요. 아주머니께선 이젠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으니 청소도 대충대충 하고 계시잖아요!”“그만하거라!”유상수가 호통을 쳤다.“손 씨 아주머니는 이 집에서 일한 지 가장 오래되신 분이다. 아주머니의 업무 태도가 어떻든 내가 모를 것 같으냐?”그는 말하면서 손 씨 아주머니를 끌어당기더니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유현아를 향해 말했다.“얼른 아주머니께 사과해!”유현아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더니 손에 있던 쓰레기를 바닥에 휙 던지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싫어요! 제가 왜요! 애초에 아주머니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건데,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해요?”“너 그게 무슨 버릇이냐? 예의는 밥 말아 먹었니?”유현아와 백혜주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 후로부터 유현아는 전처럼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예쁜 말만 골라 하면서 가끔 집안일도 도와주며 집안 도우미를 도와 차를 따라주던 유현아는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손 씨 아주머니는 두 부녀가 설전을 벌이자 결국엔 모든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말렸다.“아이고, 괜찮습니다. 제가 얼른 후딱 치우면 됩니다.”유현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빠, 혹시 아주머니가 아빠의 전 부인이 고용한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아주머니를 난처하게 만드니까 심기가 불편하셨던 거예요? 이미 화장까지 한 사람을 왜 이렇게 두려워하시는 거죠?”유상수는 정곡이라도 찔린 듯 바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그 입 다물지 못해!”뺨을 맞은 유현아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녀는 유상수가 그녀에게 손을 댈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마침 거실로 내려오던 백혜주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왜 애를 때려요?”그녀는 바로 유현아를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유상수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쟤한테 물어봐! 도대체 내 앞에서 무슨
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한 게냐?”유현아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아빠의 교양 넘치는 딸 말이에요. 이혼하고도 강한서를 놓아주지도 않고, 심지어 송씨 가문의 송민준에게도 꼬리를 치고 다닌다고요. 그리고 이 말을 전해 달라더군요. 하현주가 걔를 위해 준비한 혼수와 강씨 가문에서 걔한테 준 예물이 모두 얼마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시간이 나면 바로 와서 돌려받겠다고 했다고요. 만약 아빠가 돌려주지 않으면 고소까지 할 생각이라고 하더군요.”유상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내가 그동안 키워준 게 얼마인데? 감히 나한테 그걸 돌려받겠다고?!”뺨을 맞았던 유현아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거기다 백혜주가 지금 그녀를 지켜주고 있으니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했다.“못 돌려받을 게 또 뭐가 있겠어요? 아빠는 걔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자마자 이혼 서류를 내미셨잖아요. 유현진은 아마 뼛속까지 아빠를 증오하고 있을 거예요.”백혜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힐끔 보았다.“그만 말해!”유현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백혜주가 말했다.“걘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애구나? 예물을 돌려받겠다고?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청산할 예물이 어디 있어? 청산을 받아도 강씨 가문이 우리한테 청산을 받아야지, 걔가 뭐라고 그걸 받아? 그리고 하현주가 준비해 준 혼수는, 하현주가 그냥 병원에 입원했어? 아니잖아. 입원비를 내고 입원한 거 아니야? 걘 설마 진짜로 하현주가 걔한테 막대한 재산을 남겨줬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유상수는 당연히 유현진에게 그 돈을 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그의 돈은 이미 연현 테크의 주식 투자에서 절반이나 날렸고, 전에 유현진과 강한서가 이혼하면서 그가 운영하던 회사와 장기 계약한 거래처들도 떠나버려 매출액도 절반 가까이 확 줄어들었다. 심지어 회사의 몇몇 임원진들의 마음도 이미 떠나간 상태였고 이미 몰래 뒤에서 회사의 주식을 팔아버린 사람도 있었기에 만약 누
