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지는 게 어때?강한서의 비즈니스는 모두 몇 조가 넘는 가격이었고 협력사에서 고가의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작년에도 누군가 오팔 귀걸이를 그에게 선물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강한서가 그녀에게 줬을 때 유현진은 아주 기뻤다.파티에서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는데 강한서는 그런 그녀가 한심하다고 나무랐다.그가 몰랐던 건 그녀가 아까운 건 귀걸이가 아니라 그가 선물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강한서에게 그건 다른 사람이 선물한 쓸모없는 물건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의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물건 말이다.유현진은 박스를 닫아서 그에게 주며 말했다.“이혼할 때 자산 분할하잖아. 그때 다시 보자.”강한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유현진! 너 정말 그만두지 못해? 네가 나한테 이혼을 들먹거릴 자격이 있어? 네가 재산분할 운운할 자격이 있냐고! 네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든 게 내가 해준 거잖아. 이혼하면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생존하기도 어려울 거야!”유현진은 손이 떨렸다. 매번 강한서의 독설에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할 때면 그는 촌철살인의 독설로 다시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한참을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강한서의 말투도 누그러졌다.“네가 잘못을 인정하면 예전의 일은 따지지 않을게. 안주인 자리는 여전히 네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해 줄게.“퍽이나 관대하네.”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통곡하며 너한테 빌기라도 해야 해?”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자비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는 그런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필요한 사람에게나 줘.”강한서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유현진! 내가 어디까지 널 봐줘야 돼! 호의를 베푸면 그냥 좀 받아!”“나는 그게 어려워서 말이야. 강한서, 우리 내기할래?”
유현진은 헤어 드라이기 전원을 끄고 말리다 만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연기 전공하지 그랬어. 너한테 제격인 것 같은데.”차미주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만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오늘 얘랑 같이 잘 거야. 꿈에서 부자 돼야지!”“마음대로 해. 하지만 자기 전에 그것 좀 예쁘게 찍어줘.”차미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사진은 왜? 설마 인스타에 업로드하려고? 누구 샘나게 해서 죽일 일 일어?”“아냐.”유현진이 앉으며 답했다.“팔려고.”“뭐?”“내일 강한서랑 이혼하러 가. 이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남산 병원과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인테리어도 마쳐서 바로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으로. 엄마도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예전에 근처 집들 알아본 적 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가격이 비싸더라고. 나한테 있는 돈으로는 집 마련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 ‘정상에서’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졌대. 이혼하면 돈이 부족할 테니 그거라도 팔아서 보태야겠어.”“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차미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붙은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 계약서만 준비하면 된다며. 왜 갑자기 탈락이래?”“나도 물어봤는데 그냥 나랑 안 맞대. 투자자 한 명이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 봐. 음색이 너무 성숙하다나.”“흥! 분명 누군가 연줄로 따냈을 거야. 아니면 어떻게 정해진 결과를 번복할 수 있어? 누구랑 계약했는지 알아?”“됐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구두로 약속한 건 원래 효력이 없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차미주는 씩씩대며 “낙하산” 을 욕하다가 강한서를 욕했다.“너는 너무 물러 터졌어. 나였으면 바로 강한서가 바람난 증거를 모아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겠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상관없어.”유현진이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이젠 신경 쓰지 않아.”오늘 강한서가 내뱉은 말과 그녀를 거리에 버린 사건으로 인해 유현진은 현실을 직시하고 빨리 이혼하여 관계를 청산하기만을
유현진은 얘기하려고 했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래, 강한서가 어떻게 내 버팀목이 되겠어.’“유현진?”강한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방의 이상한 침묵에 그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몇 초 뒤,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일이 있어서 힘들겠어. 다음에 하면 안 될까?”강한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하자고? 유현진,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이혼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은 너야. 관건적인 순간에 사라진 사람도 너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창백한 안색의 유현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 거기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야. 네가 편한 시간으로 정해. 무조건 갈게.”“네 장단에 맞춰 놀아줄 시간 없어!”쌀쌀맞게 답한 강한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폰을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매번 강한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는 없었다. 실망이 계속되면 기대도 없는 법이다.그녀는 홀로 쓸쓸하게 조용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억겁의 시간과도 같은 한 시간이 흘렀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병동을 옮긴다는 소식을 전했다.하현주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의사는 유현진에게 그녀의 신체 기능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유현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간병인더러 따뜻한 물을 받아달라고 했다.그녀가 수건을 가지러 가는 모습에 간병인이 급히 말했다.“유현진 씨, 제가 할게요.”“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언니는 쉬세요. 필요하면 부를게요.”그녀의 말에 간병인 역시 병실을 나갔다.유현진은 수건을 적셔 하현주의 몸을 닦았다.사고가 나고 지금까지 6년이 흘렀다. 하현주 역시 이런 상태로 6년 동안 누워있었다.그녀의 모든 근육은 수축되었고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의 몸은 마치 산송장과도 같았는데 매일 수액으로 목숨을 유지할 뿐이었다. 몸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그녀는 언제라도 유현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인간은 이상하다. 유현진이 어릴 때 하현주
