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훈훈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옥상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휴대폰에는 페이스북 DM을 제외하고 차미주가 보낸 카톡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냐고 물었다.유현진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엄마 보러 왔어.”차미주는 재빨리 답장했다.“어머님은 괜찮아?”“그냥 그래.”“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찾아오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몰라.”그녀의 위로에 유현진은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고, 이내 답장했다.“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어. 저녁에 먼저 자,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알았어. 일 있으면 연락해.”유현진은 그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찰칵.”순간 주위가 번쩍 빛이 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는데, 마침 렌즈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만 쳐다보았다.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유현진은 입을 꾹 닫고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다가가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는 걸 몰라요? 비번이 뭐죠?”어리둥절한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숫자 몇 개를 말했다.“0712요.”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갤러리에는 방금 찍은 아래층 야경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휴대폰을 빼앗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상대방은 사진을 삭제할 틈이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애초에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대형 참사를 대체 어떻게 만회해야 한단 말인가.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무슨 수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죄송합니다. 단지 아래층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오해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유현진도
“약 잘못 먹었냐?”주강운은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성우는 늘 차분하고 점잖은 그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어리숙한 표정은 처음인지라 괜스레 등골이 오싹했다.주강운은 옆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방금 옥상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어.”“뭐?”“내가 도촬하는 줄 알고 휴대폰을 빼앗아가더니 나한테 막 뭐라 하는 거야.”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데 기분은 왜 좋아 보이는 거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냐?”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강한서, 주강운과 소꿉친구였는데, 집안 세력만 따져보았을 때 살짝 약한 편에 속했다. 반면, 한주 주씨 가문과 한주 강씨 가문은 한주시에서 거의 막상막하였고, 주강운 역시 강한서처럼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랐다.하지만 몇 년 전 주강운이 병에 걸려서 회복하는데 무려 2년이 넘게 걸렸고, 그 뒤로 부모님들도 생각을 바꾸셨는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아들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정했다.그동안 그는 음악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으며, 스키도 하고, 레이싱에 빠진 적도 있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이성을 멀리해서 사생활이 백지장처럼 깨끗했다. 결국 한성우는 한동안 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했었다.따라서 지금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자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네가 말한 그 여자 예뻐?”주강운은 방금 마주친 유현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반쯤 말린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도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어쩌면 생얼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물론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가는 모습이 더욱 흥미진진하며 임펙트가 강했다.“예뻐.”“이
”이혼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주강운은 궁금한 듯 물었다.강한서가 결혼 했을 당시 그는 병을 치료하느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부분 외국에서 지냈기에 강한서의 아내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한성우를 비롯한 사람들한테서 자주 전해 들었다. 얼굴은 예쁜데 너무 착해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그런 여자라고 했다.그때 양심이 하나도 없는 친구 놈들은 단톡방에서 강한서가 3개월 안에 무조건 이혼한다고 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 또 다른 3개월이 흘러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3년이 훌쩍 넘었다.이제 두 사람의 사이가 꽤 돈독해졌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돌아오자마자 이혼한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한성우의 말투에서 유추해보면 강한서의 아내가 먼저 이혼을 제기했다는 건데, 결국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이 화제를 언급하는 순간 한성우는 통증 따위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둘이 회사에서 한서의 와이프를 마주쳤단 말이야. 한서는 와이프가 자기를 미행하는 줄 알았는데, 와이프 분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이놈이 글쎄 부부싸움이라고 우기는 거 있지?”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 입 닥쳐.”한성우는 혀를 찼다.“차였으면서 말도 못 하게 해?”강한서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주강운이 한성우의 다리를 툭 치자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 때맞춰 화제를 바꿨다.“참, 한서가 남산 병원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잖아. 지인을 통해 그 여자 좀 알아봐달라고 하면 안 돼?”강한서가 물었다.“웬 여자?”한성우는 방금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한껏 과장해서 설명했다.강한서도 한성우와 마찬가지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예상외로 거절하지 않고 자세히 캐물었다.“어떻게 생겼는데?”한성우가 너스레를 떨었다.“강운의 말을 들어보면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이지 않을까 싶어.”주강운이 피식 웃었다.“뭐, 분위기는 제법 비슷한데, 한 성깔 하던걸
