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끊긴 전화에 기분이 언짢아진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한서야.”강한서는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 보고는 휴대폰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대체 무슨 일로 왔어?”송민영은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쑥스럽게 말했다.“요 며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디저트 좀 만들어봤거든.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작 이것 때문에 왔어?”순간 마음이 경직된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그건 아니고... 일도 좀 물어보려고.”강한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페이스북은 매니저한테 맡겨. 며칠 후에 섬블 컴퍼니에서 계약건 때문에 올 거야. 그때 다시 홍보하면 돼.”송민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전에 한성우에게 “정상에서”의 더빙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이나 어필했었지만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해 그 일로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었다.사실 게임 더빙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셋 스타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얼마 전 “비밀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할 때 그녀는 더빙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더빙 덕에 그녀의 발연기가 살았다면서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인형극을 보는 것 같다고 그녀를 욕했다.동시에 선셋 스타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힘들게 촬영한 건 그녀지만 인기를 차지한 건 선셋 스타였다. 이런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자신의 오리지널 대사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또 다른 계정에 오리지널 대사 영상을 올렸다. 원래는 다들 그녀를 칭찬할 거라 예상했지만 되레 한바탕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다.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면서 다시 한번 선셋 스타를 칭찬했다.송민영은 너무도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이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마
유현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오늘 부탁할 일만 없었더라면 당장 이 자식을 발로 확 차버리는 건데! 멀쩡하게 생겨서 왜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참. 그냥 말 섞지 말아야지!’유현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얄미운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작성한 문자를 민경하에게 보내며 말했다.“경화로의 ‘화원 향료’라는 가게에서 사면 돼요. 그 집에 향료 종류가 많아서 한꺼번에 다 살 수 있을 거예요.”“고마워요, 사모님.”유현진이 자신을 무시한 뒤로 강한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분이 지나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유현진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강한서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 번째 손가락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면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타났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들의 결혼반지였는데 아름드리 펜션에서 나올 때 결혼반지도 함께 두고 나왔었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식 날 송민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강한서는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장을 떠났다. 결국 그녀는 결혼반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꼈다.“엄마가 보시고 괜히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그래. 별 뜻은 없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유현진은 생각에서 헤어나왔다. 그녀는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내 주제를 알아.”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뒤따라 내렸다.강한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강민서였다. 올해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두 달 전 친구와 함께 졸업 여행을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한주 강씨 가문의 가장 막내인 데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버지가 돌아간 바람에 집안 어른들은 특히 그녀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움찔하더니 문을 열 용기가 사라져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누구와 결혼하든 똑같다니. 그녀를 선택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 사람이 아닌 아무라도 괜찮았던 것이다.그녀는 밖에서 10분 남짓 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돌아갔다.문을 열자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신미정이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물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죄송해요, 방금 속이 좀 더부룩해서요.”신미정은 멈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확실히 안색이 창백해졌고 립스틱도 조금 벗겨진 모습에 물었다.“괜찮아? 병원 갈까?”“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신미정이 말했다.“그래도 병원에 가 봐. 임신이면 어떡해?”방금까지 신미정이 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의아했던 그녀는 이제야 신미정의 저의를 알았다. 그녀는 유현진이 임신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여 행여나 자신의 핏줄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알겠어요, 어머니.”신미정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유현진은 마치 외부인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그릇에 갈비가 놓이고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보았다. 강한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알아서 먹어.”아니, 그녀는 외부인이 아니다. 유현진은 가족 모임에 참석한 연기자로서 강한서와 각자 알아서 배역에 맞게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연기가 필요해? 좋아, 맞춰줄게.’이내 그녀는 아주 매운 닭고기 요리를 강한서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여보, 이거 먹어봐.”강한서는 움찔하더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은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강한서에게 그녀는 일부러 매운 닭고기 요리를 준 것이다.‘어떻게