낮에 날씨가 따뜻한 덕분에 훈훈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옥상에 바람 쐬러 올라갔다.휴대폰에는 페이스북 DM을 제외하고 차미주가 보낸 카톡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냐고 물었다.유현진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엄마 보러 왔어.”차미주는 재빨리 답장했다.“어머님은 괜찮아?”“그냥 그래.”“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어느 날 갑자기 기적이 찾아오면 의식을 회복할지도 몰라.”그녀의 위로에 유현진은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고, 이내 답장했다.“네 말처럼 됐으면 좋겠어. 저녁에 먼저 자,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것 같아.”“알았어. 일 있으면 연락해.”유현진은 그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찰칵.”순간 주위가 번쩍 빛이 났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는데, 마침 렌즈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만 쳐다보았다.고개를 돌린 그녀를 보자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멋쩍게 웃어 보였다.유현진은 입을 꾹 닫고 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다가가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남의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는 걸 몰라요? 비번이 뭐죠?”어리둥절한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숫자 몇 개를 말했다.“0712요.”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갤러리에는 방금 찍은 아래층 야경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휴대폰을 빼앗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상대방은 사진을 삭제할 틈이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애초에 그녀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한 대형 참사를 대체 어떻게 만회해야 한단 말인가.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무슨 수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죄송합니다. 단지 아래층 경치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오해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유현진도
“약 잘못 먹었냐?”주강운은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성우는 늘 차분하고 점잖은 그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어리숙한 표정은 처음인지라 괜스레 등골이 오싹했다.주강운은 옆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방금 옥상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어.”“뭐?”“내가 도촬하는 줄 알고 휴대폰을 빼앗아가더니 나한테 막 뭐라 하는 거야.”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데 기분은 왜 좋아 보이는 거지?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냐?”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도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강한서, 주강운과 소꿉친구였는데, 집안 세력만 따져보았을 때 살짝 약한 편에 속했다. 반면, 한주 주씨 가문과 한주 강씨 가문은 한주시에서 거의 막상막하였고, 주강운 역시 강한서처럼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랐다.하지만 몇 년 전 주강운이 병에 걸려서 회복하는데 무려 2년이 넘게 걸렸고, 그 뒤로 부모님들도 생각을 바꾸셨는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아들의 행복을 우선순위로 정했다.그동안 그는 음악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으며, 스키도 하고, 레이싱에 빠진 적도 있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이성을 멀리해서 사생활이 백지장처럼 깨끗했다. 결국 한성우는 한동안 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했었다.따라서 지금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자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네가 말한 그 여자 예뻐?”주강운은 방금 마주친 유현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반쯤 말린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채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도 매끈하고 탄력이 넘치는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어쩌면 생얼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물론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가는 모습이 더욱 흥미진진하며 임펙트가 강했다.“예뻐.”“이
”이혼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주강운은 궁금한 듯 물었다.강한서가 결혼 했을 당시 그는 병을 치료하느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부분 외국에서 지냈기에 강한서의 아내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한성우를 비롯한 사람들한테서 자주 전해 들었다. 얼굴은 예쁜데 너무 착해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그런 여자라고 했다.그때 양심이 하나도 없는 친구 놈들은 단톡방에서 강한서가 3개월 안에 무조건 이혼한다고 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 또 다른 3개월이 흘러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3년이 훌쩍 넘었다.이제 두 사람의 사이가 꽤 돈독해졌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돌아오자마자 이혼한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한성우의 말투에서 유추해보면 강한서의 아내가 먼저 이혼을 제기했다는 건데, 결국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이 화제를 언급하는 순간 한성우는 통증 따위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둘이 회사에서 한서의 와이프를 마주쳤단 말이야. 한서는 와이프가 자기를 미행하는 줄 알았는데, 와이프 분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니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이놈이 글쎄 부부싸움이라고 우기는 거 있지?”강한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 입 닥쳐.”한성우는 혀를 찼다.“차였으면서 말도 못 하게 해?”강한서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주강운이 한성우의 다리를 툭 치자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 때맞춰 화제를 바꿨다.“참, 한서가 남산 병원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잖아. 지인을 통해 그 여자 좀 알아봐달라고 하면 안 돼?”강한서가 물었다.“웬 여자?”한성우는 방금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한껏 과장해서 설명했다.강한서도 한성우와 마찬가지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예상외로 거절하지 않고 자세히 캐물었다.“어떻게 생겼는데?”한성우가 너스레를 떨었다.“강운의 말을 들어보면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이지 않을까 싶어.”주강운이 피식 웃었다.“뭐, 분위기는 제법 비슷한데, 한 성깔 하던걸
