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오늘 부탁할 일만 없었더라면 당장 이 자식을 발로 확 차버리는 건데! 멀쩡하게 생겨서 왜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참. 그냥 말 섞지 말아야지!’유현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얄미운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작성한 문자를 민경하에게 보내며 말했다.“경화로의 ‘화원 향료’라는 가게에서 사면 돼요. 그 집에 향료 종류가 많아서 한꺼번에 다 살 수 있을 거예요.”“고마워요, 사모님.”유현진이 자신을 무시한 뒤로 강한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분이 지나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유현진이 차에서 내리려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목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강한서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 번째 손가락이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면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타났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들의 결혼반지였는데 아름드리 펜션에서 나올 때 결혼반지도 함께 두고 나왔었다.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식 날 송민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강한서는 결혼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장을 떠났다. 결국 그녀는 결혼반지를 스스로 손가락에 꼈다.“엄마가 보시고 괜히 이것저것 물어볼까 봐 그래. 별 뜻은 없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유현진은 생각에서 헤어나왔다. 그녀는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내 주제를 알아.”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어두운 얼굴로 뒤따라 내렸다.강한서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강민서였다. 올해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두 달 전 친구와 함께 졸업 여행을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한주 강씨 가문의 가장 막내인 데다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버지가 돌아간 바람에 집안 어른들은 특히 그녀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움찔하더니 문을 열 용기가 사라져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누구와 결혼하든 똑같다니. 그녀를 선택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 사람이 아닌 아무라도 괜찮았던 것이다.그녀는 밖에서 10분 남짓 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돌아갔다.문을 열자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신미정이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물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유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죄송해요, 방금 속이 좀 더부룩해서요.”신미정은 멈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확실히 안색이 창백해졌고 립스틱도 조금 벗겨진 모습에 물었다.“괜찮아? 병원 갈까?”“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젠 괜찮아요, 어머니.”신미정이 말했다.“그래도 병원에 가 봐. 임신이면 어떡해?”방금까지 신미정이 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의아했던 그녀는 이제야 신미정의 저의를 알았다. 그녀는 유현진이 임신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여 행여나 자신의 핏줄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알겠어요, 어머니.”신미정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만 유현진은 마치 외부인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그릇에 갈비가 놓이고 유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보았다. 강한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알아서 먹어.”아니, 그녀는 외부인이 아니다. 유현진은 가족 모임에 참석한 연기자로서 강한서와 각자 알아서 배역에 맞게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연기가 필요해? 좋아, 맞춰줄게.’이내 그녀는 아주 매운 닭고기 요리를 강한서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여보, 이거 먹어봐.”강한서는 움찔하더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현진은 싱긋 웃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매운 음식을 싫어하는 강한서에게 그녀는 일부러 매운 닭고기 요리를 준 것이다.‘어떻게
신미정은 유현진의 임신 사실만을 집요하게 신경을 쓰면서 딸의 이상한 모습은 눈치채지 못하고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자궁이 찬 것까지 건강검진에 나오지는 않아. 이런 걸 치료하지 않으면 이제 임신하더라도 아이가 위험해.”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신미정은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생각에 또 말했다.“둘째가 최근 시장님의 따님이랑 가깝게 지내잖아.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둘째가 너희보다 아이를 먼저 가질 거야. 그렇게 된다면 한서가 회사에서 입지가 어렵게 돼. 할머니께서 장손을 귀하게 여기는 건 잘 알잖니.”‘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강한서가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라고.’또한 그녀는 강한서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한서는 나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거야.’