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이지 않냐는 말이다. 아침을 거르면 일 얘기가 진행이 안 된다니? 단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다른 수법으로 갈아탔을 뿐이었다.강한서에게 도시락을 싸준 건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신혼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오로지 강한서밖에 없었다. 당시 더빙을 시작하기 전이라 오직 강한서를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말도 안 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남자의 입맛을 저격해야 한다는 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강한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 요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지라 한 달이나 배웠는데도 겨우 먹어줄 만한 수준이었다.하지만 강한서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나마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를 들고 강한서를 찾아가 맛보게 했을 때, 단지 맛없다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났다.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강한서가 출근할 때 억지로 쥐여주며 이번에는 꼭 맛있을 거라고 뻔뻔스럽게 큰소리쳤었다.강한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강한서가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얼른 다가가 어제보다 맛있었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맛없으니까 다시는 요리하지 말라는 대답뿐이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텅 빈 도시락을 보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로 요리하는 데 더욱 열중했고, 강한서는 매번 빈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하지만 그가 도시락에 든 음식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강한서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그녀의 일방적인 바람에 불과했고, 그는 단지 서로의 체면을 위해 굳이 들춰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이후로 그녀는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강한서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매일 먹는 척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이혼을 의논하러 온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뜨겁게 뛰던 심장이 식어버렸다. 역시 이 강한서 나쁜 놈에겐 조금의 마음도 주면 안 된다.유현진이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걸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트러플 당신이 나 대신 어머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의 시선이 서류로부터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수려하고 깨끗하고 순한 얼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강한서는 모두 그녀의 가면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엔 예전의 온순한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금만 자극하면 난리를 치는 야생 고양이가 도사리고 있다.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가느랗게 뜨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뭐라고? 내가 언제 약속했는데?”유현진은 강한서가 오리발을 내밀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예전 여동생에 관한 네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약속한 거잖아.”“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네.”강한서가 떠올린 듯하자 유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서가 예상치 못한 말을 이어갔다.“자세히 생각해보니 말이야. 우린 곧 이혼할 거잖아. 이제 강 씨 집안으로부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뭐 그렇게 귀중한 거라고.”유현진는 애써 그를 설득하려 했다.“또한 우린 합의 하에 헤어지는 거잖아. 앞으로 우리 두 집안은 친구로도 지낼 수 있을 텐데 친구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합의 하에 헤어진다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불만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한 건 아니고?”유현진: “...”분명 민감한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이다!그녀가 설명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려고 할 때 강한서가 또다시 말했다.“오늘 아침 병원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 나한테 어떤 기능성 장애가 있는지 묻더군. 그 점에 대해 왜 의사에게 상세
유현진: “...”그 공짜라는 설탕을 그의 입에 욱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됐다! 지금은 강한서의 눈치를 살펴야 할 때니 애써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굳은 것 같아. 다음엔 조심할게.”강한서의 표정이 확실히 훨씬 더 밝아졌다.유현진이 그 기회를 틈타 말했다.“강 대표, 이혼도 결혼과 마찬가지로 날짜를 잘 정해야 해.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 좋은 날이 아니어서 이렇게 안 좋은 끝을 맞이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이혼할 땐 반드시 신중하게 날짜를 선택해야 해. 그래야만 이혼 뒤에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이번 달 21, 24, 25, 26, 27, 28, 31일 모두 길일이야. 이 중에서 하루 선택하는 거 어때?”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주말 이틀 빼고 다 길일이야?”그녀의 얕은수는 강한서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유현진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이번 달 길일이 꽤 많아서 그래.”강한서는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유현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강 대표, 어떤 날이 좋겠어?”강한서는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한마디만 더 하면 물건은 네가 직접 가져가!”유현진: “...”그녀의 부드럽던 말투도 이제 끝이 났다.“강한서, 그건 엄연히 다른 일이야! 난 너와 약속한 건 모두 다 했어. 넌 왜 그러는 건데!”