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이 묻어나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혐오감이 몰려왔다.유현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긋 바라보았다.“송민영 씨, 오랜만이네요.”뒤늦게 찾아온 사장님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서로 아는 사이인가요?”송민영은 코트를 여미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내 여유롭게 걸어가 유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알다 마다요. 아주 잘 알고 있죠.”순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장님은 웃으면서 말했다.“지인이셨군요. 그럼 두 분이 따로 얘기해볼래요?”송민영은 사장님을 힐끔 바라보았다.“단지 알고 있을 뿐 친분이 있는 건 아닙니다.”단 한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자 사장님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유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박스를 앞으로 내밀었다.“사장님, 매장 방침대로 하시면 돼요. 우선 검수부터 하시죠.”송민영도 딱히 코멘트가 없자 사장님은 가방을 들고 그 자리에서 살펴보기 시작했다.룸 안에 아주 좁은 티 테이블이 있었고, 유현진과 송민영의 거리는 불과 1m도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 때문에 몇 미터나 떨어진 사장님마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얼굴이 꽤 두껍군요. 선물 받은 물건을 팔아버리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단지 필요 없는 물건을 처리했을 뿐인데, 그게 왜 창피한가요? 그쪽 말에 따르면 남이 버린 물건에 환장하는 사람은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유현진은 싱긋 웃었다.“송민영 씨도 멀쩡하게 잘살고 있잖아요?”송민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장님도 같이 있는지라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 소문이라도 날까 봐 억지로 화를 꾹 참았다.20분 정도가 흐르자 사장님은 검수를 마치고 정품임을 확인한 후 유현진한테 얼마에 팔 건지 물었다.“10억이요.”말이 끝나자마자 사장님이 가격을 감정하기도 전에 송민영이 펄쩍 뛰었다.“10억? 당신 돈에 미쳤어요? 4억 정도 되는 가방을 나한테 10억에 파는 거예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유현진은
송민영은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하며 입꼬리를 올렸다.“자기 것도 아닌데 붙잡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그녀는 이 한마디로 유현진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을 거로 확신했다. 비록 만난 적이 몇 번밖에 없었지만,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쉽게 보아냈다. 그녀가 강한서와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붙어있기라도 한다면 유현진의 두 눈에는 늘 질투심으로 가득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유현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송민영 씨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래서 살래요? 말래요?”이번에는 송민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사자니 손해 보는 것 같고, 안 사자니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유현진의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유현진은 그녀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곧이어 가방을 다시 박스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는 순간 송민영이 불쑥 말했다.“살게요!”유현진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일시불이에요.”송민영은 이를 악물었다.“걱정하지 마세요. 한 푼도 빼먹지 않을 테니까.”10억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이내 송민영은 밖으로 나가서 통화했고, 유현진이 룸에서 30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그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하지만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룸으로 들어섰다.사장님이 지켜보는 와중에 두 사람은 거래를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송민영은 그 자리에서 유현진의 계좌에 10억을 이체했다.송민영이 사인하려고 팔을 뻗는 순간 손목이 드러났는데, 유현진은 그녀의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낯익은 다이아몬드 팔찌에 시선이 사로잡혔다.디자인과 모양이 그녀가 강한서에게 돌려준 팔찌와 매우 유사했다.사인을 마친 송민영은 자신의 손목을 빤히 바라보는 유현진을 발견하고는 팔을 들어 올려 생긋 웃었다.“이 팔찌는 내가 데뷔한 해에 한서가 선물해준 거예요. 그쪽한테도 다이아몬드 액세서리만 선물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유현진은 흠칫하더니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그녀의 표정은 이미 송민영의 추측이 정
