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주먹을 꽉 쥐더니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주강운 때문에 이러는 거야?"유현진은 강한서를 밀치고 빨개진 입술을 닦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당신 또다시 힘으로 나에게 이런 걸 강요하면 나 당신 가만 안 둬!"신혼 첫날, 그녀는 강한서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강한서에게 제압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기분은 유현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었다."어쩔 건데?"강한서는 얼어버린 표정으로 물었다."유현진, 내가 주강훈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했지?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유현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일 때문에 만났는데 왜 안돼?""일 때문에?"강한서가 화를 내며 물었다."어제 그 사고를 쳐놓고 당신 어떻게 빠져나갔어? 누가 도와줬는데? 그런데 왜 당신은 나한테 털어놓지 않는 거야? 당신 마음속에 내가 있기나 해?" 유현진은 "누가 도와줬는데?"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오직 강한서가 마지막에 한 말만 들렸다."털어놔? 털어놓으면 그러라고 했겠어? 날 도왔겠어? 당신은 한 번도 날 도운 적 없어! 나 교통사고로 병원에 들어갔을 때 서명해 줄 가족조차 없었어. 당신 뭐 하고 있었어? 그리고 강민서가 증조할아버지 다치게 했을 때, 그때 당신은 또 어디 있었어?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 단 한 번도 내 옆에 없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한테 털어놔? 털어놓으면 당신이 내 앞을 막을 게 뻔한데!""그래서 주강운한테 갔어?"강한서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변했다."너한테 난 대체 뭐야? 이 일로 회사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은 줄은 알고 있어? 당신은 늘 후과를 생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벌였어. 항상 당신 뒤에서 뒤처리하게 만들지!"유현진은 창백한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쥐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 뒤처리 부탁한 적 없어.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져! 내일 회사로 가서 내가 한 일이라고 공개할 거야. 마음대로 하라고 해!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이 일이 회
강한서의 표정은 이미 어둡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의 표정은 그늘에 가려진 듯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유현진, 당신이 이혼을 원했어.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외투를 들고 말했다."출장 갔다 오면 바로 이혼하는 거야."말을 끝낸 강한서는 유현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유현진은 긴장한 몸짓으로 등에 힘을 주고 소파에 앉아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간신히 힘을 풀었다.강한서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강한서가 화를 낼 때면 되돌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지만 강한서가 차분해질 때면 이미 늦었다.'드디어 이혼하는 건가?'유현진은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드디어 이혼하게 생겼지만 그녀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그녀는 무릎을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멀지 않은 탁자 위에 전화기는 꺼지지 않은 상태로 놓여있었다.신미정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인기척이 없어진 뒤에야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이날, 유현진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어르신이 묵었던 방에서 밤을 보냈다.도우미는 이미 방을 깔끔하게 정리했고 이불도 깨끗이 말렸다. 이불에서는 은은한 햇빛 냄새가 가득했다.포근하고 편했다.하지만 그녀는 잠에 들지 못했다.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위층으로 올라가던 강한서의 눈빛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가 강한서가 한 말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밤새 뒤척이던 그녀는 결국 몇 시간도 자지 못했다.날이 밝자마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강한서가 일어난 것 같았다. 황씨 아주머니는 분주하게 강한서의 짐을 챙겨주었다.그녀의 기억으로 강한서는 출장을 서명시로 한 주일 정도 간다.황씨 아주머니는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강한서의 취향이나 습관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물건을 담을 때마다 강한서의 의견을 물어보았다.강한서는 몇 번 대답하더니 나중에는 귀찮은 듯 아주머니에게 알아서 담으라고 했다.약 한 시간쯤 뒤, 거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밖
"저 안 했는데요."민경하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두 분의 사정이 딱해서 그래요. 나한테도 그런 일이 생겼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만약 사모님이라면 아마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놨을 거예요."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유현진이 뭐라고 했어요? 왜 유현진 편을 들어요?"민경하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은 저한테 그런 얘기 안 하죠. 보통 대표님한테 어떤 좋은 일이 있는지, 아니면 나쁜 일이 있는지, 그런 것만 물어보세요."강한서는 유현진의 말을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카나리아니까 주인의 상황을 물은 거겠죠. 아니면 어떻게 사랑받아요?""카나리아가 함부로 하게 놔두는 주인은 없겠죠? 거금을 들여 장난감도 사주셨으면서."…...강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깃털 예쁘게 자라라고 돈 좀 쓰는 데 문제 있어요?"민경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렇다고 치죠."강한서는 민경하의 웃음에 불쾌해져서 다시 한번 강조해 말했다."깃털 빠지면 돈 아깝잖아요!"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대표님, 새 키워요?"