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이지 않냐는 말이다. 아침을 거르면 일 얘기가 진행이 안 된다니? 단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다른 수법으로 갈아탔을 뿐이었다.강한서에게 도시락을 싸준 건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신혼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오로지 강한서밖에 없었다. 당시 더빙을 시작하기 전이라 오직 강한서를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말도 안 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남자의 입맛을 저격해야 한다는 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강한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 요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지라 한 달이나 배웠는데도 겨우 먹어줄 만한 수준이었다.하지만 강한서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나마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를 들고 강한서를 찾아가 맛보게 했을 때, 단지 맛없다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났다.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강한서가 출근할 때 억지로 쥐여주며 이번에는 꼭 맛있을 거라고 뻔뻔스럽게 큰소리쳤었다.강한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강한서가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얼른 다가가 어제보다 맛있었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맛없으니까 다시는 요리하지 말라는 대답뿐이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텅 빈 도시락을 보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로 요리하는 데 더욱 열중했고, 강한서는 매번 빈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하지만 그가 도시락에 든 음식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강한서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그녀의 일방적인 바람에 불과했고, 그는 단지 서로의 체면을 위해 굳이 들춰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이후로 그녀는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강한서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매일 먹는 척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이혼을 의논하러 온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뜨겁게 뛰던 심장이 식어버렸다. 역시 이 강한서 나쁜 놈에겐 조금의 마음도 주면 안 된다.유현진이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걸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트러플 당신이 나 대신 어머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의 시선이 서류로부터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수려하고 깨끗하고 순한 얼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강한서는 모두 그녀의 가면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엔 예전의 온순한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금만 자극하면 난리를 치는 야생 고양이가 도사리고 있다.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가느랗게 뜨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뭐라고? 내가 언제 약속했는데?”유현진은 강한서가 오리발을 내밀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예전 여동생에 관한 네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약속한 거잖아.”“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네.”강한서가 떠올린 듯하자 유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서가 예상치 못한 말을 이어갔다.“자세히 생각해보니 말이야. 우린 곧 이혼할 거잖아. 이제 강 씨 집안으로부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뭐 그렇게 귀중한 거라고.”유현진는 애써 그를 설득하려 했다.“또한 우린 합의 하에 헤어지는 거잖아. 앞으로 우리 두 집안은 친구로도 지낼 수 있을 텐데 친구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합의 하에 헤어진다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불만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한 건 아니고?”유현진: “...”분명 민감한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이다!그녀가 설명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려고 할 때 강한서가 또다시 말했다.“오늘 아침 병원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 나한테 어떤 기능성 장애가 있는지 묻더군. 그 점에 대해 왜 의사에게 상세
유현진: “...”그 공짜라는 설탕을 그의 입에 욱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됐다! 지금은 강한서의 눈치를 살펴야 할 때니 애써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굳은 것 같아. 다음엔 조심할게.”강한서의 표정이 확실히 훨씬 더 밝아졌다.유현진이 그 기회를 틈타 말했다.“강 대표, 이혼도 결혼과 마찬가지로 날짜를 잘 정해야 해.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 좋은 날이 아니어서 이렇게 안 좋은 끝을 맞이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이혼할 땐 반드시 신중하게 날짜를 선택해야 해. 그래야만 이혼 뒤에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이번 달 21, 24, 25, 26, 27, 28, 31일 모두 길일이야. 이 중에서 하루 선택하는 거 어때?”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주말 이틀 빼고 다 길일이야?”그녀의 얕은수는 강한서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유현진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이번 달 길일이 꽤 많아서 그래.”강한서는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유현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강 대표, 어떤 날이 좋겠어?”강한서는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한마디만 더 하면 물건은 네가 직접 가져가!”유현진: “...”그녀의 부드럽던 말투도 이제 끝이 났다.“강한서, 그건 엄연히 다른 일이야! 난 너와 약속한 건 모두 다 했어. 넌 왜 그러는 건데!”그녀가 야생 고양이의 본성을 드러내자 강한서의 얼굴은 도리어 더 편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옆에 놓여있는 도시락을 탁탁 두드렸다.“유현진, 너 이혼도 하고 싶고, 네 아버지의 앞에서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척도 하고 싶은가 본데.