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눈을 부릅뜨고 거듭 확인한 뒤에야 손을 풀었다."성우 씨?"조준은 더 높게 불렀다."아직 자고 있어요?""깼어요."한성우는 헛기침하며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무슨 일이죠?"조준이 말했다."휴대폰을 술집에 두고 가서 내가 가져왔어요. 문 좀 열어봐요."차미주는 눈을 부릅뜨고 협박했다."문 앞에 두고 가시라고 해!"한성우는 옷을 걸치며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차미주도 이런 행동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휴대폰을 주겠다는데 문을 열지 못한다? 뭔가 있다는 것이 뻔하다.이런 작은 룸은 문과 침대가 마주 향했기에 문을 열게 되면 방안이 다 보이기 마련이다.그렇다고 욕실에 숨는다고 가정했을 때, 만약에 한성우가 조준에게 입을 나불거린다면 차미주는 제때 막을 수 없게 된다.한성우는 팽팽 돌아가는 그녀의 눈을 보며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이렇게 해요. 이따 내가 문 열면 바로 문 뒤에 몸을 숨기는 거예요. 그럼 들키지 않을 거고 내 말도 똑똑히 들을 수 있잖아요.""그러다가 나 엿 먹이면?"한성우는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나도 체면이 있지, 여자라면 안 가린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 안 쪽팔려요?"차미주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한성우의 종아리로 발길질했다.한성우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내 그녀의 발을 피했다."성우 씨?"조준이 또 한 번 불렀다.한성우가 말했다."잠시만요, 옷 좀 입고요."그러고는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가요."차미주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성우를 따라 문 앞까지 갔다.한성우가 문을 열었다.조준은 한창 머리를 숙이고 카톡을 하고 있었다. 조준은 한성우 가슴의 손톱자국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어제 잘 놀았어요?""그럭저럭요."한성우는 휴대폰을 넘겨받으며 말했다."밤새 고양이한테 긁혔어요."차미주는 입가를 실룩였다.'더 긁어버려?'"무슨 고양이요?"조준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병원에 볼일 있어서 가볼게요."조준은 그저 한성우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 여기고 더는 농담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문을 닫은 후, 차미주는 맥없이 축 처져서 풀이 죽어 있었다."이름이 뭐예요?"차미주는 이내 경계심을 일으키며 한성우를 바라보았다."뭐 하려고?"한성우는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담담하게 말했다."됐어요. 상관없어요." 그러고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사인을 하더니 차미주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여기 적힌 금액이 괜찮다면 합의 보는 거로 하죠. 뭐 부족하다면 법적 절차 밟아도 좋아요."사천만 원짜리 수표다.차미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내 다리를 들어 또 한 번 한성우를 걷어차려고 했다.얼마 안 되는 사이에 몇 번이나 당했던 한성우는 경험이 생겼다.그녀가 다리를 드는 순간 한성우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챈 후 다리를 움켜쥐고 침대로 눕혔다.한성우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잘 들어요. 나 여자한테 손 안 대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내가 어떤 행동 할지 장담 못 해요."차미주는 아주 난감한 포즈로 한성우에게 제압당했다.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다리가 쭉 찢어져 허벅지의 빨간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었다.한성우는 흠칫하더니 침대 시트를 보았다. 침대에도 덕지덕지 피가 묻어있었다.한성우는 머리를 숙여 차미주를 바라보았다. 차미주의 빨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지금까지 지켜온 순결을 한성우 이 말미잘 같은 놈에게 주다니. 게다가 돈을 던져줘?'차미주는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나 힘도 안 줬는데?'차미주는 눈물 콧물 짜가면서 말했다."나 아직 연애도 안 해봤단 말이야.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도 못 해보고 너 같은 개자식한테 내 처음을 줬어. 그것도 모자라서 돈을 던져줘? 네가 억울해? 내가 억울하다고. 이 나쁜 놈, 멍게 해삼 말미잘 같은 놈. 나 진짜 재수
이 시각, 한성우가 묶었던 방의 침대 아래에는 촬영 소품인 혈액 팩이 외롭게 떨어져 있었다.________강한서가 잠에서 깨었을 때, 유현진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강한서는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새로 온 도우미 황씨 아주머니는 강한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해장국부터 드세요. 사모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어요. 보글보글 끓이는 중이에요."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황씨 아주머니는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해장국을 그릇에 담고 들고나왔다.강한서는 한술 뜨고는 그릇을 들고 아예 유현진이 있는 소파 뒤로 왔다.유현진은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뭔가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다가오자 유현진은 다급히 노트북을 덮어버렸다.…...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젯밤…... 당신이 나 데리고 왔어?'"응."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가볍게 대답했다.강한서는 자기의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나 여기가 엄청 빨갛던데, 당신 나한테 뭔 짓 한 거지?"유현진은 눈가를 씰룩였다.'필름 제대로 끊겼네.'"