송민영은 어이가 없었다.입 아프게 떠들어댔더니 머릿속으로 재산을 회수할 궁리만 했단 말인가?송민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유현진 씨, 당신 제정신 맞아요? 한서가 그쪽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난 이미 한서의 아이까지 가졌다는데 끈질기게 사모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건 뭐죠? 좀 뻔뻔스럽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유현진이 피식 웃었다.“송민영 씨는 연예인 아닌가요? 나랑 했던 말들을 혹시라도 온라인에 유포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내연녀 신분인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집착하는 거예요? 심지어 와이프한테 이혼하라고 강요하다니,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망가지고, 이것 때문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해요?”송민영은 그녀의 말에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 바닥에 몸을 담근 지 몇 년이라고, 이미 별의별 상황을 다 겪어봤죠. 지난번 추돌사고만 하더라도 온 동네가 떠들썩했지만, 결국에는 없던 일로 마무리되지 않았나요? 매번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요? 한서를 제외하고 과연 그럴만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비록 한 달 동안이나 잠수 타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정상에서’의 더빙을 손에 넣었죠.”유현진의 미소가 서서히 굳었다.“무슨 더빙이라고요?”“’정상에서’라고 형편없는 게임이...”송민영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얘기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제발 눈치 챙겨서 제 발로 나가줄래요? 나중에 내 배가 점점 커지면 당신은 쫓겨날 신세밖에 더 있겠어요? 그때 가서 할머니가 아무리 원치 않더라도 자기 집안의 핏줄을 밖에 남겨둘 수는 없잖아요.”유현진은 손이 떨리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어쩐지 오디션 당일에 그가 섬블 컴퍼니에 나타났더라니, 이미 결정 난 계약을 섬블 컴퍼니에서 번복한 이유가 고작 다른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그녀의 손에서 계약서를 빼앗아 간 거였어?‘강한서, 정녕 날 한 번이라도 존중해
“대표님, 대추차 좀 끓였는데 한 잔 드릴게요.”강한서는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거기 두시면 돼요.”가정부는 찻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한 모금 마시자마자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맛은 예전 같지 않았고, 쓴맛이 감돌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이내 찻잔을 옆으로 치워두고 책을 집어 들려는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고개를 돌려 힐긋 쳐다보니 낯선 번호라서 그는 받지 않았다.벨 소리가 멈춘 뒤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제야 느긋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한수 씨 맞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아내 분이 저희 바에서 술 마시다가 취했는데 데리러 와줄 수 있으실까요?”“잘못 걸었어요.”강한서는 쌀쌀맞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잠시 후 상대방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강한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받았다.“번호 맞는데요? 아내 분께서 이 번호를 알려줬거든요. 혹시 아내 분 댁에 계신가요?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하죠?”강한서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전 한수가 아닙니다.”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전화를 끊었다.상대방한테서 재차 전화가 걸려오지는 않았지만, 몇 분 뒤 문자로 사진 한 장을 받았다.사진 속 배경은 어두컴컴했으나 카운터에 엎드려 인사불성이 된 여자가 바로 유현진이라는 걸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강한서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가게가 어디시죠?”...“내 술은?”유현진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빈 술잔을 흔들며 혀 꼬인 소리로 물었다.“누가 내 술 마셨어?”바텐더는 그녀에게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여기요.”유현진은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곧바로 몽땅 토해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술이라고 하면서 물을 준 거야? 잘 들어, 내 남편 완전 부자야! 한주시 모든 술집을 다 사들일 수 있는데, 고작 술값을 못 낼 것 같아? 술 따라!”바텐더도 이런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슈트를 쫙 빼입고 어딘가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바를 찾은 다른 손님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이러한 차림새는 별의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술집보다는 셀럽들만 드나드는 회원제 클럽에서나 볼 법했다.물론 부자들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동네 술집의 푸근한 분위기를 체험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바텐더는 가식적인 미소를 장착했다.“어서 오세요.”유현진은 불쾌한 듯 술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어서 오세요는 무슨, 아직 술도 안 따라줬잖아. 얼른 따르지 않고 뭐해?”바텐더도 술주정하는 그녀에게 두손 두발을 들었기에 꾹 참고 달래주었다.“손님, 곧 마감할 거라서 남은 술이 없어요.” “거짓말, 다른 사람들은 다 술 마시고 있는데 왜 나만 없어?”그녀를 속이기 쉽지는 않은 듯싶었다. 부가티 차주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바텐더는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진짜 없어요. 저분이 술을 몽땅 결제했는데, 아니면 내일 다시 오실래요?”