신미정은 유현진의 임신 사실만을 집요하게 신경을 쓰면서 딸의 이상한 모습은 눈치채지 못하고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자궁이 찬 것까지 건강검진에 나오지는 않아. 이런 걸 치료하지 않으면 이제 임신하더라도 아이가 위험해.”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신미정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또 말했다.“둘째가 최근 시장님의 따님이랑 가깝게 지내잖아.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둘째가 너희보다 아이를 먼저 가질 거야. 그렇게 된다면 한서가 회사에서 입지가 어렵게 돼. 할머니께서 장손을 귀하게 여기는 건 잘 알잖니.”‘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강한서가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라고.’또한 그녀는 강한서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한서는 나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거야.’“네 엄마는 지금까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네 아빠도 5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 앞으로 재혼할 수도 있잖아. 그때가 되면 유씨 집안에 네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너의 것이다. 네가 의지할 사람이라고. 현진아, 너도 미래를 생각해야지.”유현진은 신미정이 그녀를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씨 일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했는데 그들에게 그녀는 바둑알에 불과할 뿐이다.“알겠어요, 어머니.”유현진은 시선을 떨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하게 답했다.신미정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유현진에게 어서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피할 곳이 없던 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이혼 한 번 쉽지 않네. 재산을 반드시 더 많이 가져갈 거야!’그녀가 약을 다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돌아왔다.목적을 이룬 신미정은 식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오후에 약속 있어서 이만 갈게. 너희는 식사 계속해.”강민서 역시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도 친구랑 쇼핑하기로 했어. 엄마, 나 좀 데려다줘요.”강한서와 유현진
솔직해지는 게 어때?강한서의 비즈니스는 모두 몇 조가 넘는 가격이었고 협력사에서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작년에도 누군가 오팔 귀걸이를 그에게 선물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강한서가 그녀에게 줬을 때 유현진은 아주 기뻤다.파티에서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강한서는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고 나무랐다.그가 몰랐던 건 그녀가 아까운 건 귀걸이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강한서에게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한 쓸모없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의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물건 말이다.유현진은 박스를 닫아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이혼할 때 자산 분할하잖아. 그때 다시 보자.”강한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현진! 너 정말 그만두지 못해? 네가 나한테 이혼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어? 네가 재산분할 운운할 자격이 있냐고! 네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든 게 내가 해준 거잖아. 이혼하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생존하기도 어려울 거야!”유현진은 손이 떨렸다. 매번 강한서의 독설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면 그는 촌철살인의 독설로 다시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한참을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강한서의 말투도 누그러졌다.“네가 잘못을 인정하면 예전의 일은 따지지 않을게. 안주인 자리는 여전히 네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퍽이나 관대하네.”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통곡하며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자비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그런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필요한 사람에게나 줘.”강한서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유현진!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줘야 돼! 호의를 베푸면 그냥 좀 받아!”“나는 그게 어려워서 말이야. 강한서, 우리 내기할래?”
유현진은 헤어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말리다 만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연기 전공하지 그랬어. 너한테 제격인 것 같은데.”차미주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만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오늘 얘랑 같이 잘 거야. 꿈에서 부자 돼야지!”“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기 전에 그것 좀 예쁘게 찍어줘.”차미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사진은 왜? 설마 인스타에 업로드하려고? 누구 샘나게 해서 죽일 일 일어?”“아냐.”유현진이 앉으며 답했다.“팔려고.”“뭐?”“내일 강한서랑 이혼하러 가. 이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남산 병원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인테리어도 마쳐서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엄마도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예전에 근처 집들 알아본 적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가격이 비싸더라고. 나한테 있는 돈으로는 집 마련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 ‘정상에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이혼하면 돈이 부족할 테니 그거라도 팔아서 보태야겠어.”“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차미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붙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 계약서만 준비하면 된다며. 왜 갑자기 탈락이래?”“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나랑 안 맞대. 투자자 한 명이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 봐. 음색이 너무 성숙하다나.”“흥! 분명 누군가 연줄로 따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정해진 결과를 번복할 수 있어? 누구랑 계약했는지 알아?”“됐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구두로 약속한 건 원래 효력이 없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차미주는 씩씩대며 “낙하산” 을 욕하다가 강한서를 욕했다.“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나였으면 바로 강한서가 바람난 증거를 모아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겠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상관없어.”유현진이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이젠 신경 쓰지 않아.”오늘 강한서가 내뱉은 말과 그녀를 거리에 버린 사건으로 인해 유현진은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이혼하여 관계를 청산하기만을