“네 엄마는 지금까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네 아빠도 5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 앞으로 재혼할 수도 있잖아. 그때가 되면 유씨 집안에 네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아이는 너의 것이다. 네가 의지할 사람이라고. 현진아, 너도 미래를 생각해야지.”유현진은 신미정이 그녀를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씨 일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했는데 그들에게 그녀는 바둑알에 불과할 뿐이다.“알겠어요, 어머니.”유현진은 시선을 떨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하게 답했다.신미정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유현진에게 어서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피할 곳이 없던 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이혼 한 번 쉽지 않네. 재산을 반드시 더 많이 가져갈 거야!’그녀가 약을 다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돌아왔다.목적을 이룬 신미정은 식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오후에 약속 있어서 이만 갈게. 너희는 식사 계속해.”강민서 역시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도 친구랑 쇼핑하기로 했어. 엄마, 나 좀 데려다줘요.”강한서와 유현진
솔직해지는 게 어때?강한서의 비즈니스는 모두 몇 조가 넘는 가격이었고 협력사에서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작년에도 누군가 오팔 귀걸이를 그에게 선물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강한서가 그녀에게 줬을 때 유현진은 아주 기뻤다.파티에서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강한서는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고 나무랐다.그가 몰랐던 건 그녀가 아까운 건 귀걸이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강한서에게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한 쓸모없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의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물건 말이다.유현진은 박스를 닫아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이혼할 때 자산 분할하잖아. 그때 다시 보자.”강한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현진! 너 정말 그만두지 못해? 네가 나한테 이혼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어? 네가 재산분할 운운할 자격이 있냐고! 네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든 게 내가 해준 거잖아. 이혼하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생존하기도 어려울 거야!”유현진은 손이 떨렸다. 매번 강한서의 독설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면 그는 촌철살인의 독설로 다시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한참을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강한서의 말투도 누그러졌다.“네가 잘못을 인정하면 예전의 일은 따지지 않을게. 안주인 자리는 여전히 네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퍽이나 관대하네.”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통곡하며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자비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그런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필요한 사람에게나 줘.”강한서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유현진!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줘야 돼! 호의를 베푸면 그냥 좀 받아!”“나는 그게 어려워서 말이야. 강한서, 우리 내기할래?”
유현진은 헤어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말리다 만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연기 전공하지 그랬어. 너한테 제격인 것 같은데.”차미주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만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오늘 얘랑 같이 잘 거야. 꿈에서 부자 돼야지!”“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기 전에 그것 좀 예쁘게 찍어줘.”차미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사진은 왜? 설마 인스타에 업로드하려고? 누구 샘나게 해서 죽일 일 일어?”“아냐.”유현진이 앉으며 답했다.“팔려고.”“뭐?”“내일 강한서랑 이혼하러 가. 이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남산 병원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인테리어도 마쳐서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엄마도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예전에 근처 집들 알아본 적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가격이 비싸더라고. 나한테 있는 돈으로는 집 마련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 ‘정상에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이혼하면 돈이 부족할 테니 그거라도 팔아서 보태야겠어.”“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차미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붙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 계약서만 준비하면 된다며. 왜 갑자기 탈락이래?”“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나랑 안 맞대. 투자자 한 명이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 봐. 음색이 너무 성숙하다나.”“흥! 분명 누군가 연줄로 따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정해진 결과를 번복할 수 있어? 누구랑 계약했는지 알아?”“됐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구두로 약속한 건 원래 효력이 없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차미주는 씩씩대며 “낙하산” 을 욕하다가 강한서를 욕했다.“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나였으면 바로 강한서가 바람난 증거를 모아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겠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상관없어.”유현진이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이젠 신경 쓰지 않아.”오늘 강한서가 내뱉은 말과 그녀를 거리에 버린 사건으로 인해 유현진은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이혼하여 관계를 청산하기만을