유현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뒤돌아 앉았고, 깔끔한 옷차림의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테이블을 짚고 휘청거리며 일어선 그녀는 상대방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켰다.“술을 몽땅 결제했다는 사람이 당신이야?”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흐트러진 옷,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온몸으로 술 냄새를 풍기는 그녀한테서 평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가리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대답해, 네가 술 다 샀냐고!”바텐더가 대충 둘러댄 말을 철석같이 믿은 그녀는 단단히 따질 기세로 강한서를 노려보았다.“내가 먼저 왔는데 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술을 다 결제하는 거지? 선착순 몰라?”바텐더는 강한서가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얼른 끼어들었다.“손님, 이분이 술에 취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안 취했거든!”유현진은 고개를 홱 돌리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강한서의 턱을 받쳐 들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부터 목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잘 생겼으니까 난 솔로야.”술기운이 살살 풍기는 따뜻한 숨결에 왠지 모르게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다.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그의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반쯤 감긴 두 눈으로 유혹의 눈빛을 보냈다.“내가 60만 원 주면 내 남자친구 할래?”그러자 강한서의 낯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녀를 차갑게 빤히 쳐다보았다.“60만 원? 너무 적은 거 아니야?”유현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지금 시세에 60만이면 적지 않을 텐데?”“지금 시세?”강한서가 코웃음을 쳤다.“아는 게 많은가 보네.”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알았어! 얼굴값 하는 것 같으니까 10만 더 줄게. 70만, 어때? 더는 못 줘.”지금 이 순간 강한서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끔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옆에 있는 어항에 푹 담가버리고 싶었다.‘오늘 밤 내가 안 왔더라면 아무 남자랑 자겠단 말이잖아!’그 생각에 강한서의 낯빛이 또 더 어두워졌다.유현진은 위험이 닥쳐온 줄도 모르고 지갑에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강한서의 셔츠 옷깃을 풀어 카드를 옷깃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남자에 굶주린 여자처럼 그의 가슴을 만지며 빵끗 웃었다.“내 돈 떼먹어서는 안 돼.”강한서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바의 종업원이 그를 불러세웠다.“한수 씨, 사모님께서 아직 계산 안 하셨어요.”강한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속만 썩이는 여자를 힐끗 보고는 들고 있던 가죽 재킷을 종업원에게 건넸다.“안에 골드카드 있어요. 비번 없으니까 그냥 긁으면 돼요.”짜증 섞인 강한서의 표정을 본 종업원은 한시도 지체할세라 째깍 결제한 뒤 카드를 다시 재킷에 넣어 두 손으로 강한서에게 건넸다.“조심히 가세요,
그녀의 두 눈은 동그랗고 큰 데다가 눈꼬리도 길었다. 정신이 또렷했을 때는 늘 차가운 빛이 담겨있었지만 웃을 때는 또 아름답고 매력이 넘쳤다. 지금처럼 술에 취해 실눈을 떴을 때가 가장 유혹적이었고 저도 모르게 사람을 홀렸다.강한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보다가 낮은 중저음으로 말했다.“어디서 자고 싶은데?”유현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결국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희 집.”강한서의 두 눈이 번쩍였다.“정말이야?”눈앞이 빙빙 돌아 유현진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고는 강한서의 얼굴을 받쳐 들고 해롱해롱한 눈빛으로 말했다.“너한테 70만 원이나 줬는데 호텔 방까지 잡으면 돈 너무 많이 쓰잖아. 돈도 아낄 겸 그냥 너희 집으로 가. 나중에 이혼 소송할지도 모르거든.”강한서는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주도면밀한 계획을 칭찬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집 간 걸 남편이 알기라도 하면 어떡해?”그러자 유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난 남편 없어. 과부야.”말문이 막힌 강한서는 이를 꽉 깨물었다.“과부가 이혼을 해?”유현진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정신이 해롱해롱한 탓에 앞뒤 말이 전혀 맞지 않았다. 강한서 때문에 술을 깨기는커녕 오히려 더 헷갈렸다.“짜증 나! 넌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내 남자친구 하기 싫으면 돈 다시 돌려줘!”그러고는 손을 마구 흔들며 강한서의 몸을 더듬거렸다. 강한서는 그녀의 두 손을 꽉 누르고 안전벨트를 해준 뒤 무덤덤하게 말했다.“이미 늦었어.”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어 질주해갔다.“차 세워. 내릴 거야!”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반항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핸들을 뺏는 등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째려보기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위협만 가하고 할퀼 용기는 없는 버려진 길고양이 같았다.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 만체했다.“지금 날 납치하려고?