유현진은 얘기하려고 했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래, 강한서가 어떻게 내 버팀목이 되겠어.’“유현진?”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의 이상한 침묵에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몇 초 뒤,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일이 있어서 힘들겠어. 다음에 하면 안 될까?”강한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하자고? 유현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이혼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너야. 관건적인 순간에 사라진 사람도 너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창백한 안색의 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네가 편한 시간으로 정해. 무조건 갈게.”“네 장단에 맞춰 놀아줄 시간 없어!”쌀쌀맞게 답한 강한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폰을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매번 강한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는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면 기대도 없는 법이다.그녀는 홀로 쓸쓸하게 조용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한 시간이 흘렀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병동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하현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의사는 유현진에게 그녀의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유현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간병인더러 따뜻한 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그녀가 수건을 가지러 가는 모습에 간병인이 급히 말했다.“유현진 씨, 제가 할게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언니는 쉬세요. 필요하면 부를게요.”그녀의 말에 간병인 역시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수건을 적셔 하현주의 몸을 닦았다.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6년이 흘렀다. 하현주 역시 이런 상태로 6년 동안 누워있었다.그녀의 모든 근육은 수축되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몸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았는데 매일 수액으로 목숨을 유지할 뿐이었다. 몸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그녀는 언제라도 유현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인간은 이상하다. 유현진이 어릴 때 하현주
낮에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훈훈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옥상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휴대폰에는 페이스북 DM을 제외하고 차미주가 보낸 카톡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냐고 물었다.유현진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엄마 보러 왔어.”차미주는 재빨리 답장했다.“어머님은 괜찮아?”“그냥 그래.”“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찾아오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몰라.”그녀의 위로에 유현진은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고, 이내 답장했다.“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어. 저녁에 먼저 자,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알았어. 일 있으면 연락해.”유현진은 그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찰칵.”순간 주위가 번쩍 빛이 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는데, 마침 렌즈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만 쳐다보았다.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유현진은 입을 꾹 닫고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다가가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는 걸 몰라요? 비번이 뭐죠?”어리둥절한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숫자 몇 개를 말했다.“0712요.”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갤러리에는 방금 찍은 아래층 야경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휴대폰을 빼앗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상대방은 사진을 삭제할 틈이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애초에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대형 참사를 대체 어떻게 만회해야 한단 말인가.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무슨 수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죄송합니다. 단지 아래층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오해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유현진도
‘한서 오빠... 한서 오빠...’송가람은 갑자기 멈춰 섰다.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가람은 눈물을 쏟으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민경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해 지금 회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러더니 잠시 망설인 후 덧붙였다. “가람 씨, 오늘 가람 씨가 떠난 후, 대표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가람 씨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요. 다만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저를 통해 연락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가람 씨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대표님은 자신으로 인해 가람 씨와 어머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송가람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람 씨, 혹시 우셨어요?” 송가람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누구시죠?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급하게 답했다. “저... 저, 저 주혁입니다.” 송가람은 이름을 들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서둘러 설명했다. “저는 한 대표님의 운전기사입니다. 예전에 식당 카드를 만들 때 가람 씨께서 직접 저를 카드 만드는 곳까지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떠올렸다. 약간 너저분한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왜 전화했어요?” 주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차장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주웠는데, 프런트 데스크에서 가람 씨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마침 시간이 있어서, 가람 씨가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직접 가져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엄마는? 