정말 아무것도 생각 안 나?"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뭘 기억해야 하는데?"'하,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폰으로 찍어두는 건데.'"술에 취하고 그 뒤 일은 하나도 생각 안 나는 거야?"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 기억을 되돌려 보았지만 한성우가 그에게 칵테일을 넘겨준 것을 끝으로 뒤의 일은 흐릿하기만 했다.그는 어렴풋하게 유현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현진은 그의 옷을 벗기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한 강한서는 눈빛이 그윽해지면서 유현진을 향해 말했다."뭐 생각나는 게 있기도 하고."유현진은 의외였다.'뭐야, 진화한 거야? 완전히 끊긴 거 아니었어?""그럼 당신…...""나 취하면 좋아?"강한서는 느닷없이 한마디 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했다.강한서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나 취하면
유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현진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문자 못 봤어?""봤어요."유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봤는데 왜 전화 안 했어?""그 시간에 연락하신 걸 보면 유현아 때문에 전화 주셨겠죠."유상수는 흠칫했다. 유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유상수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어릴 적에도 한 번 싸운 적 없던 애가 대체 왜 그랬어? 왜 현아를 그렇게 때렸어?""유현아가 말 안 했어요?""한서가 취해서 부축해 줬는데 네가 화났다고 그러더라고. 그럴 필요 있어? 현아가 자기 형부한테 뭐 딴맘이라도 먹을까 봐서 그래?"유현진은 코웃음을 쳤다."부축이요? 유현아가 그렇게 말해요?"유상수는 그녀의 코웃음에 뒤통수가 싸늘해 났다. 그 웃음은 하현주와 너무 닮았다."그게 아니면 뭐야?"유현진은 쌀쌀한 말투로 말했다."나 어릴 적에 키우던 토끼 생각나요?"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생각이 안 나는 게 뻔했다."반급 친구가 생일 선물로 나한테 토끼 한 마리 줬었어요. 유현아도 그 토끼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 걸로 만들려고 했죠. 하지만 내가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아빠는 그 토끼를 유현아에게 줬어요. 결국 토끼는 차에 치여 죽었죠."유상수는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있었던 일이지만 상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유현진이 죽은 토끼를 안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기억만 났다."유현아가 원하는 건 아빠는 다 주려고 했어요. 그게 내 거라도 말이에요."유상수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상냥하게 말했다."그 일은 아빠가 잘못했어. 현아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그 토끼가 저절로 뛰어갔는데 어쩌겠어, 어린 현아가 어떻게 잡아?""그래요, 어렸으니 내가 봐줬죠. 지금은요? 스물셋이에요, 아직도 어려요? 강한서가 취한 틈을 타 유현아는 옷 다 벗어버리고 강한서의 침대에 올랐어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부모의 편애가 이 지경까지 무섭다니."정말 강한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유현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다 같이 확인해 보죠. 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따져보자고요."유상수는 목이 멨다.유상수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유현아를 바라보며 의구심이 들었다.유상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알아볼게.""잠깐만요."유현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빠, 구암동 고아원 후원금은 언제 이체하실 거예요?"유상수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회사 매출이 떨어져서 더는 후원 못 할 것 같아. 시청에 연락 넣었으니 시청에서 도와줄 거야." 유현진은 표정이 굳어졌다."아빠, 후원금은 엄마 카드에서 나가는 거예요. 회사 매출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한들 월 2천만 원이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 고용해서 엄마 지분 나한테 넘겨요. 후원금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유현진의 말에 유상수는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했다."네 엄마 매달 병원비만 몇천만 원이라 일 년이면 몇억이 들어가. 넌 우리 집안이 강씨 가문처럼 재산이 많은 줄 알아? 네 엄마 병원비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무슨 돈으로 후원까지 해?"유현진은 쌀쌀하게 웃었다. 유상수는 교묘하게 지분 얘기를 피해 갔다. 만약 정말 하현주의 돈으로 병원비조차 지불하기 힘들다면 유상수는 본인이 먼저 애물단지를 유현진에게 넘겼을 것이다.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하현주는 유상수의 죄증을 낱낱이 찾아 내 겨우 유상수를 재산포기 각서에 사인하게 했다. 그러니 유현진은 하현주의 심혈을 꼭 지켜 내 유현아한테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안 넘긴다 이거지. 그래, 내가 직접 찾아올 거야!"유현진이 답이 없자 유상수가 말했다."현진아, 네 엄마 건강이 우선 아니겠어?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국민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너 그 시설에 남다른 감정이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지만 일단 우리가 살고 봐야지."'시설에 후원하면
