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길에서 우연히 한성우를 만난다해도 쳐다보지도 않았을 일이 조 선생님을 쫓다보니 어쩔수없이 지를수밖에 없었다.아나 모르나, 한성우는 그녀의 좋은 친구였다."너는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너는 너 친구가 보금자리를 찾는걸 바라지 않아?""만약 오늘 날 데려가지 않으면, 너 5년동안 잠자리를 못가질거라고 저주할거야!"유현진은 입가가 떨렸다.너무나도 악독한 저주였다.그녀는 차미주를 힐끔 보고는"한성우는 사람이 쪼짠해서 선물을 준비해서 가야할거야. 아니면 한성우가 널 쫓아내도 난 몰라."차미주의 눈은 순식간에 반달모양이 되였다."당연하지!""그리고 조건이 있어, 만약 못 지키겠다면......""만약 너가 날 저주한다면 나도 너한테 영원히 조 선생님과는 연결이 안될꺼라고 저주할거야!"차미주는 말문이 막혔다."그건 농담이지, 근데 나 화장 좀 해줄수 있어? 이렇게 갈수는 없잖아."차미주는 잠시 숨을 고른후 말을 이어갔다."내가 강한서를 욕할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잠자리를 못가지는거엔 왤케 예민해? 강한서가 침대위에선 엄청 대단해?"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퇴근후, 민경하는 강한서를 싣고 약속한 지점에서 유현진을 데리러 갔다.차가 멈추고 민경하는 차에서 내려 유현진을 도와 차문을 열어주었다.유현진은 이에"민비서님, 앞에 조수석도 열어주세요, 친구 데려왔어요."민경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미주를 도와 조수석문을 열어주었다.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민비서님 감사해요."민경하는 이에 놀라며"차아가씨?"차미주는 어금니를 드러내며"저 오늘 예뻐요?"민경하는 차미주에 대해 그래도 잘 아는 편이였다. 필경 자주 사모님과 어울렸기에 접촉은 피할수 없었다.그의 인상속의 차미주는 항상 후드티에 청바지 머리카락은 어꺠에 닿을정도였고 아주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동그란 눈, 웃을때 드러나는 두개의 어금니, 보일듯 보이지 않는 보조개. 말을 하지않을땐 아직 졸업하지 않은 대학생같은 풋풋함이 묻어났었다.하지만 입을 열기만 하면 사회인이 다 되
앞에서 줄 서있는 사람이 많아서 차미주는 까치발을 들고 보고있었다.시계를 선물하는 사람, 신발을 선물하는 사람, 가방을 선물하는 사람, 액세사리를 선물하는 사람, 게다가 차를 선물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속이고 자신이 손에 든 선물을 보고는 소리소문없이 가방안에 넣었다. 현진이 선물 줄때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이였다.강한서의 차례가 되자 그는 한세트의 와인잔을 꺼내 선물했다.차미주는 갑자기 실망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소리로 유현진에게 속삭였다."강한서도 너무 쪼잔한거 아니야?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군데 고작 와인잔이라니."유현진은 할말을 잃었다.(어쩐지 강한서가 우리 둘 그냥 똑같다더니, 어쩜 와인잔을 보고 하는 말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을 수가 있지?)그녀의 집에도 똑같은 와인잔이 있었다, 강한서가 회사의 고객한테서 받은거였다.당시에 강한서가 그걸 들고올때 그녀도 차미주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그녀는 절대로 그녀가 말을 끝낸후 강한서가 그녀를 보는 눈빛을 잊을수 없었다. 의아, 놀람, 믿을수 없다는 표정에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마지막에 민경하가 알려주길 이건 오지리에서 아주 유명한 와인잔회사에서 제조한 물건이라 했다.잔에 담긴 와인의 맛이 더욱 좋아질뿐만아니라 잔 아래에 박혀있는 보석은 그 가치만 해도 2억은 넘었다.차미주는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조 선생님을 찾아냈다.그녀는 먹임감을 노리는 고양이마냥 순식간에 따라갔다. 유현진이 차마 부르기도 전에."한서야, 현진씨."등뒤에서 주강운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현진은 고개를 돌리고 놀랍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주 변호사님?"이에 강한서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주강운은 하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티셔츠는 항상 마지막 단추까지 달고 있었다.그는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웃고 있지 않을땐 고귀해보였으며 웃을땐 따뜻함이 느껴졌다.주 변호사 몸에 있는 상처 때문인지, 마음속에 있는 자책감때문인지. 그녀는 그를 대할때 항상
주강운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너 민서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민서가 오해하는 것도 싫고, 두 가족이 이에 대해 기대를 품는 것도 원치 않아."강한서는 오히려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 빨리 여친을 찾아서 민서가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하면 되잖아."주강운이 웃으면서 말했다."그게 내가 생각한다고 바로 실현되는 거 아니잖아.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지. 적합한 사람 있으면 나 소개시켜줘. 내가 그렇게 요구가 높은 것도 아니고. 외모야 봐줄 만하면 되고, 성격은 현진 씨 정도면 돼."강한서......상대방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강한서는 주강운의 눈을 응시했다. 강한서에 비해 유현진은 엄청 단순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심 흥분되었던 그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향해 말했다."봐봐. 