그녀가 야생 고양이의 본성을 드러내자 강한서의 얼굴은 도리어 더 편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옆에 놓여있는 도시락을 탁탁 두드렸다.“유현진, 너 이혼도 하고 싶고, 네 아버지의 앞에서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척도 하고 싶은가 본데.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에 있어?”유현진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이렇게나 빨리 유상수에게 이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현주가 사고를 당하기 전 두 사람 사이는 이미 금이 갔고, 하현주가 사고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그러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계속 강한서와 함께 살다가 행여 어느 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아이가 나타나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그녀는 한성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반드시 이혼을 강행해야 한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또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강 대표, 잘 생각해봐. 네 이혼은 이곳 한성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큰일이야. 예고 하나 없이 갑자기 이혼하는데 회사나 주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강한서가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1년 뒤에 공표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야.”강한서가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유현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1년이 너무 길면 8개월?”강한서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반년... 반년은 너무 짧은데, 뭐 그래도 괜찮아...”강한서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유현진, 그 입 다물지 않으면 창문으로 던져버릴 거야!”유현진이 그제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조용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번 달 안에 이혼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어?”몇 분 뒤 유현진은 급기야 경비원에게 잡혀 강한서의 사무실에서 끌려나갔다.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강한서 그 나쁜 놈은 그녀를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이 분명하다! 그 도시락을 차라리 개에게 먹이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와 마주쳤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유현진을 보자마자 강민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누가 너한테 들어오라고 했어?”물론 유현진도 강민서가 달갑지 않았다.“내 남편이 이곳에서 출근하는데 내가 왜 못 와?”강민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우리 강 씨 집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와 결혼했다고 한성 그룹 절반이 네 것이라도 된 것 같아? 네가
12층, 강한서의 사무실.민경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을 때 강한서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물었다.“갔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자 뭐라고 하던가요?”민경하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강한서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왜 점점 더 답답해지는 거예요? 유현진이 대체 뭐라고 말했는데요?”민경하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곱창구이를 할 때 곱창을 씻는 걸 깜빡했다고요.”강한서의 온몸이 순간 굳어버렸다....곱창은 물론 씻었다. 유현진은 강한서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게 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강한서의 일그러진 표정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강한서는 소독약을 삼켜서라도 위장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타고 가던 택시에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저번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후 그녀는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좀처럼 차를 몰 수 없어 최근 계속 택시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택시까지도 사고가 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다행히 사고는 그리 크지 않아 보험사를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다혈질 성격 탓인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고 택시 기사 또한 참다못해 반격을 하다가 몸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순경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 경찰서에까지 넘어가 버렸다.유현진도 목격자의 신분으로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녀는 승합차 운전기사가 먼저 선방을 날렸고 택시 기사는 정당방위를 했음을 증명해 주었다.진술을 마치고 사인을 한 뒤 유현진은 경찰서에서 나왔다.오늘 휴가를 냈던 차미주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유현진은 전화를 끊은 후 택시 어
유현진은 그제야 그날 남산 병원 옥상에서 마주친 남자임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는 아직도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미친년! 사람까지 부르다니. 그렇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 어디 한 번 내 몸에 손이라도 대봐!”유현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주강운이 그녀를 막았다.그는 이어 핸드폰을 꺼내 누구보다도 차분한 말투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당신이 조금 전 사람을 폭행하던 증거가 고스란히 내 핸드폰에 담겨 있어요. 물론 당신은 임산부이니 경찰서에 신고하면 벌금 정도로 끝나겠죠. 그래서 무서워하지 않는가 본데 만약 내가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네티즌들이 당신이 임신했다고 해서 봐줄 것 같아요? 당신의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을 텐데 태어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어요?”임산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것 같았다.