심원 모자를 불러놓고 나랑 맞선 보는 얘기는 왜 나한테 하지 않은 건데? 엄마 사업을 위해서, 엄마 고객을 위해서라면 딸도 팔겠다는 거야?”서해금은 화나 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 대체 어떤 뇌를 갖고 있는 건지 네 머리를 열어서 보고 싶을 지경이야! 그냥 만나서 식사 한 번 하는 것뿐이잖아. 누가 너더러 결혼하래?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싫다는 네 목에 내가 칼이라도 들이대면서 협박이라도 할까봐 그래?”“내가 그렇게 얘기를 안 하면 네 생각엔 홍혜림이 약속 자리에 나오기나 했을 것 같아? 홍혜림 씨와 채지윤 씨는 어렸을 적부터 있다면 오랜 친구야. 심원은 홍혜림 씨에겐 친아들 같은 존재라고. 심원이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네가 그 아이 마음만 잘 잡고 있다면 내가 홍혜림 씨 마음을 다시 되돌리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오히려 네가 한 짓을 봐! 한 번 두 사람 모두에게 미움을 샀어. 우리 회사가 진씨 가문과 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네가 알기나 해? 지금 홍혜림 씨가 사업 파트너로 한현진을 지정했어. 그것 때문에 내 손실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아?”송가람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파트너가 한현진이라고 해도 협업하려면 회사 절차는 걸쳐야 하잖아. 수익도 전부 회사로 들어오는 거고. 엄마에게 떨어지는 돈이 줄어들 진 않잖아.”서해금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병X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더니 더는 말이 없었다. 서해금에게 병원에 갔다고 속이고 강한서에게 갔던 일에 대해 잘못을 인지하고 미안함을 느낀 송가람이 나지막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를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한서 오빠는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시면 안 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걱정되어서 오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간 거야. 엄마, 아까 한서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어.”서해금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실소를
이쯤이면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강한서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한현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야?’생각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는 연결이 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사모님, 저예요.”민경하의 목소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는요?”“대표님은...”잠시 말이 없던 민경하는 노려보는 강한서의 눈빛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더 그럴듯하게 연기 하시려고 술을 두어 잔 더 마셨다가 지금 취하셨어요.”한현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민경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숙취해소제도 마셨고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계획했던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어요. 사모님들께서는 전부 언짢아하시며 돌아가셨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대표님께 직접 들으세요.”한현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쥐똥만한 주량의 소유자인 남편이 걱정되었다. “강한서 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가볼게요.”“아뇨. 서 대표님께서 가실 때 대표님을 보시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어요. 의심을 사 대표님을 감시할 수도 있어요. 사모님께서는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걱정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저 대신 강한서 잘 챙겨줘요. 옆으로 누워서 자게 해요. 술 많이 마시면 자꾸 토하거든요. 옆에 물도 한 잔 떠주고요.”민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민경하가 고개를 돌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고양이 같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만약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본인 몸을 바쳐가며 송가람이 약을 탔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고 제가 대표님을 도와 사모님께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걸아시면 아마 전 앞으로 사모님께 빌붙을 수 없을 지도 몰라요.강한서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허약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
말을 마친 홍혜림은 룸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도도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을 감싸 쥔 송가람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강한서가 송가람에게 휴지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송가람은 코끝이 찡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서해금은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강한서를 밀쳤다. 중심을 잃은 강한서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의 얼굴이 통증으로 하얗게 질렸다. 울컥 화가 치민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 “엄마, 뭐하는 거야!”“마침”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던 민경하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른 달려가 강한서를 부축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송가람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한서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서해금이 같은 자리에서 송가람의 뺨을 때렸다. “그쪽으로 가기만 해. 그럼 우린 오늘 모녀 관계를 끊는 거야. 앞으로 다신 내 눈 앞에 띄지마.”서해금은 온 몸의 힘을 다 해 송가람을 때렸다. 그녀는 예전에도 송가람를 때린 적이 있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때, 그림을 못 그렸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실수를 했을 때에도 매를 든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힘을 실은 적은 없었다. 뺨을 얻어맞은 송가람은 귀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해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강한서는 마치 송가람이 맞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민경하의 부축을 받으며 나지막이 해명했다. “아주머니, 가람이도 이젠 성인이에요. 가람이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있어요. 이렇게 몰아붙이시면 안 되죠.”서해금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딸을 어떻게 가르치든 그건 강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앞으로 우리 딸에게서 좀 떨어져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든 가람이에게 부탁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주지 말란 말이야!”