유현진은 얘기하려고 했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래, 강한서가 어떻게 내 버팀목이 되겠어.’“유현진?”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의 이상한 침묵에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몇 초 뒤,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일이 있어서 힘들겠어. 다음에 하면 안 될까?”강한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하자고? 유현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이혼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너야. 관건적인 순간에 사라진 사람도 너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창백한 안색의 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네가 편한 시간으로 정해. 무조건 갈게.”“네 장단에 맞춰 놀아줄 시간 없어!”쌀쌀맞게 답한 강한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폰을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매번 강한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는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면 기대도 없는 법이다.그녀는 홀로 쓸쓸하게 조용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한 시간이 흘렀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병동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하현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의사는 유현진에게 그녀의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유현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간병인더러 따뜻한 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그녀가 수건을 가지러 가는 모습에 간병인이 급히 말했다.“유현진 씨, 제가 할게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언니는 쉬세요. 필요하면 부를게요.”그녀의 말에 간병인 역시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수건을 적셔 하현주의 몸을 닦았다.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6년이 흘렀다. 하현주 역시 이런 상태로 6년 동안 누워있었다.그녀의 모든 근육은 수축되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몸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았는데 매일 수액으로 목숨을 유지할 뿐이었다. 몸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그녀는 언제라도 유현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인간은 이상하다. 유현진이 어릴 때 하현주
낮에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훈훈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옥상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휴대폰에는 페이스북 DM을 제외하고 차미주가 보낸 카톡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냐고 물었다.유현진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엄마 보러 왔어.”차미주는 재빨리 답장했다.“어머님은 괜찮아?”“그냥 그래.”“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찾아오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몰라.”그녀의 위로에 유현진은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고, 이내 답장했다.“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어. 저녁에 먼저 자,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알았어. 일 있으면 연락해.”유현진은 그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찰칵.”순간 주위가 번쩍 빛이 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는데, 마침 렌즈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만 쳐다보았다.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유현진은 입을 꾹 닫고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다가가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는 걸 몰라요? 비번이 뭐죠?”어리둥절한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숫자 몇 개를 말했다.“0712요.”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갤러리에는 방금 찍은 아래층 야경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휴대폰을 빼앗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상대방은 사진을 삭제할 틈이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애초에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대형 참사를 대체 어떻게 만회해야 한단 말인가.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무슨 수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죄송합니다. 단지 아래층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오해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유현진도