유현진은 입을 앙다물었다.“유상수.”차미주는 바로 화를 냈다.“그 쓰레기가 무슨 염치로 너한테 연락을 한 거야?!”“나도 몰라, 어쨌든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거야.”말을 하는 순간에도 휴대폰이 또 울렸다.차미주가 말했다.“받아봐. 도대체 이 쓰레기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보게. 그리고 현주 아주머니의 돈도 다 뱉어내라고 해!”생각을 마친 유현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유상수의 전화 폭격은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뭣 때문에 그가 이렇게 전화를 쳐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현진아, 끊지 말고 일단 들어봐.”전화가 드디어 통하자 유상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유현진은 휴대폰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하면서 녹음 기능까지 켜두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유상수 씨, 자꾸 이런 식으로 전화하시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난 그냥 너에게 볼일이 있단다.”유상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별다른 뜻은 없어.”유현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하, 저희 사이에 고소를 진행하는 것 말고는 또 다른 볼일이 있나요? 아니면 유현아가 제 말을 똑똑히 전했나 보네요, 그래서 돈을 갚으시려고요? 돈 갚으시려는 거면 제가 얘기를 들어드리죠.”유상수의 표정이 순간 확 굳어졌고 언짢은 기분을 꾹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현진아, 비록 너와 나는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이지만, 그래도 내가 널 키웠잖니. 난 우리 사이에 아직도 가족애가 남아있다고 보는데, 넌 안 그러냐? 사실 법정에서 나온 후로부터 난 줄곧 네가 너무 걱정되어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잘 지내고는 있니?”차미주는 바로 헛구역질을 하면서 입 모양만 벙긋거렸다.“도대체 무슨 낯으로 저런 말을 한대?”유현진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유 대표님, 이렇게 말씀드리죠. 저희 사이에는 더는 남아있는 감정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굳이 걱정하는 척 연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유상수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졌다. 유현진의 화법은 그야말로 하현주의 화법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으면서 나직하
차미주는 무표정을 지으면서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만약 그녀가 유현진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유현진의 목소리만 듣고 그녀는 분명 유현진이 유상수의 꿍꿍이에 넘어갔을 것으로 생각했다.명백하게 하자는 말에 유상수는 역시 뜸을 들였다.“그... 그래서 어떻게 명백하게 할 생각이지?”“적어도 입양 절차 정도는 해주셔야죠. 입양 신청하고, 유언장에 제 이름도 써주시고. 만약에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이 두 서류가 없이는 전 유산을 단 한 푼도 못 받게 되거든요.”유상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그저 유현진을 이용하여 그에게 다리를 놓는 역할만 해주길 바랐고 그녀에게 유산 받을 권리까지 주고 싶지 않았다.“현진아, 지금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단다. 내가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유언장은 좀 아닌 것 같구나. 게다가 넌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입양 신청은 할 수 없을 테지.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더냐?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 두 가지가 없어도 난 널 내 친딸처럼 여길 거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넌 정정당당한 유씨 가문의 아가씨가 될 거다. 네가 미래에 강한서랑 다시 재혼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든 유씨 가문은 영원히 널 지켜줄 거다.”그의 입에서 강한서의 이름을 듣게 되자마자 유현진은 바로 그가 갑자기 계속 전화를 걸어온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다.유상수는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를 갑자기 수양딸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아마도 어디서 뭔가를 들은 게 틀림없었다.유현진은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아무것도 못 해주면서 저보고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적어도 저한테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상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그마한 성의를 보이지 않는 한 정말로 이젠 유현진을 쉽게 속일 수 없는 것 같았다.“아빠로서 당연히 성의를 보여야겠지. 그래. 네 외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자그마한 저택이 하나 있단다. 전에는 내가 사업을 하느라 그 저택을 담보로 내걸었지만,
