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 “...”그 공짜라는 설탕을 그의 입에 욱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됐다! 지금은 강한서의 눈치를 살펴야 할 때니 애써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굳은 것 같아. 다음엔 조심할게.”강한서의 표정이 확실히 훨씬 더 밝아졌다.유현진이 그 기회를 틈타 말했다.“강 대표, 이혼도 결혼과 마찬가지로 날짜를 잘 정해야 해.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 좋은 날이 아니어서 이렇게 안 좋은 끝을 맞이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이혼할 땐 반드시 신중하게 날짜를 선택해야 해. 그래야만 이혼 뒤에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이번 달 21, 24, 25, 26, 27, 28, 31일 모두 길일이야. 이 중에서 하루 선택하는 거 어때?”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주말 이틀 빼고 다 길일이야?”그녀의 얕은수는 강한서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유현진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이번 달 길일이 꽤 많아서 그래.”강한서는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유현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강 대표, 어떤 날이 좋겠어?”강한서는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한마디만 더 하면 물건은 네가 직접 가져가!”유현진: “...”그녀의 부드럽던 말투도 이제 끝이 났다.“강한서, 그건 엄연히 다른 일이야! 난 너와 약속한 건 모두 다 했어. 넌 왜 그러는 건데!”그녀가 야생 고양이의 본성을 드러내자 강한서의 얼굴은 도리어 더 편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옆에 놓여있는 도시락을 탁탁 두드렸다.“유현진, 너 이혼도 하고 싶고, 네 아버지의 앞에서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척도 하고 싶은가 본데.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에 있어?”유현진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이렇게나 빨리 유상수에게 이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현주가 사고를 당하기 전 두 사람 사이는 이미 금이 갔고, 하현주가 사고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그러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계속 강한서와 함께 살다가 행여 어느 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아이가 나타나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그녀는 한성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반드시 이혼을 강행해야 한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또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강 대표, 잘 생각해봐. 네 이혼은 이곳 한성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큰일이야. 예고 하나 없이 갑자기 이혼하는데 회사나 주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강한서가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1년 뒤에 공표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야.”강한서가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유현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1년이 너무 길면 8개월?”강한서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반년... 반년은 너무 짧은데, 뭐 그래도 괜찮아...”강한서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유현진, 그 입 다물지 않으면 창문으로 던져버릴 거야!”유현진이 그제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조용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번 달 안에 이혼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어?”몇 분 뒤 유현진은 급기야 경비원에게 잡혀 강한서의 사무실에서 끌려나갔다.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강한서 그 나쁜 놈은 그녀를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이 분명하다! 그 도시락을 차라리 개에게 먹이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그녀는 강한서의 동생 강민서와 마주쳤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유현진을 보자마자 강민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누가 너한테 들어오라고 했어?”물론 유현진도 강민서가 달갑지 않았다.“내 남편이 이곳에서 출근하는데 내가 왜 못 와?”강민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우리 강 씨 집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와 결혼했다고 한성 그룹 절반이 네 것이라도 된 것 같아? 네가
12층, 강한서의 사무실.민경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을 때 강한서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민경하에게 물었다.“갔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자 뭐라고 하던가요?”민경하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강한서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왜 점점 더 답답해지는 거예요? 유현진이 대체 뭐라고 말했는데요?”민경하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까 곱창구이를 할 때 곱창을 씻는 걸 깜빡했다고요.”강한서의 온몸이 순간 굳어버렸다....곱창은 물론 씻었다. 