그 말을 들은 유현진은 막 피어오른 희망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고, 이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단지 우연이라는 말인가요?”의사가 위로를 건넸다.“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눈동자가 움직인다는 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죠. 다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의식을 잃은 지 좀 오래되어서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주세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후 유현진은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간병인에게 팁을 챙겨줬지만, 상대방은 안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다.유현진이 말했다.“아주머니, 받으세요. 제가 평소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아주머니께서 모든 일을 케어해주시는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마음이 편치 않네요. 앞으로 우리 엄마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주세요.”“당연하죠. 그게 제 일인걸요.”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그녀 때문에 간병인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차미주는 여전히 깨어 있었는데, 단톡방에서 문자를 보내느라 무아지경이었다. 옆에는 TV가 틀어져 있었고, 마침 ‘보이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왔어?”유현진은 대답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자 온종일 팽팽하던 긴장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꼴이 그게 뭐니? 어머님은 괜찮아?”“아직은.”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혼은 못 했어.”“난 또 뭐라고.”차미주는 그녀의 입에 체리 한 알을 넣어주었다.“오늘 실패했다고 해도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해결하면 되잖아.”유현진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서 강한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아마도 자신이 일부러 약속을 어긴 줄 알고, 심지어 또다시 ‘밀당’한다고 오해하는 느낌이 강했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약속을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자를 보내
“그건 내가 너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야. 네 덕에 별장에서 살아보길 기대하고 있으니까 얼른 대답하라고.”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좀 더 생각해볼게. 촬영은 다음 달이라서 아직 시간은 많아.”다음날 유현진은 아침 일찍 물건을 챙겨 한성그룹으로 찾아갔다.강한서와 결혼한 3년 동안 이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혼 때문에 처음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유현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한성 그룹은 한주시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건물은 한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었다. 혁신적인 건물 외관은 이미 한주시의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었고,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사람들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천장이 돋보였다.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우고 곧장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 있죠?”젊고 잘생긴 청년이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는데,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혹시 예약하셨을까요?”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사전에 약속이 없으면 대표님께서는 손님을 접대하지 않습니다.”유현진이 말했다.“그럼 전화해서 유현진이 찾는다고 말해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깔끔한 옷차림에 예의도 바르고 미모까지 갖춘 그녀를 보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었다.얼마 안 되어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고, 이내 남자직원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유현진이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하십니다.”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놓고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 주시겠어요?”프런트 남자직원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아내란 사람이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는 것 같았다.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강한서와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아서 자신 있게 말했다.“이제 믿을 수 있겠죠?”프런트 남자직원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둘이 같이
한현진의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주사위 잘 던지신다면서요?”한성우가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도박장에서는 제가 주사위를 굴리는 게 아니잖아요.”“...”“주사위 게임은 심리전이예요. 거기에...”한성우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밑장빼기가 중요하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연기만 잘하면 돼요. 온전히 도박 기술에만 의지하면 신이와도 굶어죽을 거예요.”멈칫하던 한성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왔어요.”한성우의 시선을 따라 한현진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보통의 몸매를 가진 남자가 뒷짐을 진 채로 매 테이블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현진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한성우가 바로 그녀를 데리고 고수의 테이블로 향했다. 신표를 유인하기 위해 한성우는 거액의 돈을 흩뿌렸다. 