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잘못 먹었냐?”주강운은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성우는 늘 차분하고 점잖은 그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어리숙한 표정은 처음인지라 괜스레 등골이 오싹했다.주강운은 옆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방금 옥상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어.”“뭐?”“내가 도촬하는 줄 알고 휴대폰을 빼앗아가더니 나한테 막 뭐라 하는 거야.”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데 기분은 왜 좋아 보이는 거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냐?”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강한서, 주강운과 소꿉친구였는데, 집안 세력만 따져보았을 때 살짝 약한 편에 속했다. 반면, 한주 주씨 가문과 한주 강씨 가문은 한주시에서 거의 막상막하였고, 주강운 역시 강한서처럼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랐다.하지만 몇 년 전 주강운이 병에 걸려서 회복하는데 무려 2년이 넘게 걸렸고, 그 뒤로 부모님들도 생각을 바꾸셨는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아들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정했다.그동안 그는 음악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으며, 스키도 하고, 레이싱에 빠진 적도 있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이성을 멀리해서 사생활이 백지장처럼 깨끗했다. 결국 한성우는 한동안 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했었다.따라서 지금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자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네가 말한 그 여자 예뻐?”주강운은 방금 마주친 유현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반쯤 말린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도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어쩌면 생얼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물론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가는 모습이 더욱 흥미진진하며 임펙트가 강했다.“예뻐.”“이
”이혼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주강운은 궁금한 듯 물었다.강한서가 결혼 했을 당시 그는 병을 치료하느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부분 외국에서 지냈기에 강한서의 아내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한성우를 비롯한 사람들한테서 자주 전해 들었다. 얼굴은 예쁜데 너무 착해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그런 여자라고 했다.그때 양심이 하나도 없는 친구 놈들은 단톡방에서 강한서가 3개월 안에 무조건 이혼한다고 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 또 다른 3개월이 흘러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3년이 훌쩍 넘었다.이제 두 사람의 사이가 꽤 돈독해졌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돌아오자마자 이혼한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한성우의 말투에서 유추해보면 강한서의 아내가 먼저 이혼을 제기했다는 건데, 결국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이 화제를 언급하는 순간 한성우는 통증 따위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둘이 회사에서 한서의 와이프를 마주쳤단 말이야. 한서는 와이프가 자기를 미행하는 줄 알았는데, 와이프 분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이놈이 글쎄 부부싸움이라고 우기는 거 있지?”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 입 닥쳐.”한성우는 혀를 찼다.“차였으면서 말도 못 하게 해?”강한서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주강운이 한성우의 다리를 툭 치자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 때맞춰 화제를 바꿨다.“참, 한서가 남산 병원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잖아. 지인을 통해 그 여자 좀 알아봐달라고 하면 안 돼?”강한서가 물었다.“웬 여자?”한성우는 방금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한껏 과장해서 설명했다.강한서도 한성우와 마찬가지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예상외로 거절하지 않고 자세히 캐물었다.“어떻게 생겼는데?”한성우가 너스레를 떨었다.“강운의 말을 들어보면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이지 않을까 싶어.”주강운이 피식 웃었다.“뭐, 분위기는 제법 비슷한데, 한 성깔 하던걸
그 말을 들은 유현진은 막 피어오른 희망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고, 이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단지 우연이라는 말인가요?”의사가 위로를 건넸다.“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눈동자가 움직인다는 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죠. 다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의식을 잃은 지 좀 오래되어서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주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후 유현진은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간병인에게 팁을 챙겨줬지만, 상대방은 안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다.유현진이 말했다.“아주머니, 받으세요. 제가 평소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께서 모든 일을 케어해주시는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마음이 편치 않네요. 앞으로 우리 엄마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주세요.”“당연하죠. 그게 제 일인걸요.”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그녀 때문에 간병인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차미주는 여전히 깨어 있었는데, 단톡방에서 문자를 보내느라 무아지경이었다. 옆에는 TV가 틀어져 있었고, 마침 ‘보이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왔어?”유현진은 대답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자 온종일 팽팽하던 긴장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꼴이 그게 뭐니? 어머님은 괜찮아?”“아직은.”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혼은 못 했어.”“난 또 뭐라고.”차미주는 그녀의 입에 체리 한 알을 넣어주었다.“오늘 실패했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해결하면 되잖아.”유현진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서 강한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아마도 자신이 일부러 약속을 어긴 줄 알고, 심지어 또다시 ‘밀당’한다고 오해하는 느낌이 강했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약속을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내