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에 있어?”유현진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이렇게나 빨리 유상수에게 이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현주가 사고를 당하기 전 두 사람 사이는 이미 금이 갔고, 하현주가 사고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그러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계속 강한서와 함께 살다가 행여 어느 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아이가 나타나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그녀는 한성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반드시 이혼을 강행해야 한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또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강 대표, 잘 생각해봐. 네 이혼은 이곳 한성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큰일이야. 예고 하나 없이 갑자기 이혼하는데 회사나 주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강한서가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1년 뒤에 공표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야.”강한서가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유현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1년이 너무 길면 8개월?”강한서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반년... 반년은 너무 짧은데, 뭐 그래도 괜찮아...”강한서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유현진, 그 입 다물지 않으면 창문으로 던져버릴 거야!”유현진이 그제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조용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번 달 안에 이혼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어?”몇 분 뒤 유현진은 급기야 경비원에게 잡혀 강한서의 사무실에서 끌려나갔다.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강한서 그 나쁜 놈은 그녀를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이 분명하다! 그 도시락을 차라리 개에게 먹이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와 마주쳤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유현진을 보자마자 강민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누가 너한테 들어오라고 했어?”물론 유현진도 강민서가 달갑지 않았다.“내 남편이 이곳에서 출근하는데 내가 왜 못 와?”강민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우리 강 씨 집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와 결혼했다고 한성 그룹 절반이 네 것이라도 된 것 같아? 네가
12층, 강한서의 사무실.민경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을 때 강한서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물었다.“갔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자 뭐라고 하던가요?”민경하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강한서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왜 점점 더 답답해지는 거예요? 유현진이 대체 뭐라고 말했는데요?”민경하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곱창구이를 할 때 곱창을 씻는 걸 깜빡했다고요.”강한서의 온몸이 순간 굳어버렸다....곱창은 물론 씻었다. 유현진은 강한서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게 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강한서의 일그러진 표정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강한서는 소독약을 삼켜서라도 위장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타고 가던 택시에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저번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후 그녀는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좀처럼 차를 몰 수 없어 최근 계속 택시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택시까지도 사고가 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다행히 사고는 그리 크지 않아 보험사를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다혈질 성격 탓인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고 택시 기사 또한 참다못해 반격을 하다가 몸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순경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 경찰서에까지 넘어가 버렸다.유현진도 목격자의 신분으로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녀는 승합차 운전기사가 먼저 선방을 날렸고 택시 기사는 정당방위를 했음을 증명해 주었다.진술을 마치고 사인을 한 뒤 유현진은 경찰서에서 나왔다.오늘 휴가를 냈던 차미주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유현진은 전화를 끊은 후 택시 어
유현진은 그제야 그날 남산 병원 옥상에서 마주친 남자임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는 아직도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미친년! 사람까지 부르다니. 그렇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 어디 한 번 내 몸에 손이라도 대봐!”유현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주강운이 그녀를 막았다.그는 이어 핸드폰을 꺼내 누구보다도 차분한 말투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당신이 조금 전 사람을 폭행하던 증거가 고스란히 내 핸드폰에 담겨 있어요. 물론 당신은 임산부이니 경찰서에 신고하면 벌금 정도로 끝나겠죠. 그래서 무서워하지 않는가 본데 만약 내가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네티즌들이 당신이 임신했다고 해서 봐줄 것 같아요? 당신의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을 텐데 태어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어요?”임산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것 같았다.주경운은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제 소개가 늦었네요. 난 신문사 기자예요. 이 정도면 그만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임산부는 두려움에 명함도 받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오늘 운 좋은 줄 알아!”말을 마친 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배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주강운이 유현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 그 사납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없이 따뜻한 남자의 모습만 남아있었다.“다쳤네요.”그가 유현진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유현진은 핸드폰을 비추어 상처를 살폈다. 손톱에 찍혀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제 차에 약이 있으니 가서 치료해 줄게요.”유현진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주강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별말씀을요.”차에 올라탄 뒤 주강운은 약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소독해주려 했다.유현진은 어색하게 그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녀의 말에 주강운은 약을