“약 잘못 먹었냐?”주강운은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성우는 늘 차분하고 점잖은 그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어리숙한 표정은 처음인지라 괜스레 등골이 오싹했다.주강운은 옆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방금 옥상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어.”“뭐?”“내가 도촬하는 줄 알고 휴대폰을 빼앗아가더니 나한테 막 뭐라 하는 거야.”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데 기분은 왜 좋아 보이는 거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냐?”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강한서, 주강운과 소꿉친구였는데, 집안 세력만 따져보았을 때 살짝 약한 편에 속했다. 반면, 한주 주씨 가문과 한주 강씨 가문은 한주시에서 거의 막상막하였고, 주강운 역시 강한서처럼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랐다.하지만 몇 년 전 주강운이 병에 걸려서 회복하는데 무려 2년이 넘게 걸렸고, 그 뒤로 부모님들도 생각을 바꾸셨는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아들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정했다.그동안 그는 음악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으며, 스키도 하고, 레이싱에 빠진 적도 있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이성을 멀리해서 사생활이 백지장처럼 깨끗했다. 결국 한성우는 한동안 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했었다.따라서 지금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자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네가 말한 그 여자 예뻐?”주강운은 방금 마주친 유현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반쯤 말린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도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어쩌면 생얼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물론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가는 모습이 더욱 흥미진진하며 임펙트가 강했다.“예뻐.”“이
차미주의 말에 한성우가 전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미워도 차마 날 날리겠다는 얘기는 안 하네. 너 혼자서만 몰래 간직하려는 거야?”차미주: ...“넌 변기에 빠져도 시원하다고 할 애야.”며칠 후. 조향 대회의 예선 결과가 발표되었다. 깔린느에서 예선에 참가한 조향사는 모두 17명이었다. 그중 2명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회에 불참했고 나머지 15명은 전부 예선에 통과했다. 회의에서 그 15명의 조향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던 서해금은 사비로 12억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10억, 결승 TOP 10에 들면 40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소식에 직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말뿐인 칭찬보다 물질적인 상금은 늘 더 달콤할 따름이었다.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는 한현진을 본 서해금이 그녀를 불렀다. “한 대표. 한 대표도 응원의 말 좀 해줘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12억으로 보너스를 드리겠다고 하니 제가 8억을 보태 보너스를 총 20억으로 하죠. 대회에서 우승하신 분은 16억을, 10위 안에 드신 분들은 각각 4000만 원을, 그리고 10위에서 20위 사이에 도달하신 분들은 2000만 원을 받으실 수 있어요.”“만약 우리 회사에서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16억의 보너스는 다음 조향 대회로 연기되며 그때 다시 지급 규칙을 정하도록 하죠.”상금은 많아진 대신 난도가 떨어지니 더 흥분한 직원들로 인해 회의실이 시끌벅적해졌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그녀의 말에 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지며 수십 쌍의 눈이 한현진을 향했다.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송 팀장님은 어떤 성적을 따내시든 보너스를 받지 않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왜요? 한 팀장님, 지금 이런 식으로 사적인 복수를 하시겠다는 건가요?”한현진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송 팀장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
채지윤이 말했다. “전연 씨는 성격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보기 좋아요.”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며느리로는 어떤 것 같으세요? 두 분 마음에 드세요?”심근호와 채지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채지윤이 심근호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전연 씨를 좋게 보고 있어요. 예의도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할 줄 알고요. 전연 씨 개인 정보와 가정환경은 이미 한 대표님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물론 저희가 어느 정도 알아본 것도 있고요.”“만약 두 아이가 서로 마음이 맞아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너무 과분한 요구가 아닌 이상 예물이든 결혼식이든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요. 혼수는 전연 씨 쪽에서 편하신 대로 준비하시면 돼요. 저희는 따로 바라는 게 없어요.”“저희도 자식이 아들놈 하나뿐이라 결혼 준비는 섭섭지 않게 할 거예요. 그러니 그 점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는 오히려 원이가 전연 씨를 거절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조금 전에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바람 쐬러 나간다는 핑계로 전연 씨를 돌려보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거든요.”