연속 세 판을 지자 2억 원이던 판돈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주변엔 점점 더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었고 신표도 한성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한현진은 조금 긴장한 티가 났지만 한성우는 오히려 덤덤했다. 그는 소매 단추를 풀며 씩 웃더니 말했다. “오늘은 운이 안 좋네.”주변에서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오늘 처음이시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한성우가 말했다. “여기 리모델링하기 전부터 왔었어요. 요 몇 달 동안 바빠서 못 왔죠. 그러시는 분들도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말하며 한성우가 카드를 펼쳤다. 쯧, 혀를 차며 카드를 테이블에 던졌다. 여전히 운이 따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또 졌다. 한성우가 손을 들어 손짓하자 곧 두 사람이 상자 두 개를 들고 다가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현금 뭉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계속 하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한성우의 똥손 기운과 두 박스에 가득 찬 현금에 몇 명의 도박꾼은 마음이 흔들렸다. 곧 누군가 한성우를 따라 배팅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관찰하던 신표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한성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한성우가 본격적으
한현진이 씩 웃으며 텀블러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강한서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고 아직 앞날도 창창하잖아. 절대 신미정이 강한서를 망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20억이 신표의 손을 거치자 4억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신표는 여전히 도박을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현진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나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신표는 처음부터 도박장의 단골이었다. 비록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런 사업을 하는 인간들에게 애초부터 규칙이나 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 돈만 있다면 그들의 문은 언제든지 열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설 도박장은 아무나 함부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지인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었고 몇 번의 테스트를 거친 후에야 눈을 가린 채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성우의 안내로 한현진은 한 번도 출입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박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한성우는 야심도 있고 간도 크고 놀기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엔 어떤 사람과도 어울려 지냈고 도박장도 예전에 함께 놀던 양아치 같은 친구들이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박장이라는 곳에는 승승장구하는 장군은 없는 법이었다. 한성우가 이곳에서 제일 많이 돈을 잃었을 땐 생활비조차도 없어 매일 강한서에게 밥을 얻어먹으려 다녔었다. 나중에야 점차 비결을 알아냈고 돈을 따면 멈추는 법도 배우게 됐다. 한성우는 도박으로 쏠쏠하게 돈을 벌었지만 그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에게 들키고 말았다. 단 한 번도 한성우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강한서였지만 한성우가 도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오후, 그는 곧바로 한성우의 집으로 달려가 한바탕 주먹을 날렸다. 한성우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때린 후 꽉 쥐고 있던 강한서의 주먹이 얼마나 떨렸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바로 도박을 하는 신표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신미정은 신표가 자신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몰래 그에게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도박을 끊는 건 금연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을 땐 괜찮았지만 일단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의 단골이 되었고 연년생 아이를 낳은 이윤하는 신표와 회사를 관리할 정력이 없었다. 어렵게 일으킨 회사는 또다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 당시 마침 강한서는 한성을 혼자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자 신미정은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신표에게 투자자를 끌어다주었다. 이윤하는 모든 정력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퍼부었고 회사 일에는 점점 손을 놓게 되었다. 그녀는 신표가 도박을 하든 말든 가만히 놔두었다. 어차피 신씨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었다.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돈은 전부 신미정이 몰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얼마 전 주강운이 말한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의 원인은 아마 신표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그쪽으로 몰래 돈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 한현진이 강한서와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강한서는 재산은 어차피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고 내연녀와 새 살림을 꾸릴 용기 따위도 없고 돈이 생기면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신표를 어떤 눈 먼 여자가 따라다니겠냐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신표는 연예인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곧 50대가 되는 아저씨였다. 그러니 뭘 보고 그런 남자의 내연녀가 되려고 할까? 중년을 향하는 나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도박꾼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서?이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말했다. “오빠, 이윤하 행적을 알아봐줘요. 채무 상황도요.”다음 날 송민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이윤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빈해시로 향했다. 그녀의 계좌엔 16억이 들어온 기록이 있었고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신표였다. 그리고 신표의 계좌에는 신미정이 한현진에게서 받은 20억이 들어온 기록이