그 말을 들은 유현진은 막 피어오른 희망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고, 이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단지 우연이라는 말인가요?”의사가 위로를 건넸다.“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눈동자가 움직인다는 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죠. 다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의식을 잃은 지 좀 오래되어서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주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후 유현진은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간병인에게 팁을 챙겨줬지만, 상대방은 안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다.유현진이 말했다.“아주머니, 받으세요. 제가 평소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께서 모든 일을 케어해주시는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마음이 편치 않네요. 앞으로 우리 엄마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주세요.”“당연하죠. 그게 제 일인걸요.”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그녀 때문에 간병인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차미주는 여전히 깨어 있었는데, 단톡방에서 문자를 보내느라 무아지경이었다. 옆에는 TV가 틀어져 있었고, 마침 ‘보이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왔어?”유현진은 대답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자 온종일 팽팽하던 긴장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꼴이 그게 뭐니? 어머님은 괜찮아?”“아직은.”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혼은 못 했어.”“난 또 뭐라고.”차미주는 그녀의 입에 체리 한 알을 넣어주었다.“오늘 실패했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해결하면 되잖아.”유현진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서 강한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아마도 자신이 일부러 약속을 어긴 줄 알고, 심지어 또다시 ‘밀당’한다고 오해하는 느낌이 강했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약속을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내
“그건 내가 너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야. 네 덕에 별장에서 살아보길 기대하고 있으니까 얼른 대답하라고.”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좀 더 생각해볼게. 촬영은 다음 달이라서 아직 시간은 많아.”다음날 유현진은 아침 일찍 물건을 챙겨 한성그룹으로 찾아갔다.강한서와 결혼한 3년 동안 이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혼 때문에 처음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현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한성 그룹은 한주시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건물은 한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었다. 혁신적인 건물 외관은 이미 한주시의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었고,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람들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천장이 돋보였다.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고 곧장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 있죠?”젊고 잘생긴 청년이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는데,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혹시 예약하셨을까요?”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사전에 약속이 없으면 대표님께서는 손님을 접대하지 않습니다.”유현진이 말했다.“그럼 전화해서 유현진이 찾는다고 말해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깔끔한 옷차림에 예의도 바르고 미모까지 갖춘 그녀를 보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안 되어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고, 이내 남자직원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유현진이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십니다.”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 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아내란 사람이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강한서와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아서 자신 있게 말했다.“이제 믿을 수 있겠죠?”프런트 남자직원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둘이 같이
사람들이 잇달아 고개를 돌렸고, 강한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기침을 멈추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다들 대표님이 조금 전 업무 보고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틀더니 민경하와 나지막이 몇 마디 주고받고는 다시 똑바로 앉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계속하시죠.”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민경하는 소리소문없이 회의실을 나섰다.아래층 접견실.유현진은 소파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민경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사모님, 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어요?”길을 안내하던 프런트 남자 직원은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저 사람이 진짜 대표님의 와이프라고? 그렇다면 대표님은 왜 모르는 척한 거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방금 사모님이란 사람한테 그런 사진을 찍어줬다는 사실이었다.남자 직원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순간 500대 기업에서의 커리어가 끝장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난이 이토록 심한 부부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유현진은 잡지를 내려놓았다.