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엔 긴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사람들 무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전 예전에 송가람 씨의 서예 실력을 본 것 같아요.”“어디서 보셨어요? 어떠셨어요?”“어느 서예 전시회에서 본 것 같네요. 그 전시회는 마지철 선생님의 전시회였는데 마지철 선생님의 작품들 속에 송가람 씨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더라고요.”이때 다른 사람도 입을 열었다.“송가람 씨는 마지철 선생님이 직접 가르친 제자잖아요. 제가 마지철 선생님의 자택에서 송가람 씨와 선생님의 사진도 봤거든요.”“대박, 직접 가르쳤다고요? 그럼 엄청나게 잘 쓰시겠네요. 그럼 유현진 씨가 망신당하는 거 아니에요?”“유현진 씨가 스스로 글을 쓰겠다고 한 거잖아요. 망신을 당해도 스스로 자처한 것이니 어쩔 수 없죠.”“전 심지어 유현진 씨가 붓도 사용할 줄 모른다고 봐요. 유현진 씨는 피아노든 서예든 뭐든 못하게 생겼거든요. 차라리 무대에 올라가서 춤이나 추는 게 서예보다 낫지 않을까요? 전 굳이 실력도 안 되면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봐요.”“그래도 강씨 가문의 전 손주며느리인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체면은 지켜야죠.”“어차피 유현진 씨는 사생아인데 무슨 체면이 필요하겠어요? 전 유현진 씨가 뻔뻔하게 여기 팔순 잔치에 참가할 줄도 몰랐다고요. 이런 곳도 뻔뻔하게 와서 참가했는데 무대에서 춤추는 건 아무것도 아닐걸요?”“유현진 씨는 배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듣기론 이미 촬영 시작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맞아요. 유현진 씨에겐 그게 더 잘 어울려요. 웃는 얼굴로 돈 버는 직업이요.”긴 테이블에 준비물들을 세팅하고 있던 강한서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유현진의 서예 실력을 본 적이 있었고 딱히 나쁘진 않았지만 너무 좋은 것도 아니었다.만약 그녀가 혼자 글을 써서 정인월에게 선물했다면 정인월은 분명 나쁘지 않다고 말해줬을 것이었다.하지만 송가람도 같이 쓰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당연히
한성우는 두 사람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에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강한서에게 말했다.“형수님 정말 손가락 건초염 아니야? 손을 아주 심하게 떠는 것 같은데 글이나 제대로 쓸 수 있으려나?”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그 입 좀 닥쳐.”한성우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송가람은 한눈에 봐도 서예를 배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에 막힘이 없었고 짧은 시간 내에 벌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한성우는 목을 쭉 빼 들며 힐끔 쳐다봤다.송가람이 쓴 글씨체는 약간 흘려 쓴 한자의 서체 행서체였다. 그녀의 작품은 대담함과 적당한 기복이 느껴졌고 예술성이 아주 뛰어났다.비록 한성우는 서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송가람의 작품이 예술성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한성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현진 쪽을 쳐다봤다.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망했네.’‘망했네, 망했어.’유현진의 패배가 분명하게 느껴졌다.한성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니면 이렇게 해. 네가 일단 쓰러진 척하면서 이 술잔을 형수님의 작품에 쏟아버려. 이러면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강한서는 입술을 깨물더니 옆에 있던 술잔을 한성우에게 건넸다.“네가 해.”한성우는 강한서 손에 든 술잔과 유현진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난 맷집이 약해서 맞으면 아파.”강한서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쫄보.”한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신미정은 유현진의 글을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전 여사를 흘겨봤다.전 여사가 일부러 비아냥거리면서 말했다.“유현진 씨, 고작 몇 글자라고 이렇게 오래 쓰세요? 송가람 씨는 이미 다 쓰고 유현진 씨를 기다리고 있는데.”유현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붓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담담한 표정으로 글을 써 내려가면서 말했다.“제한 시간 있는 건 아니잖아요.”전 여사는 웃으면서 말했다.“당연히 제한 시간은 없죠. 하지만 늦게 쓴다고 해서 글씨가 어떻게 더 아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 여사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에이 아니죠. 우리 집 아이는 소심해서 유현진 씨와 비교할 수는 없죠.”정인월이 미간을 찌푸렸고 정인월도 눈뜨고 헛소리를 할 순 없었다.정인월은 고개를 들고 강한서를 보더니 이내 자신의 손자에게 평가를 맡겼다.“한서야, 네가 평가해 보거라.”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한성우는 눈썹을 치켜떴다.‘역시 할머니이시네. 누가 자신의 며느리를 건드는 꼴을 못 보시는 거겠지.’강한서는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의 작품을 보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송가람 씨의 글은 필적에 막힘이 없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네요. 반면 현진이의 글은... 독창적인 느낌이 있는 것 같네요. 각자만의 매력이 있으니 그냥 비긴 걸로 합시다.”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이게 비긴 거라고?’유현진은 살짝 웃음이 터졌다.‘지금 내 작품을 칭찬해 주려고 머리를 짜낸 거야?’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태로 보기엔 송가람 씨의 형태가 더 좋은 것 같고 의미를 따지고 보기엔 현진 씨의 작품이 더 의미가 있어 보이네요.”사람들은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주강운이 성큼성큼 웃으면서 정인월에게 다가갔다.“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제가 괜한 소리 한 거 아니겠죠?”강한서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정인월은 웃으면서 말했다.“아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난 당연히 네 탓을 하지 않을 거란다.”주강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맞아요. 저도 제 관점에서 얘기한 거예요.” 그는 고개를 돌려 유현진의 작품을 든 직원에게 말했다.“작품을 뒤집어서 들어주세요.”직원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네? 뒤집으라고요?”“네, 뒤집으세요.”비록 직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뒤집어 들었다.뒤집은 작품을 본 강한서는 순간 유현진의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챘다.사람들은 모두 유현진의