주경운은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제 소개가 늦었네요. 난 신문사 기자예요. 이 정도면 그만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임산부는 두려움에 명함도 받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오늘 운 좋은 줄 알아!”말을 마친 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배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주강운이 유현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 그 사납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없이 따뜻한 남자의 모습만 남아있었다.“다쳤네요.”그가 유현진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유현진은 핸드폰을 비추어 상처를 살폈다. 손톱에 찍혀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제 차에 약이 있으니 가서 치료해 줄게요.”유현진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주강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별말씀을요.”차에 올라탄 뒤 주강운은 약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소독해주려 했다.유현진은 어색하게 그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녀의 말에 주강운은 약을
강민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날 안 좋아하는지? 그 사람 부모님들은 날 엄청 좋아해 주셨어! 오빤 그냥 날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직접 찾아보던지.”강민서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찾을 수 있었다면 아마 회사까지 찾아와 강한서에게 부탁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주강운은 귀국하고서부터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갈 때면 항상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핸드폰도 통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오, 오빠, 나 좀 도와줘, 오빠는 동생이 시집가는 게 안 좋아?”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강운이 너보다 7살이나 많아, 너희 둘 안 어울려.”“유현진이 오빠한테 시집올 때도 내 나이만 했어. 왜 그때는 새언니가 어리다는 생각 안 했어. 남자들 진짜 내로남불인거 알아?”유현진 이 세 글자를 듣자 또 그때 그녀가 한 일이 떠올랐고, 시끄러운 강민서 때문에 머리가 찌근찌근하던 차였는데 이제는 위까지 쓰려왔다. 그는 강민서에게 핸드폰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전화하고 꺼져!”강민서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바로 주강운의 이름을 찾았다. 신호음이 얼마 안 가자 핸드폰 너머로는 주강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강운 오빠, 어디 갔었어? 요즘 내 연락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도 안 하고?”주강운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강한서 이 자식은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을 마음에 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었다.“요즘에 좀 바빠서 연락 온 걸 못 봤나 봐. 무슨 일이야?”“아무 일도 없어…그냥 주말에 있는 자선 파티 말인데. 나랑 같이 가. 내가 초대장이 없어.”“오빠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 한서도 초대장 있어.”주강운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오빠가 날 데려갈 리가 없
“여기 맞죠?”주강운은 차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그의 말에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밖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앞에 세워 주시면 돼요.”차가 서자 유현진은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주강운이 영문을 몰라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유현진은 이미 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뒷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10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인행 도로 너머에서 좌우로 달리는 차들을 살피는 그녀의 손에는 내릴 때와 달리 커피가 두 개 들려져 있었다.주강운의 눈빛은 그런 그녀에게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차 창문을 내리자 유현진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커피를 받은 주강운은 결심이라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주강운이라고 합니다. 그쪽은요?”유현진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답했다.“유현진이에요.”…같은 시각, 주강운에게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걸 안 강민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오빠, 강운 오빠 여자 파트너 있대! 그 여자 파트너 도대체 누구야!”강한서는 속이 쓰려 더 이상 대꾸할 힘조차 없을뿐더러 짜증이 밀려왔다.“내가 어떻게 알아?”“오빠 제일 친한 친구 아니야?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도대체 여자 파트너 누구냐고?”강한서는 그녀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강민서, 여기서 한 번만 더 난리 칠 거면 나가!”강민서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강한서가 기분이 좋을 때만 애교를 쓰거나 성질을 부릴수 있었다. 아무리 오빠라 하여도 그녀는 강한서를 어려워하고 있었다.강한서가 오늘 이렇게까지 화난 데에는 유현진과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민서는 안절부절못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오빠, 방금 유현진 회사에 와서 뭐 했어?”강한서는 그녀를 쳐다보곤 대답하였다.“뭐라고 했어?”강민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그러니까, 새