강한서는 그녀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이내 마음이 녹아내렸다.만약 유현진이 평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면 강한서는 아마 잠시 고민했었겠지만 이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니 전혀 거절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강한서는 이내 승낙하자 유현진은 위층으로 올라가 외출 준비를 했다.30분쯤 지나니 인내심이 바닥난 강한서가 도우미를 시켜 유현진을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유현진이 마침 내려왔다.유현진은 웨이브를 주어 더 윤기 나는 헤어를 연출했고 검은색 브이넥 롱드레스를 입어 몸매를 더 부각했다.그녀는 머리를 살짝 들고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그녀의 정교한 외모는 굳이 주얼리를 하지 않아도 빛나고 있었다.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강한서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미소를 지었다."가자."유현진의 패션은 과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워낙 귀티가 흐르다 보니 누더기를 입고 걸어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마치 그녀의 성격처럼 강렬했다.부부가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민경하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대표님 이제야 철든 거야?'민경하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이내 차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차에 오르고 나서야 민경하가 물었다."사모님 먼저 모셔다드릴게요. 어디 가세요?"유현진이 대답했다."강 대표와 함께 태주 대학교로 가요."민경하는 문뜩 유현진도 태주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생각났다.유현진은 비주얼이 사기인 데다가 통통 튀는 성격이라 사람들은 그녀와 태주 대학교가 연관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다.태주 대학교의 진입 장벽은 아주 높다. 평소 모의고사에서 지역 10등 안에 들지 못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아무리 특기생이라고 해도 성적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다.민경하는 유현진의 대학입시 점수가 상당히 높다고 기억한다.그녀는 전공과목 점수를 제외하고도 한주시에서 태주 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교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전공과목 점수를 합치면 2등을 월등히 초과했다.그녀는 본인의 전공에서 아주 뛰어난 존재이다
'왜 저렇게 심취해서 보는 거야?어딜 보고 있기에?'강한서는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보았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펼쳐진 책 속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으며 유현진은 한창 라방을 보고 있었다.상대는 금방 운동을 끝냈는지 옷이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무슨 얘기를 했는지 시청자들은 열띤 호응을 했으며 유현진도 빠른 속도로 '좋아요'를 눌러댔다.이내 남자는 웃통을 벗어버렸다.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독서를 통해 정서 조절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거나 보고 있었다니.강한서는 굳은 표정으로 책을 들어버렸다. 지지대가 사라지자 휴대폰은 그대로 유현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그제야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끝났어?"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들어 팔로우를 취소하고 차단 했다.…..."강한서, 이건 너무하잖아. 내가 뭐 보는 것까지 다 참견해야 해?"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치가 없는 건 적당히 봐. 당신 이러다가 바보 된다.""그게 왜 가치가 없어? 그럼 당신은 어떤 가치 있는 인플루언서를 팔로우했는데? 공유해 봐."말을 끝낸 유현진은 강한서의 휴대폰을 낚아채 강한서의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안면인식 잠금을 풀었다. 그러고 틱톡을 켰다.강한서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최소한 당신 거보다 가치 있을걸.""안 믿어."유현진은 강한서의 팔로우를 확인했다. 강한서의 팔로우는 오직 한 사람, 바로 유현진이다.흠칫하는 유현진에게 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최소한 내 팔로우 상대는 단순한 바보지. 당신처럼 껍데기만 화려한 인간이 아니라."…...유현진은 잠시 설렐 뻔했는데 강한서의 찬물 끼얹는 한마디에 설렘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어때."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이 팔로우한 사람보다 낫지?"유현진은 어금니를 깨물고 휴대폰을 던져주었다.괘씸한 마음에 말대꾸하려던 그때, 누군가 노크했다.강한서는 이
이런 자기 자랑이 대다수인 홍보 강연 원고는 전혀 강한서의 취향이 아니다.유현아는 프로젝트 홍보보다 본인 자랑에 더 신경 썼다.그녀는 인기도 많았고 자기의 장점도 잘 이용했다. 두 번의 홍보 강연으로 유현아는 몇십만이나 되는 팔로우를 얻었으며 긍정적인 기사와 실검이 수두룩하게 생겼다.사실 이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마치 유현아와 회사를 세트로 만드는 듯한 행동이라 나중에 다들 유현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한성 그룹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유현아의 이미지는 점차 회사의 이미지와 겹친다.만약 유현아가 늘 지금처럼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면 회사도 손해 볼 것 없다.하지만 신이 아닌 사람이다 보니 늘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사건 사고라도 생겨서 이미지가 몰락하면 한성을 노리던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펜을 들어 그녀의 이야기로 감성팔이 하는 부분을 지워버리고 주제와 연관된 내용만 보류했다.