강민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날 안 좋아하는지? 그 사람 부모님들은 날 엄청 좋아해 주셨어! 오빤 그냥 날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직접 찾아보던지.”강민서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찾을 수 있었다면 아마 회사까지 찾아와 강한서에게 부탁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주강운은 귀국하고서부터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갈 때면 항상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핸드폰도 통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오, 오빠, 나 좀 도와줘, 오빠는 동생이 시집가는 게 안 좋아?”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강운이 너보다 7살이나 많아, 너희 둘 안 어울려.”“유현진이 오빠한테 시집올 때도 내 나이만 했어. 왜 그때는 새언니가 어리다는 생각 안 했어. 남자들 진짜 내로남불인거 알아?”유현진 이 세 글자를 듣자 또 그때 그녀가 한 일이 떠올랐고, 시끄러운 강민서 때문에 머리가 찌근찌근하던 차였는데 이제는 위까지 쓰려왔다. 그는 강민서에게 핸드폰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전화하고 꺼져!”강민서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바로 주강운의 이름을 찾았다. 신호음이 얼마 안 가자 핸드폰 너머로는 주강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강운 오빠, 어디 갔었어? 요즘 내 연락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도 안 하고?”주강운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강한서 이 자식은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을 마음에 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었다.“요즘에 좀 바빠서 연락 온 걸 못 봤나 봐. 무슨 일이야?”“아무 일도 없어…그냥 주말에 있는 자선 파티 말인데. 나랑 같이 가. 내가 초대장이 없어.”“오빠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 한서도 초대장 있어.”주강운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오빠가 날 데려갈 리가 없
“여기 맞죠?”주강운은 차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그의 말에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밖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앞에 세워 주시면 돼요.”차가 서자 유현진은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주강운이 영문을 몰라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유현진은 이미 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뒷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10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인행 도로 너머에서 좌우로 달리는 차들을 살피는 그녀의 손에는 내릴 때와 달리 커피가 두 개 들려져 있었다.주강운의 눈빛은 그런 그녀에게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차 창문을 내리자 유현진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커피를 받은 주강운은 결심이라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주강운이라고 합니다. 그쪽은요?”유현진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답했다.“유현진이에요.”…같은 시각, 주강운에게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걸 안 강민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오빠, 강운 오빠 여자 파트너 있대! 그 여자 파트너 도대체 누구야!”강한서는 속이 쓰려 더 이상 대꾸할 힘조차 없을뿐더러 짜증이 밀려왔다.“내가 어떻게 알아?”“오빠 제일 친한 친구 아니야?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도대체 여자 파트너 누구냐고?”강한서는 그녀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강민서, 여기서 한 번만 더 난리 칠 거면 나가!”강민서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강한서가 기분이 좋을 때만 애교를 쓰거나 성질을 부릴수 있었다. 아무리 오빠라 하여도 그녀는 강한서를 어려워하고 있었다.강한서가 오늘 이렇게까지 화난 데에는 유현진과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민서는 안절부절못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오빠, 방금 유현진 회사에 와서 뭐 했어?”강한서는 그녀를 쳐다보곤 대답하였다.“뭐라고 했어?”강민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그러니까, 새
심원과 강한서 모두 매혹적인 봉황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강한서의 눈은 일자로 뻗어나간 형태였고 심원의 눈은 위로 살짝 치켜올라간 모양이었다. 웃으면 살짝 올라가는 눈꼬리는 귀티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멈칫한 전연이 심원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전연을 태운 심원의 차가 이모네 국수를 향해 출발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 탓인지 심원은 전연과 조잘조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심원은 자신과 비슷한 입맛과 취향을 가진 전연이 신기하기만 했다.그 탓인지 어떤 주제든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단순히 맞장구를 치기 위한 기계적인 리액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야 전연을 만나게 되어 아쉽다는 생각이 든 심원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만약 우리가 더 일찍 만났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을 거예요.”전연이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도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그 말에 대답하려던 심원은 연신 하품을 하는 전연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아직 조금 더 가야 해요. 도착하면 깨울게요.”