유현진은 강한서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게 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강한서의 일그러진 표정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강한서는 소독약을 삼켜서라도 위장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가 타고 가던 택시에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저번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후 그녀는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좀처럼 차를 몰 수 없어 최근 계속 택시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택시까지도 사고가 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다행히 사고는 그리 크지 않아 보험사를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다혈질 성격 탓인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고 택시 기사 또한 참다못해 반격을 하다가 몸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순경 한 명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이 경찰서에까지 넘어가 버렸다.유현진도 목격자의 신분으로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사실대로 진술했다. 그녀는 승합차 운전기사가 먼저 선방을 날렸고 택시 기사는 정당방위를 했음을 증명해 주었다.진술을 마치고 사인을 한 뒤 유현진은 경찰서에서 나왔다.오늘 휴가를 냈던 차미주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유현진은 전화를 끊은 후 택시 어
유현진은 그제야 그날 남산 병원 옥상에서 마주친 남자임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는 아직도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미친년! 사람까지 부르다니. 그렇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 어디 한 번 내 몸에 손이라도 대봐!”유현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주강운이 그녀를 막았다.그는 이어 핸드폰을 꺼내 누구보다도 차분한 말투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당신이 조금 전 사람을 폭행하던 증거가 고스란히 내 핸드폰에 담겨 있어요. 물론 당신은 임산부이니 경찰서에 신고하면 벌금 정도로 끝나겠죠. 그래서 무서워하지 않는가 본데 만약 내가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네티즌들이 당신이 임신했다고 해서 봐줄 것 같아요? 당신의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을 텐데 태어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어요?”임산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것 같았다.주경운은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제 소개가 늦었네요. 난 신문사 기자예요. 이 정도면 그만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임산부는 두려움에 명함도 받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오늘 운 좋은 줄 알아!”말을 마친 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배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주강운이 유현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 그 사납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없이 따뜻한 남자의 모습만 남아있었다.“다쳤네요.”그가 유현진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유현진은 핸드폰을 비추어 상처를 살폈다. 손톱에 찍혀 피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제 차에 약이 있으니 가서 치료해 줄게요.”유현진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부탁할게요.”주강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별말씀을요.”차에 올라탄 뒤 주강운은 약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소독해주려 했다.유현진은 어색하게 그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녀의 말에 주강운은 약을
강민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날 안 좋아하는지? 그 사람 부모님들은 날 엄청 좋아해 주셨어! 오빤 그냥 날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직접 찾아보던지.”강민서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찾을 수 있었다면 아마 회사까지 찾아와 강한서에게 부탁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주강운은 귀국하고서부터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갈 때면 항상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핸드폰도 통하지 않는 걸 보아서는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오, 오빠, 나 좀 도와줘, 오빠는 동생이 시집가는 게 안 좋아?”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강운이 너보다 7살이나 많아, 너희 둘 안 어울려.”“유현진이 오빠한테 시집올 때도 내 나이만 했어. 왜 그때는 새언니가 어리다는 생각 안 했어. 남자들 진짜 내로남불인거 알아?”유현진 이 세 글자를 듣자 또 그때 그녀가 한 일이 떠올랐고, 시끄러운 강민서 때문에 머리가 찌근찌근하던 차였는데 이제는 위까지 쓰려왔다. 그는 강민서에게 핸드폰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전화하고 꺼져!”강민서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바로 주강운의 이름을 찾았다. 신호음이 얼마 안 가자 핸드폰 너머로는 주강운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강운 오빠, 어디 갔었어? 요즘 내 연락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도 안 하고?”주강운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강한서 이 자식은 전에 자기가 했던 말을 마음에 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었다.“요즘에 좀 바빠서 연락 온 걸 못 봤나 봐. 무슨 일이야?”“아무 일도 없어…그냥 주말에 있는 자선 파티 말인데. 나랑 같이 가. 내가 초대장이 없어.”“오빠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 한서도 초대장 있어.”주강운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오빠가 날 데려갈 리가 없
