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유현아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만약 유현아가 강한서를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먼저 유현아를 혼냈을 것이다.교활한 유현아는 자기가 한 짓은 생략하고 말했다."왜겠어요? 오늘 한 대표 생일이라 강한서가 취하는 바람에 난 그냥 부축해 줬을 뿐인데 유현진이 막무가내로 달려와서 내 뺨을 때렸지 뭐에요!"백혜주는 씩씩거리며 말했다."가만히 있었어?""날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유현아는 눈물 콧물 짜가면서 말했다."엄마, 아빠랑 혼인 신고도 했는데 난 왜 아직도 이런 대접 받아야 해? 나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고!" 백혜주도 사실 많이 억울했다.다른 부부는 당당하게 결혼하는데 백혜주는 혼인신고도 남들 눈을 피해 해야 했으며 파티 같은 장소에는 아직도 비서 자격으로 동행해야 했다.그녀는 20년을 죽은 듯이 참아왔다. 게다가 하현주에게 사고가 나면서 드디어 유상수도 이혼을 마음먹었는데 하필 강씨 가문에서 유현진을 선택했다.마침 이때 유상수의 사업은 정체기에 들어섰고 유현진의 결혼은 유상수에게 동아줄 같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니 유상수는 당연히 유현진을 조상님 섬기듯 섬길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현진이 이혼을 반대하니 유상수도 바로 이혼 결심을 접었다.백혜주와 유현아의 오랜 기다림과 인내는 유현진의 한마디에 짓밟히고 말았다.막내아들의 초등학교 입학 절차를 빌미로 백혜주가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면 유상수는 아마 지금까지도 하현주와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이혼도 했고 혼인신고도 했는데 예전과 비교했을 때 큰 변화가 없다.그녀는 여전히 유상수의 숨겨둔 여자다.그녀는 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하현주와 유현진에 대한 증오, 그리고 유상수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불만.유현진이 이혼하지 않는 이상, 백혜주와 유현아는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다.한평생 명분도 없는 데다가 유현아까지 괴롭힘을 당하니, 그녀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시끌벅적한 소리에 서재에 있던 유상수가 문을 열고 나섰다. 아래층에서 유현아
유상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현진이가 그런 거라고?""걔 밖에 있겠어요? 걔니까 현아가 가만히 있은 거지."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백혜주는 사건에 MSG를 쳐가면서 과장해 말했다. 그러고는 억울한 척 연기하며 투정을 부렸다."오빠, 나 오빠랑 지낸 세월이 얼만데, 내가 대접 못 받고 해도 난 그런 거니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아가 뭔 잘못이 있겠어요? 이게 뺨 맞을 일이에요? 사실 그것 때문에 화났겠어요? 그저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지!"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아가 나지막한 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엄마, 그만 해요. 아빠 힘들게 하지 말고.""내가 네 아빠 힘들게 하려고 했으면 지금까지 꾹꾹 참지 않았을 거야."백혜주는 눈물을 닦고 머리를 돌려 말했다."씻으세요. 우리 모녀 팔자겠죠.""그게 무슨 말이야?"유상수는 표정을 풀고 백혜주의 손을 꼭 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힘든 거 나도 잘 알아.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현아가 저렇게 돌아와서 나도 마음이 아파. 근데 나 연현 테크랑 계약해서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기도 해. 기회 되면 적당한 이유로 이혼 공개할 거야. 그때면 당신과 현아에게 꼭 명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 일은 내가 현진이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백혜주는 또 한 번 실망했다. 유상수는 늘 그녀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본인도 유현아도 결국 아무런 명분을 가지지 못할 것이 뻔하다.백혜주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손을 빼며 쌀쌀맞게 말했다."알아서 해요."그리고 유현아에게 말했다."얼른 씻어. 내일 출근이야."유현진은 백혜주와 유현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유상수는 입술을 오므리고 유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무음 모드를 설정한 유현진은 유상수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유현진은 잠시 천장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내 다시 강한서로 인해