유상수는 그동안 한성 그룹을 등에 업고 아주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본인과 강씨 가문의 관계를 들먹이며 주문을 받아냈지만, 제품의 세대교체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또한 제품에 정말로 관심 있는 고객들을 늘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강한서와 이혼을 하자마자 강씨 가문과의 관계도 끝나버렸고 유상수는 떠나가는 고객들조차 붙잡지 못했으니 회사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러나 유씨 가문의 회사는 오랜 기간 기반을 다져온 회사였고 유상수도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었기에 이렇게 쉽게 망할 위기에 처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고 그 일로 인해 유상수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유현진은 아예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이 녹음 기록으로 그녀는 하현주의 저택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주강운에게 문자를 보내 문의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 그녀는 메시지 내용을 쓰다 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이내 내용을 삭제해 버렸다.주강운에게 물어보는 것은 물론 아주 편리했지만, 질투의 화신인 강한서가 알게 된다면 분명 또 난리를 칠 것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미주야, 전에 동창 중에 변호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유산 문제도 해결해 준대?”차미주가 말했다.“아마도 가능할걸? 걔는 사건이라면 다 받아. 근데 왜 주 변호사님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찾는 거야? 주 변호사님 엄청 실력 있잖아. 승소율도 높고.”“계속 주 변호사님께 부탁할 수는 없잖아. 일단 네가 아는 그 변호사 카톡 아이디 알려줘.”차미주는 휴대폰을 보면서 말했다.“너 혹시 강한서가 질투해서 확 엎어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 넌 정말 강한서에게 물러도 너무 물러! 이혼까지 했는데 강한서가 너한테 송민영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는 거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잖아. 그동안 널 가만히 내버려 두다가 왜 인제 와서 다시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너도 얼른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강한서
대표님이 지시한 일이니 그는 하는 수 없이 해체해야만 했다.그는 공구함을 열고 안에서 각종 소형의 공구들을 꺼냈다. 루나가 기계 눈으로 한 무더기의 공구들을 스캔하더니 갑자기 말을 했다.“아저씨, 저를 해체하려면 반드시 원래 있던 공장에서 해체해야 해요. 루나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맘대로 해체하면 다치게 될 거예요.”그 사람은 순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든 공구를 놓칠 뻔했다.“송 대표님, 그래도 해체를 안 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이런 지능이 높고 인간의 행동까지 예측 가능한 로봇을 그가 해체하면 다시 조립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송민준은 다리를 꼬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해체하라면 해체하세요. 말이 많은 것 같으면 당장 전원을 끄시고요.”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루나의 전원 버튼을 눌러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제어판의 위치를 찾은 뒤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제어판 주위에 있던 나사를 제거하자 제어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그가 기계 본체 안으로 손을 뻗자 전원을 꺼둔 루나가 갑자기 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그리고 송민준은 작았던 철 덩어리에 사지가 생기고 변형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고 120cm 정도였던 작은 철 덩어리는 순식간에 성인 남자의 키만큼 커지게 되었다. 로봇에게 팔을 잡힌 남자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송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찻잔을 몸에 엎어버렸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뭐야 이거? 트랜스포머야?”루나는 이미 방어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고 그 남자의 팔을 놓아주더니 이내 머리를 빙 돌려 송민준을 목표물로 고정하고는 바로 다리를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송민준의 앞까지 온 루나는 그의 손에 있던 찻잔을 뺏어 들고 로봇 팔로 찻잔을 박살 냈다.이윽고 찻잔을 박살 낸 그 로봇 손이 송민준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송민준은 바로 도망쳤다.루나는 그를 쫓아갈 뿐만 아니라 파괴 모드로 전환하더니 자신의 길을 막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그를 쫓아갔다.