나 같은 유형 소개팅 시장에서는 은근 인기가 많다니까."한성우도 유사한 얘기를 한 적 있고, 심지어 주강운도 이렇게 말하니 유현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강한서가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한마디 뱉었다."그래 얼굴만 예쁘고 머리가 텅 비었으니 인기가 많겠지."유현진......망할 인간! 그 놈의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올 때가 없지!주강운이 방금 전에 한 말은 농담인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농담 분위기를 거두고 부드럽게 말했다."가자. 성우한테 가봐야지."차미주가 뒤따라 왔을 때, 조 선생님은 한성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의사가운이 아닌 정장 차림이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포착하자 차미주의 눈은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을 필터링해 버렸다. 시야에 남은 건 오직 조 선생님 뿐이었다.차미주는 잠깐 옷차림을 정리하고 보폭을 줄여 앞으로 다가가 애교를 섞은 목소리로 불렀다."조 선생님?"조준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차미주에게 시선을 돌렸다.그의 시선은 차미주를 아래로부터 훑기 시작하여, 희고 가느다란 다리를 지나 조금씩 위로 이동하면서 엉덩이,
한성우는 다시 한번 차미주를 밀어냈다.하지만 온 몸에 탄탄한 근육들로 뒤덮인 차미주는 낙지마냥 한성우에게 착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성우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한서라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바로 밀쳤을 텐데, 한성우는 강한서와 달랐다. 그는 어느 부잣집 따님인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힘껏 밀칠 수가 없었다.한성우는 차미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얼굴을 보여줘야 변했는지 안 변했는지 알지."내 얼굴을 보겠다고? 그러면 다 들통날 거잖아.차미주는 얼굴을 아예 한성우의 가슴에 묻으면서 말했다."성우 오빠, 농담하지 마요. 저 쑥스러움을 많이 탄단 말이에요."한성우......이거 누가 특별히 준비한 프로그램 같은 거 아니겠지?키가 이렇게 작은데, 뭔 힘이 이렇게 세?두 사람의 '친밀한' 스킨십을 보자, 조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미주 씨, 한 대표님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었어요?""어릴 때 잠깐 알고 지내던 사이었어요."한성우......이렇게 끌다가 한성우가 뭔가 떠오르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차미주는 바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성우 오빠, 생일 축하해요.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요. 저는 화장실 다녀올게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성우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한성우는 차미주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다. 그저 조준과 얘기를 나눌 때 빛이 반짝였던 큰 눈만 뇌리에 박혔다.조준이 물었다."한 대표님, 미주 씨 어느 집 따님이죠?"한성우가 어찌 알겠는가?그저 한마디 얼버무렸다."먼 친척이요."조준이 웃었다."재밌는 친구네요."차미주는 멀리 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폈다. 조 선생님의 기색이 평소와 다름없자 비로소 시름을 놓았다.엄청 위험했다! 그나마 반응이 빨라 위험한 상황은 모면했지만!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자, 방금 전에 한성우를 안았던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불쾌한 표정을
이때 차미주에게서 문자가 왔다."강한서랑 조 선생님이 아는 사이야?"유현진이 답장을 했다."그런 것 같어.""너 강한서한테 조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아보라고 해. 만약 나랑 조 선생님이 잘되면 나중에 너랑 강한서를 주례로 모실게."차미주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유현진은 알아볼 계획이었다. 어느 집안 출신인지 알아보기 전에 우선 사람 됨됨이를 알아야 하니까.사람들이 인사말을 서로 주고받은 후 유현진은 낮은 소리로 강한서에게 물었다."당신, 조 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야?"강한서가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더니 답했다."아니!"그러자 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당신한테 말을 걸어?"강한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내가 일일이 다 잘 알아야 돼?"유현진은 할말을 잃었다.강한서는 일부러 말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가끔 한성우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을 뿐, 그의 배경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하지만 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말해주는 않는 줄 알고 순간 화가 났다.이러한 자리에서 강한서는 항상 인기가 폭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유현진은 옆에서 딱히 할말도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조 선생님에 관해 알아볼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이때 그는 주강운이 조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포착했다.