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도 회사 운영하시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어느 회사 인턴이 수억짜리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던가요? 한서 지난번에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를 계약할 때도 1억 좀 넘는 벤츠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갔어요. 그런데 얘가 뭐라고 벌써 그리 비싼 차를 타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유상수가 살짝 분노를 터뜨렸다.“회사마다 사정이 다르잖아. 맨날 집에서 호강하며 놀고먹는 네가 뭘 안다고 그래?”“놀고먹는다고요?”유현진은 어이없는 나머지 피식 웃었다.“그때 저한테 일을 포기하라고 설득하실 때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강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어디 저뿐인가요?”“쾅!”유상수는 식탁을 탁 치며 노기등등하게 말했다.“차 좀 빌려달라는데 옛날 일을 왜 들먹여!”그러자 유현아가 재빨리 유상수를 말렸다.“아빠, 진정하세요. 아빠 혈압이 높아서 화내시면 절대 안 돼요. 이 얘기 꺼내는 게 아닌데 다 제 탓이에요. 언니가 빌려주기 싫다면 방법 없죠, 뭐. 화내지 말아요, 아빠.”그녀가 옆에서 말릴수록 유상수는 친딸이 점점 더 성에 차지 않았다.“현아 좀 봐봐. 너보다 어린데 훨씬 철이 들었어!”식사 자리가 결국 서로 기분만 상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유현진이 가기 전 유현아는 트러플 두 박스를 그녀의 차에 넣고는 유리창에 대고 말했다.“언니, 형부 오늘 일 때문에 바빠서 못 온 거 아니지?”그러자 유현진이 그녀를 째려보았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유현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차 주인은 한 사람만 있는 거 아니야. 남자도 마찬가지고.”그러고는 그녀 대신 유리창 버튼을 누른 뒤 안으로 들어갔다.아파트.차미주는 그녀가 가져온 두 선물 박스를 만지며 말했다.“이거 대여섯 근 정도는 되겠는데? 너희 아빠 강씨 가문에 잘 보이려고 아주 아낌없이 돈을 쓰시는구나. 아빠한테 매번 가져간 선물 시어머니가 쳐다도 안 본다고 말 안 했어?”“말한다고 해서 그만둘 것 같아?”TV 채널을 여러 개 돌려도 송민영의 드라마만
갑자기 끊긴 전화에 기분이 언짢아진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한서야.”강한서는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 보고는 휴대폰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대체 무슨 일로 왔어?”송민영은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쑥스럽게 말했다.“요 며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디저트 좀 만들어봤거든.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작 이것 때문에 왔어?”순간 마음이 경직된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그건 아니고... 일도 좀 물어보려고.”강한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페이스북은 매니저한테 맡겨. 며칠 후에 섬블 컴퍼니에서 계약건 때문에 올 거야. 그때 다시 홍보하면 돼.”송민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전에 한성우에게 “정상에서”의 더빙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이나 어필했었지만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해 그 일로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었다.사실 게임 더빙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셋 스타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얼마 전 “비밀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할 때 그녀는 더빙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더빙 덕에 그녀의 발연기가 살았다면서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인형극을 보는 것 같다고 그녀를 욕했다.동시에 선셋 스타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힘들게 촬영한 건 그녀지만 인기를 차지한 건 선셋 스타였다. 이런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자신의 오리지널 대사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또 다른 계정에 오리지널 대사 영상을 올렸다. 원래는 다들 그녀를 칭찬할 거라 예상했지만 되레 한바탕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다.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면서 다시 한번 선셋 스타를 칭찬했다.송민영은 너무도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이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마
유현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오늘 부탁할 일만 없었더라면 당장 이 자식을 발로 확 차버리는 건데! 멀쩡하게 생겨서 왜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참. 그냥 말 섞지 말아야지!’유현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얄미운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작성한 문자를 민경하에게 보내며 말했다.“경화로의 ‘화원 향료’라는 가게에서 사면 돼요. 그 집에 향료 종류가 많아서 한꺼번에 다 살 수 있을 거예요.”“고마워요, 사모님.”유현진이 자신을 무시한 뒤로 강한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분이 지나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유현진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강한서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 번째 손가락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면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타났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들의 결혼반지였는데 아름드리 펜션에서 나올 때 결혼반지도 함께 두고 나왔었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식 날 송민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강한서는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장을 떠났다. 결국 그녀는 결혼반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꼈다.“엄마가 보시고 괜히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그래. 별 뜻은 없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유현진은 생각에서 헤어나왔다. 그녀는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내 주제를 알아.”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뒤따라 내렸다.강한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강민서였다. 올해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두 달 전 친구와 함께 졸업 여행을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한주 강씨 가문의 가장 막내인 데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버지가 돌아간 바람에 집안 어른들은 특히 그녀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움찔하더니 문을 열 용기가 사라져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누구와 결혼하든 똑같다니. 