“전화했는데 민 실장님이 너무 바빠서 못 들었나 보죠.”민경하는 유현진이 연락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받으면 안 된다는 대표님의 지시에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비아냥거리는 유현진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한 척 말을 이어갔다.“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회의 중이라서 휴대폰은 사무실에 두고 갔어요. 물론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제 탓입니다. 비서 사무실의 안내원이 신입이라서 일할 때 누락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애꿎은 사모님께 폐를 끼쳐드렸네요. 이쪽으로 오시죠.”그의 말에는 허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강한서가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했을 때 현장에 없었더라면 그녀는 철석같이 믿었을지도 모른다.모두 한통속이라니!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에야 민경하가 물었다.“사모님, 회사에는 어쩐 일이시죠?”유현진은 손에 든 박스를 보
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이지 않냐는 말이다. 아침을 거르면 일 얘기가 진행이 안 된다니? 단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다른 수법으로 갈아탔을 뿐이었다.강한서에게 도시락을 싸준 건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신혼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오로지 강한서밖에 없었다. 당시 더빙을 시작하기 전이라 오직 강한서를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말도 안 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남자의 입맛을 저격해야 한다는 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강한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 요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지라 한 달이나 배웠는데도 겨우 먹어줄 만한 수준이었다.하지만 강한서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나마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를 들고 강한서를 찾아가 맛보게 했을 때, 단지 맛없다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났다.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강한서가 출근할 때 억지로 쥐여주며 이번에는 꼭 맛있을 거라고 뻔뻔스럽게 큰소리쳤었다.강한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강한서가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얼른 다가가 어제보다 맛있었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맛없으니까 다시는 요리하지 말라는 대답뿐이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텅 빈 도시락을 보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로 요리하는 데 더욱 열중했고, 강한서는 매번 빈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하지만 그가 도시락에 든 음식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강한서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그녀의 일방적인 바람에 불과했고, 그는 단지 서로의 체면을 위해 굳이 들춰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이후로 그녀는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강한서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매일 먹는 척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이혼을 의논하러 온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뜨겁게 뛰던 심장이 식어버렸다. 역시 이 강한서 나쁜 놈에겐 조금의 마음도 주면 안 된다.유현진이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걸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트러플 당신이 나 대신 어머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의 시선이 서류로부터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수려하고 깨끗하고 순한 얼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강한서는 모두 그녀의 가면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엔 예전의 온순한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금만 자극하면 난리를 치는 야생 고양이가 도사리고 있다.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가느랗게 뜨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뭐라고? 내가 언제 약속했는데?”유현진은 강한서가 오리발을 내밀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예전 여동생에 관한 네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약속한 거잖아.”“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네.”강한서가 떠올린 듯하자 유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서가 예상치 못한 말을 이어갔다.“자세히 생각해보니 말이야. 우린 곧 이혼할 거잖아. 이제 강 씨 집안으로부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뭐 그렇게 귀중한 거라고.”유현진는 애써 그를 설득하려 했다.“또한 우린 합의 하에 헤어지는 거잖아. 앞으로 우리 두 집안은 친구로도 지낼 수 있을 텐데 친구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합의 하에 헤어진다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불만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한 건 아니고?”유현진: “...”분명 민감한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이다!그녀가 설명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려고 할 때 강한서가 또다시 말했다.“오늘 아침 병원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 나한테 어떤 기능성 장애가 있는지 묻더군. 그 점에 대해 왜 의사에게 상세