두 사람의 모습을 보아서는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유현진은 바로 술잔을 들고 다가갔다."강운 씨, 이거 드셔 보실래요?"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발견하자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유현진이 건네는 디저트를 받아쥐고는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유현진은 이 기회에 조준에게 인사를 했다."조 선생님, 안녕하세요."조준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했다."현진 씨, 안녕하세요."주강운이 옆에서 물었다."두 사람 아는 사이에요?""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고, 얼마 전에 친구가 건강검진하는데
그는 숨을 죽이고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그의 예상대로 9743 숫자 네 개 모두 그 위에 있었다.그럼 하현주가 설정한 비번이 은영 선생님의 행사 횟수?찐팬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였다.그럼 나머지 두 자리는?6과 5는 뭘 의미하지?9743이 은형 선생님과 연관이 있다면, 6과 5도 분명 은영 선생님과 관련 있을 텐데.유현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검색창에 은영 선생님을 입력해보니, 은영 선생님의 생일이 바로 6월 5일이었다.비번이 이거라고?유현진은 갑자기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가 수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주강운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유현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 화면을 끄고 말했다."강운 씨, 조금 있다가 그이한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집 갈 때 미주를 집에다 바래다주라고 해요."유현진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주강운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아뇨."유현진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오늘 저녁에 비가 있다고 하네요. 제가 키우는 화분들이 비를 맞으면 안돼서 비막이를 해줘야 해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온 지 얼마 안돼서 서툴다보니 제가 직접 가봐야 해요.""알겠어요. 제가 조금 있다가 한서에게 전할게요.""고마워요."그러고 나서 유현진은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주강운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전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택시를 잡아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유현진은 금고 앞으로 직행하여 659743을 입력했다.틀렸다.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974365를 입력했다.그러자 금고에서 "띠띠" 소리가 나더니 치륜들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쾅당"소리가 울리면서 금고 문이 튕기면서 열렸다.그 안에스는 엄청 두꺼운 자료가 놓여 있었다.그가 손을 내밀어서 꺼내보자 첫 번째 자료가 바로 이혼협의서였다.그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운 마음을 애써 다독이면
유상수는 얼굴에 유현진이 몇 번 보지 못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이 사진은 유독 구김이 심했다. 세 사람의 웃음이 심지어 구김 속에서 흉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현진은 이 사진을 봤을 때 하현주의 심정이 어땠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유현진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유상수가 유현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떠올려 보니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불길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맨 마지막에 친자확인서가 있었다.그의 예상대로 유현아와 유상수는 친자관계였다.확인서에는 유현아가 유상수의 친딸일 가능성이 99.996%라고 적혀 있었다.유현진은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진실에 한번 놀랐고, 유상수의 잔혹함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그는 자신의 친딸을 양녀 신분으로 집에 끌어들여 자신의 아내가 십여 년을 키우게 하였다. 어느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할 수 있는가?그는 하현주가 이 일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이 안갔다.하현주는 유현진에게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하현주의 우울증과 정서 기복 때문에 힘들었던 유현진는 엄마가 이토록 충격적인 일로 큰 고통을 겪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서 찢어질 것만 같았다.어쩌면 하현주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했는데 자신이 유의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유현진은 대학입시 당시 하현주가 자신에게 만약 자신이 유상수와 이혼하면 누구랑 살겠냐고 몇 번 물어봤던 생각이 떠올랐다.하지만 유현진은 당시 하현주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전에도 하현주는 유상수와 자주 싸웠고, 싸우고 나서는 항상 그 물음을 했기 때문이다.사실 하현주는 유상수와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유현진에게서 답을 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이혼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자 했을 뿐이다.그래서 유현진은 매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대답하면 엄마가 아빠와 이혼할 수가 없었기에그 답을 들으면 엄마는 늘 웃음을 지으면서 유현진을 품에 안아주었다.그런데 그러던