심원과 채지윤 모자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룸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송가람의 목소리에 채지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심원과 채지윤을 본 순간 서해금은 송가람을 데리고 유전자검사라도 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멍청한 X! 멍청한 X!’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X년이 누구더러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거야?”움찔한 송가람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분노가 가득한 채지윤과 창백한 얼굴의 심원이 보였다. 사실 심원은 그리 뚱뚱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동그란 얼굴 때문에 덩치가 있어 보일 뿐 퍼진 몸은 아니었다. 외모는 심지어 꽤 빼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한현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심원의 눈이 강한서와 많이 닮았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강한서는 그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을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강한서를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외모만으로도 적지 않은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심원의 눈은 강한서와 70% 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꽤 많았을 것이다.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하며 귀하게 자라왔다. 먹는 것이든 갖고 싶은 것이든 그의 요구라면 전부 들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조금 통통한 편이었다. 그리고 몸매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적도 많았다. 다이어트를 여러 번 했고 또 성공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곧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대학생 시절 열등감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좋아할 용기도 없었던 심원은 해외 유학 시절 자신에게 늘 잘해주던 송가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해외의 다양한 심미 기준으로 인해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송가람이 싫어했던 터라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심원은 줄곧 송가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당황한 송가람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 앞에는 홍혜림과 서해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송가람은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과 홍혜림이 왜 히비스커스 호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세 한식당에 있는거 아니었어?’홍혜림의 얼굴은 경멸로 가득 했다. 그녀는 웃는 듯 또 아닌 듯 한 표정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서해금을 힐끔 쳐다보았다. “따님은 병을 병원이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남자에게 진료 받나보죠? 아프다는 게 대체 열이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몸이 달았다는 거예요? 심씨 가문과의 혼사를 원하지 않는 거였다면 직접 얘기하시지 이렇게 제 조카가 바보처럼 기다리게 속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너무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라 서해금의 얼굴이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해금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막 입을 열려는데 송가람 옆에 서 있던 강한서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사모님, 예의를 지키시죠. 가람이는 그저 저에게 해장국을 가져왔을 뿐이예요. 함부로 남의 명성을 더럽히지 마세요.”그 말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애틋한 기분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한서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줬어. 역시 오빠도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서해금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만약 조금 전 서해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면 그녀는 송가람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럴싸한 핑계를 대줬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 한 마디로 송가람이 꾀병을 부린 일은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다. 역시, 강한서의 말을 들은 홍혜림은 경멸의 감정이 조금 더 짙어졌다. “좋네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본인은 아픈 척 애인을 챙겨주러 갔다니. 서 대표님, 이게 바로 대표님이 말한 성의라는 건가요?”서해금이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모님, 가람이는 정말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갔었어요. 아마 한서가 숙취 때문에 가람이에게 해장국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아요. 저희 두 집안은 예전부터 가깝게 지냈었잖아요.