"누가? 누구 없는데? 호텔리어가 휴대폰 두고 갔나 봐." 차미주는 갈라진 목소리로 다급히 둘러댔다.유현진은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호텔? 너 어제 호텔에서 잤어?""어."차미주는 헛기침하며 말했다."어제 취하기도 했고 너무 늦기도 해서 그냥 호텔로 왔어.""어, 그랬구나. 어제 강한서가 많이 마신 데다 사고가 좀 생기는 바람에 너한테 전화하는 거 깜빡했어. 그래서 어떻게 갔는지 걱정돼서 전화했지.""아, 나 괜찮아."차미주는 체력 노동이라도 하는 듯 말투가 이상했다.유현진이 물어보기도 전에 차미주는 다급히 말했다."콜택시 왔어, 나 끊는다. 이따가 전화할게.""그래."통화를 종료한 차미주는 그녀의 몸 아래에 깔려 입을 틀어막힌 남자에게 버럭버럭하며 말했다."이 멍게 같은 놈! 말미잘 같은 놈! 대체 나한테 뭔 짓을 한 거야!"차미주에게 입을 틀어막힌 한성우는 하마터면 동공이 풀린 번 했다.'이 여자 짐승이야 뭐야? 힘이 왜 이렇게 세!'한성우는 한참을 끙끙대며 겨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숨을 들이쉬며 찬찬히 그녀를 보았다.차미주는 귀여운 외모지만 몸매는 글래머스하다. 나시만 입은 채로 한성우의 몸에 올라타 있는 그녀의 어깨와 가슴에는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은 그녀의 몸매와 어우러져 괜히 더 섹시해 보였다.그런데 많이 봤던 얼굴은 아니다. 한성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나 그 쪽한테 뭔 짓했어요?""그걸 왜 나한테 물어!"차미주는 잔뜩 화가나 어금니를 깨물고 베개를 들어 한성우의 머리를 가격하며 말했다."이 개나리 같은 놈, 다른 여자도 모자라서 날 갖고 놀아?"한성우는 짜증이 몰려와 베개를 잡으며 말했다."잘 봐요! 여긴 내 방이고, 그쪽이 내 침대에 올라왔어요!""내가 어떻게 알아? 보나 마나 그쪽이 엉큼해서 날 데리고 들어왔겠지!"한성우는 눈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엉큼? 볼 게 뭐 있다고."이 말을 들은 차미주는 뚜껑이 열려버렸다.
차미주는 눈을 부릅뜨고 거듭 확인한 뒤에야 손을 풀었다."성우 씨?"조준은 더 높게 불렀다."아직 자고 있어요?""깼어요."한성우는 헛기침하며 높은 목소리로 답했다."무슨 일이죠?"조준이 말했다."휴대폰을 술집에 두고 가서 내가 가져왔어요. 문 좀 열어봐요."차미주는 눈을 부릅뜨고 협박했다."문 앞에 두고 가시라고 해!"한성우는 옷을 걸치며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차미주도 이런 행동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휴대폰을 주겠다는데 문을 열지 못한다? 뭔가 있다는 것이 뻔하다.이런 작은 룸은 문과 침대가 마주 향했기에 문을 열게 되면 방안이 다 보이기 마련이다.그렇다고 욕실에 숨는다고 가정했을 때, 만약에 한성우가 조준에게 입을 나불거린다면 차미주는 제때 막을 수 없게 된다.한성우는 팽팽 돌아가는 그녀의 눈을 보며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이렇게 해요. 이따 내가 문 열면 바로 문 뒤에 몸을 숨기는 거예요. 그럼 들키지 않을 거고 내 말도 똑똑히 들을 수 있잖아요.""그러다가 나 엿 먹이면?"한성우는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나도 체면이 있지, 여자라면 안 가린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 안 쪽팔려요?"차미주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한성우의 종아리로 발길질했다.한성우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내 그녀의 발을 피했다."성우 씨?"조준이 또 한 번 불렀다.한성우가 말했다."잠시만요, 옷 좀 입고요."그러고는 차미주를 향해 말했다."가요."차미주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성우를 따라 문 앞까지 갔다.한성우가 문을 열었다.조준은 한창 머리를 숙이고 카톡을 하고 있었다. 조준은 한성우 가슴의 손톱자국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어제 잘 놀았어요?""그럭저럭요."한성우는 휴대폰을 넘겨받으며 말했다."밤새 고양이한테 긁혔어요."차미주는 입가를 실룩였다.'더 긁어버려?'"무슨 고양이요?"조준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병원에 볼일 있어서 가볼게요."조준은 그저 한성우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 여기고 더는 농담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문을 닫은 후, 차미주는 맥없이 축 처져서 풀이 죽어 있었다."이름이 뭐예요?"차미주는 이내 경계심을 일으키며 한성우를 바라보았다."뭐 하려고?"한성우는 그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담담하게 말했다."됐어요. 상관없어요." 