“네.”대답한 전연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감았다. 이모네 국수 앞에 도착했지만 전연은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전연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심원은 전연을 깨우지 않았다. 차의 시동도 끄지 않고 에어컨도 그대로 틀어놓은 채 안전벨트를 푼 심원이 조용히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가 미리 주문을 했다. 심원이 차에서 내리자 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맑게 빛나는 눈빛은 졸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연이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순조롭게 진행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곧 한성우가 답장했다. [이렇게 빨리?]전연: [상대하기 힘든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내 사진을 보고는 바로 발끈하던데?]한성우가 역시 대단하다는 의미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지금 어디야?]전연: [미래의 남편과 밥 먹으러 왔어. 우리도 서로 알아가야지.]한성우: [얼
전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만약 제가 심원 씨가 좋아하시는 분과 사귈 수 있게 도와드린다면요?”심원은 그저 전연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연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심원을 도와줄 테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심원은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화력이 좋은 전연은 사람의 이야기를 잘 끌어내는 매력이 있었다. 심원은 저도 모르는 사이 전연에게 송가람과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전연은 매일 같이 심원과 약속을 잡았다. 가끔은 공원에서 또 가끔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매번 송가람이었다. 신원은 자신과 송가람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전연에게 들려주었다. 전연은 심원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와 송가람을 이어줄 방법을 고민했다. 심원의 여자친구인 척 하게 된 것도 전연이 송가람을 자극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송가람은 전연이 예측했던 것처럼 먼저 심원에게 연락했다. 전연의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을 해야 해요? 아니면 또 인스타그램에 우리 사진을 올려서 질투를 유발할까요?”전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 전 송가람 씨 연락은 안 받으면서 바로 우리 사진을 올려버리면 그분도 자기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올린 사진이구나, 하고 눈치 챌 텐데 그럼 오빠가 저랑 사귀고 있다는 것도 안 믿을 거예요.”“콜백도 안 되고 사진도 안 되면 전 뭘 어떡해요?”전연이 웃으며 말했다. “콜백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빨리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생각해봐요. 전에 오빠가 먼저 연락했을 땐 매번 시간이 잔뜩 지나서야 다시 연락이 왔잖아요. 그럼 오빠는 답장을 기다리느라 속이 바짝 탔었죠?”심원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당연히 알죠. 그건 우리 여...”큼, 헛기침한 전연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우리 여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내 말 듣고 있어?”대답이 없는 송가람을 본 서해금이 언성을 높였다. 송가람이 재빨리 대답했다. “듣고 있어. 알았어.”창백해진 얼굴의 서해금을 본 송가람은 순간 한 가지 추측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고민도 없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엄마, 한현진이 바뀐 거 우연한 사고 맞아?”멈칫한 서해금이 송가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정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있다고 생각해?”송가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얼굴로 서해금을 바라보던 송가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해금이 정리를 마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송가람 앞으로 걸어간 서해금이 시선을 내려 송가람의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어떤 사람의 운명은 타고나는 거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본인이 직접 개척해 나가야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애를 쓴 건 넌 나처럼 피땀 흘리며 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에 안주하면 안 돼. 내 말 알아들어?”송가람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시선을 내린 그녀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송가람은 줄곧 한현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동안 누린 관심과 행복은 전부 한현진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만약 한현진이 바뀌지 않았다면 서해금이 송병천과 결혼하고 송가람이 송병천의 딸로 살 기회가 있었을까?그 질문의 정답을 송가람은 마주할 자신도, 인정할 자신도 없었다. 한편, 전연이 전화를 끊자 더는 참을 수 없던 심원이 말했다. “휴대폰 이리 줘요. 가람이에게 전화해야겠어요.”전연이 심원의 손을 피하며 휴대폰을 뺏기려 하지 않았다. “안 돼요. 아직은 전화하면 안 돼요.”심원이 다급하게 얘기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하라면서요. 왜 지금은 또 안 된다는 거예요?”“콜백을 하긴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금방 전화를 끊었는데 바로 다시 전화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심원이 모르겠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라고 생각하는데요?”전연이 말했
