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 오빠는 당신처럼 유치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리고 어차피 당신은 나랑 이혼했는데 당신이 형이라고 부르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허점이 가득한 핑곗거리에 강한서는 정색하면서 말했다.“어쨌든 안 돼! 부르지 마!”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하! 무조건 부를 건데!’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와중에 여러 명이 엄청 큰 8단 케이크를 밀고 들어왔다.할머니의 말씀은 정확했다. 그 8단 케이크는 전부 과일로 장식을 하였고 그중 한 단은 전부 망고로 도배되어 있었다.유현진은 8단 케이크를 빤히 바라보면서 나중에 케이크라면 환장하는 차미주에게 한 조각 가져다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차미주가 떠올랐던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아직도 안 온 거지? 설마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차미주에게 카톡을 보냈다.“어디까지 온 거야?”한참을 기다려도 차미주는 답장이 없었다. 이때 강한서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자. 이따가 같이 사진 찍어야 하니까 앞으로 나가자.”유현진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강한서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앞자리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아주 시끄러웠고 유현진은 자신의 가방에 넣은 휴대폰이 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차미주는 용호 밖에 있었고 경비원들이 그녀에게 초청장이 없다는 이유로 들여보내 주지 않고 있었다.그러나 하필이면 이때 연락이 되지 않는 유현진에 차미주는 많이 조급해졌다.은영의 매니저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지금 이게 다 무슨 소란인 거죠? 초청장도 없으면서 들어가려고요?”차미주는 웃는 얼굴로 사과했다.“죄송해요. 현진이가 지금 바빠서 휴대폰을 확인해 보지 못했나 봐요. 선생님, 얼른 차에 가서 쉬고 계세요. 제가 현진이에게 다시 연락해 볼게요.”은영은 아주 비싼 옷과 진한 무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아주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다시 연락해 봐요.”유현진이 부탁한 중요한 일을 망치게 될까 봐 두려웠
이때 누군가가 물었다.“유현진 씨 오늘 뭘 선물했는지 아시는 사람 있나요?”“모르겠는데요. 유현진 씨가 저쪽에서 등기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대충 다른 사람에게 묻혀서 들어온 거 아닐까요?”“대박, 빈손으로 온 거예요? 정말 뻔뻔하네요. 심지어 선물까지 받아냈잖아요.”...주아름의 눈빛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사람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때 유현진은 휴대폰을 꺼내 몰래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었다.그녀는 얼른 차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던 차미주는 그녀의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그녀는 차미주에게 카톡을 보냈다.“너 지금 어디야?”카톡을 보내자마자 현장은 갑자기 술렁이더니 이내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왔다.선물을 보낸 사람을 적어두었던 회계장부에 실수로 술잔을 쏟았다는 것이었다.진 씨는 얼른 그 소식을 정인월에게 전했고 정인월은 미간을 찌푸렸다.선물을 보낸 사람들을 적은 회계장부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누가 무엇을 선물했는지 자세하게 적고 나중에 그 회계장부대로 선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현재 회계장부가 젖어버렸으니 글씨는 이미 알아볼 수가 없었고 페이지도 찢어져 무엇을 적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신미정과 송민희 더욱 조급해졌다. 그 두 사람은 이 팔순 잔치에 어마어마한 돈을 퍼부었고 그 두 사람은 각자 초대장을 보내 지인들을 초대했기에 선물들도 각자 알아서 나눠 가져야 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회계장부가 손상되었으니 누가 뭘 선물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일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죠?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술잔도 제대로 안 치우고 뭐 한 거죠?”신미정은 바로 불만을 드러냈다.송민희의 안색도 좋지 않았지만 회계장부를 적는 회계사는 정인월이 아끼는 이미 회사에서 퇴직한 집사였다. 그녀는 분노를 꾹꾹 참으면서 말했다.“어머님, 사람들이 아직 이곳에 있으니까 얼른 다시 적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인원수와 맞지 않으면 제가 사람을 시켜 다시 알아보라고 할게요.”