유현진이 현장에 도착하자 강한서가 보이지 않았다.한성우도 보이지 않았고, 현장은 케익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엄청 지저분했다. 게다가 여전히 시끄러웠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취한 상태였다. 무대 위에서는 초청가수가 여전히 혼신을 다해 노래를 하고 있었고, 명암이 바뀌는 조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한바퀴 돌아본 유현진은 구석진 곳에서 소파에 앉아있는 주강운을 발견했다.그의 머리카락에도 크림이 묻어있었다. 그는 팔뚝으로 테이블을 짚어 몸을 지탱하면서 눈을 감은 상태로 태양혈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유현진이 가까이 다가가서 두 번이나 불러서야 정신을 차린 주강운은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보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왔어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한서 씨는요?""한서가 좀 많이 취해서 제가 방금 전에 룸에 눕혔어요. 제가 룸까지 안내해 드릴게요.""네, 그럼 부탁할게요."주강운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으면서 일어서더니 휘청거렸다. 유현진은 바로 그의 팔을 잡고는 부축하면서 물었다."강운 씨 괜찮아요?"주강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했다. 입술에도 핏기가 전혀 없었다. 상태가 아주 안좋아 보였다. 그는 손을 절레절레하면서 답했다."오늘 술은 좀 과하게 마신 것 같아요. 두통이 심하네요."그러자 유현진은 주강운이 수술 후 두통 후유증이 남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우선 여기에 앉아요. 약을 가져왔어요? 술을 마셨으니 약은 최대한 안먹는 게 좋겠네요. 제가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주강운이 말을 하기도 전에 유현진은 이미 몸을 돌려 물 가지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따뜻한 물을 들고 왔다.주강운은 물 반 컵을 몇 분에 걸쳐 마셨다. 그는 동작 하나하나가 점잖았다.따뜻한 물을 마시자 혈색이 조금 돌아온 주강운을 발견하자 유현진이 말했다."여전히 힘드시면, 조금 있다가 우리가 돌아갈 때, 제가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요. 의사 선생님 보셔야 할 것 같은데.""자주 있었던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좀 지나
신미정은 결혼을 재촉했지만 할머니는 결혼은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찾는 거라고 마음에 들고 잘 맞는 사람과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를 물색하던 중 한현진의 강한서의 눈에 들게 된 것이다.교통사고까지 다 해서 고작 네 번 본 사이었고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어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한현진이 마음에 들었다.강한서도 마침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시간 낭비 같았는데 한현진도 저런 늙은이한테 시집가는 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날 교통사고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한현진의 엄마가 간민혜를 차로 쳐서 죽인 건 맞기에 주강운이 갑자기 한현진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어쨌든 주강운한테 고모가 간민혜를 만나려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해명한 건 자신이었기에 강한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현진을 데리고 있고 싶었다.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강한서는 이틀 뒤 바로 한현진에 연락해 그녀와 맞선자리를 가졌다.맞선자리에서 한현진은 강한서를 알아본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강한서도 굳이 그 일을 꺼내진 않았다.한현진은 이 맞선자리가 유상수가 꾸며낸 자리인 줄로만 알고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었지만 사실 유상수는 꿈만 꿀 뿐이지 그럴 능력이 못 되는 사람이었다.선 자리를 끝내고 본가로 돌아간 강한서는 바로 한현진의 자료를 건네주며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유씨 집안을 조사해본 할머니는 바로 반대부터 했다.유씨 집안의 지위보다 아내가 아픈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서랑만 붙어있는 유상수의 사람 됨됨이가 별로라서 그의 딸도 비슷할 거라 생각해 거절한 걸 알아챈 강한서는 평소에는 그렇게 말을 아꼈으면서 이번에는 웬일로 한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그녀가 친구를 도와 나서던 일과 그녀의 지금 상황까지 다 말한 강한서는 한현진이 아니면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한 뒤 집을 나섰다.그 말에 답답해