표정을 굳힌 송가람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혹시 뭐 기억났어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최면의 거부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가람이 곧바로 강한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말렸다. “한서 오빠, 아프면 생각하지 마요. 생각 안 하면 안 아프잖아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밀치며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만지지 마!”그의 반응에 깜짝 놀란 송가람은 그 순간 강한서가 모든 것을 떠올렸다고 착각했다. 당황하여 넋이 나갔던 송가람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낸 그녀는 약 두 알을 물에 녹인 후 강한서 입가에 가져갔다. “한서 오빠, 이거 마셔요. 마시면 안 아플 거예요.”얼굴이 일그러진 민경하가 룸으로 뛰쳐갔다. 극심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강한서는 송가람이 건네는 물을 받아 쭉 들이켰다. 송가람은 최면할 때 사용하던 심리 암시를 위한 풍령 소리를 강한서 귀 옆에 울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괜찮아요? 머리 아직도 아파요?”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고 강한서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는 나지막이 송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이?”얼굴을 붉힌 송가람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예요, 오빠.”약효 때문인건지 강한서는 허탈한 사람처럼 몸을 뒤로 기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여깄어?”“그... 그게 오빠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 되어서요.”송가람이 말하며 저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현진 씨가 오빠를 잘 챙겨줄 거라고 했었잖아요. 챙겨준다는게 이런 거였어요?”강한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아저씨 돌아오는 날 아냐? 한현진 씨도 공항에 마중 나갔는데 넌 안 가도 괜찮아?”멈칫하던 송가람은 곧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저 걱정해 주는 거예요?”강한서는 눈
그 말을 들은 심원이 얼마나 기뻤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심원은 송가람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녀 스스로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송가람이 신경 쓰던 그 여자와는 그저 썸을 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니 심원은 단호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거절한 후 송가람과 “친구”사이를 유지했다. 그는 친구라는 관계에서 시작해 진심을 담아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해외에 있을 당시 적지 않은 남자가 송가람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심원은 줄곧 자신은 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비록 송가람이 고백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누구보다 상냥하게 대했다. 심원의 생일엔 선물을 챙겨주고 그가 아플 땐 학교를 조퇴하고 보살펴 주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그렇고 그런 일이 있기도 했다. 요즘 심원은 채지윤에게 부탁해 송씨 가문의 뜻을 물어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송가람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는 한 달 동안이나 그를 무시했다. 그 후로 심원은 두 번 다시 그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송가람이 두 가문의 차이 때문에 줄곧 그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작년 송가람이 귀국했을 당시 심원은 졸업을 1년 남짓 남겨둔 상황이었다. 당시의 그는 하마터먼 학업을 그만두고 송가람을 따라 귀국할 뻔 했었다. 집에서 경제 지원을 전면 끊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리고 송씨 가문에서 실종된지 수년이 된 친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원은 이젠 송가람과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송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고 심씨 가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라면 송가람 곁에 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겨우 졸업까지 견뎌낸 심원은 기다렸다는 듯 귀국하여 송가람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송가람은 심원의 귀국 파티에 딱 한 번 참석했을 뿐, 요즘엔 그의 문자에 답장조차 잘 하지 않아 심원을 초조하게 했다. 아무래도 1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그는 송가람에게 다른 사람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심원에게 송가
서해금은 처음엔 송가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현진 말로는 아침에도 봤었다며. 네가 직접 운전하고 오겠다고 해서 같이 안 온거라고 하던데. 그땐 너 아프단 얘기는 없었는데?”송가람은 오지랖 넓은 한현진을 욕하며 거짓말을 이어갔다. “한현진이 누구 좋으라고 내 상태를 엄마한테 알려주겠어. 내가 공항으로 마중 안 나가서 아빠가 나에게 안 좋은 마음이 생기길 눈이 빠지게 바라고 있을 텐데.”또 콜록이며 기침한 송가람이 말했다. “엄마, 나 정말 병원이야. 못 믿겠으면 내가 보낸 위치를 봐. 일부러 엄마 전화 안 받은 거 아니야. 정말 너무 힘들어서 그래. 전화를 무음모드로 해놓고 깜빡했어.”송가람의 말에 그녀가 보낸 위치 공유를 확인한 서해금은 그제야 송가람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곤 송가람의 몸 상태를 묻기 시작하자 송가람이 대답했다. “아직 대기하고 있어. 진료 끝나면 알려줄게.”서해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진료 끝나면 얼른 와. 40분밖에 시간 못 줘. 오늘 홍혜림 씨와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 사고는 네가 친 거니까 오늘 쓰러지지 않은 한 어떻게든 식사 자리에 나와야 해! 아프면 오히려 좋지. 홍혜림 씨에게 우리 성의를 보일 수 있는 기회니까. 홍혜림 씨가 화를 풀어야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 있어. 이 고객들이 나중엔 전부 네 것이 될 거라고.”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짜증이 몰려왔지만 서해금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서해금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엄마가 인정머리 없다고 뭐라고 하지 마. 창피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네가 정말 아무것도 없이 모든 걸 잃어보면 체면이든 자존심이든 뭐든, 돈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좀 이따 새 주소 보내줄게. 도착하면 말해.”송가람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송가람에게 위치를 전송했다. 그녀는 옷매무시를 정리한 후 미소를 걸고 룸으로 들어섰다.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