깜짝 놀란 정인월이 얼른 호숫가의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어 주변의 스피커에서 판소리의 장단이 울려 퍼졌다. 젊은 사람 중에는 판소리를 즐겨 듣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판소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이 상황을 한주 강씨 가문에서 준비한 이벤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장단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이 장단은 판소리 “백화정”의 시작 부분이 아닌가? 그리고 이 창법, 한 소절뿐이었지만, 부드러운 음색에 오랫동안 판소리를 들어온 사람이라면 부르는 사람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은영 선생님이 부르는 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정인월이 국악 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유명 인사는 없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은영 선생님의 창법이었다. 사실 정인월뿐만 아니라 한주시 유명 인사 중에도 많은 팬이 있었다. 하지만 은영 선생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어떤 장소에서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려고 하든, 아는 지인들을 다 동원해도 은영 선생님은 쉽게 원칙을 깨지 않았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에는, 유명해지지 못했던 그때에도, 하루 7, 8회차씩, 담배값도 안되는 티켓값을 받고도 단 한 회도 빠짐없이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가 부르지 않는다고 할 때는 그 어떤 가격을 제시해도 그는 절대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또 이런 원칙주의의 성격 덕분에 사람들은 더욱 은영 선생님에게 국악가로서의 풍격이 있다며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창법이 같다고 느끼면서도 정말로 은영 선생님일 것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다. 한주시 강씨 가문이 뭐라고, 은영 선생님은 국보급 국악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시녀 분장을 한 배우들이 온통 녹색으로
신미정은 듣자마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하다니, 미리 말해줄 수는 없었을까?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송민희도 은영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은영 선생님은 굳이 송민희의 부탁을 들어주면서까지 자기에게 미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미정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차피 누구도 은영 선생님을 모셔 올 수 없으니,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나타낼지는 각자의 역량이었다. 하지만, 은영 선생님이 오실 줄이야!신미정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전 여사를 쳐다보았다.전 여사 역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 처리를 확실히 하지 못한 그녀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전 여사는 신미정을 위로했다. "미정 언니, 은영 선생님께서는 송민희 씨가 불러서 오신 건 절대 아닐 거예요. 송민희 씨를 위해 윤 여사님이 오랜 동창인 저와 껄끄러워질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 학교 다닐 때 사이가 꽤 좋았어요.""송민희가 아니면 누가 모셔 왔다는 거예요?"신미정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고작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해요?"전 여사는 욱 화가 치밀었다.'고작? 이 일이 고작이라고?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모셔 오던지.'부탁하는 신세면서, 불평이라니. 전 여사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은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많은 일들을 신미정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 때문에 전 여사는 눈을 내리깔고 불만을 억누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신미정은 여전히 정색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민희도 미간을 찌푸렸다. 강현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엄마, 저분을 어떻게 모신 거예요?""내가 모신 게 아니야."송민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윤 여사님에게 문전박대당해서 은영 선생님을 뵙지도 못했어."강현우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엄마가 아니면 누구예요?"신미정은 전혀 표정관리를 못 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은영 모신 것이라면 절대 저런 표정을
비록 차미주가 내뱉은 말은 굉장히 예의없었지만 그 말은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큰 파동을 일으켰다. “설마 유현진 말하는 거야?”“설마! 유현진이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왜 강한서와 결혼하겠어? 장난하지 마.”“하지만 여기에 현진이란 이름이 유현진 말고는 없잖아.”“금방 말한 사람, 유현진 옆에 있던 그 여자애 같아.”“정말 유현진이 한 건가 봐…”…신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유현진이 은영 선생님을 모셔 왔을 줄은 그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은영 선생님의 출연으로 정인월이 저렇게 행복해하니, 그녀가 준비한 것들은 큰 기대를 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오늘 그녀가 자신을 보여 줄 기회를 유현진이 전부 뺏어갔다!유현진이 강씨 가문에 있을 때도 정인월은 유현진을 제일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혼한 지금도 여전히 자기 일을 망치다니!신미정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로 보았다. 유현진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이 마치 그녀에게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유현진이 모셔왔다는 말을 들은 정인월이 깜짝 놀라며 얼른 유현진을 불렀다. “현진아, 어떻게 된 일이야?”유현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인월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드리는 생신 선물이에요. 은영 선생님께서 부르시는 “백화정” 꼭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나야 듣고 싶지. 근데 어떻게 모셔 온 거야?”유현진이 대답했다. “은영 선생님께서 워낙 좋으신 분이니까요. 할머니가 은영 선생님 골수팬이라고 하니까 바로 할머니 생신 때 오시기로 약속해 주셨어요.”은영 선생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솜씨 하나는 좋은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벌써 날마다 은영 선생님이 매일 차를 마시던 찻집에서 기다렸던 걸 잊은 건가?부끄러운 줄 모르고 새장을 들어주고 물심부름이나 하면서 아무리 쫓아도 절대 굴하지 않아 귀찮음을 한 몸에 받았었다. 하지만 은영 선생님을 오게 만든 건 단순히 유현진이 계속 뻔뻔하게