그녀를 선택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 사람이 아닌 아무라도 괜찮았던 것이다.그녀는 밖에서 10분 남짓 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돌아갔다.문을 열자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신미정이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물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죄송해요, 방금 속이 좀 더부룩해서요.”신미정은 멈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확실히 안색이 창백해졌고 립스틱도 조금 벗겨진 모습에 물었다.“괜찮아? 병원 갈까?”“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신미정이 말했다.“그래도 병원에 가 봐. 임신이면 어떡해?”방금까지 신미정이 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의아했던 그녀는 이제야 신미정의 저의를 알았다. 그녀는 유현진이 임신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여 행여나 자신의 핏줄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알겠어요, 어머니.”신미정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유현진은 마치 외부인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그릇에 갈비가 놓이고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보았다. 강한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알아서 먹어.”아니, 그녀는 외부인이 아니다. 유현진은 가족 모임에 참석한 연기자로서 강한서와 각자 알아서 배역에 맞게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연기가 필요해? 좋아, 맞춰줄게.’이내 그녀는 아주 매운 닭고기 요리를 강한서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여보, 이거 먹어봐.”강한서는 움찔하더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은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강한서에게 그녀는 일부러 매운 닭고기 요리를 준 것이다.‘어떻게
신미정은 유현진의 임신 사실만을 집요하게 신경을 쓰면서 딸의 이상한 모습은 눈치채지 못하고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자궁이 찬 것까지 건강검진에 나오지는 않아. 이런 걸 치료하지 않으면 이제 임신하더라도 아이가 위험해.”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신미정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또 말했다.“둘째가 최근 시장님의 따님이랑 가깝게 지내잖아.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둘째가 너희보다 아이를 먼저 가질 거야. 그렇게 된다면 한서가 회사에서 입지가 어렵게 돼. 할머니께서 장손을 귀하게 여기는 건 잘 알잖니.”‘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강한서가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라고.’또한 그녀는 강한서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한서는 나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거야.’“네 엄마는 지금까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네 아빠도 5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 앞으로 재혼할 수도 있잖아. 그때가 되면 유씨 집안에 네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너의 것이다. 네가 의지할 사람이라고. 현진아, 너도 미래를 생각해야지.”유현진은 신미정이 그녀를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씨 일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했는데 그들에게 그녀는 바둑알에 불과할 뿐이다.“알겠어요, 어머니.”유현진은 시선을 떨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하게 답했다.신미정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유현진에게 어서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피할 곳이 없던 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이혼 한 번 쉽지 않네. 재산을 반드시 더 많이 가져갈 거야!’그녀가 약을 다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돌아왔다.목적을 이룬 신미정은 식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오후에 약속 있어서 이만 갈게. 너희는 식사 계속해.”강민서 역시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도 친구랑 쇼핑하기로 했어. 엄마, 나 좀 데려다줘요.”강한서와 유현진
솔직해지는 게 어때?강한서의 비즈니스는 모두 몇 조가 넘는 가격이었고 협력사에서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작년에도 누군가 오팔 귀걸이를 그에게 선물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강한서가 그녀에게 줬을 때 유현진은 아주 기뻤다.파티에서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강한서는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고 나무랐다.그가 몰랐던 건 그녀가 아까운 건 귀걸이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강한서에게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한 쓸모없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의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물건 말이다.유현진은 박스를 닫아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이혼할 때 자산 분할하잖아. 그때 다시 보자.”강한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현진! 너 정말 그만두지 못해? 네가 나한테 이혼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어? 네가 재산분할 운운할 자격이 있냐고! 네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든 게 내가 해준 거잖아. 이혼하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생존하기도 어려울 거야!”유현진은 손이 떨렸다. 매번 강한서의 독설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면 그는 촌철살인의 독설로 다시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한참을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강한서의 말투도 누그러졌다.“네가 잘못을 인정하면 예전의 일은 따지지 않을게. 안주인 자리는 여전히 네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퍽이나 관대하네.”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통곡하며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자비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그런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필요한 사람에게나 줘.”강한서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유현진!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줘야 돼! 호의를 베푸면 그냥 좀 받아!”“나는 그게 어려워서 말이야. 강한서, 우리 내기할래?”