그리고 다시 유현아에게 건네주었다."이렇게 해."원고를 확인한 유현아는 얼굴색이 변했다."대표님, 너무 많이 삭제하신 거 아니에요?"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유현아가 해석했다."지난 두 차례 강연에서 이것과 비슷하게 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강현우 부대표님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셨고요. 특별히 저한테 더 추가하라고 하셔서 추가한 건데 이걸 지우시면 시간이 많이 남아요."강한서가 쌀쌀맞게 말했다."답은 정해져 있었으면서 나한테 왜 물어?"유현아는 목이 메어왔다.사실 그녀는 강한서가 어젯밤 일을 기억하는지 궁금했기도 하고 두 차례 홍보 강연으로 효과가 좋았으니 강한서에게 인정받으려고 일부러 왔다.그런데 강한서가 이렇게 혹평할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게다가 유현진도 자리에 있고 강한서도 아무렇지 않은 거로 보아 어젯밤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다."할 얘기 남았어?"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유현아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니, 아니요."강한서는 그녀
“아니면 뭐 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봐?”차미주는 물 한 모금 마시며 한성우의 눈길을 피했다.그런 그녀를 몇 초 동안 뚫어져라 보던 한성우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럼 나는 뭐라고 저장해줄까? 슈크림?”순간, 차미주는 입안에 있던 물을 푸하고 내뿜었다.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자 촉촉한 미간과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한 한성우는 관능미가 한층 더해져 매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턱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차미주의 손에 떨어져 차미주는 저절로 손이 움츠러들었다.“크리미가 이런 뜻이었어? 도대체 그 머릿속엔 무슨 야리꾸리한 생각이 들어있는 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뭐라는 거야?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생사람 잡지 마!”눈꼬리가 올라간 한성우의 눈매는 유달리 이뻤다.“오늘 어때?”“뭐라고?”차미주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서 한성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한성우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크리미의 저력을 알고 싶지 않아?”차미주가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한성우는 그녀를 잡아 소파에 눕혔다.차미주는 발버둥 치며 말했다.“이거 놔줘.”한성우는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며 말했다.“나쁜 생각은 네가 먼저 한 거잖아. 너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걸.”차미주는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헛소리하지 마, 난 아무 생각하지 않았다고.”“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한성우는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조잘조잘 말하는 차미주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차미주는 해명하려고 했으나 한성우는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고 결국 차미주는 해명은 커녕 화를 낼 기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한성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팔에 끼어있던 한현진이 선물했던 팔찌가 손에 닿았다.그는 그녀의 팔을 들어 전등불에 비추자 미주는 아프다고 팔을 빼며 말했다.“망가뜨리면 안 돼. 함부로 다치지 마.”한성우는 팔찌를 만지작거
한성우가 멍때리고 있을 사이, 차미주는 그를 바닥에 제압해 버렸다.“아파 아파.”한성우는 크리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아프다고 외쳤다.그는 처음으로 차미주가 밥을 너무 잘 먹어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밥심을 모두 자신을 제압하는 데 썼다간 언젠가는 자신의 몸이 고장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차미주는 이를 갈며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말했다.“줄게 줄게, 나를 먼저 놔줘.”강한서와 달리 한성우는 바로 투항하는 타입이었다.차미주는 한성우가 폰을 돌려주자 그제야 완전히 그를 풀어주었다.한성우는 바닥에 앉아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불평했다.“아가씨,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 넘어요.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질 나이라고요. 나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가는 큰일 난다고요.”“도둑놈 잡는 게 습관 대서 그래. 그러니까 돌려달라고 할 때 줬으면 됐잖아. 핸드폰을 가지고 튀니까 직업병이 도져서 그런 거지.”차미주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괜히 기침 한번 했다.“정의 구현이 아니라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한성우가 되묻자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며 부정했다.“찔리긴 뭐가 찔려, 괜한 트집 잡지 마.”한성우는 어깨를 문지르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찔리는 게 없는데 왜 안 보여줘? 혹시 조준한테 미련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전번 날에도 두 사람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어, 재검진 시간 예약하던데.”“헛소리하지 마, 언제 시간 되냐고 묻길래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대답한 거거든. 그날은 자신의 외래 날이 아니라고 했어. 난 그걸 알고 일부러 그날에 가려고 한 거고. 네가 괜히 오해할까 봐. 넌 내 통화를 엿들은 것도 모자라 혼자 시나리오까지 쓰고 앉아 있네. 피해망상증이 있는 거 아니야?”차미주의 말을 들은 한성우는 기분이 좋아져 가까이 붙으며 물었다.“주치의 바꿨어?”차미주가 내일 당장 원래대로 바꾸겠다고 말하자 한성우는 그녀를 껴안으며 사과했다.“여보, 내가 미안해,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방에 물건 가지러