침대에서는 늘 신사다웠던 강한서였기에 한현진은 하면서도 아픈 적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그래서 당연히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그저 간간이 색다른 그의 모습을 바랐던 적은 있었다.사실 별로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물어오는 강한서에 부끄러워진 한현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잠이나 자!”그에 웃음을 흘리던 강한서는 한현진을 이불과 함께 끌어와 제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얘기마저 하고 자. 앞으로 어떻게 널 만족시켜야 하는지는 알려줘야지.”“현진아, 현진아.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보라니까?”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어떻게 하면 만족할지를 자세하게 말하라니, 한현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강한서는 그렇게 한현진을 한참 놀리다가 자리에 제대로 누우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나 오늘 내가 부계정으로 올렸던 피드들 다시 봤는데 진짜 너무 유치하더라, 전에는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너 원래 유치하잖아, 닉네임만 봐도 알리지 않아?”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한현진에 강한서가 웃어 보였다.“그 이름 내가 지은 거 아니야.”사실 그 계정은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사업에 필요해서 만든 거였다.그때 한성 그룹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었는데 영향력이 좀 있는 사람들까지 그간의 데이터들을 언급하며 한성에는 그 정도 기술이 없다고, 전부 허위 홍보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서 그걸 반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었다.그 신제품이 진짠지 가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강한서는 화가 나서 자신의 본 계정으로 반박문을 내려고 했지만 본 계정으로 낸 입장문이라면 큰 효과가 없을 거라던 한성우의 말에 설득당해 ‘다이아몬드 수저의 일상’이라는 계정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한성우의 말대로 부계정을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팔로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자신의 화려한 배경이 사라지니 허구한 날 걸고넘어지던 사람들도
한현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딱딱하게 물었다.“말해 빨리, 나 잘 거니까.”“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강제로 몰아붙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하다가 네가 진짜로 하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네가 진짜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잘 몰라서 실수하면 어떡해?”“잘 나가다가 내가 갑자기 왜 화를 내겠어?”“지금도 갑자기 화내잖아, 아까는 막 나 유혹하더니. 아무 예고도 없이 화내는 게 한두 번이야?”그 말을 들은 한현진은 돌아누워 강한서와 눈을 맞추며 따지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이유도 없이 자꾸 화만 낸다 그거야?”“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진짜 하기 싫은 건데 내가 그걸 못 알아보고 계속하다가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진짜 싫으면 내가 너 물 거니까 그딴 걱정 할 필요 없어.”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강한서는 언제 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유로워진 손으로 한현진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현진이 그걸 왜 혼자 풀어냈냐고 따지기도 전에 혀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치열을 고르게 훑고 지나가는 강한서에 한현진의 몸은 빠르게 나른해졌다.강한서가 입을 뗐을 때 한현진의 얼굴과 입술은 이미 빨개져 있었고 그녀는 가만히 누운 채 숨만 내뱉으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한현진 위에 올라타 있었던 강한서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안 깨물었네.”한현진이 그 말의 뜻의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강한서는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시간을 얼추 계산해보니 3달은 넘은 것 같아 사실상 관계를 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한현진은 쥐고 있던 강한서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몸에 힘을 뺐다.그렇게 키스를 이어나가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한현진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자자 이제.”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만 바라보던 한현진은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피드가 하나 떠올랐다.