신씨 가문은 진작 신미정이 결혼 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씨 가문의 아들딸이 가진 것이라곤 그저 외모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아무리 힘을 합쳐도 그럴듯한 아이디어 하나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만약 강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신씨 가문은 진작 재벌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강한서가 신미정이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동생에게 끌어준 자금줄을 전부 끊은 후 전부터 안 좋던 회사 정황은 나날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신표의 아내가 돈을 빼돌려 도망갔다고? 한현진은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설사 도망갔다고 해도 신표에게 돈이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하필 돈 떨어진 이 타이밍에?게다가 강한서의 외숙모는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표는 도박 중독이었다. 신씨 가문 절반 이상의 재산은 전부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어도 신씨 가문과 어울리는 집안에서는 도박꾼에서 딸을 시집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표의 아내인 이윤하는 신씨 가문에서 지방에 있던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정 형편도, 외모도 평범했고 억척스러운 여자였다. 신표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했고 그가 결혼할 때 강한서는 이미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강한서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도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결혼식을 준비는 전부 신미정이 짊어지게 되었다. 신미정은 이윤하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하를 거칠고 교양 없는 여자라 생각했고 못생기고 평범한 집안 때문에 신씨 가문에 그 어떤 도움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이 이윤하를 며느리로 콕 점 찍어둔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결혼을 막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신미정은 결혼식에서 이윤하의 기를 눌러 줄 계획을 세웠다. 예물 교환 순서에 사용될 화
그녀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떠올리며, 멍하니 있던 그 뚱뚱한 물고기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발로 작은 돌멩이를 툭 차 연못에 던졌다.‘퐁당!’ 소리와 함께 뚱뚱한 물고기가 깜짝 놀라 몸을 홱 뒤집었고, 그 꼬리짓에 옆에 있던 작은 잉어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정인월은 눈썹을 씰룩이며 바라봤다.“아이고, 저 건들건들한 짓거리... 왜 우리 큰손주랑 똑같냐?”한현진은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그때 은서가 깡충깡충 달려와 한현진의 다리를 꼭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이모, 왜 이제 왔어요! 은서 이모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한현진은 은서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모가 너 주려고 작은 선물 좀 사느라 늦었어.”“선물이요?”은서의 눈이 반짝이며 한현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어디 있어요? 빨리 가요!”한현진은 은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먼저 이 오빠랑 차에 타 있어. 이모는 할머니랑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원율의 손을 잡고 차로 갔다. 아이가 자리를 떠나자, 정인월은 물었다.“그래서, 무슨 얘기를 나눴니?”한현진은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정인월에게 말했고, 정인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하려고?”한현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한서 씨를 망치게 두진 않을 거예요. 200억은 신미정의 협박값이 아니에요. 그 돈으로 신미정과 한서 씨의 혈연관계를 끝낼 생각이에요.”그녀는 이어 덧붙였다.“물론, 그 돈이 순순히 그 사람 손에 들어가게 두진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 집안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그 말을 하고는 갑자기 기침을 터트렸다. 한현진은 급히 다가가 정인월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차를 따라 정인월의 잔에 차를 채워드렸다.“할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정인월은 차를
“안 돼!”신미정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2주는 너무 길어! 일주일 안에 끝내!”한현진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열흘은 줘요. 일주일로는 정말 돈을 마련할 수 없어요.”신미정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한서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한현진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설마 나더러 한서 씨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큰 금액을 요구하면, 당신은 한서 씨가 돈의 용도를 추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당신이 내게 돈을 요구하라고 시켰다는 걸 직접 말하길 바라요?”신미정은 강한서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애초에 그녀가 찾아온 상대는 한현진이었다.하지만 강한서가 한현진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죽은 남편의 유산을 건드릴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운 좋게 한현진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한현진의 말에 신미정은 잠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잠깐 고민한 뒤, 신미정은 입을 열었다.“좋아, 열흘은 줄게. 하지만 열흘 뒤에도 내가 원하는 금액을 못 받으면, 너 기다려!”신미정이 자리를 떠난 뒤, 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차 안에 녹화된 영상 복사해 주세요.”원율은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는 곧 녹화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오늘 일은 한서 씨에게 말하지 마요. 그게 어려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나요. 제가 두 달 치 월급을 더 챙겨드릴 테니 다른 직장을 찾아요.”원율은 다급히 말했다.“사모님, 대표님이 저를 고용하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모님의 사람입니다. 사모님의 안전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개인적인 일은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한현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이제 본가로 가요.”원율은 대답하며 녹화 파일이 담긴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차를 돌려 강씨 집안의 본가로 향했