유현진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눈시울도 점점 붉어졌다.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네 말이 맞아. 그 사람은 날 신경 쓰지도 않아...”그녀가 추돌 사고를 당하고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강한서의 얼굴이 찌푸려졌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상했다. 그는 변명하듯 설명을 늘어놓았다.“이런 말도 안 되는 꿍꿍이를 누가 믿냐 이거야.”유현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한서는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남았지만 꾹 참았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말이다. 무슨 얘기를 하든 결국에는 화가 날 것인데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인기척을 들은 가정부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강한서가 차에서 그녀를 안고 내렸다. 가정부가 우산을 들고 가까이 가서야 그 여자가 유현진이라는 걸 알았다.“사모님 왜 이래요?”강한서는 가정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욕실에 가서 물 좀 받아놔요.”유현진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던 그때 강한서의 시선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눈가가 촉촉한 걸 보니 아무래도 아까 울었나 보다. 그 모습에 강한서는 입을 삐죽거렸다.“대표님, 물 다 받아놓았어요.”가정부가 도와주려 하자 강한서가 그녀의 도움을 피하며 덤덤하게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주세요.”가정부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물러났다.욕조의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욕실 전체가 수증기로 자욱했다.강한서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잠깐 내려보다가 그녀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그녀의 하얀 속살이 예고 없이 드러났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찌푸린 얼굴로 수건을 그녀의 몸에 휙 던지고는 돌아섰다.욕실 문을 연 순간 문 앞에 있던 가정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문을 열어 당황한 가정부는 말까지 더듬거렸다.“
차가 송가람이 말한 회원제 클럽에 도착했고, 그녀가 내리려던 순간 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주혁은 잠시 망설이며 물었다. “기다려 드릴까요?” 송가람은 안전벨트를 풀며 무심히 말했다. “아니요, 가도 돼요.”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지갑을 꺼내 돈 한 장을 뽑아 주혁에게 내밀었다. “차비예요.” 주혁은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가람 씨, 저는 그런 의도로 태워드린 게 아닙니다.” “알아요.”송가람이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난 빚지고 싶지 않아요. 만약 이게 불편하다면...”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럼 한현진을 혼내주든가요. 정말 꼴도 보기 싫거든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돈을 좌석에 던져 놓은 뒤 차에서 내렸다. 주혁은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한편, 진윤은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가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깜짝 놀라 아빠가 온 줄 알고 얼른 게임기를 끄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내려가 보니 엄마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엄마는 이모랑 밥 먹으러 갔다면서요.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진윤의 엄마는 신발을 벗으면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말도 마라, 생각만 해도 재수 없으니까!” 그러더니 오늘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윤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날 아침 한현진의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문자로 물어왔다. [너희 엄마가 오늘 점심에 누구랑 약속했어?]그는 이상해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엄마한테 부탁해서‘한세 한식당’을 '히비스커스 호텔'로 바꿔봐. 그러면 여신님 앞길이 밝아질 거야.]그는 여신 팬클럽의 열혈 멤버로서, 고민
그가 차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가람 씨.” 송가람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운전 중인 싸구려 카롤라를 본 송가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런 차를 타고 온 거예요?” 주혁이 설명했다. “이건 제 차입니다. 오늘 한 대표님께서 쉬시는 날이라, 그분 차는 두고 왔습니다.” 송가람은 약간 불쾌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뒷좌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공간이 좁아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차 안에는 차량용 방향제가 뿌려져 있었는데, 그 방향제는 그들의 회사 제품으로, 가격이 저렴하지 않다. 마침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였다. 송가람은 주혁을 유심히 살폈다. ‘이 초라한 사람이 이런 걸 쓸 수 있다고? 한현진 같은 여자가 사람 마음을 사려고 준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현진에 대한 이미지는 한층 더 위선적이라는 딱지를 얻게 되었다. 