차가 송가람이 말한 회원제 클럽에 도착했고, 그녀가 내리려던 순간 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주혁은 잠시 망설이며 물었다. “기다려 드릴까요?” 송가람은 안전벨트를 풀며 무심히 말했다. “아니요, 가도 돼요.”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지갑을 꺼내 돈 한 장을 뽑아 주혁에게 내밀었다. “차비예요.” 주혁은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가람 씨, 저는 그런 의도로 태워드린 게 아닙니다.” “알아요.”송가람이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난 빚지고 싶지 않아요. 만약 이게 불편하다면...”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한현진을 혼내주든가요. 정말 꼴도 보기 싫거든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돈을 좌석에 던져 놓은 뒤 차에서 내렸다. 주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한편, 진윤은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가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깜짝 놀라 아빠가 온 줄 알고 얼른 게임기를 끄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내려가 보니 엄마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엄마는 이모랑 밥 먹으러 갔다면서요.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진윤의 엄마는 신발을 벗으면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말도 마라, 생각만 해도 재수 없으니까!” 그러더니 오늘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윤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날 아침 한현진의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문자로 물어왔다. [너희 엄마가 오늘 점심에 누구랑 약속했어?]그는 이상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엄마한테 부탁해서‘한세 한식당’을 '히비스커스 호텔'로 바꿔봐. 그러면 여신님 앞길이 밝아질 거야.]그는 여신 팬클럽의 열혈 멤버로서, 고민
그가 차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운전 중인 싸구려 카롤라를 본 송가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차를 타고 온 거예요?” 주혁이 설명했다. “이건 제 차입니다. 오늘 한 대표님께서 쉬시는 날이라, 그분 차는 두고 왔습니다.” 송가람은 약간 불쾌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뒷좌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공간이 좁아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차 안에는 차량용 방향제가 뿌려져 있었는데, 그 방향제는 그들의 회사 제품으로, 가격이 저렴하지 않다. 마침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송가람은 주혁을 유심히 살폈다. ‘이 초라한 사람이 이런 걸 쓸 수 있다고? 한현진 같은 여자가 사람 마음을 사려고 준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현진에 대한 이미지는 한층 더 위선적이라는 딱지를 얻게 되었다. 주혁은 앞 좌석 수납함에서 작은 선물 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가람 씨, 이거 가람 씨의 물건입니다.” 그가 말하는 순간, 송가람은 마스크를 벗었다. 주혁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남은 선명한 뺨 자국과 부어오른 흔적을 보게 되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누가 때렸어요?” 송가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쪽이 알 바 아니에요.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주혁이 건넨 가방을 받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자신의 열쇠고리와 상자에 담긴 진주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송가람은 열쇠고리만 꺼내고는 가방을 다시 주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건 그쪽 물건이죠.” 주혁은 억지로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고 조용히 말했다. “그건 가람 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송가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선물
‘한서 오빠... 한서 오빠...’송가람은 갑자기 멈춰 섰다.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가람은 눈물을 쏟으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민경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해 지금 회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러더니 잠시 망설인 후 덧붙였다. “가람 씨, 오늘 가람 씨가 떠난 후, 대표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가람 씨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요. 다만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저를 통해 연락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가람 씨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대표님은 자신으로 인해 가람 씨와 어머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송가람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람 씨, 혹시 우셨어요?” 송가람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누구시죠?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급하게 답했다. “저... 저, 저 주혁입니다.” 송가람은 이름을 들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서둘러 설명했다. “저는 한 대표님의 운전기사입니다. 예전에 식당 카드를 만들 때 가람 씨께서 직접 저를 카드 만드는 곳까지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떠올렸다. 약간 너저분한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왜 전화했어요?” 주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차장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주웠는데, 프런트 데스크에서 가람 씨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마침 시간이 있어서, 가람 씨가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직접 가져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엄마는? 심원 모자를 불러놓고 나랑 맞선 보는 얘기는 왜 나한테 하지 않은 건데? 엄마 사업을 위해서, 엄마 고객을 위해서라면 딸도 팔겠다는 거야?”서해금은 화나 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 대체 어떤 뇌를 갖고 있는 건지 네 머리를 열어서 보고 싶을 지경이야! 그냥 만나서 식사 한 번 하는 것뿐이잖아. 누가 너더러 결혼하래?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싫다는 네 목에 내가 칼이라도 들이대면서 협박이라도 할까봐 그래?”“내가 그렇게 얘기를 안 하면 네 생각엔 홍혜림이 약속 자리에 나오기나 했을 것 같아? 홍혜림 씨와 채지윤 씨는 어렸을 적부터 있다면 오랜 친구야. 심원은 홍혜림 씨에겐 친아들 같은 존재라고. 심원이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네가 그 아이 마음만 잘 잡고 있다면 내가 홍혜림 씨 마음을 다시 되돌리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오히려 네가 한 짓을 봐! 