한성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분만 연이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 전 얼마든지 두 사람 만나보라고 할 거예요. 나중에 결과가 어떻든, 결혼까지 가든 못 가든 그건 두 사람의 문제니까요.”“그러니 두 분도 너무 심원 씨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어떻게 됐는지도 묻지 마시고요. 저희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심근호와 채지윤이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쉰 채지윤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한 대표님, 저희는 한 대표님을 믿어요. 하지만 저희 집안은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결혼식을 올리길 원해요. 그 점은 알아두셨으면 해요.”한성우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명문가는 아니지만 연이도 뼈대 있는 집안의 규수예요. 걱정하시는 비열한 수단 같은 건 절대 없을 거예요. 만약 연이가 그런 짓을 한다면 사모님 댁에서 말을 꺼내기 전에 연이 집안에서
차미주: ???웃으며 차미주를 끌어당긴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진짜 여우 같은 게 뭔지 곧 보게 될 거야.”차미주는 어리둥절한 채로 한성우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예약된 룸에 들어가자 심근호 가족은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근호 부부는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단정한 옷차림에서 그들이 이번 만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흰색 티셔츠를 입은 캐주얼한 옷차림의 심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채지윤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이 자리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채지윤의 시선은 곧바로 한성우 뒤에 있는 전연에게로 향했다. 순간 눈을 반짝인 채지윤이 테이블 아래로 심근호를 살짝 잡아당겼다. 한성우가 미소 지으며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 병원에 갑자기 응급환자가 생겨서 시간을 좀 지체했어요. 시간 맞춰 도착하려고 했는데 결국엔 늦었네요.”채지윤이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가 일찍 도착해서 그래요. 게다가 병원은 원래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잖아요.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닌데 한 대표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심근호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요. 식사하면서 얘기해요.”심근호와 채지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전연은 곧 심원 옆에 놓인 의자를 빼내며 자리에 앉았다. 멈칫한 심원이 은근슬쩍 의자를 채지윤 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채지윤은 의자를 툭 차내며 심원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심원: ...자리에 앉은 한성우가 심근호 부부에게 차미주와 전연을 소개했다. 물론 전연을 소개하는 것이 이 자리를 마련한 제일 중요한 목적이었다. 전연 역시 예의 바르게 심근호 부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질문에 침착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기만 했다. 채지윤이 전연에게 심원을 소개했다. “여긴 제 아들인 심원이에요. 전연 씨보다는 2살이 많고 줄곧 해외에서 경영을 전공했어요.”말하며 채지윤은 심원에게 눈짓
한성우가 곧바로 전연의 말에 반박했다. “나 같은 느끼한 여우도 너처럼 이런 꼬마한테는 관심 없어.”전연이 한성우를 향해 입을 삐죽이더니 곧 차미주를 보며 말했다. “전 돈은 많지만 순진한 사람이 좋아요. 좀 덜 똑똑한 사람이면 더 좋고요.”차미주: !!!‘너무 직설적인 거 아냐?’전연이 씩 미소 지었다. 포니테일에 말끔한 얼굴의 전연은 단순한 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 같이 직설적이었다. “제가 너무 돈만 밝히는 것 같아요?”차미주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혹시라도 전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차미주가 말을 이었다. “진짜 돈을 밝히는 사람은 그런 말 안 해요. 게다가 맞선이잖아요. 누구든 조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게 당연하죠. 가난한 사람을 만나 같이 고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전연이 환하게 웃었다. “제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해준 사람은 새언니가 처음이에요. 다들 얘기는 안 하지만 이상한 눈빛으로 절 쳐다보거든요.”차미주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다들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법이잖아요. 저도 예전엔 학식이 풍부하고 말이 적은 진중한 성격의 의사나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수다쟁이를 만난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심지어 입만 살아서 저보다도 말이 많잖아요.”한성우: ???“내가 말이 많아?”한성우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 말수가 적은 사람 한 번 만나봐. 열 마디를 해도 겨우 한 마디 대답할까 말까 한 그런 사람 말이야. 뉴스를 보면서도 수다를 떨어야 하는 네 성격에 그런 사람 만나면 병날걸?”“내가 뭐가 말이 많아? 너 말고 나랑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본 적 있어? 내가 너한테 말을 많이 하는 건 뭐든 너랑 공유하고 싶지 때문이잖아. 입 꾹 닫고 어떻게 너랑 일상을 공유해? 내가 말이 적으면 넌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거야.”“그리고 말이 많으면 뭐 어때서. 말을 하라고 달린 입이잖아. 결혼 생활은 소통이 제일 중요해. 안 그럼 뭐 집에서