“그런 상황은 우리 실험 단계에서도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송민준은 당연히 자신이 사람을 불러 루나를 해체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내가 로봇한테 무슨 짓을 했겠어? 그냥 너희들이 만든 로봇에 버그가 생긴 거겠지!”이내 송민준은 그를 재촉하면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이거 어떻게 멈추는지나 알려줘 봐!”강한서는 가볍게 피식 웃더니 속으로 송민준도 참 고집이 세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지하게 답했다.“기다려 봐.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 테니까.”“얼른!”전화를 끊은 후, 송민준은 바닥에 엎드렸다.그의 두 팔은 이미 루나에 의해 뒤로 잡혀있었다. 로봇은 인간처럼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송민준은 자신의 두 팔이 곧 탈골될 것 같은 느낌에 아프고 저렸다.“오빠, 이 로봇 한서 오빠가 만든 거야?”송가람은 계단 위에 멀찍이 앉아 궁금한 듯 물었다.송민준은 불쾌한 기색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걔 아니면, 누가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겠어!”“한서 오빠 정말 대단하네.”“대단하긴 뭐가! 정말 그렇게 대단했다면 이 철덩이가 통제를 벗어났겠어?”송가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송민준은 그렇게 그 자세로 10여 분간 엎드려 있었지만, 여전히 연락 없는 강한서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물어는 봤냐? 이걸 어떻게 멈춰!”“방금 물어봤어.”강한서가 말했다.“연구개발팀 직원이 그러는데 방어 시스템이 작동된 거 같대.”사실 강한서는 애초에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아까 송민준의 연락을 받고도 의자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무슨 시스템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래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멈춘다는 거냐!”그는 지금 강한서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의심했다!강한서는 아주 느긋하게 대답했다.“아, 그래. 그건 아직 설정 안 해줬는데.”송민준의 안색이 파래졌고 그는 이를 빠득 갈면서 말했다.“뭐라고?”“아직 강제 종료시키는 시스템을 설정해 두지 않았다고. 어쨌든 아직도 연구개발 중
강한서는 당연히 송민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루나의 공격을 멈추게 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루나의 방어 시스템이 피동적으로 작동된 경우에는 배터리 소모량이 아주 높았기에 방어 시스템이 유지되는 시간을 짧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 기껏해야 2시간뿐이었다.물론, 이 2시간은 송민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의 창피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예를 들면, 집으로 돌아간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먼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렸다.한열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송민준의 사진에 “현생과 나”라는 글귀를 적어 이모티콘으로 만들어 한씨 가문의 가족 단톡방에 보냈고 그렇게 송민준은 그들에게 한 해 동안 놀림을 당하게 되었다.오후 회의가 끝난 후, 강한서는 민경하에게 다른 업무를 내려주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민경하가 바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밸런타인데이인데 사모님이랑 같이 안 보내세요?”강한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제야 말해주는 거죠.”그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고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민경하가 말했다.“예전에도 제가 말해드린 적은 없습니다. 다 사모님께서 대표님께 말해드린 겁니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민경하를 쓱 쳐다보며 흡사 눈빛으로 “그럼 왜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는 인제야 말해주는 겁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민경하가 말했다.“제가 두 분을 위해 영화표 두 장을 예매해 두었습니다. 듣기론 커플이라면 반드시 함께 봐야 하는 영화라더군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모시고 영화관 데이트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순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강한서는 바로 표정을 풀고 시계를 확인하면서 물었다.“몇 시에 시작하는 영화죠?”“영화는 저녁 8시에 시작하고 2시간 뒤에 끝납니다. 그리고 오늘 밤 능강에서 유등축제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영화가 끝나면 바로 가서 유등축제로 가시면 될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
서해금 사무실.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데 고작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삭감해?”밖에선 꾹 참고 있던 서해금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더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송가람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엄마. 은서하는 재무팀 직원이야. 감히 내 앞에서 한현진의 선물을 받았어. 그건 엄마에게 창피를 주는 것과 다를 거 없잖아.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직원들도 은서하와 똑같이 했을 거야. 난 그저 엄마 대신 주의를 준 것뿐이야.”“주의?”서해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옷 한 벌로 주의? 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야? 은서하가 한현진 옷 선물을 받았을 때, 왜 그 이유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어? 은서하는 가족 병원비 때문에 충분히 힘들게 살고 있어. 만약 이런 타이밍에 네가 은서하를 도와줬다면 걔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네가 얼마나 아량이 넓은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하지만 네가 한 짓을 봐! 보너스를 삭감으로 은서하 상황만 더 안 좋게 했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네 곁에 있던 멍청이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어. 