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그들을 태운 차는 이내 병원 지하 주차장에 도달했다.민경하는 차에서 내린 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약 20분쯤이 지나서 민경하는 어린 소녀를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아이는 아직 정신도 못 차린 채로 민경하의 어깨에 기대 눈도 뜨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아이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한서 삼촌, 우리 어디 가요?"강한서는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놀러 가."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진작에 말했어야죠. 옷 예쁘게 입게."강한서가 말했다."지금도 너무 예뻐."은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거짓말쟁이, 저번에 분명 나한테 불에 탄 성냥 같다고 했잖아요."강한서는 은서에게 그 검은 모자를 사주었다. 그런데 은서는 마침 검은 모자를 쓰고 나왔다."불에 탄 성냥이 얼마나 멋진데."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사람은 갖고 싶
유현진은 얼굴이 새파래졌다."아주머니, 일단 막아요. 우리 엄마 몸에 손 못 대게 해요. 지금 당장 갈 테니까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차이현에게 말했다."감독님, 죄송하지만 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차이현도 마침 그녀의 통화를 들었다.사실 차이현은 그녀와 촬영하는 동안 그녀의 집안일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기에 요해하고 있었다.그녀에게 장기 혼미 상태로 병원에 있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비록 집안에 일이 많지만 한번도 촬영에 지장을 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유현진은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중 가장 겸손하고 총명하며 또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갖춘 배우라 차이현은 그녀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차이현은 바로 답했다."가보세요. 오늘 촬영 거의 마무리됐어요. 나머지 신은 어차피 장소를 바꿔야 하니 다음에 촬영하면 돼요."유현진은 다급히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메이크업 그대로 남산 병원으로 향했다.남산 병원.하현주의 병실 앞에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제일 앞에 선 남자는 키가 크고 살집이 있으며 왼쪽 눈가에는 긴 흉터가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 검은 가죽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남자는 보기만 해도 악독해 보였다.그 뒤에는 양아치 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 문신한 남자, 그리고 얼굴 곳곳을 피어싱으로 장식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감히 옆으로 지나가지도 못했다.조씨 아주머니는 남자들이 폭력을 쓸까 봐 병상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까처럼 하현주의 호흡기를 떼려고 할까 봐서 말이다.문 어귀에 있는 의료진도 두려움에 멀리 서 있었다. 혹시라도 병원 이미지와 다른 환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담당 간호사는 용기를 내 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앞에 선 흉터남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봐, 간호사.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우리도 돈은 받아야 할 것 아니야? 이게 몇 년짼데 아직도 안 갚았어. 우리도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 먹고는 살아야지. 법치 국가에서
머리띠를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그녀의 머리는 그대로 뒤로 넘겨져 있었고 담담한 중전 메이크업은 그녀의 차가움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당신들 누구죠? 누가 보냈어요?"흉터남은 유현진에게서 시선을 멈추더니 머리를 치켜들며 물었다."넌 뭐야?"유현진은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이 병실에 있는 사람, 우리 엄마예요."남자는 유현진의 차림과 명품 백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잘 찾아왔네."남자는 겨드랑이의 가죽가방에서 차용증을 가득 꺼냈다."이건 당신 엄마가 빌린 돈이야. 딸이니까 대신 갚아야겠지?"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용증을 넘겨받았다.대충 보아도 열댓 장이다.몇백만 원짜리 차용증으로부터 몇억짜리 차용증까지, 차용증에는 모두 신미정의 사인과 지장이 찍혀있었다.제일 오래된 거로는 십여 년 전이고 가장 최근이라야 팔 년 전이다."모두 열일곱 장이야. 이자까지 다 하면 80억. 나이도 젊어 보이니 할부로 받으려 했는데, 프라다에 루이비통에 어마어마한 걸 보니 이 정도 돈은 모자라지 않겠지? 한꺼번에 내놔."유현진은 바로 차용증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우리 엄마가 빌린 거 아니니까, 빌린 사람한테 가서 받아요."유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비켜요!"흉터남은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차용증까지 다 있는데 인정 안 해?"유현진은 흉터남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투를 바꿔 말했다."저기요, 누구 대신 빚 받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차용증의 진위를 떠나 이자만 봐도 은행 대출보다 4배나 높아요. 이거 사채예요. 사채는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어요. 경찰서에 가져가도 기껏해야 30% 정도의 이자만 받을 수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빚받이만 몇 년을 다닌 남자들은 처음 겪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어이, 예쁜 동생. 가방끈 좀 긴가 봐? 나한테 법을 따져? 이 오빠가 법학 석사과정 밟을 때, 예쁜 동생은 발육도 못 했어."흉터남의 성희롱에 세 시다바리는 음흉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라보며 웃었다."예쁜 동생이 이 돈 갚으면 우