“어쩌면 이런 것도 인연이겠네요. 제 사촌 동생이 마침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동생이 저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심원 씨를 보고는 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땐 심원 씨가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말씀을 안 드렸었고요.”“요즘 심원 씨가 맞선을 보고 있다는 소식에 이렇게 연락드렸어요. 다른 분은 모르겠고 사촌 동생의 성격이 심원 씨와 잘 맞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사촌 동생을 소개해 드리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 오늘 실례를 무릅쓰고 심원 씨 맞선 얘기를 꺼낸 거예요.”심근호가 놀란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생각인 줄 전혀 몰랐어요.”한성우가 말했다. “전엔 괜히 실례인 것 같아 대표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물어봤었어요. 심원 씨가 해외에서 만나던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더 묻지 않았고요. 하지만 요즘 심원 씨가 맞선을 보고 있다는 소식에 사촌 동생 오작교나 해줄까, 생각한 거예요.”여자친구라는 말에 심근호는 심원과 송가람의 일이 이미 소문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송가람을 향한 심근호의 불만이 커져만 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헛소문이에요. 원이는 여자친구 없어요.”멈칫한 심근호가 말을 이었다. “한 대표님 사촌 동생분은 뭘 하시는 분이에요? 혹시 사진 있어요?”“의사예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주 병원에서 인턴으로 있어요. 아이를 좋아해서 소아병동에서 근무하고 있고요. 인내심이 강한 애예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선생님이세요. 한 분은 중학교, 다른 한 분은 고등학교에 근무하세요.”“가정환경은 흠잡을 데가 없지만 대표님 댁에 비하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동생이 어쩌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오빠가 되어서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내키지 않으시면 저도 확실히 마음을 접을 수 있게 얘기할 수 있고요.”한성우가 말을 이었다. “잠시만요. 제가 사진 보내드릴게요.”잠시 후 차미주는 학사복을 입은 채 카메라를 향해 V를 그리며 웃고 있는 여자아이의 사
고작 열몇 살의 어린아이가, 한창 자존심이 강할 나이에 이런 일로 또래에게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못에서 시계를 건져 올린 그날, 또다시 같은 일로 비웃는 아이를 보며 한성우는 갑자기 독한 마음을 먹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아이를 바닥에 누른 채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아이의 일행이 이미 한성우를 에워싸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 상대방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입에 문 늑대처럼 죽어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한성우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으며 욕을 퍼붓던 남자아이는 결국 겁에 질려 울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한준우가 한성우를 끌어냈을 때 그의 눈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남자아이의 집안이 재력가였던 탓에 함부로 척질 수 없었던 한성우의 부모님은 한성우를 억지로 끌고 가 사과하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한성우의 잘못인 듯 얘기했다. 그날 이후, 한성우는 다시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타협을 배웠고 가식을 배웠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했고 놀림과 왕따를 당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우가 처음 강한서와 친구가 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한서 집안이 한주에서는 명문가였기 때문이었어요. 게다가 한서는 강씨 가문의 장손이었으니 보호막이 되어주길 바랐든 인맥을 넓히기 위한 수단이었든 성우에게 한서는 최고의 선택지였어요.”“하지만 나중에야 술에 취한 성우가 그러더라고요.”“강한서는 너무 멍청해. 비행기 모형을 만져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모형을 선물로 주더라니까. 걔는 그 모형이 마음에 안 든대.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이지. 그 비행기 모형은 거울처럼 반짝거렸어.”“매일 소중하게 닦지 않았다면 그렇게 깨끗할 리가 없잖아. 말만 그래, 걔는. 그리고 어찌나 잘 속는지... 만약 내가 친구 하자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얘기하면 강한서 설마 우는 거 아냐? 됐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평생 속이지, 뭐.”그때의 차미주는 한창 연애 경험이
수화기 너머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심근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한성우가 태연하게 티슈를 뽑아 차미주에게 건네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녜요. 집 고양이가 감기에 걸리더니 투정을 좀 부려서요.”차미주가 찔린 얼굴로 티슈를 받아 한성우의 얼굴에 튄 물기를 닦아냈다. 그녀는 신들린 듯 내뱉는 한성우의 거짓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저 형제 많은 거 아시죠? 부모님께서 젊으셨을 때 돈을 버시느라 절 할아버지 댁에 맡겼었어요. 할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이셨고 글도 떼지 못한 분이셨어요. 제가 건강하게만 자라도 훌륭하게 컸다고 여기시는 분이셨죠.”“학원 같은 건 전혀 다닌 적도 없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마음껏 뛰어놀았고 그렇게 12살이 되었어요. 그쯤 할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더 이상 저를 키워주실 수 없으셨고 그래서 부모님은 다시 절 한주에 데려오셨어요.”“농촌 마을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한주에 오니 여기 아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었어요. 장기자랑 대회가 있어서 선생님께서 개인기를 하나씩 준비해 오라고 하셨지만 제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외국인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영어 수업은 전혀 알아듣지도 못했어요. 