정인월은 말을 하면서 답례로 진 씨에게 선물을 나눠 주라고 했다.유현진은 감사 인사와 함께 선물을 받았다.그러나 송가람은 거절을 하면서 말했다.“제 실력은 현진 언니보다 못하니 할머니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네요.”유현진은 순간 동작을 멈추더니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가람 씨, 이건 어차피 정식 대결도 아니잖아요. 그저 좋은 글을 써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뿐인데 왜 실력이 못하다고 말하는 거죠?”진 씨도 그녀에게 말했다.“송가람 씨, 그냥 받으세요. 이건 사모님의 작은 성의입니다.”송가람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선물을 받아들었다.“제가 마음이 협소했네요.”유현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송가람이 그녀와 함께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송가람이 자신을 추켜세우려고 한 것이라면 기회는 아주 많았을 것인데 왜 굳이 자신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봐도 그녀를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추켜세우려는 것 같아 보였다.아니면 그저 너무 단순하게 제일 큰 악의로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유현진은 자신의 생각이 쓸데없는 생각이길 바라고 있었다.송씨 가문의 아가씨가 굳이 그녀를 발판으로 삼아 밟으면서까지 자신을 추켜세울 리가 없었다. 긴 테이블을 치우자 주강운이 강한서와 한성우 곁으로 다가갔다.한성우가 그에게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강운아, 왜 이제야 왔어? 난 네가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주강운이 답했다.“요 며칠 사건이 좀 많아서 사무실도 많이 바빴거든. 그래서 좀 늦게 왔어.”그는 말을 하면서 이미 시선을 유현진에게로 돌렸다.“제가 마침 타이밍 기가 막히게 온 것 같더군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렇게나 흥미로운 작품들을 못 볼 뻔했어요.”유현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강운 씨만 아니면 누구도 몰랐을 거예요. 심지어 제가 직접 작품을 뒤집으면 서프라이즈가 개그로 되어버리잖아요.”주강운이 작품을 뒤집어 본 것은 그녀가 스스로 가서 작품을 뒤집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통쾌한 일이었다.
유현진은 정인월이 준 선물을 슬쩍 꺼내보더니 이내 선물에 담긴 봉투의 두께를 확인하였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한성우를 보면서 말했다.“아마 대충 봐도 40억은 될 것 같아요.”한성우도 봉투를 만져보면서 말했다.“40억보다 더 많을 것 같은데요? 이거 만약 새로 찍은 지폐이면 대충 60억 정도 같네요.”“아무리 새로 찍은 지폐라도 60억이라는 돈이 이렇게나 얇은 순 없어요.”“아니요. 분명 60억은 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봉투가 이렇게 클 리가 없잖아요.”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순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창피하게 느껴졌다.한성우의 재촉에 유현진은 슬며시 봉투를 열어보았다.잔뜩 기대하는 마음과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봉투 안에는 또 다른 봉투 하나가 있었다.유현진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성우는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제 생각엔 어쩌면 형수님의 말대로 40억일 수도 있겠네요.”유현진은 봉투를 꺼내 다시 열어보자 또 다른 봉투가 또 나왔다.두 사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한성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설마 20억일까요?”“20억도 돈이에요.”유현진은 바로 세 번째 봉투를 열어보았다.손을 넣으니 안에는 작은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유현진은 순간 멈칫하였다.옆에 있던 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얼마예요?”유현진이 답했다.“카드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요.”한성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역시 할머니께서 통이 크시네요. 얼른 카드 안에 얼마 들어 있나 확인해 봐요.”유현진은 손을 넣어 그 카드를 꺼냈다.그리고 그 카드를 본 세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그건 은행 카드가 아닌 강한서의 증명사진이었다.사진 속의 강한서는 대학 다닐 때의 모습이었고 배경을 보니 대충 태주대 운동장 같아 보였다. 태주대의 실험실은 바지 모양의 특이한 건축물이었다.사진 속의 강한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릇파릇해 보였다. 그는 운동복을 입고 잔디에 앉아 땀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유현진이 음식 가지러 가자 한성우가 배시시 웃으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사진은 효과가 없어. 다음번엔 너를 포장해서 직접 선물해 봐. 그러면 형수님도 받아주실 거야.”강한서가 그를 흘겨보면서 말했다.“드라마 좀 그만 봐.”봉투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강한서는 유현진이 봉투에서 그의 사진을 꺼냈을 때 깜짝 놀랐다.하지만 정인월이 선물한 것이라고 하니 그는 정인월이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한성우가 계속 입을 열었다.“형수님께서는 여전히 너의 얼굴을 제일 좋아하시네. 형수님이 너의 사진을 봤을 때 그 표정 봤냐? 아주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나오더라.”강한서가 멈칫하면서 말했다.“정말이야?”“만약 형수님이 널 싫어하셨다면 너의 사진을 보자마자 아마 질색하셨겠지. 근데 아까 형수님은 사진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시더라! 유현진 씨가 얼굴 빠순이셨다니. 형수님의 SNS 계정 팔로우만 봐도 모두 잘생기고 몸 좋은 사람들만 팔로우하셨잖아. 그리고 너 정도의 얼굴이면 대부분 셀럽보다 훨씬 낫지!”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금 나랑 셀럽들을 비교해 보는 거냐?”