“그건 내가 너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야. 네 덕에 별장에서 살아보길 기대하고 있으니까 얼른 대답하라고.”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좀 더 생각해볼게. 촬영은 다음 달이라서 아직 시간은 많아.”다음날 유현진은 아침 일찍 물건을 챙겨 한성그룹으로 찾아갔다.강한서와 결혼한 3년 동안 이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혼 때문에 처음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현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한성 그룹은 한주시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건물은 한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었다. 혁신적인 건물 외관은 이미 한주시의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었고,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람들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천장이 돋보였다.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고 곧장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 있죠?”젊고 잘생긴 청년이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는데,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혹시 예약하셨을까요?”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사전에 약속이 없으면 대표님께서는 손님을 접대하지 않습니다.”유현진이 말했다.“그럼 전화해서 유현진이 찾는다고 말해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깔끔한 옷차림에 예의도 바르고 미모까지 갖춘 그녀를 보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안 되어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고, 이내 남자직원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유현진이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십니다.”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 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아내란 사람이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강한서와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아서 자신 있게 말했다.“이제 믿을 수 있겠죠?”프런트 남자직원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둘이 같이
사람들이 잇달아 고개를 돌렸고, 강한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기침을 멈추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다들 대표님이 조금 전 업무 보고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틀더니 민경하와 나지막이 몇 마디 주고받고는 다시 똑바로 앉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계속하시죠.”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민경하는 소리소문없이 회의실을 나섰다.아래층 접견실.유현진은 소파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민경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사모님, 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어요?”길을 안내하던 프런트 남자 직원은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저 사람이 진짜 대표님의 와이프라고? 그렇다면 대표님은 왜 모르는 척한 거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방금 사모님이란 사람한테 그런 사진을 찍어줬다는 사실이었다.남자 직원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순간 500대 기업에서의 커리어가 끝장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난이 이토록 심한 부부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유현진은 잡지를 내려놓았다.“전화했는데 민 실장님이 너무 바빠서 못 들었나 보죠.”민경하는 유현진이 연락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받으면 안 된다는 대표님의 지시에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비아냥거리는 유현진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한 척 말을 이어갔다.“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회의 중이라서 휴대폰은 사무실에 두고 갔어요. 물론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제 탓입니다. 비서 사무실의 안내원이 신입이라서 일할 때 누락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애꿎은 사모님께 폐를 끼쳐드렸네요. 이쪽으로 오시죠.”그의 말에는 허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강한서가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했을 때 현장에 없었더라면 그녀는 철석같이 믿었을지도 모른다.모두 한통속이라니!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에야 민경하가 물었다.“사모님, 회사에는 어쩐 일이시죠?”유현진은 손에 든 박스를 보