두 사람은 모두 한성우를 관여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서로의 유전자를 탓하며 비난하기에 바빴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삐그덕거렸고 양측 부모님들은 아이가 생기면 나아질 거라며 두 사람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권유한 덕에 그가 태어났다.어찌저찌하여 가정은 유지해 왔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혼인 관계에서 두 사람은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해 왔고 그 영향으로 인해 한성우는 결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 차미주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사실 한성우는 일찌감치 부모님에게 자신의 태도 의사를 밝혔다.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고 부잣집 딸이 아니라 평범한 아가씨라고, 만나고 싶으면 인사시킬 수는 있으나 지적하거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럴 거면 인사시키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화내기 전에 가버렸다.그들의 성격상 만남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언제 인사시키겠냐고 연락이 왔고 한성우는 이를 차미주에게 알렸다.그리고 나서는 이내 또 후회가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미주가 자신의 가정 상황을 알고 나서 흔들릴까 봐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들이 말을 함부로 할까 봐 걱정됐다.하지만 차미주가 이번 만남을 신중히 생각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이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결혼 당사자는 본인이니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도 자신이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차미주가 손을 씻고 씻을 때,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귓속말했다.“다 씻었어?”차미주는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귓속말하지 마. 간지러워.”한성우는 더욱 가까이 붙으며 간지럽히듯 여보라고 불렀고 차미주는 귀가 빨개지도록 부끄러웠다.“뭐라고?”한성우는 웃으며 말했다.“나랑 결혼하면 여보 맞잖아. 여보 아니면 뭐라고 부를까? 애기? 자기야?”차미주는 얼굴이 빨개졌다.“마음대로 해.”“그럼 난 여보. 카카오톡도 여보라고 저장
말을 하며 차미주를 화장실로 데려가 손에 세정제를 좀 묻히고 힘껏 팔에 끼워넣었다. 차미주는 손목을 돌리며 이 팔찌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이전에 옥이 별로라고 말한 게 너무 과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팔찌, 진짜 너무 아름다워. 말 그대로 예술이잖아.’ 그녀가 팔찌를 감탄하며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강한서가 내 손목 둘레를 재었다고 하는데, 이 팔찌는...?” 한현진이 눈을 살짝 좁히며 웃었다. “이건 너를 위한 신혼 선물이야.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미리 즐겨봐. 나한테 며칠 더 두면 내가 못 참고 껴버릴까 봐 그래.” 차미주는 그 말을 듣고 팔찌를 빼려고 했다. “너 미쳤어? 이거 얼마나 비싼데. 너 결혼할 때 내가 500만 원밖에 안 줬는데 이건 너무 과하지 않냐고.” 처음 끼울 땐 힘들었는데 이제 빼려니 더 어려웠다.한현진이 차미주를 막았다. “미주야, 그건 다르지. 그렇게 비교하면 안 돼. 내가 결혼할 때 너는 한 달 월급이 300만 원도 안 됐잖아. 그런데도 500만 원을 선물로 줬고 그 마음이 그 선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중요한 거야. 지금은 내가 능력이 생겨서 너 결혼할 때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게 된 거고 그건 내 마음이야. 가치가 높고 낮고로 그 마음의 소중함이 달라지지 않아.”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팔찌는 강한서가 고른 건 맞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너도 이걸 좋아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 마음에 들어?” 차미주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좋으면 됐어. 앞으로도 우리 둘 다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때 가면 팔찌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건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너한테 줄 수 있어.” 차미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됐어. 건물은 너무 비싸. 너랑 강한서가 또 이혼하고 나한테 재산 반환을 요구하면 어떻게 해?” 한현진은 혀를 차며 이빨을 간 채 말했다. “우리 둘한테