멈칫한 한현진이 시선을 올려 은서하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 남았어요?”고개를 가로 저은 은서하가 서류철은 안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책상에 놓인 유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한현진이 주세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현이 문을 열고 송가람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류가 여기저기로 널브러져 엉망진창인 모습이 주현의 눈에 들어왔다. 커피를 손에 든 주현은 뒤뚱거리며 서류를 피해 송가람 앞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건넨 주현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여기 커피요.”송가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심원의 새로운 여자친구에 관해 얘기 중이었다. SNS는 하지도 않던 조용한 심원이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와의 사진을 업로드 했다. 송가람의 친구들이 그 사진을 채팅방에 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아는 사람 맞아? 처음 보는 사람 같아.][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우리가 알만 한 사람은 아닐 거야. 심 대표님께서 아드님에게 찾아준 맞선 대상이 명문가 딸은 아니라고 들었어. 심원 씨가 외동이라 괜히 재벌가와 사돈을 맺었다가 대가 끊기게 될까 봐 컨트롤이 가능한 평범한 가정의 딸을 소개했다고 하던데.][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거겠지.][심 대표님과는 안 그래도 인연이 없었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한 거지, 뭐. 가람이가 심원 씨와 동창에다 사이도 좋았잖아. 어쩌면 가람이는 심원 씨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지도 몰라.”송가람이 심원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심원과 그 여자의 사진이 버젓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에 밀크티를 쥐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포니테일을 한 채 카메라를 향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 부분에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다른 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남자친구의 시야에서 손을 맞잡은 여자친구의 모습
이어질 다음 경기는 조별 리그였다. 조향 대회의 조별 리그는 팀워크가 중요했다. 자유롭게 팀을 구성할 수 있었고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채택할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당연히 문채영과 팀을 하려 했다. 문채영의 실력을 등에 업는다면 송가람은 무난히 다음 라운드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주세은이었다. 회의 전 한현진은 주세은에게 누구와 팀을 짤 것이 물었었다. 주세은은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과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팀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안 맞는 사람과 팀이 되었다간 협력은커녕 오히려 팀원이 주세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다간 바로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훑어보던 한현진은 어쩌면 이시연과 주세인이 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회사 내의 다른 참가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만약 이시연이 이미 파트너를 정했다면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서로가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교적 침착한 성격의 참가자 두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 표식을 해두었다. 조금 이따 물어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이시연이 자몽 두 개를 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바쁘세요?”한현진이 서류철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뇨. 무슨 일이에요?”이시연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몽을 한현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저 대신 주세은 씨에게 저와 팀을 하면 어떨지 물어봐 주시겠어요?”한현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시연 씨와 팀을 하겠다는 분이 없어요?”이시연이 난감함 표정을 지었다. “있긴 한데 제가 거절했어요. 전 주세은 씨와 팀을 하고 싶거든요. 전에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했을 때, 사실 저 깜짝 놀랐어요. 이번엔 예선에서도 바로 TOP 10에 들었잖아요.”“저와 성적이 비슷하니까 같이 힘을 합쳐서 포인
직원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대회를 앞둔 시점에 갑자기 문채영을 스카우트해 송가람과 팀을 맺어준 목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가자를 응원하기 위한 보너스라고 얘기했지만 상금의 80%는 우승자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20%의 상금도 TOP 10에 들어야만 일 인당 4000만 원씩 받을 수 있었다. 난이도가 극상에 가까운 미션에 성공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현진의 제안대로라면 20위 안에만 들어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송가람을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이 보너스를 받을 기회는 자연히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억의 우승 보너스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송가람까지 제외된 상황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도전 의식을 불태워볼 만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진 참가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투표를 진행하지 않아도 서해금은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한현진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투표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한 대표 제안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 대표 제안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다들 원하는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애쓰길 바라요. 대회가 끝나면 제가 직접 파티를 열어 여러분께 보너스를 지급할 거예요.”서해금과 눈을 마주친 한현진이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리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할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회의실에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둘 그녀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분노로 들끓은 송가람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던 송가람은 서류 심부름을 하러 온 비서와 부딪혔다. 서류를