그런 식으로 은서하를 조롱하면 네가 뭐라도 돼 보일 것 같아? 멍청한 것! 네가 그럴수록 사람들은 네가 속이 좁다고 생각할 뿐이야. 고작 그런 일로 복수나 하는 아량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 누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을 것 같아?”멍해졌던 송가람은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그땐... 그땐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렇게 멍청하게 한 번도 인사팀에 묻지 않을 줄은 몰랐지. 그리고 내가 걔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아...”변명을 늘어놓던 송가람은 조금 전 한현진이 대신 나서줬음에도 끝내 한현진 편에 서지 않던 은서하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조금 전 한현진이 도와주는데도 가만히 있는 거 봤잖아. 엄마는 어떻게 은서하가 배은망덕한 머리 검은 짐승이 아닐 거라 확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부업으로 회사 청소를 하시면서 실수가 있으셨고 그걸 바로 저에게 보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덜미를 잡혔어요. 만약 오늘 세은이가 오일 제조에 실패했다면 기사님이 얼마나 큰 책임을 떠안아야 했는지 알고는 계세요?”“마지막 이유는, 제 사무실 앞에 꿇어앉아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어야 하셨어요. 무릎을 꿇는 이유가 사과든 반성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든 그건 제가 싫어하는 방식이거든요.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자존심도 전부 내려놓는 행위이니까요. 부모님과 은인 앞이 아닌 이상,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고용관계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보다 한참 연장자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기사님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바라는 행동을 전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주혁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도 조금씩 하얗게 질려갔다. 한현진의 논리정연한 말에 주혁은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죄송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말이 없던 한현진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해요. 월급은 제가 최대한 인사팀과 협의해 볼게요.”한참을 잠자코 있던 주혁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다시 대표님 운전기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한현진은 이번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현진은 진심으로 주혁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가 부업을 하려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몰랐다. 한현진에게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여유가 없었다. 면접을 봤던 그날 주혁이 구해준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한현진은 그런 이유로 더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꿇어앉은 주혁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가뜩이나 앙상한 몸이 유난히 허약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눈이 반짝이며 생기가 감돌았다. 무릎을 꿇은 채 한현진 앞으로 다가간 주혁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벌해 주세요.”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 굳은 표정을 한 그녀는 곧바로 주혁을 일으키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일어나세요.”주혁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고 목소리도 조금 갈라졌다. “대표님, 제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도 절 감싸주시고 정말 대표님을 볼 낯이 없어요. 벌해 주세요.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두 눈을 꼭 감은 한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어나라고 말씀 드렸어요. 다른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라고 제 사무실 앞에 무릎 꿇고 계신 거예요?”주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 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면 일어나요!”한현진은 연장자인 주혁에게 말 할 때도 늘 예의를 다했었다. 심지어 조금 전 오일 저장실에서도 최대한 그를 감싸주려 했었다. 그랬기에 주혁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한현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을 문지르던 주혁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다들 안 바빠요?”화를 내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그 카리스마는 전혀 서해금 못지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한현진의 말에 곧 흩어졌다. 주혁을 쳐다보던 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들어와요.”깊은 숨을 들이쉰 주혁이 입술을 꾹 오므리며 한현진의 뒤를 따랐다. 조용히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간 한현진이 의자에 앉았다. 주혁은 그 순간 미세하게 나온 한현진의 아랫배를 보고는 당황했다. 다시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현진이 의자를 책상 쪽으로 끈 덕에 책상에 시야가 막혔다. 시선을 올린 한현진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주혁이 긴장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서 있으면 돼요.”그러자 한현