옷 브랜드의 진품과 짝퉁도 구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한 파티에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할 줄도 몰랐어요. 전 어디에서든 촌놈이라고 놀림 받았죠.”“그때의 전 자존감이 바닥을 쳤어요. 명절마다 가족들과 선물을 고르러 갈 때면 부모님께선 저에게 먼저 고르라고 하셨지만 전 차마 제 마음에 드는 걸 고르지도 못했어요. 늘 전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사교적으로 보여도 사실은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으며 적응하다 보니 그런 척, 하는 연기가 제법 는 것뿐이거든요. 절 완전히 바뀌게 한 건 실은 제 약혼녀예요.”멈칫, 행동을 멈춘 차미주가 고개를 들어 한성우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라고 여기던 차미주였지만 한성우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성우의
한성우: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한성우의 모습에 차미주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내 다이어트를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야?”“아니, 그게 아니라.”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한성우가 한참 만에야 말했다. “자기는 아직 자기를 잘 모르는 것 같아.”차미주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한성우를 바라보았다. 이별을 막기 위해 한성우가 용기 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속상해서 살이 빠지는 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넌? 넌 속상하면 맛있는 걸 먹어서 보상받으려고 하잖아. 평소엔 족발 1인분만 먹던 애가 속상할 땐 2인분도 먹는데 살이 빠져?”차미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나서였다. 손을 뻗어 한성우를 꼬집은 차미주가 잔뜩 화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한성우가 차미주의 손등을 두드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야. 난 곧 죽어도 널 사랑하는 네 모습이 좋아. 그리고 내가 왜 너랑 헤어져. 다이어트 때문이라고 해도 안 돼.”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그럼 자꾸 날 데리고 맛집 탐방하러 다니지 마. 내가 다이어트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이 걸림돌 같은 인간아.”“미안해. 다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유혹하지 않을게. 내가 또 네 다이어트를 방해하면 올해는 일전 한 푼도 못 벌게 될 거라고 맹세할게.”한성우처럼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이 정도의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을 가다듬은 차미주가 말했다. “그래. 일단은 믿어줄게.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네가 말한 그 방법, 가능하긴 한 거야?”한성우가 씩 웃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해보면 알게 되겠지.”말하며 한성우는 휴대폰을 꺼내 심근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업무 관련 얘기를 나누던 한성우가 갑자기 화제를 돌려 심원에 관해 물었다. “심 대표님, 아드님 맞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그 말에 심근호가 한숨을 내뱉었다. “
한성우가 생각했다. ‘이렇게 태연하게 나에게 사진을 보내는 걸 보면 송가람의 수단에 충격받을 사람 같진 않아.’하지만 한성우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내뱉어봐야 가정의 평화에 불화를 가져올 뿐이었다. 그와 한현진 중 차미주가 누굴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한성우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성우는 상업 파티와 연예계에 몸담으며 수도 없이 많은 여우 같은 여자들을 봤었다. 그들의 수단은 전부 한성우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야한 사진을 보내는 것은 하수들이 자주 이용하는 제일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성적인 매력으로 남자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송가람은 여우 중에서도 하수에 속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결혼하고나서야 성생활을 시작한 모태 솔로였다. 강한서는 애초부터 성욕이 많지 않은 데다 바른 청년의 삶을 사는 그에게 연애 중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 여자가 와이프와 원수지간이라면 더더욱 불가능했다. 송가람은 강한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강한서는 송가람이 말하는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진심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한현진에게서 그를 뺏으려는 욕심인 건지도 알지 못했다. 만약 진심으로 강한서를 좋아하는 거라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강한서의 결혼 생활 내내 송가람은 그 어떤 마음의 표현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한현진의 신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그때부터 강한서에게 점점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송가람은 강한서의 외모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유학 시절엔 강한서와 비슷한 심씨 가문의 외동아들 심원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강한서의 빈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한성우는 남자든 여자든 또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는 것을 제일 멸시했다. 한성우에게 그런 건 사랑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는 역겨운 행위에 불과했다. 심원은 요즘 또다시 집안에서 지정해 준 여자들과 맞선을 보고 있다고 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