유현진은 멈칫했다."뭐라고요?"흉터남은 유현진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설마 몰랐어?"유현진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뭘 몰라요?""유상수와 하현주 이미 이혼했어. 유상수가 안주니까 병원에 찾아온 거야.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우리가 왜 너처럼 예쁜 동생을 괴롭히겠어?"유현진은 몸이 굳어버렸다."뭐라고요?""예쁜 동생 부모님 이미 이혼했다고. 그러니까 유상수도 더는 예쁜 동생 엄마의 빚을 안 갚아 준다고."남자는 짜증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왜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게 만들어! 당장 돈 내놓지 않으면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유현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엄마 사고 났을 때 분명 이혼 절차는 아직이었는데, 왜 이혼했다고 그러는 거지?만약 정말 이혼했다면 언제 한 거지? 재산은 어떻게 분할했지?'유현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전화 한 통만 할게요."유현진은 바로 유상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유상수는 받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주강운에게 연락하려다가 강한서의 말이 떠올랐다.이내, 유현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한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성우는 미팅 중에 유현진의 전화를 받았다.한성우도 요즘 인터넷에 퍼진 강연 사건을 지켜보았기에 유씨 집안의 추잡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하도 강한서가 요 며칠 화가 단단히 나서 말이지, 한성우는 진작에 그들 부부에게서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었다.그 와중에 유현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니 한성우는 두 눈이 반짝였다.미팅이 끝나기도 전에 한성우는 휴대폰을 들고 나갔다. 한성우의 비서는 한성우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긴 줄 알았다."여보세요, 형수님. 무슨 일 있어요?""한 대표님. 혹시 시간 되세요?"한성우는 서류를 비서에게 던져주며 말했다."시간 있어요. 왜요?""병원에 와주실래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어느 병원요? 주소는요?""문자로 보내드릴게요.""그래요. 바로 갈게요."유현진은 조폭들을 훑어보며 나지막한
주강운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갈래?"한성우가 물었다."어디래?""사무소로 데리러 갈게."주강운이 대답했다."그래, 이따 보자."흉터남은 통화하는 유현진에게 짜증을 부렸다."안됐어?""됐어요."유현진은 휴대폰을 들었던 팔을 내리며 말했다."친구가 곧 올 거니까 차용증에 대해서 상의하죠. 일단 당신 사람들 자리 비키게 해줘요. 그리고 간호사들에게 호흡기 세팅해 달라고 하세요."남자는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돈 내놓으면 꺼져줄게."유현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래요? 만약 우리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땐 돈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들 싹 다 처넣을 거니까!"흉터남은 피식 웃으며 유현진의 턱을 잡았다."예쁜 동생 나 지금 협박하는 거야?"유현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본능적으로 흉터남의 손을 쳐냈다."퍽-"문신남은 유현진의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때렸다."이 년이! 감히 우리 형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당장 사과해!"유현진은 문신남이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남자와 여자의 힘은 완전히 다르다. 문신남에게 따귀를 맞은 유현진은 머리가 윙윙거리며 얼굴 절반이 아프고 저렸으며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유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문신남은 더 신나서 말했다."귀먹었어? 당장 사과해!"문신남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뒤에서 문신남을 세차게 걷어차는 바람에 유현진의 얼굴을 가격하지 못했다. 문신남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한성우는 다리를 내저으며 혀를 차더니 문신남을 노려보며 말했다."요즘 내가 복싱을 그만둬서 말이지, 아니면 너 여기서 들려 나갔을 거야."문신남은 머리를 벽에 박아 커다란 혹이 올라왔으며 허리뼈는 부스러진 듯 아팠다. 문신남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주강운은 다급히 유현진을 일으켜 세웠다.따
주강운은 차용증을 훑어본후 고개를 들고 물었다."하현주여사님이 그쪽한테서 돈을 빌릴때 옆에 있었던 보증인이 있습니까? 아니면 담보로 물건을 맡아놨다던가?""없습니다."흉터가 있는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흰 종이에 그녀가 쓴 글이랑 도장만 있으면 되는거 아닙니까?""보증인도 없고 담보도 맡지 않았고 차용증 하나만으로 돈을 빌려줄 생각은 어떻게 한겁니까? 돌려받지 못할거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이에 남자는 경멸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저희 이쪽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빌린 사람 인적사항 같은건 모를리가 없고 게다가 집에 있는 물건까지 다 알아요. 집주소만 알면 도망가지 못해요.""도망가지 못한다 해도 그러면 돈은 어쩝니까? 아무런 담보도 맡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상대방이 갑자기 파산해서 대출도 못 갚으면 어떡하십니까? 도망가지 않는다는 보장 있습니까?"주강운은 숨을 고른후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 돈을 다시 돌려받을려는 심산이였으면 담보를 맡았어야 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봅니다. 진짜 빌려준 돈 만을 받으려는 생각입니까?"흉터가 있는 남자는 질문세례에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무슨 뜻이지요?""아무것도 아닙니다."주강운은 손에 들고 있는 차용증을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들고 답했다."하여사님이 도장을 찍은거라고 하시니 필적검사 한 번 해봅시다."흉터가 있는 남자는 뭔가 꼬리를 밟힌듯이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몇 년동안 누워있었는데 어떻게 필적검사를 합니까? 그 도장에 그 사람 지문이 있으니 된거 아닙니까?""누가 무조건 하여사님이 깨어 있어야 필적검사를 할수 있다고 했습니까?"주강운은 상대방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을 계속해 이어갔다."예전에 글 썼던 필적만 있으면 됩니다."흉터가 있는 남자는 이에 표정이 급변했다.그는 의심어린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방금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생각하고 있었다.(다 태웠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또 뭔 필적검사야?)"갑시다."주강운은 태연하게 답했다."제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