한 번 두 사람 모두에게 미움을 샀어. 우리 회사가 진씨 가문과 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네가 알기나 해? 지금 홍혜림 씨가 사업 파트너로 한현진을 지정했어. 그것 때문에 내 손실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아?”송가람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파트너가 한현진이라고 해도 협업하려면 회사 절차는 걸쳐야 하잖아. 수익도 전부 회사로 들어오는 거고. 엄마에게 떨어지는 돈이 줄어들 진 않잖아.”서해금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병X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더니 더는 말이 없었다. 서해금에게 병원에 갔다고 속이고 강한서에게 갔던 일에 대해 잘못을 인지하고 미안함을 느낀 송가람이 나지막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를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한서 오빠는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시면 안 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걱정되어서 오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간 거야. 엄마, 아까 한서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어.”서해금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실소를
이쯤이면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강한서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한현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야?’생각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는 연결이 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사모님, 저예요.”민경하의 목소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는요?”“대표님은...”잠시 말이 없던 민경하는 노려보는 강한서의 눈빛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더 그럴듯하게 연기 하시려고 술을 두어 잔 더 마셨다가 지금 취하셨어요.”한현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민경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숙취해소제도 마셨고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계획했던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어요. 사모님들께서는 전부 언짢아하시며 돌아가셨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대표님께 직접 들으세요.”한현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쥐똥만한 주량의 소유자인 남편이 걱정되었다. “강한서 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가볼게요.”“아뇨. 서 대표님께서 가실 때 대표님을 보시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어요. 의심을 사 대표님을 감시할 수도 있어요. 사모님께서는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걱정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저 대신 강한서 잘 챙겨줘요. 옆으로 누워서 자게 해요. 술 많이 마시면 자꾸 토하거든요. 옆에 물도 한 잔 떠주고요.”민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민경하가 고개를 돌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고양이 같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만약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본인 몸을 바쳐가며 송가람이 약을 탔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고 제가 대표님을 도와 사모님께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걸아시면 아마 전 앞으로 사모님께 빌붙을 수 없을 지도 몰라요.강한서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허약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
말을 마친 홍혜림은 룸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도도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을 감싸 쥔 송가람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강한서가 송가람에게 휴지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송가람은 코끝이 찡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서해금은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강한서를 밀쳤다. 중심을 잃은 강한서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의 얼굴이 통증으로 하얗게 질렸다. 울컥 화가 치민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 “엄마, 뭐하는 거야!”“마침”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던 민경하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른 달려가 강한서를 부축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송가람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한서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서해금이 같은 자리에서 송가람의 뺨을 때렸다. “그쪽으로 가기만 해. 그럼 우린 오늘 모녀 관계를 끊는 거야. 앞으로 다신 내 눈 앞에 띄지마.”서해금은 온 몸의 힘을 다 해 송가람을 때렸다. 그녀는 예전에도 송가람를 때린 적이 있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때, 그림을 못 그렸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실수를 했을 때에도 매를 든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힘을 실은 적은 없었다. 뺨을 얻어맞은 송가람은 귀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해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강한서는 마치 송가람이 맞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민경하의 부축을 받으며 나지막이 해명했다. “아주머니, 가람이도 이젠 성인이에요. 가람이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있어요. 이렇게 몰아붙이시면 안 되죠.”서해금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딸을 어떻게 가르치든 그건 강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앞으로 우리 딸에게서 좀 떨어져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든 가람이에게 부탁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주지 말란 말이야!”