차미주의 말에 한성우가 전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미워도 차마 날 날리겠다는 얘기는 안 하네. 너 혼자서만 몰래 간직하려는 거야?”차미주: ...“넌 변기에 빠져도 시원하다고 할 애야.”며칠 후. 조향 대회의 예선 결과가 발표되었다. 깔린느에서 예선에 참가한 조향사는 모두 17명이었다. 그중 2명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회에 불참했고 나머지 15명은 전부 예선에 통과했다. 회의에서 그 15명의 조향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던 서해금은 사비로 12억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10억, 결승 TOP 10에 들면 40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소식에 직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말뿐인 칭찬보다 물질적인 상금은 늘 더 달콤할 따름이었다.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는 한현진을 본 서해금이 그녀를 불렀다. “한 대표. 한 대표도 응원의 말 좀 해줘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12억으로 보너스를 드리겠다고 하니 제가 8억을 보태 보너스를 총 20억으로 하죠. 대회에서 우승하신 분은 16억을, 10위 안에 드신 분들은 각각 4000만 원을, 그리고 10위에서 20위 사이에 도달하신 분들은 2000만 원을 받으실 수 있어요.”“만약 우리 회사에서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16억의 보너스는 다음 조향 대회로 연기되며 그때 다시 지급 규칙을 정하도록 하죠.”상금은 많아진 대신 난도가 떨어지니 더 흥분한 직원들로 인해 회의실이 시끌벅적해졌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그녀의 말에 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지며 수십 쌍의 눈이 한현진을 향했다.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송 팀장님은 어떤 성적을 따내시든 보너스를 받지 않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왜요? 한 팀장님, 지금 이런 식으로 사적인 복수를 하시겠다는 건가요?”한현진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송 팀장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
채지윤이 말했다. “전연 씨는 성격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보기 좋아요.”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며느리로는 어떤 것 같으세요? 두 분 마음에 드세요?”심근호와 채지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채지윤이 심근호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전연 씨를 좋게 보고 있어요. 예의도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할 줄 알고요. 전연 씨 개인 정보와 가정환경은 이미 한 대표님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물론 저희가 어느 정도 알아본 것도 있고요.”“만약 두 아이가 서로 마음이 맞아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너무 과분한 요구가 아닌 이상 예물이든 결혼식이든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혼수는 전연 씨 쪽에서 편하신 대로 준비하시면 돼요. 저희는 따로 바라는 게 없어요.”“저희도 자식이 아들놈 하나뿐이라 결혼 준비는 섭섭지 않게 할 거예요. 그러니 그 점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는 오히려 원이가 전연 씨를 거절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조금 전에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바람 쐬러 나간다는 핑계로 전연 씨를 돌려보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거든요.”한성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분만 연이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 전 얼마든지 두 사람 만나보라고 할 거예요. 나중에 결과가 어떻든, 결혼까지 가든 못 가든 그건 두 사람의 문제니까요.”“그러니 두 분도 너무 심원 씨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어떻게 됐는지도 묻지 마시고요. 저희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심근호와 채지윤이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쉰 채지윤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한 대표님, 저희는 한 대표님을 믿어요. 하지만 저희 집안은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결혼식을 올리길 원해요. 그 점은 알아두셨으면 해요.”한성우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명문가는 아니지만 연이도 뼈대 있는 집안의 규수예요. 걱정하시는 비열한 수단 같은 건 절대 없을 거예요. 만약 연이가 그런 짓을 한다면 사모님 댁에서 말을 꺼내기 전에 연이 집안에서
차미주: ???웃으며 차미주를 끌어당긴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진짜 여우 같은 게 뭔지 곧 보게 될 거야.”차미주는 어리둥절한 채로 한성우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예약된 룸에 들어가자 심근호 가족은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근호 부부는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단정한 옷차림에서 그들이 이번 만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흰색 티셔츠를 입은 캐주얼한 옷차림의 심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채지윤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이 자리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채지윤의 시선은 곧바로 한성우 뒤에 있는 전연에게로 향했다. 순간 눈을 반짝인 채지윤이 테이블 아래로 심근호를 살짝 잡아당겼다. 한성우가 미소 지으며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 병원에 갑자기 응급환자가 생겨서 시간을 좀 지체했어요. 시간 맞춰 도착하려고 했는데 결국엔 늦었네요.”채지윤이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가 일찍 도착해서 그래요. 게다가 병원은 원래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잖아요.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닌데 한 대표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심근호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요. 식사하면서 얘기해요.”심근호와 채지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전연은 곧 심원 옆에 놓인 의자를 빼내며 자리에 앉았다. 멈칫한 심원이 은근슬쩍 의자를 채지윤 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채지윤은 의자를 툭 차내며 심원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심원: ...자리에 앉은 한성우가 심근호 부부에게 차미주와 전연을 소개했다. 물론 전연을 소개하는 것이 이 자리를 마련한 제일 중요한 목적이었다. 전연 역시 예의 바르게 심근호 부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질문에 침착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기만 했다. 채지윤이 전연에게 심원을 소개했다. “여긴 제 아들인 심원이에요. 전연 씨보다는 2살이 많고 줄곧 해외에서 경영을 전공했어요.”말하며 채지윤은 심원에게 눈짓