한현진이 그녀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떠들고 가만히 서 있어 봐.” 차미주는 바로 허리를 펴고 자세를 잡았다. 한현진이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뭔가 하나가 부족한데...” 차미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한현진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려 봐.”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차미주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한서였다. 그는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담담했다. 차미주는 놀라서 물었다. “너 여기 웬일이야?” “너희 집에서는 현관문 열고 얘기하면 몇 년 받냐?” 차미주는 말문이 막혔다. 차미주는 멋쩍게 길을 비켜주며 그 귀한 분을 집 안으로 들였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눈짓에 따라 손에 든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한현진이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상자를 열자 차미주는 호기심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는 투명한 광택을 띠는 옥 팔찌가 들어 있었다. 차미주는 옥 팔찌에 대해 잘 몰랐다. 엄마가 몇 개 가지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짙은 녹색이라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늘 옥 팔찌는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팔찌는 달랐다. 맑고 투명한 빛에 가장자리엔 은은한 황금빛이 스며들어 있었고 자연광 아래에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마치 물기를 머금은 꽃잎 같았다. 차미주는 눈앞에 옥 팔찌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미주야, 이리 와.” 한현진이 불렀다. 차미주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한현진은 차미주의 손목을 잡고 팔찌를 들어올렸다.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 안 들어갔다. 다시 시도했다. 또 안 들어갔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차미주의 손목은 붉게 달아올랐고 팔찌는 손목 중간쯤에서 멈춰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차미주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안 정했어. 그의 생일에 맞춰서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은 양쪽 부모님이 서로 만나고 만족하면 우리 엄마가 사람을 불러서 날짜를 정해줄 거야. 우리한테 맞는 날을 고르기만 하면 돼.”한현진은 놀라서 물었다. “너희 둘 진도가 언제 이렇게 빨라졌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청혼할 때 내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받아 줬어. 후에 웃으면서 말하더라구. 내가 너무 급하게 받아줬다고. 좀 더 밀당했어야 한다고. 근데 그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어. 내 머릿속엔 오직 ‘그래. 나도 결혼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어. 하하.”한현진은 웃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를 자극한 거야?”“자극이라기보단...” 차미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기억나? 내가 말했던 그 큰 이모. 그 이모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둘째는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우리 할머니는 그 집안을 아주 좋게 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집에 편애가 심했지. 내가 사촌오빠랑 싸우면 그 오빠가 나를 이기지 못하고 항상 고자질을 했거든.”“그 큰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어.” ‘너처럼 덩치 크고 성격도 안 좋으면 커서 누가 너랑 결혼해주냐?’ “사실 그 말이 나한텐 꽤 큰 걱정거리였어. 물론 자라면서 그 이모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란 걸 알게 됐지만 그때는 정말 결혼 못할까 봐 불안했어. 아니면 왜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겠어.”한현진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한테 남자가 없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했던 사람들을 네가 죄다 친구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사실 그녀가 알기로만 해도 대학 시절 차미주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는 둘이나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어떻게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두 번째 남자는 차미주에게 농구 경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직접 데이트 신청까지 했었다. 차미주는 선뜻 따라갔지만 농구장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한현진은 그녀의 호적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이시연은 오래 기다렸고 그 사이 네 명이 더 끼어든 후에야 은서하가 비로소 돌아왔다. 그녀는 땀에 젖어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고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이시연은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거예요? 의사한테 같이 가줄까요?”은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장실 갔다 오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이시연은 결과지를 건네며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면 승진하고 나 좀 잘 챙겨줘요.”은서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자리만 지킬 수 있어도 감사하죠. 승진은 꿈도 안 꿔요.”잠시 멈추고선 덧붙였다. “대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그냥 그럭저럭이죠. 서 대표님이 이번에 강력한 카드를 데려왔으니까 우리는 그저 배경일 뿐이죠.” 이시연의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친선 경기라고 보면 되죠 뭐.”은서하는 향료 조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도 좀 더 열심히 해봐야죠. 안 그러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요.”