심원과 채지윤 모자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룸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송가람의 목소리에 채지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심원과 채지윤을 본 순간 서해금은 송가람을 데리고 유전자검사라도 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멍청한 X! 멍청한 X!’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X년이 누구더러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거야?”움찔한 송가람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분노가 가득한 채지윤과 창백한 얼굴의 심원이 보였다. 사실 심원은 그리 뚱뚱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동그란 얼굴 때문에 덩치가 있어 보일 뿐 퍼진 몸은 아니었다. 외모는 심지어 꽤 빼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한현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심원의 눈이 강한서와 많이 닮았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강한서는 그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을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강한서를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외모만으로도 적지 않은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심원의 눈은 강한서와 70% 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꽤 많았을 것이다.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하며 귀하게 자라왔다. 먹는 것이든 갖고 싶은 것이든 그의 요구라면 전부 들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조금 통통한 편이었다. 그리고 몸매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적도 많았다. 다이어트를 여러 번 했고 또 성공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곧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대학생 시절 열등감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좋아할 용기도 없었던 심원은 해외 유학 시절 자신에게 늘 잘해주던 송가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해외의 다양한 심미 기준으로 인해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송가람이 싫어했던 터라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심원은 줄곧 송가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당황한 송가람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 앞에는 홍혜림과 서해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송가람은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과 홍혜림이 왜 히비스커스 호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세 한식당에 있는거 아니었어?’홍혜림의 얼굴은 경멸로 가득 했다. 그녀는 웃는 듯 또 아닌 듯 한 표정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서해금을 힐끔 쳐다보았다. “따님은 병을 병원이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남자에게 진료 받나보죠? 아프다는 게 대체 열이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몸이 달았다는 거예요? 심씨 가문과의 혼사를 원하지 않는 거였다면 직접 얘기하시지 이렇게 제 조카가 바보처럼 기다리게 속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너무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라 서해금의 얼굴이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해금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막 입을 열려는데 송가람 옆에 서 있던 강한서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사모님, 예의를 지키시죠. 가람이는 그저 저에게 해장국을 가져왔을 뿐이예요. 함부로 남의 명성을 더럽히지 마세요.”그 말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애틋한 기분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한서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줬어. 역시 오빠도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서해금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만약 조금 전 서해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면 그녀는 송가람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럴싸한 핑계를 대줬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 한 마디로 송가람이 꾀병을 부린 일은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다. 역시, 강한서의 말을 들은 홍혜림은 경멸의 감정이 조금 더 짙어졌다. “좋네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본인은 아픈 척 애인을 챙겨주러 갔다니. 서 대표님, 이게 바로 대표님이 말한 성의라는 건가요?”서해금이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모님, 가람이는 정말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갔었어요. 아마 한서가 숙취 때문에 가람이에게 해장국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아요. 저희 두 집안은 예전부터 가깝게 지냈었잖아요.
표정을 굳힌 송가람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혹시 뭐 기억났어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최면의 거부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가람이 곧바로 강한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말렸다. “한서 오빠, 아프면 생각하지 마요. 생각 안 하면 안 아프잖아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밀치며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만지지 마!”그의 반응에 깜짝 놀란 송가람은 그 순간 강한서가 모든 것을 떠올렸다고 착각했다. 당황하여 넋이 나갔던 송가람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낸 그녀는 약 두 알을 물에 녹인 후 강한서 입가에 가져갔다. “한서 오빠, 이거 마셔요. 마시면 안 아플 거예요.”얼굴이 일그러진 민경하가 룸으로 뛰쳐갔다. 극심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강한서는 송가람이 건네는 물을 받아 쭉 들이켰다. 송가람은 최면할 때 사용하던 심리 암시를 위한 풍령 소리를 강한서 귀 옆에 울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괜찮아요? 머리 아직도 아파요?”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고 강한서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는 나지막이 송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이?”얼굴을 붉힌 송가람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예요, 오빠.”약효 때문인건지 강한서는 허탈한 사람처럼 몸을 뒤로 기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여깄어?”“그... 그게 오빠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 되어서요.”송가람이 말하며 저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현진 씨가 오빠를 잘 챙겨줄 거라고 했었잖아요. 챙겨준다는게 이런 거였어요?”강한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아저씨 돌아오는 날 아냐? 한현진 씨도 공항에 마중 나갔는데 넌 안 가도 괜찮아?”멈칫하던 송가람은 곧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저 걱정해 주는 거예요?”강한서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