유현진은 헤어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말리다 만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연기 전공하지 그랬어. 너한테 제격인 것 같은데.”차미주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만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오늘 얘랑 같이 잘 거야. 꿈에서 부자 돼야지!”“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기 전에 그것 좀 예쁘게 찍어줘.”차미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사진은 왜? 설마 인스타에 업로드하려고? 누구 샘나게 해서 죽일 일 일어?”“아냐.”유현진이 앉으며 답했다.“팔려고.”“뭐?”“내일 강한서랑 이혼하러 가. 이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남산 병원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인테리어도 마쳐서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엄마도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예전에 근처 집들 알아본 적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가격이 비싸더라고. 나한테 있는 돈으로는 집 마련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 ‘정상에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이혼하면 돈이 부족할 테니 그거라도 팔아서 보태야겠어.”“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차미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붙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 계약서만 준비하면 된다며. 왜 갑자기 탈락이래?”“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나랑 안 맞대. 투자자 한 명이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 봐. 음색이 너무 성숙하다나.”“흥! 분명 누군가 연줄로 따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정해진 결과를 번복할 수 있어? 누구랑 계약했는지 알아?”“됐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구두로 약속한 건 원래 효력이 없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차미주는 씩씩대며 “낙하산” 을 욕하다가 강한서를 욕했다.“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나였으면 바로 강한서가 바람난 증거를 모아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겠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상관없어.”유현진이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이젠 신경 쓰지 않아.”오늘 강한서가 내뱉은 말과 그녀를 거리에 버린 사건으로 인해 유현진은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이혼하여 관계를 청산하기만을
유현진은 얘기하려고 했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래, 강한서가 어떻게 내 버팀목이 되겠어.’“유현진?”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의 이상한 침묵에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몇 초 뒤,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일이 있어서 힘들겠어. 다음에 하면 안 될까?”강한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하자고? 유현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이혼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너야. 관건적인 순간에 사라진 사람도 너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창백한 안색의 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네가 편한 시간으로 정해. 무조건 갈게.”“네 장단에 맞춰 놀아줄 시간 없어!”쌀쌀맞게 답한 강한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폰을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매번 강한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는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면 기대도 없는 법이다.그녀는 홀로 쓸쓸하게 조용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한 시간이 흘렀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병동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하현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의사는 유현진에게 그녀의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유현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간병인더러 따뜻한 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그녀가 수건을 가지러 가는 모습에 간병인이 급히 말했다.“유현진 씨, 제가 할게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언니는 쉬세요. 필요하면 부를게요.”그녀의 말에 간병인 역시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수건을 적셔 하현주의 몸을 닦았다.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6년이 흘렀다. 하현주 역시 이런 상태로 6년 동안 누워있었다.그녀의 모든 근육은 수축되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몸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았는데 매일 수액으로 목숨을 유지할 뿐이었다. 몸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그녀는 언제라도 유현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인간은 이상하다. 유현진이 어릴 때 하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