주혁은 앞 좌석 수납함에서 작은 선물 가방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가람 씨, 이거 가람 씨의 물건입니다.” 그가 말하는 순간, 송가람은 마스크를 벗었다. 주혁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남은 선명한 뺨 자국과 부어오른 흔적을 보게 되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누가 때렸어요?” 송가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쪽이 알 바 아니에요.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주혁이 건넨 가방을 받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자신의 열쇠고리와 상자에 담긴 진주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송가람은 열쇠고리만 꺼내고는 가방을 다시 주혁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건 그쪽 물건이죠.” 주혁은 억지로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고 조용히 말했다. “그건 가람 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송가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선물
‘한서 오빠... 한서 오빠...’송가람은 갑자기 멈춰 섰다.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가람은 눈물을 쏟으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민경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대표님께서는 술에 취해 지금 회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러더니 잠시 망설인 후 덧붙였다. “가람 씨, 오늘 가람 씨가 떠난 후, 대표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가람 씨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요. 다만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저를 통해 연락하시라고 하셨습니다. 가람 씨께서 대표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대표님은 자신으로 인해 가람 씨와 어머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송가람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람 씨, 혹시 우셨어요?” 송가람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누구시죠?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급하게 답했다. “저... 저, 저 주혁입니다.” 송가람은 이름을 들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서둘러 설명했다. “저는 한 대표님의 운전기사입니다. 예전에 식당 카드를 만들 때 가람 씨께서 직접 저를 카드 만드는 곳까지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제야 그녀는 떠올렸다. 약간 너저분한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고, 왜 전화했어요?” 주혁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차장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주웠는데, 프런트 데스크에서 가람 씨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마침 시간이 있어서, 가람 씨가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직접 가져
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엄마는? 심원 모자를 불러놓고 나랑 맞선 보는 얘기는 왜 나한테 하지 않은 건데? 엄마 사업을 위해서, 엄마 고객을 위해서라면 딸도 팔겠다는 거야?”서해금은 화나 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 대체 어떤 뇌를 갖고 있는 건지 네 머리를 열어서 보고 싶을 지경이야! 그냥 만나서 식사 한 번 하는 것뿐이잖아. 누가 너더러 결혼하래?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싫다는 네 목에 내가 칼이라도 들이대면서 협박이라도 할까봐 그래?”“내가 그렇게 얘기를 안 하면 네 생각엔 홍혜림이 약속 자리에 나오기나 했을 것 같아? 홍혜림 씨와 채지윤 씨는 어렸을 적부터 있다면 오랜 친구야. 심원은 홍혜림 씨에겐 친아들 같은 존재라고. 심원이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네가 그 아이 마음만 잘 잡고 있다면 내가 홍혜림 씨 마음을 다시 되돌리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오히려 네가 한 짓을 봐! 한 번 두 사람 모두에게 미움을 샀어. 우리 회사가 진씨 가문과 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네가 알기나 해? 지금 홍혜림 씨가 사업 파트너로 한현진을 지정했어. 그것 때문에 내 손실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아?”송가람이 훌쩍이며 말했다. “아무리 파트너가 한현진이라고 해도 협업하려면 회사 절차는 걸쳐야 하잖아. 수익도 전부 회사로 들어오는 거고. 엄마에게 떨어지는 돈이 줄어들 진 않잖아.”서해금이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병X을 보는 듯 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더니 더는 말이 없었다. 서해금에게 병원에 갔다고 속이고 강한서에게 갔던 일에 대해 잘못을 인지하고 미안함을 느낀 송가람이 나지막이 서해금에게 사과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엄마를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한서 오빠는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해서 술을 마시면 안 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걱정되어서 오빠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간 거야. 엄마, 아까 한서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어.”서해금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실소를