그러고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사인을 하더니 차미주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여기 적힌 금액이 괜찮다면 합의 보는 거로 하죠. 뭐 부족하다면 법적 절차 밟아도 좋아요."사천만 원짜리 수표다.차미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내 다리를 들어 또 한 번 한성우를 걷어차려고 했다.얼마 안 되는 사이에 몇 번이나 당했던 한성우는 경험이 생겼다.그녀가 다리를 드는 순간 한성우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챈 후 다리를 움켜쥐고 침대로 눕혔다.한성우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잘 들어요. 나 여자한테 손 안 대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내가 어떤 행동 할지 장담 못 해요."차미주는 아주 난감한 포즈로 한성우에게 제압당했다.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다리가 쭉 찢어져 허벅지의 빨간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것은 분명 핏자국이었다.한성우는 흠칫하더니 침대 시트를 보았다. 침대에도 덕지덕지 피가 묻어있었다.한성우는 머리를 숙여 차미주를 바라보았다. 차미주의 빨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지금까지 지켜온 순결을 한성우 이 말미잘 같은 놈에게 주다니. 게다가 돈을 던져줘?'차미주는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나 힘도 안 줬는데?'차미주는 눈물 콧물 짜가면서 말했다."나 아직 연애도 안 해봤단 말이야.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고백도 못 해보고 너 같은 개자식한테 내 처음을 줬어. 그것도 모자라서 돈을 던져줘? 네가 억울해? 내가 억울하다고. 이 나쁜 놈, 멍게 해삼 말미잘 같은 놈. 나 진짜 재수
이 시각, 한성우가 묶었던 방의 침대 아래에는 촬영 소품인 혈액 팩이 외롭게 떨어져 있었다.________강한서가 잠에서 깨었을 때, 유현진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강한서는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새로 온 도우미 황씨 아주머니는 강한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해장국부터 드세요. 사모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어요. 보글보글 끓이는 중이에요."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끔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황씨 아주머니는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가 해장국을 그릇에 담고 들고나왔다.강한서는 한술 뜨고는 그릇을 들고 아예 유현진이 있는 소파 뒤로 왔다.유현진은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뭔가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다가오자 유현진은 다급히 노트북을 덮어버렸다.…...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젯밤…... 당신이 나 데리고 왔어?'"응."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더니 가볍게 대답했다.강한서는 자기의 가슴을 더듬으며 말했다."나 여기가 엄청 빨갛던데, 당신 나한테 뭔 짓 한 거지?"유현진은 눈가를 씰룩였다.'필름 제대로 끊겼네.'"정말 아무것도 생각 안 나?"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뭘 기억해야 하는데?"'하,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폰으로 찍어두는 건데.'"술에 취하고 그 뒤 일은 하나도 생각 안 나는 거야?"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 기억을 되돌려 보았지만 한성우가 그에게 칵테일을 넘겨준 것을 끝으로 뒤의 일은 흐릿하기만 했다.그는 어렴풋하게 유현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현진은 그의 옷을 벗기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한 강한서는 눈빛이 그윽해지면서 유현진을 향해 말했다."뭐 생각나는 게 있기도 하고."유현진은 의외였다.'뭐야, 진화한 거야? 완전히 끊긴 거 아니었어?""그럼 당신…...""나 취하면 좋아?"강한서는 느닷없이 한마디 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했다.강한서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나 취하면