서해금은 첫 번째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한현진이라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강한서의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에게 아이는 강한서를 잡는 패가 될 수는 있어도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양시은 딸의 결혼식장에서 신미정의 계략으로 넘어진 한현진을 바짝 긴장한 채 안고 가는 강한서의 모습은 한현진의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모두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유독 송가람과 서해금에게만 쉬쉬거렸다. 숨기는 이유가 어쩌면 한아람 죽음에 관한 의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해금은 불안해졌다. 당시 그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더는 증인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해금의 불안을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현진이 돌아온 그 순간부터 서해금은 단 하루도 깊은 잠에 빠질 수가 없었다. 창백한 얼굴의 송가람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한서 오빠가 기억 잃은 척 연기할 리가 없어. 한현진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한서가 정말 기억 상실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확신해?”“만약 기억을 잃은게 아니라면 오빠가 어떻게 날...”순간 멈칫한 송가람이 입술을 꾹 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무튼 오빠는 기억을 잃은게 확실해.”이상함을 감지한 서해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강한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아냐. 난 아무것도 안 했어.”송가람이 서해금의 눈빛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오빠 기억 회복을 도와주려고 제일 유명한 신경외과 교수님을 모셨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날 속일 수는 있어도 의사를 속일 수는 없을 거잖아.”한참동안 서해금은 송가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자신은 서해금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짙게 난 손톱자국의 통증을 용기 삼아 송가
서해금이 개의치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다 한 번, 행운이 따랐던 것뿐이야. 한현진은 아직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야. 너야말로 계속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거 문채영 씨 옆에서 제대로 배워. 두 번 다신 실망시키지 마.”서해금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송가람의 머릿속은 여전히 심원의 일로 가득 했다. “그, 새로 오신 기사님은 어때?”서해금이 슬그머니 물었다. “마음에 잘 맞아?”잔소리가 많던 중년의 남자를 떠올린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그래. 말이 좀 많은 것 같아. 계속 이것저것 물어서 귀찮아 죽겠어. 하지만 운전 실력은 좋은 것 같아.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해. 강아지처럼 말을 잘 들어.”그 말에 멈칫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송가람,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말 기억해?”움찔한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기억해.”서해금이 서류를 정리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말해봐.”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신분이 낮을 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내가 높은 자리에 있을 땐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서해금이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넌 그 말을 지키고 있어?”아랫입술을 깨문 송가람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잘못했어.”“다신 잘못했다는 말 듣게 하지마.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게 그 말이야.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뭐 해! 달라지질 않는데! 송가람. 엄마 이젠 젊지 않아. 평생 네 곁을 지킬 수 없어. 어떤 일은 너도 이젠 혼자 해내야지.”고개를 숙인 송가람은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불쌍한 송가람의 모습에 서해금은 안쓰러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어 안쓰러웠고 자신의 좋은 유전자 대신 멍청힌 아빠를 닮은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송가람은 심지어 그녀의 아빠만큼 성실하지도 않았다. 만약 송병천과 아들딸이라도 낳을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상황에 끌
전연은 비꼬는 송가람의 말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저와 원이 오빠가 사귀기로 한지 며칠밖에 되지 않아서요. 오빠가 쑥스러움이 많고 내향적이라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직 얘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원이 오빠와 많이 친하신 것 같은데 오빠에게서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빠 동창이세요?”송가람은 더 이상 웃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맞다는 대답도, 아니라는 대답도 할 수 없어 그녀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랑 심원이 무슨 사이인지는 심원에게 직접 물어요!”전연이 말했다.“오빠랑 가까운 사이 같으신데 제가 언니 카톡 추가해도 될까요? 친한 사이면 원이 오빠 취향을 잘 아실 거잖아요. 곧 오빠 생일이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제가 아는 오빠 친구가 없어서요. 오빠에게 직접 물어보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요.”“언니가 알려주실래요?”송가람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까짓 게 뭔데.’하지만 자신이 고생해 길들은 강아지가 자신 몰래 여자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송가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연락처 저장해서 추가해요.”전연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언니.”해맑게 불린 언니라는 호칭에 송가람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전연이 곧 송가람에게 친구 추가를 신청했다. 전연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조금 전 심원의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이었다. 수락을 누른 송가람은 곧 전연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냈다. 전연이 기본 그리드에 고정한 피드는 바로 심원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나도 드디어 달달한 연애 시작이다~]분노로 얼룩진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주현이 다시금 커피를 건네자 송가람은 탁, 커피를 쳐냈다. 뜨거운 커피가 주현의 몸에 흘러내렸고 그 고통에 주현이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송가람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쓸어버리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꺼져! 당장 꺼지라고!”마침 송가람 사무실로 들어서며