이쯤이면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강한서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한현진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야?’생각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는 연결이 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경하였다. “사모님, 저예요.”민경하의 목소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강한서는요?”“대표님은...”잠시 말이 없던 민경하는 노려보는 강한서의 눈빛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더 그럴듯하게 연기 하시려고 술을 두어 잔 더 마셨다가 지금 취하셨어요.”한현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민경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숙취해소제도 마셨고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계획했던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어요. 사모님들께서는 전부 언짢아하시며 돌아가셨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대표님께 직접 들으세요.”한현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쥐똥만한 주량의 소유자인 남편이 걱정되었다. “강한서 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가볼게요.”“아뇨. 서 대표님께서 가실 때 대표님을 보시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어요. 의심을 사 대표님을 감시할 수도 있어요. 사모님께서는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걱정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저 대신 강한서 잘 챙겨줘요. 옆으로 누워서 자게 해요. 술 많이 마시면 자꾸 토하거든요. 옆에 물도 한 잔 떠주고요.”민경하가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민경하가 고개를 돌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고양이 같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만약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본인 몸을 바쳐가며 송가람이 약을 탔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했고 제가 대표님을 도와 사모님께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걸아시면 아마 전 앞으로 사모님께 빌붙을 수 없을 지도 몰라요.강한서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허약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
말을 마친 홍혜림은 룸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도도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을 감싸 쥔 송가람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강한서가 송가람에게 휴지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송가람은 코끝이 찡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서해금은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강한서를 밀쳤다. 중심을 잃은 강한서는 휘청하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의 얼굴이 통증으로 하얗게 질렸다. 울컥 화가 치민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 “엄마, 뭐하는 거야!”“마침” 계산을 마치고 돌아오던 민경하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얼른 달려가 강한서를 부축했다. 그는 조금 화가 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송가람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강한서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서해금이 같은 자리에서 송가람의 뺨을 때렸다. “그쪽으로 가기만 해. 그럼 우린 오늘 모녀 관계를 끊는 거야. 앞으로 다신 내 눈 앞에 띄지마.”서해금은 온 몸의 힘을 다 해 송가람을 때렸다. 그녀는 예전에도 송가람를 때린 적이 있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때, 그림을 못 그렸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실수를 했을 때에도 매를 든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힘을 실은 적은 없었다. 뺨을 얻어맞은 송가람은 귀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해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강한서는 마치 송가람이 맞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민경하의 부축을 받으며 나지막이 해명했다. “아주머니, 가람이도 이젠 성인이에요. 가람이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있어요. 이렇게 몰아붙이시면 안 되죠.”서해금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 딸을 어떻게 가르치든 그건 강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앞으로 우리 딸에게서 좀 떨어져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든 가람이에게 부탁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주지 말란 말이야!”