“여기 맞죠?”주강운은 차의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그의 말에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밖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앞에 세워 주시면 돼요.”차가 서자 유현진은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주강운이 영문을 몰라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유현진은 이미 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뒷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10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인행 도로 너머에서 좌우로 달리는 차들을 살피는 그녀의 손에는 내릴 때와 달리 커피가 두 개 들려져 있었다.주강운의 눈빛은 그런 그녀에게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차 창문을 내리자 유현진이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커피를 받은 주강운은 결심이라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주강운이라고 합니다. 그쪽은요?”유현진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답했다.“유현진이에요.”…같은 시각, 주강운에게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걸 안 강민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오빠, 강운 오빠 여자 파트너 있대! 그 여자 파트너 도대체 누구야!”강한서는 속이 쓰려 더 이상 대꾸할 힘조차 없을뿐더러 짜증이 밀려왔다.“내가 어떻게 알아?”“오빠 제일 친한 친구 아니야?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도대체 여자 파트너 누구냐고?”강한서는 그녀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는 매섭게 쏘아붙였다.“강민서, 여기서 한 번만 더 난리 칠 거면 나가!”강민서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강한서가 기분이 좋을 때만 애교를 쓰거나 성질을 부릴수 있었다. 아무리 오빠라 하여도 그녀는 강한서를 어려워하고 있었다.강한서가 오늘 이렇게까지 화난 데에는 유현진과 무슨 일이 있은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민서는 안절부절못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오빠, 방금 유현진 회사에 와서 뭐 했어?”강한서는 그녀를 쳐다보곤 대답하였다.“뭐라고 했어?”강민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그러니까, 새
가정부가 말리려고 하였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산산조각이 된 물건을 본 가정부는 아연실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아가씨, 그걸 밟으시면 어떡해요?”강민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나갔다.“유 씨 가문에서 주는 보잘것없는 물건은 울 엄마도 안 받아!”“그래도 밟고 망가뜨리면 안 되죠. 이걸 사모님께 어떻게 드려요? 강 대표님께서 특별히 저한테 직접 사모님께 드리라고 당부하셨는데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면 강 대표님한테 뭐라고 말씀드려요?”“오빠가 물어보면 그냥 엄마한테 드렸다고 해. 오빠가 어떻게 알아? 줬는지 안 줬는지?”“그래도…”강민서는 매서운 얼굴로 가정부를 째려보았다.“뭐가 그래도 야.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이 쓰레기 빨리 갖다 버려. 보는 것도 짜증 나니까!”가정부는 그저 묵묵히 치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유현진이 돌아오자마자 차미주는 그녀의 목에 붙혀진 반창고를 발견하였다. 그녀의 집요한 추궁 끝에야 그녀는 어제 유현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알 수 있었다.“미친년 아니야 진짜, 배속의 애가 두렵지도 않대?”차미주는 그녀의 일이라면 항상 자신 일처럼 화내곤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물었다.“벤틀리남이 너 도와준 거고? 그래서 커피 사다 준거야?”“아니면?”차미주는 그녀의 다리를 치며 소리쳤다.“야 밥이라도 사줘야지! 커피가 말이 돼? 너무 성의 없잖아!”“두 번밖에 안 본 사이에 밥은 너무 오버 아니야?”“오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처음 본 사이에도 밥 먹는데 너희 둘 삼 일 동안 두 번이나 마주쳤어. 그런데도 인연이 아니라고? 벤틀리남 몇 살이래? 잘 생겼어?”유현진은 그녀가 뭘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아무것도, 그냥 사람 좋아 보이길래 어장에서 키워도 될 거 같아서 말이야."유현진은 베개를 그녀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키우긴 뭘 키워 나 유부녀야! 뭐라는 거야 진짜!”차미주는 베개를 만지며 배시시 웃었다.“곧 이혼하는거 아니야? 미리 썸 타는
“네 그 가방 말이야, 인터넷에 올리라고 했잖아. 벌써 물어본 사람 엄청 많아.”유현진은 너무 놀랐다.“그렇게 많아? 우리나라 1인당 소비 수준이 그 정도야?”“뭐라는 거야? 와서 다 보기만 한 거야. 아직 이 가방 인터넷에 올라온 적 없거든. 빌려 달라는 인플루언서들은 몇 있었어. 빌려서 사진만 찍고 싶은 거겠지.”유현진은 머리를 가로저었다.“구입만 되지 빌리는 건 안돼”“이미 말했지, 거기서 몇 명 걸렀거든. 근데 한 분이 진짜로 사고 싶은 의향이 있나 봐. 삼 일 동안 나한테 카톡 보냈거든. 그리고 상세 컷도 여러 장 요구하기도 했어. 그리고 직접 물건 보고 가격 협상할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일단 너 대신 답해줬어.”“왜 그러는지 알아?”차미주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내 생각에는 부잣집 사모님들 같지는 않았어. 그 사람 약속 잡은 장소가 중고 사치품 가게거든. 알아봤더니 거기 브랜드 후원 없는 연예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래. 물론 명문가 자제들도 많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고.”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 직접 한번 가볼게.”“마지막 이건 오늘 완전 진짜 제일 중요한 일.”차미주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차이현 감독님 신작 ‘봄의 연인’ 배우 찾고 있는 중이야. 물론 주인공은 이미 확정된 상태이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차이현 감독님 여성 위주로 작품 찍는 거. 조연이라도 거기에 출연하기만 하면 대박 나. 이번 주 금요일 힐튼 호텔에서 카메라 테스트 있어. 네 프로필 그쪽으로 보냈으니까 가봐.”유현진은 너무 놀랐다.“나 작품 한 것도 없는데 프로필 어떻게 보낸 거야?”“나도 이 바닥에서는 잔뼈가 굵네요. 이래 봬도 인맥 있어! 매니저란에는 일단 내 이름 적어 놓기는 했는데 회사랑 계약하게 되면 그때 가서 바꿔.”차미주는 웃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오디션 보러 갈 거야?”“당연하지, 이 기회 네가 잡아준 거잖아, 안 갈 이유 없는데?”차미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근데 두 가지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