이시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클라우드 아파트 902.“현진아, 이건 어때?”차미주는 흰 티에 청바지 오버롤을 입고 한현진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어때?”한현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그럼 아까 그 꽃무늬 원피스는?”“그것도 괜찮아.”차미주는 눈꺼플이 살짝 뛰었다. “그럼 이 노란 운동복은?”“비슷해.”차미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너 지금 뭐야? 그냥 대충 말하는 거지? 다 비슷하면 난 도대체 뭘 입어야 해?”한현진은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너 대충 대하는 게 아니야. 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너한테 좀 더 격식을 차린 옷을 입힐지 아니면 너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힐지 말이야. 평소에 이렇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갑자기 정장 스타일을 입으면 길도 제대로 못 걸을 거고 스
한현진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서해금 옆에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벌써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법을 배우셨군요.”은서하의 얼굴이 잠시 창백해졌지만 이내 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 대표님, 저를 싫어하시든 미워하시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주혁이라는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에요.”“주혁 씨가 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운전기사일 뿐인데? 당신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정말로 걱정해서 경고해 주는 건지 아니면 고의로 우리 사이를 흔들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은서하는 더 조급해졌다. “저는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만큼은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세요. 한 대표님, 당신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예요.”초조해하는 은서하와는 달리 한현진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도와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죠? 갑자기 등을 돌리지 않았나요? 은서하 씨,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은서하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 대표님, 저는 겁이 많고 피할 줄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최소한 저를 도와주셨던 대표님을 해칠 수 없다는거요.” 그녀의 진지한 말투에 한현진은 마음이 흔들렸다.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다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주혁 씨를 멀리하라는 이유라고 말해보세요.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 될 만한 이유요.”은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움켜잡은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한현진은 지칠 대로 지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여기서 나를 걱정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은서하는 급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서해금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 만약 네가 은서하고 우연히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걸 이용해서 서대금이 나를 잠시라도 회사에서 밀어낼 수 있게 할 수 있어. 그리고 넌 그 기회를 통해 승진하고 월급도 올리고 사장 앞에서 좋은 이미지도 쌓을 수 있어. 그 상황에서 너라면 그걸 참을 수 있겠어?]차미주는 그 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임신한 채로도 이렇게 계산적이네? 너 아이 낳으면 두 명의 도깨비가 나올까 봐 걱정돼.]한현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 없을 거야. 강한서가 매일 내 옆에서 를 읽어주고 있어. 맨날 애들한테도 읽어주니까 조금은 성품이 좋을 거야.][강한서 진짜 대단하다. 넌 그걸 듣고 있어?][안 듣지.] 한현진이 대답했다. [난 이어폰 끼고 드라마 봐. 강한서가 애들한테 읽어주고.]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국 는 아무 소용없다는 거네.][왜?] 한현진이 물었다.차미주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엄마가 항상 그러셨어. 아이는 유전이 중요하다고.]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용은 용을 낳고 봉항은 봉황이 낳는다고. 네가 도덕이 없다면 강한서이 아무리 를 많이 읽어줘도 소용없어.”[너 진짜!] 한현진이 이빨을 갈며 말했다. [한성우 씨랑 있더닌 이제는 입만 잘 돌아가네.][오래 배운 거 이럴 때 써먹어야지.]한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나랑 연습하면 뭐 해. 능력 있으면 너희 사장한테 가서 연습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사장한테서 월급 받아야 해.]차미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있잖아.그 사람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자고 하는데 네가 봤을 때 첫 만남에 뭘 입고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까? 정말 고민돼.]한현진은 답했다. [내가 경험이 많아 보여?][두 번이나 결혼했잖아. 너가 없으면 누가 경험 있겠어.]한현진은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