한성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지금 그게 문제냐? 제일 중요한 건 유현진 씨가 너의 얼굴을 좋아한다니까! 그게 너의 가장 큰 우세란 말이야!”강한서가 그를 흘겨보면서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하냐?”유현진이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예전에 유현진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실에 들어가게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러 갔을 땐 그녀는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었다.의사는 유현진의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시켜 말을 걸어 보라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현진은 눈을 떴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불렀었다.“오빠.”그 후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칭찬의 말을 잔뜩 했었고 심지어 그에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난리까지 쳤었다.한성우 또한 매번 그의 얼굴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한성우
유현진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대표님은 자신의 여동생에게 약한 거 아니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지?’유현진은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이내 송민준이 원래 그런 다정한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어차피 그의 말은 무모한 행동을 한 송가람 대신 사과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뭐 어차피 진짜로 열심히 배웠다고 해도 아마 가람 씨한테는 상대도 안 될 거예요. 가람 씨의 실력은 정말 아주 좋더라고요.”송민준은 한껏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유현진은 가정 교육을 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아주 착했다.“전 여사님이 현진 씨가 피아노도 칠 줄 안다고 그러시던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게 한번 들려주세요.”놓친 지난 20여 년을 위해 그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아가고 싶었다.마침 망고 파이를 한입 문 그녀는 다시 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었다.그가 꺼낸 의미심장한 말에 그녀는 송민준이 그녀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송민준도 자신의 말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을킬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전 그저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야 맞춤형 방송을 찾아줄 수가 있거든요.”유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망고 파이를 마저 삼키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저 피아노 잘 못 쳐요.”송민준은 깜짝 놀랐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한테서 그녀가 유람선에서 피아노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제가 칠 줄 아는 곡은 딱 하나뿐이거든요.”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를 느낀 유현진은 사실대로 자신의 피아노 실력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사람들 앞에서 잘 칠 수 있는 곡은 하나뿐이라서 다음번에도 그 곡을 치면 사람들이 의심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대표님, 다음에 저한테 방송 배정해 줄 때 절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쳐야 하
얼마 지나지 않아 하현주는 그녀가 아이들과 몰래 놀았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녀를 엄하게 꾸짖었다.하현주는 그녀를 아주 아꼈기에 도저히 손댈 수가 없었고 그저 손바닥에 힘만 살짝 실어 엉덩이를 때렸었다.“나중에 저희 엄마가 드디어 제가 피아노를 배울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셨고 거기다 많이 바쁘셨으니 더 이상 저를 피아노 연습하라고 강박하지는 않았거든요.”더 나중에 그녀의 집은 더욱 잘살게 되어 큰 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녀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즐겁지 않았다.송민준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그렇게 피아노가 싫었으면 왜 피아노를 망가뜨릴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피아노를 망가뜨리면 더 이상 연습 안 해도 되고 어머님께 꾸중 들을 일도 없게 되잖아요.”유현진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그럴 용기가 없었거든요. 민준 씨가 이해 못 할 수도 있는데 그때 저희 집은 그리 잘사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그 피아노는 2000만 원 정도 했거든요. 그때 당시 2000만 원은 엄청 큰돈이었죠. 저희 엄마는 분명 그 돈으로 차를 뽑을 수 있었음에도 저에게 피아노를 사주셨거든요. 게다가 저에게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아빠랑 싸우기까지 했었어요. 그래서 그때의 전 엄마한테 매를 맞더라도 피아노를 망가뜨릴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 피아노는 저희 엄마가 피땀을 흘려 번 돈으로 사준 거니까요.”그랬기에 그녀가 예체능으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하현주 심하게 반대를 했었다. 하현주는 자신의 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녀가 한순간의 열정으로 예술을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서 흥미를 잃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을까 봐 하현주는 반대를 했었다.그녀의 일반 과목 성적이 높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하현주가 매번 그녀에게 그녀가 아무리 예체능 과목에서 1등을 한다 해도 일반 과목 성적이 전 학년 20등 안에 들지 못한다면 그녀를 예술 학교로 보내지 않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성적이 아주 잘 나왔을 땐 그녀는 성적표를 들고 하현주에게 달려가 한껏 자랑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