한성우가 곧바로 전연의 말에 반박했다. “나 같은 느끼한 여우도 너처럼 이런 꼬마한테는 관심 없어.”전연이 한성우를 향해 입을 삐죽이더니 곧 차미주를 보며 말했다. “전 돈은 많지만 순진한 사람이 좋아요. 좀 덜 똑똑한 사람이면 더 좋고요.”차미주: !!!‘너무 직설적인 거 아냐?’전연이 씩 미소 지었다. 포니테일에 말끔한 얼굴의 전연은 단순한 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 같이 직설적이었다. “제가 너무 돈만 밝히는 것 같아요?”차미주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혹시라도 전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차미주가 말을 이었다. “진짜 돈을 밝히는 사람은 그런 말 안 해요. 게다가 맞선이잖아요. 누구든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게 당연하죠. 가난한 사람을 만나 같이 고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전연이 환하게 웃었다. “제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해준 사람은 새언니가 처음이에요. 다들 얘기는 안 하지만 이상한 눈빛으로 절 쳐다보거든요.”차미주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다들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법이잖아요. 저도 예전엔 학식이 풍부하고 말이 적은 진중한 성격의 의사나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수다쟁이를 만난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심지어 입만 살아서 저보다도 말이 많잖아요.”한성우: ???“내가 말이 많아?”한성우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 말수가 적은 사람 한 번 만나봐. 열 마디를 해도 겨우 한 마디 대답할까 말까 한 그런 사람 말이야. 뉴스를 보면서도 수다를 떨어야 하는 네 성격에 그런 사람 만나면 병날걸?”“내가 뭐가 말이 많아? 너 말고 나랑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본 적 있어? 내가 너한테 말을 많이 하는 건 뭐든 너랑 공유하고 싶지 때문이잖아. 입 꾹 닫고 어떻게 너랑 일상을 공유해? 내가 말이 적으면 넌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거야.”“그리고 말이 많으면 뭐 어때서. 말을 하라고 달린 입이잖아. 결혼 생활은 소통이 제일 중요해. 안 그럼 뭐 집에서
“어쩌면 이런 것도 인연이겠네요. 제 사촌 동생이 마침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동생이 저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심원 씨를 보고는 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땐 심원 씨가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말씀을 안 드렸었고요.”“요즘 심원 씨가 맞선을 보고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연락드렸어요. 다른 분은 모르겠고 사촌 동생의 성격이 심원 씨와 잘 맞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사촌 동생을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심원 씨 맞선 얘기를 꺼낸 거예요.”심근호가 놀란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생각인 줄 전혀 몰랐어요.”한성우가 말했다. “전엔 괜히 실례인 것 같아 대표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물어봤었어요. 심원 씨가 해외에서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더 묻지 않았고요. 하지만 요즘 심원 씨가 맞선을 보고 있다는 소식에 사촌 동생 오작교나 해줄까, 생각한 거예요.”여자친구라는 말에 심근호는 심원과 송가람의 일이 이미 소문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송가람을 향한 심근호의 불만이 커져만 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헛소문이에요. 원이는 여자친구 없어요.”멈칫한 심근호가 말을 이었다. “한 대표님 사촌 동생분은 뭘 하시는 분이에요? 혹시 사진 있어요?”“의사예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주 병원에서 인턴으로 있어요. 아이를 좋아해서 소아병동에서 근무하고 있고요. 인내심이 강한 애예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선생님이세요. 한 분은 중학교, 다른 한 분은 고등학교에 근무하세요.”“가정환경은 흠잡을 데가 없지만 대표님 댁에 비하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동생이 어쩌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오빠가 되어서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내키지 않으시면 저도 확실히 마음을 접을 수 있게 얘기할 수 있고요.”한성우가 말을 이었다. “잠시만요. 제가 사진 보내드릴게요.”잠시 후 차미주는 학사복을 입은 채 카메라를 향해 V를 그리며 웃고 있는 여자아이의 사
고작 열몇 살의 어린아이가, 한창 자존심이 강할 나이에 이런 일로 또래에게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못에서 시계를 건져 올린 그날, 또다시 같은 일로 비웃는 아이를 보며 한성우는 갑자기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아이를 바닥에 누른 채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아이의 일행이 이미 한성우를 에워싸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 상대방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입에 문 늑대처럼 죽어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한성우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으며 욕을 퍼붓던 남자아이는 결국 겁에 질려 울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한준우가 한성우를 끌어냈을 때 그의 눈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자아이의 집안이 재력가였던 탓에 함부로 척질 수 없었던 한성우의 부모님은 한성우를 억지로 끌고 가 사과하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한성우의 잘못인 듯 얘기했다. 그날 이후, 한성우는 다시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타협을 배웠고 가식을 배웠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했고 놀림과 왕따를 당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우가 처음 강한서와 친구가 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한서 집안이 한주에서는 명문가였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한서는 강씨 가문의 장손이었으니 보호막이 되어주길 바랐든 인맥을 넓히기 위한 수단이었든 성우에게 한서는 최고의 선택지였어요.”“하지만 나중에야 술에 취한 성우가 그러더라고요.”“강한서는 너무 멍청해. 비행기 모형을 만져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모형을 선물로 주더라니까. 걔는 그 모형이 마음에 안 든대.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이지. 그 비행기 모형은 거울처럼 반짝거렸어.”“매일 소중하게 닦지 않았다면 그렇게 깨끗할 리가 없잖아. 말만 그래, 걔는. 그리고 어찌나 잘 속는지... 만약 내가 친구 하자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얘기하면 강한서 설마 우는 거 아냐? 됐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평생 속이지, 뭐.”그때의 차미주는 한창 연애 경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