강한서는 영문은 몰랐지만 그래도 한현진에게 벨트를 건네주었다.“뒤돌아서 손 등 뒤로 보내.”강한서는 한현진이 뭘 할지 알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뒤로 돌고는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켰다.오래전에 배웠던 로프 묶는 방법을 오늘에서야 쓰게 되니 기뻤는지 한현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강한서의 손목을 묶었다.“이제 뒤 돌아도 돼.”한현진의 말에 따라 뒤로 돈 강한서는 손이 묶인 채로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었는데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니 머리카락도 앞으로 툭 하고 떨어져나와 그의 반쪽 얼굴을 가려버렸다.얼굴 앞에 드리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한현진의 심장은 다시금 두근대기 시작했다.이제 보니 여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꿇어앉아 있는데 환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맘에 들어?”낮은 목소리로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듯이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귀를 붉힌 채 말했다.“응, 맘에 들어.”“강운 그룹 사모님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나 이렇게 묶어 놓고 싶었겠네?”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강한서에 한현진은 헛기침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그건 아니고. 난 네가 날 이렇게 대해주길 더 원했어.”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좋은 점이라 하면 아마도 서로에게 더 뻔뻔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그래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해도 부끄러움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강한서는 가만히 꿇어앉아 제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나는 내가 싫다고 해도 네가 억지로 하는 걸 더 좋아해. 그리고 다 한 다음에 침대에 꿇어앉아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게 보고 싶었어. 내 취향은 그런 거라서.”한현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강한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럼 전에 우리가 싸울 때 내가 화나서 입 맞췄을 때는 왜 나 때린 거야? 그날도 내가 억지로 너 몰아세우고 하려고 했었잖아, 좋아한다면서 그때는 왜 나 죽이겠다고 그런 건데?”“진짜
송가람은 생각했다. ‘오빠는 그날 히비스커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나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거야. 게다가 내가 오빠 외숙모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분명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간단한 문자에도 오래 고민하는 거겠지.’강한서가 대화창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한 거야?”한현진이 불퉁한 말투로 말했다.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되라고 하니까 어쩌겠어. 어떻게 답장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모르겠다고 했지.”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가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서 오빠, 사실 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저희 엄마가 너무 하셨어요. 오빠가 그렇게 대답한 것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저 오빠 원망 안 해요.]눈을 마주친 강한서와 한현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알아서 넘어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열띤 토론을 펼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현진이 문자를 보냈다. [몸은 어때. 삼촌 일은, 내가 미안해.]송가람은 다시 한 번 그동안 강한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전 괜찮아요, 오빠. 네가 멋대로 결정했다고 오빠가 널 미워하지만 않는다면요.]한현진: [치료 잘 받아.]송가람이 얌전함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오빠, 생일 파티할 거예요?]한현진: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느 사실 강한서가 조금 보고 싶었다. 고백 멘트를 작성하던 송가람은 서해금의 충고를 떠올리고 문자를 삭제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한현진을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만.’송가람이 여전히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 시점에 상대방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진 씨에게 들으니까 요즘 회사에서 대회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요즘 바빠?]송가람: [네. 조향 대회가 있어서요. 지금 한창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어요.]한현진: [네가 대회에서 좋은
한현진이 귀를 쫑긋 세웠다.“누구야?”강한서가 휴대폰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내 불륜녀.”그 말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 뭐라고?”강한서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강한서는 한현진이 보내는 칭찬의 눈빛을 알아보고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우는 호기심에 겨워 잔뜩 흥분한 채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 대체 뭐하는 거야? 네 불륜녀를 감히 조강지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두 사람은 한성우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현진은 사랑의 라이벌을 한 번 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람아, 다친 건 어때? 아직도 아파?]강한서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언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한다고 그래?”한현진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강한서 답지 않은 문자였다. 그녀는 [아직도 아파?]라는 문자를 삭제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 자상하게 얘기하지마. 지난 번에 홍혜림 씨를 만났을 때도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내가 더는 선을 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대면 나더러 어떡하라고.”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다친 건 어때?]라는 글을 지우고 문자를 다시 작성했다. [계획 없어. 좋은 제안이라도 있어?]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일에 뭐할까 고민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야. 네가 이렇게 물어보면 걔가 뭐라고 생각하겠어?”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조용히 해. 애초부터 네 불륜녀에게는 내가 답장할 거라고 얘기했잖아. 네가 뭔데 나서?”강한서가 말했다. “내가 답장은 네가 하라고 얘기한 건 맞지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지. 현실 반영은 해야 하잖아.”한성우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형수님, 불륜녀라뇨. 강한서에게 언제부터 불륜녀가 있었어요. 남자예요, 여