심원과 채지윤 모자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룸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송가람의 목소리에 채지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심원과 채지윤을 본 순간 서해금은 송가람을 데리고 유전자검사라도 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멍청한 X! 멍청한 X!’뒤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X년이 누구더러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거야?”움찔한 송가람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분노가 가득한 채지윤과 창백한 얼굴의 심원이 보였다. 사실 심원은 그리 뚱뚱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동그란 얼굴 때문에 덩치가 있어 보일 뿐 퍼진 몸은 아니었다. 외모는 심지어 꽤 빼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한현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심원의 눈이 강한서와 많이 닮았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강한서는 그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을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강한서를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외모만으로도 적지 않은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심원의 눈은 강한서와 70% 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꽤 많았을 것이다.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하며 귀하게 자라왔다. 먹는 것이든 갖고 싶은 것이든 그의 요구라면 전부 들어주었다. 그런 이유로 심원은 어렸을 때부터 조금 통통한 편이었다. 그리고 몸매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적도 많았다. 다이어트를 여러 번 했고 또 성공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곧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대학생 시절 열등감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좋아할 용기도 없었던 심원은 해외 유학 시절 자신에게 늘 잘해주던 송가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해외의 다양한 심미 기준으로 인해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송가람이 싫어했던 터라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심원은 줄곧 송가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당황한 송가람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 앞에는 홍혜림과 서해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송가람은 멍해졌다. 그녀는 서해금과 홍혜림이 왜 히비스커스 호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세 한식당에 있는거 아니었어?’홍혜림의 얼굴은 경멸로 가득 했다. 그녀는 웃는 듯 또 아닌 듯 한 표정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서해금을 힐끔 쳐다보았다. “따님은 병을 병원이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남자에게 진료 받나보죠? 아프다는 게 대체 열이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몸이 달았다는 거예요? 심씨 가문과의 혼사를 원하지 않는 거였다면 직접 얘기하시지 이렇게 제 조카가 바보처럼 기다리게 속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너무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이라 서해금의 얼굴이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해금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막 입을 열려는데 송가람 옆에 서 있던 강한서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사모님, 예의를 지키시죠. 가람이는 그저 저에게 해장국을 가져왔을 뿐이예요. 함부로 남의 명성을 더럽히지 마세요.”그 말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애틋한 기분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한서 오빠가 내 편을 들어줬어. 역시 오빠도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서해금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만약 조금 전 서해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면 그녀는 송가람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럴싸한 핑계를 대줬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 한 마디로 송가람이 꾀병을 부린 일은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다. 역시, 강한서의 말을 들은 홍혜림은 경멸의 감정이 조금 더 짙어졌다. “좋네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본인은 아픈 척 애인을 챙겨주러 갔다니. 서 대표님, 이게 바로 대표님이 말한 성의라는 건가요?”서해금이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모님, 가람이는 정말 병원에 진료 받으러 갔었어요. 아마 한서가 숙취 때문에 가람이에게 해장국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아요. 저희 두 집안은 예전부터 가깝게 지냈었잖아요.
표정을 굳힌 송가람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혹시 뭐 기억났어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최면의 거부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가람이 곧바로 강한서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말렸다. “한서 오빠, 아프면 생각하지 마요. 생각 안 하면 안 아프잖아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밀치며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만지지 마!”그의 반응에 깜짝 놀란 송가람은 그 순간 강한서가 모든 것을 떠올렸다고 착각했다. 당황하여 넋이 나갔던 송가람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낸 그녀는 약 두 알을 물에 녹인 후 강한서 입가에 가져갔다. “한서 오빠, 이거 마셔요. 마시면 안 아플 거예요.”얼굴이 일그러진 민경하가 룸으로 뛰쳐갔다. 극심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강한서는 송가람이 건네는 물을 받아 쭉 들이켰다. 송가람은 최면할 때 사용하던 심리 암시를 위한 풍령 소리를 강한서 귀 옆에 울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오빠, 괜찮아요? 머리 아직도 아파요?”통증이 조금씩 가라앉고 강한서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는 나지막이 송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이?”얼굴을 붉힌 송가람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예요, 오빠.”약효 때문인건지 강한서는 허탈한 사람처럼 몸을 뒤로 기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여깄어?”“그... 그게 오빠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 되어서요.”송가람이 말하며 저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현진 씨가 오빠를 잘 챙겨줄 거라고 했었잖아요. 챙겨준다는게 이런 거였어요?”강한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아저씨 돌아오는 날 아냐? 한현진 씨도 공항에 마중 나갔는데 넌 안 가도 괜찮아?”멈칫하던 송가람은 곧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빠, 저 걱정해 주는 거예요?”강한서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