돈 얘기에 한현진이 잔뜩 신난 말투로 말했다. “그 돈은 내기에서 이겨서 받은 거야. 그 중 2천만 원 정도는 송가람이 베팅한 거야. 송가람 돈을 땄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잖아. 딴 돈을 혼자 가질 수는 없으니까 너에게 절반 줄게.”“감사합니다, 사모님.”강한서가 씩 미소 짓더니 거래 기록을 캡처해 저장하고는 돈을 다시 한현진에게 송금했다. “네가 일단 관리해줘. 나중에 필요하면 너에게 다시 얘기할게.”“그럼 내가 다 써버릴 거야.”강한서가 입꼬리를 예쁘게 올렸다. “그럼 너로 배상해줘.”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은 하지 마.”“...”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민경하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째려보았다. 한현진이 말했다. “거 봐. 민 실장님도 그 말은 느끼하다고 생각하잖아.”민경하가 곧바로 해명하듯 말했다. “아뇨. 전 대표님께서 저런 말씀하시는 거 보기 좋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진심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알아요. 절 보면서 말하는 건 괜찮아요. 얼굴을 보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얼굴을 못 보는 상황에 저런 말을 들으면 신고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니까요. 괜히 희롱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민경하는 이번엔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밌어요? 민 실장이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지금부터 웃으면서 운전해요.”“민 실장님 괴롭히지 마.”한현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모님 라인을 탄 보람이 있네. 역시 사모님은 본인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니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민경하의 귓가로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이따 민 실장님이 데이트하러 가서 강민서에게 이르면 네 동생은 돌아와 너한테 복수할 거야.”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아.’강민서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민경하를 쳐다보며 한현진에게 물었다. “넌
놀란 은서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성 비서님, 전 괜찮아...”“받아요!”성월이 차가운 말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받아요. 이건 서 대표님 마음이에요. 대표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요.”은서하의 눈초리가 파르르 진동했다. 떨리는 손으로 돈다발을 받은 은서하가 허리를 숙였다. “대표님께 감사하다고 인사 전해주세요.”성월이 멸시가 담긴 눈빛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성월이 말했다. “한 대표님이 서하 씨를 대신해 나서신 건 서하 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고마운 건 고맙다고 인사 드려요. 한 대표님 실망하게 하지 말고.”‘내가 한 대표님과 사이가 멀어지는 건 원치 않는 거네...’고개를 푹 숙인 은서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시 돈이 급한 저에게 일자리를 주신 건 서 대표님이셨어요. 성 비서님, 벼랑 앞에 서 있는 저에게 손 내밀어 주신 은혜는 그 어떤 도움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성월은 의외라는 듯 은서하를 쳐다보더니 곧이어 말했다. “알면 됐어요. 돈 받아요. 들키지 말고.”재킷을 벗은 은서하는 돈다발을 옷 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성월은 은서하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은서하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아무리 한현진이 지지해 준다고 해도 서해금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한현진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뒤이어 따라온 주혁이 노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였기에 한현진은 주혁을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주혁이 들어온다면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혁은 한현진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였다. 한참 어른인 그를 도무지 혼낼 수가 없었다. ‘돈이 부족해 회사 청소 일을 하고 싶다고 왜 얘기를 하지 않는 거야. 만약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대체 언제까지 숨기려던 거냐고.’한현진이 주혁을 고용한 건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
멈칫하던 한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닌 한현진의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현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주혁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깡마르고 잔뜩 움츠러든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오일은 제가 깨뜨린 거예요. 오늘 안에서 청소를 하다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이곳엔 값비싼 물건들만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말하며 그는 한현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송해요.”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회사엔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고 있는데 왜 기사님이 청소하신 거예요?”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차마 한현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제가 신청했어요. 시급으로 15000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이라도 해주려고...”주혁이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들은 한현진은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송가람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이 고르고 고른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어요? 넘버 S 오일을 얼마나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수로 깨뜨려요? 오일을 깨뜨리고 무서워서 감히 인정을 못 한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부터 손버릇이 나쁜 사람인 걸지도 몰라요. 청소를 핑계로 훔치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깨뜨린 거죠.”당황하던 주혁이 창백해진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매에 감춰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닦으려고 오일병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