멈칫한 한현진이 시선을 올려 은서하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 남았어요?”고개를 가로 저은 은서하가 서류철은 안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책상에 놓인 유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한현진이 주세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현이 문을 열고 송가람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류가 여기저기로 널브러져 엉망진창인 모습이 주현의 눈에 들어왔다. 커피를 손에 든 주현은 뒤뚱거리며 서류를 피해 송가람 앞으로 다가갔다. 커피를 건넨 주현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여기 커피요.”송가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심원의 새로운 여자친구에 관해 얘기 중이었다. SNS는 하지도 않던 조용한 심원이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와의 사진을 업로드 했다. 송가람의 친구들이 그 사진을 채팅방에 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아는 사람 맞아? 처음 보는 사람 같아.][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꽤 예쁘장하게 생겼는데?][우리가 알만 한 사람은 아닐 거야. 심 대표님께서 아드님에게 찾아준 맞선 대상이 명문가 딸은 아니라고 들었어. 심원 씨가 외동이라 괜히 재벌가와 사돈을 맺었다가 대가 끊기게 될까 봐 컨트롤이 가능한 평범한 가정의 딸을 소개했다고 하던데.][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거겠지.][심 대표님과는 안 그래도 인연이 없었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한 거지, 뭐. 가람이가 심원 씨와 동창에다 사이도 좋았잖아. 어쩌면 가람이는 심원 씨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지도 몰라.”송가람이 심원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했다. 심원과 그 여자의 사진이 버젓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한 손에 밀크티를 쥐고 있었다. 셔츠를 입고 포니테일을 한 채 카메라를 향해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 부분에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다른 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남자친구의 시야에서 손을 맞잡은 여자친구의 모습
이어질 다음 경기는 조별 리그였다. 조향 대회의 조별 리그는 팀워크가 중요했다. 자유롭게 팀을 구성할 수 있었고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채택할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당연히 문채영과 팀을 하려 했다. 문채영의 실력을 등에 업는다면 송가람은 무난히 다음 라운드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한현진이 걱정되는 건 주세은이었다. 회의 전 한현진은 주세은에게 누구와 팀을 짤 것이 물었었다. 주세은은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과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최 측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팀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안 맞는 사람과 팀이 되었다간 협력은커녕 오히려 팀원이 주세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다간 바로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참가자 명단을 훑어보던 한현진은 어쩌면 이시연과 주세인이 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시연은 회사 내의 다른 참가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만약 이시연이 이미 파트너를 정했다면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서로가 난감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교적 침착한 성격의 참가자 두 명의 이름에 동그라미 표식을 해두었다. 조금 이따 물어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이시연이 자몽 두 개를 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바쁘세요?”한현진이 서류철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뇨. 무슨 일이에요?”이시연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몽을 한현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저 대신 주세은 씨에게 저와 팀을 하면 어떨지 물어봐 주시겠어요?”한현진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시연 씨와 팀을 하겠다는 분이 없어요?”이시연이 난감함 표정을 지었다. “있긴 한데 제가 거절했어요. 전 주세은 씨와 팀을 하고 싶거든요. 전에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했을 때, 사실 저 깜짝 놀랐어요. 이번엔 예선에서도 바로 TOP 10에 들었잖아요.”“저와 성적이 비슷하니까 같이 힘을 합쳐서 포인
직원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대회를 앞둔 시점에 갑자기 문채영을 스카우트해 송가람과 팀을 맺어준 목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가자를 응원하기 위한 보너스라고 얘기했지만 상금의 80%는 우승자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20%의 상금도 TOP 10에 들어야만 일 인당 4000만 원씩 받을 수 있었다. 난이도가 극상에 가까운 미션에 성공해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한현진의 제안대로라면 20위 안에만 들어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송가람을 보너스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참가자들이 보너스를 받을 기회는 자연히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6억의 우승 보너스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금이 높아지면 그만큼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고 송가람까지 제외된 상황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도전 의식을 불태워볼 만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진 참가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굳이 투표를 진행하지 않아도 서해금은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한현진을 바라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투표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한 대표 제안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한 대표 제안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다들 원하는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애쓰길 바라요. 대회가 끝나면 제가 직접 파티를 열어 여러분께 보너스를 지급할 거예요.”서해금과 눈을 마주친 한현진이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미리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할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회의실에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둘 그녀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분노로 들끓은 송가람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던 송가람은 서류 심부름을 하러 온 비서와 부딪혔다. 서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