여러 루트를 통해 송가람은 드디어 시계 관련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재고가 없어 7일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 마침 빈해시의 한 고객이 시계를 반품했고 송가람이 동의한다면 먼저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빈해시는 한주와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면 시계를 받을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매니저가 말했다. “고객님은 오늘 두 번째로 이 시계에 관해 물어보신 분이세요. 점장님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만약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이 물었다. “저 말고 또 누가 물어본 거죠?”“죄송해요, 고객님. 그건 고객님 개인 정보라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현진이 분명했다. 송가람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결국은 자신이 한현진보다 먼저 시계를 구해내고야 말았다. 송가람이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준비해줘요. 물건은 바로 저에게 보내주시고요.”“알겠어요. 돈을 입금해주시면 저희가 영수증과 함께 시계를 포장해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송가람은 자신이 가진 절반 이상의 돈을 신미정에게 사기 당했다. 이 시계까지 사고 나면 송가람은 거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현진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은 물론 강한서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큰마음을 먹고 계좌 이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입금을 하자마자 한성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대박. 팔렸어요. 형수님, 저희 회사에서 영업을 하시는 게 어때요? 한 달 매출의 절반을 원하신대도 괜찮아요.”한현진이 말했다.“꿈 깨요. 이렇게 쉽게 속는 바보가 그렇게 많을 줄 알아요?”그 시계는 신우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다. 사긴 했지만 하고 다닌 적은 없었고 집에 한 달 째 고이 모셔두고 있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 환불한 것이다. 이런 명품 시계는 애초부터 재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이 되어서야 환불을 하려니 쉽지 않
송가람은 조금 멍해졌다. 서해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서와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때문에 모녀가 몇 번을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서해금이 갑자기 뜻을 굽히니 송가람은 심지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정말 반대 안 할 거야?”서해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무슨 소용 있어? 내가 반대한다고 네가 내 말을 들은 적이나 있어? 넌 엄마를 원수 취급하려고 했잖아.”“엄마, 정말 날 속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송가람이 몇 번이고 서해금의 마음을 확인했다. 서해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어? 지금 네 꼴을 봐봐. 강한서를 위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하고도 돌아서려 하지 않는지. 이런 널 보고 내가 뭘 어떡할 수 있겠어?”송가람이 와락 서해금을 끌어안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이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 전엔 다 내가 잘못했어. 난 그냥 한서 오빠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뭐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할게.”서해금이 가볍게 송가람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벌써 좋아하지 마. 내가 말한 조건 잊지 마. 엄마는 깔린느에 반 평생을 쏟아부었어. 깔린느는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깔린느를 지킬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 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앞으로 네 결혼 생활이 어떻든, 깔린느가 네 손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알겠어, 엄마.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전엔 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강한서를 미끼로 사용하니 이제야 조금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서해금이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세은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한현진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해?”송가람은
스쳐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미모에 파묻힌 두 눈은 은서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 은서하는 실수로 바닥에 놓인 화분을 건드렸다. 꽃병이 흔들리는 소리에 은서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한현진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은서하를 쳐다보았다. 은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은서하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그리 티가 나는 떨림은 아니라 한현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사인을 마친 서류철을 은서하에게 건넸다. “결재 다 했어요. 가봐요.”한현진이 건넨 서류철을 받아 꼭 끌어안은 은서하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한현진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은서하는 사무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 번 주혁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상대방 역시 사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서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았다. 서류철을 끌어안은 은서하의 머릿속은 백짓장이 되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서류철을 쥔 손에 꽉 힘을 실었다. 결재 서류에 크고 작은 구겨진 자국이 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걷던 은서하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품 안의 서류가 툭 날리며 바닥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흩어졌다. 은서하가 부딪힌 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가까운 사이였던 그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은서하를 도와 서류를 주으며 핀잔을 줬다. “넌 키가 작아서 내 얼굴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 내가 얼마 전에 고친 코가 너 때문에 부러질 뻔 했잖아.”은서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코를 고쳐? 너 성형했어?”“기억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 아냐? 성형한지 이제 6개월도 지났어. 이번엔 다시 손 좀 본 거야.”상대방은 말하며 은서하의 이마를 톡 쳤다. “너도 얼른 그 복코 수술 좀 해. 네 얼굴은 코 때문에 다 망쳤어. 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이 기술이 꽤 좋아. 할 생각 있으면 얘기해. 소개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