한현진은 신미정을 한 번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한서 씨는 매달 당신 계좌로 생활비를 송금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 당신이 회사 계좌에서 빼돌린 돈의 증거도 가지고 있죠.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신미정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런 추문이 퍼지면, 한성의 주가와 한서 선거 표에 아무 영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한현진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뻔뻔하고 비열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서해금과 백혜주는 그렇게 악독해도 자식들만큼은 끝까지 보호했다. 그런데 신미정은 대체 뭔가?한현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요?”신미정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너랑 상관없어. 돈만 보내면 돼. 기한은 3일이야. 안 주면 바로 한서를 고소할 거야!”한현진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부모와 자식이라는 증거가 없었으면, 진심으로 한서 씨가 당신 친아들이라는 걸 의심했을 거예요. 당신은 한서 씨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낳았어요? 낳았으면 왜 돌보지 않았고요? 한서 씨가 이렇게 어렵게 이룬 걸 왜 또 망치려는 거죠?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예요?”신미정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우리 모자는 원래 잘 지내고 있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재앙이야! 한서가 날 이렇게 대하니 내가 무정한 건 당연하지!”“과시하려고 아들이 물에 빠지도록 내버려둔 게 당신 말로는 잘 지낸 거라고요?”한현진의 말은 신미정의 아픈 곳을 건드린 듯했다. 신미정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뭘 알아? 내가 한서를 엄격하게 키우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될 수 있었겠어?”그 뻔뻔한 논리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신미정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냉랭한 태도로 물었다.“말 돌리지 말고, 그 돈 줄 거야, 안 줄 거야?”한현진은
한현진은 시선을 거두고 진씨에게 말했다.“아저씨, 은서를 데리러 왔어요.”진씨가 대답했다.“은서는 피아노 연습 중입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르려던 순간, 신미정이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한현진, 네가 나를 강씨 집안에서 쫓아내고 우리 모자를 갈라놓았으니 아주 만족스럽겠지?”한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조금 더 오래 갇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신미정의 눈에 증오가 스쳤지만, 이내 억눌렀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얘기 좀 하자.”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사이에 대체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고 생각하시죠?”한현진은 신미정이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해치려 했던 여자에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신미정이 왜 갑자기 시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을까?비록 신미정이 강씨 집안에서 쫓겨났고, 강한서가 그녀와의 인연을 끊으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공했지만, 강민서는 그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강민서는 여전히 신미정에게 애정이 남아 있었다. 비록 과거에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더라도, 신미정이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신미정이 풀려난 날, 강민서는 그녀를 찾아갔고 약간의 돈도 건넸다.강한서가 이 사실을 한현진에게 말하며 은근히 물었다.“내가 민서를 막아야 할까?”한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자기 속셈을 모를 줄 아나!’강한서는 신미정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막아섰다가 나중에 신미정이 돈 때문에 사고라도 치면 강민서가 자신을 원망하고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또 막지 않으면 한현진이 오해할까 두려워 문제를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었다.한현진은 애초에 강민서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강민서는 반항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억누르
강한서가 주강운을 잘 아는 만큼, 그는 단기간에 성급하게 어떤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은서는 간민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주강운은 최소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중히 행동하며,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할 것이 분명했다.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은서를 데려와 펜션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때? 할머니께서 연세도 많으시고, 은서를 돌볼 체력이 없으시잖아. 그리고... 강운 씨 입장에서 보면 은서는 간민혜가 준 치욕의 상징일 텐데, 만약 병이 도져서 은서에게 화풀이라도 한다면 어쩌지?”강한서는 처음엔 주강운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를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졌다.만약 정말로 그를 이해했다면, 전에 있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겠지.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대로 해.”사실 강한서가 한성우를 통해 주강운에게 은서의 출생 비밀을 넌지시 알린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주씨 집안을 이용해 문지상의 진짜 사망 원인을 찾아내려는 계획이었다.강한서는 여전히 문지상이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어깨장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간직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음 날, 한현진은 직접 강씨 집안의 본가로 가서 은서를 데려왔다.그런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신미정이 구류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녀는 잔뜩 선물을 들고 정인월을 찾아왔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한현진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진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진 기사, 제발 시어머니께 잘 말씀 좀 해줘.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돼?”진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어르신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며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더는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신미정은 계속 사정하며 설득했지만, 진 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신미정의 눈빛이 달라졌다.결국 억눌렀던 본심이 드러났다.“내가 강씨 집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