유현진은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현진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문자 못 봤어?""봤어요."유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봤는데 왜 전화 안 했어?""그 시간에 연락하신 걸 보면 유현아 때문에 전화 주셨겠죠."유상수는 흠칫했다. 유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유상수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어릴 적에도 한 번 싸운 적 없던 애가 대체 왜 그랬어? 왜 현아를 그렇게 때렸어?""유현아가 말 안 했어요?""한서가 취해서 부축해 줬는데 네가 화났다고 그러더라고. 그럴 필요 있어? 현아가 자기 형부한테 뭐 딴맘이라도 먹을까 봐서 그래?"유현진은 코웃음을 쳤다."부축이요? 유현아가 그렇게 말해요?"유상수는 그녀의 코웃음에 뒤통수가 싸늘해 났다. 그 웃음은 하현주와 너무 닮았다."그게 아니면 뭐야?"유현진은 쌀쌀한 말투로 말했다."나 어릴 적에 키우던 토끼 생각나요?"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생각이 안 나는 게 뻔했다."반급 친구가 생일 선물로 나한테 토끼 한 마리 줬었어요. 유현아도 그 토끼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 걸로 만들려고 했죠. 하지만 내가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내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아빠는 그 토끼를 유현아에게 줬어요. 결국 토끼는 차에 치여 죽었죠."유상수는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있었던 일이지만 상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유현진이 죽은 토끼를 안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기억만 났다."유현아가 원하는 건 아빠는 다 주려고 했어요. 그게 내 거라도 말이에요."유상수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상냥하게 말했다."그 일은 아빠가 잘못했어. 현아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그 토끼가 저절로 뛰어갔는데 어쩌겠어, 어린 현아가 어떻게 잡아?""그래요, 어렸으니 내가 봐줬죠. 지금은요? 스물셋이에요, 아직도 어려요? 강한서가 취한 틈을 타 유현아는 옷 다 벗어버리고 강한서의 침대에 올랐어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부모의 편애가 이 지경까지 무섭다니."정말 강한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유현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다 같이 확인해 보죠. 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따져보자고요."유상수는 목이 멨다.유상수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유현아를 바라보며 의구심이 들었다.유상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알아볼게.""잠깐만요."유현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빠, 구암동 고아원 후원금은 언제 이체하실 거예요?"유상수는 멈칫하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회사 매출이 떨어져서 더는 후원 못 할 것 같아. 시청에 연락 넣었으니 시청에서 도와줄 거야." 유현진은 표정이 굳어졌다."아빠, 후원금은 엄마 카드에서 나가는 거예요. 회사 매출이 아무리 떨어졌다고 한들 월 2천만 원이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 고용해서 엄마 지분 나한테 넘겨요. 후원금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유현진의 말에 유상수는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했다."네 엄마 매달 병원비만 몇천만 원이라 일 년이면 몇억이 들어가. 넌 우리 집안이 강씨 가문처럼 재산이 많은 줄 알아? 네 엄마 병원비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무슨 돈으로 후원까지 해?"유현진은 쌀쌀하게 웃었다. 유상수는 교묘하게 지분 얘기를 피해 갔다. 만약 정말 하현주의 돈으로 병원비조차 지불하기 힘들다면 유상수는 본인이 먼저 애물단지를 유현진에게 넘겼을 것이다.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하현주는 유상수의 죄증을 낱낱이 찾아 내 겨우 유상수를 재산포기 각서에 사인하게 했다. 그러니 유현진은 하현주의 심혈을 꼭 지켜 내 유현아한테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안 넘긴다 이거지. 그래, 내가 직접 찾아올 거야!"유현진이 답이 없자 유상수가 말했다."현진아, 네 엄마 건강이 우선 아니겠어?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국민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너 그 시설에 남다른 감정이 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지만 일단 우리가 살고 봐야지."'시설에 후원하면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