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이지 않냐는 말이다. 아침을 거르면 일 얘기가 진행이 안 된다니? 단지 그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다른 수법으로 갈아탔을 뿐이었다.강한서에게 도시락을 싸준 건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신혼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오로지 강한서밖에 없었다. 당시 더빙을 시작하기 전이라 오직 강한서를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말도 안 되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남자를 사로잡으려면 먼저 그 남자의 입맛을 저격해야 한다는 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강한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열심히 요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지라 한 달이나 배웠는데도 겨우 먹어줄 만한 수준이었다.하지만 강한서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나마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를 들고 강한서를 찾아가 맛보게 했을 때, 단지 맛없다는 대답을 들은 기억이 났다.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강한서가 출근할 때 억지로 쥐여주며 이번에는 꼭 맛있을 거라고 뻔뻔스럽게 큰소리쳤었다.강한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강한서가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얼른 다가가 어제보다 맛있었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맛없으니까 다시는 요리하지 말라는 대답뿐이었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텅 빈 도시락을 보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로 요리하는 데 더욱 열중했고, 강한서는 매번 빈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하지만 그가 도시락에 든 음식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강한서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이 모든 건 그녀의 일방적인 바람에 불과했고, 그는 단지 서로의 체면을 위해 굳이 들춰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이후로 그녀는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강한서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매일 먹는 척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이혼을 의논하러 온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뜨겁게 뛰던 심장이 식어버렸다. 역시 이 강한서 나쁜 놈에겐 조금의 마음도 주면 안 된다.유현진이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걸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트러플 당신이 나 대신 어머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거네.”그녀의 말에 강한서의 시선이 서류로부터 그녀의 얼굴로 옮겨갔다.수려하고 깨끗하고 순한 얼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강한서는 모두 그녀의 가면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엔 예전의 온순한 토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금만 자극하면 난리를 치는 야생 고양이가 도사리고 있다.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가느랗게 뜨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뭐라고? 내가 언제 약속했는데?”유현진은 강한서가 오리발을 내밀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예전 여동생에 관한 네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약속한 거잖아.”“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네.”강한서가 떠올린 듯하자 유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한서가 예상치 못한 말을 이어갔다.“자세히 생각해보니 말이야. 우린 곧 이혼할 거잖아. 이제 강 씨 집안으로부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어.”유현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뭐 그렇게 귀중한 거라고.”유현진는 애써 그를 설득하려 했다.“또한 우린 합의 하에 헤어지는 거잖아. 앞으로 우리 두 집안은 친구로도 지낼 수 있을 텐데 친구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야?”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합의 하에 헤어진다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불만 때문에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한 건 아니고?”유현진: “...”분명 민감한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꼬장을 부리는 것이다!그녀가 설명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려고 할 때 강한서가 또다시 말했다.“오늘 아침 병원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 나한테 어떤 기능성 장애가 있는지 묻더군. 그 점에 대해 왜 의사에게 상세
유현진: “...”그 공짜라는 설탕을 그의 입에 욱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됐다! 지금은 강한서의 눈치를 살펴야 할 때니 애써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굳은 것 같아. 다음엔 조심할게.”강한서의 표정이 확실히 훨씬 더 밝아졌다.유현진이 그 기회를 틈타 말했다.“강 대표, 이혼도 결혼과 마찬가지로 날짜를 잘 정해야 해.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 좋은 날이 아니어서 이렇게 안 좋은 끝을 맞이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이혼할 땐 반드시 신중하게 날짜를 선택해야 해. 그래야만 이혼 뒤에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이번 달 21, 24, 25, 26, 27, 28, 31일 모두 길일이야. 이 중에서 하루 선택하는 거 어때?”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주말 이틀 빼고 다 길일이야?”그녀의 얕은수는 강한서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유현진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이번 달 길일이 꽤 많아서 그래.”강한서는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유현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강 대표, 어떤 날이 좋겠어?”강한서는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한마디만 더 하면 물건은 네가 직접 가져가!”유현진: “...”그녀의 부드럽던 말투도 이제 끝이 났다.“강한서, 그건 엄연히 다른 일이야! 난 너와 약속한 건 모두 다 했어. 넌 왜 그러는 건데!”그녀가 야생 고양이의 본성을 드러내자 강한서의 얼굴은 도리어 더 편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옆에 놓여있는 도시락을 탁탁 두드렸다.“유현진, 너 이혼도 하고 싶고, 네 아버지의 앞에서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척도 하고 싶은가 본데.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에 있어?”유현진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녀는 확실히 이렇게나 빨리 유상수에게 이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하현주가 사고를 당하기 전 두 사람 사이는 이미 금이 갔고, 하현주가 사고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