차미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리 현진이 능력이야 대단하죠. 하려고 마음먹은 건 꼭 해내니까요.”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남자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요!”강한서: ...한성우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는 차미주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네 친구가 그렇게 대단한데 넌 왜 아직도 그렇게 하찮은 일이나 하면서 지내는 거야?”차미주는 어깨에 올려진 한성우의 손을 떼어내며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네 친구들은 20대에 이미 상장회사의 CEO에 한주시 모범청년이었는데 넌 서른이 되어도 유흥 업계 1위는커녕 아직도 하루 종일 여자들과 놀아나고 있으면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봐?”한성우가 입술을 움찔 떨었다. 차미주가 내뱉은 말은 유현진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오히려 유현진보다 더 날이 섰다. 말을 마친 유현진은 음식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쟤같이 입에 칼이라도 문 것처럼 독한 소리만 해대는 여자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한성우는 차미주 흉을 보려고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강한서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의 끝엔 유현진과 함께 있는 송민준도 있었다. 그에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민준 저건 파리 새끼처럼 또 현진이한테 말을 걸어?’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한성우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송민준이 나보다 잘난 게 뭐야?”“잘난 거라... 당연히 아직 결혼을 안 했다는 거겠지, 넌 재혼이잖아.”강한서: ...강한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그러자 한성우가 대답했다. “나도 진지하게 대답한 거야. 아직 총각이라는 거, 중요하잖아.”강한서가 얼굴을 굳혔다. “송민준한테는 오빠라고 불렀어. 나한테는 아직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 없는데!”‘고작 그런 일에 이렇게 화를 낸다고?’한성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강한서를 위로하며 말했다. “화내지 마, 화내지 마. 너도 오빠 맞아. 넌… 전남편 오
전 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욕을 지껄였다. “너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전 여사님, 전 의원님께서 굳이 여사님더러 용호를 저에게 빌려주라고 했던 일, 기억하시죠?”전 여사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 보니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당시 유현진이 용호를 빌리려 하자 전 여사는 신미정의 말대로 용호를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유현진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용호의 대여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유현진의 부탁을 거절하고 돌려보냈는지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잘했다는 칭찬할 줄 알았던 남편은 오히려 그녀를 나무랐다. 전 의원을 그녀를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른다며 욕했고 그녀에게 신미정과 유현진의 고부갈등에 끼어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강씨 가문은 언젠가 강한서의 것이 될 테고 유현진에게 미움을 사는 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 여사는 그 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유현진이 강씨 가문의 손주며느리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전 의원은 버럭 화를 내며 어떤 이유든 무조건 용호를 유현진에게 빌려주라고 강조했다. 전 여사의 인품이야 어떻든 그녀는 전 의원에게만큼은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전태평이 화를 내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결혼 이삼십 년 동안 얼굴을 붉히며 싸운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태평의 입장은 확고했기에 전 여사는 어쩔 수 없이 용호를 유현진에게 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론 빌려주기도 전에 유현진의 집안에 일이 생기면서 강한서와 이혼하는 바람에 생일 연회를 준비하는 일은 그녀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실은 전 여사도 전태평이 예전에는 늘 신미정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하더니, 왜 갑자기 이번 일에 끼어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현진은 어떻게 전태평이 자기에게
전 여사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자기를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데, 날 이렇게 대해!”전 여사가 자신이 기대하던 반응을 보이자 유현진은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유현진은 그 틈을 타 손에 묻은 케이크를 전 여사의 드레스에 문질렀다. “본인 처지도 좀 생각하세요. 따님도 세 분이나 계시는데.”그리곤 다시 접시를 들고 케이크를 가지러 갔다. 자신이 던진 작은 돌멩이에 괴로워하는 전 여사는 내버려 둔 채. 이렇게 하지 않고 전 여사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신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전 여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린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진태평이 순리롭게 승진할 수 있었던 건, 전 여사의 내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더러운 일이든 전부 그녀가 직접 나서서 그를 도왔다. 그녀는 늘 자신은 정략결혼을 한 다른 사모님들과는 다르다고 여겼었다. 그녀와 남편인 전태평은 연애결혼이었고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로 지낸 긴 시간 동안 그들은 처음과 같이 변함이 없었고 진태평은 기념일마다 그녀에게 직접 고른 선물을 건네주어 사모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오랜 결혼 생활 중에도 한결같은 남편을 만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그녀의 결혼 생활 중 유일한 오점은 최지영이었다. 전 여사가 이 일을 알게 된 건 8년 전 일이었다. 당시 진태평은 자기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며 끊임없이 사과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녀가 최지영을 떼어낼 것을 제안하자 전태평도 망설임 없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녀는 최지영을 떼어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신미정에게 사정을 설명해 가며 돈을 빌렸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 혼자만 모두에게 속고 있었다. 신미정은 그녀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미 전태평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때 신미정이 자신을 위로하던 말들을 떠올린 전 여사는 순간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토하고 싶어졌다. 신미정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