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내가 오해했었네."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뒤끝 없잖아요. 사과하고 잘 달래주면 용서하실 거예요."…...뒤끝이 없어? 어제도 이불 한 번 당겼다고 내 팔을 바로 물어버리더구먼. 이빨 자국이 아직도 그대로라고.'이 세상에 유현진보다 더 뒤끝 있는 여자는 없을 거야.'강한서는 휴대폰을 다시 민경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송민영 잘 지켜봐요. 약속한 시간 안에는 절대 다쳐서 일내면 안 돼요. 만약 또 한 번 계약 위반하면 내가 준 것들 그대로 돌려받을 거예요.""그럴게요."민경하가 나가자마자 유현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증조할아버지가 당신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을 거냐고 물으셔."강한서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힐끔 보더니 서류 봉투를 닫아버리고 답장을 보냈다. "갈게."강한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르신은 예전과 달리 열정적으로 반겨주었다. "강한서 왔어?"어르신은 활짝 웃었다. 깊게 파인 주름들은 한데 모여 한결 인자해 보였다.강한서는 갑자기 변한 어르신의 태도에 당황해서 그저 간단하게 대답한 뒤에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에는 건드리지 않은 음식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강한서는 미안한 마음에 다급히 해석했다. "길이 좀 막혀서요.""큰 도시가 그렇지 뭐, 길 막히는 건 정상이지.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빨리 손 씻고 같이 밥 먹자고."이번에는 강한서뿐만 아니라 유현진도 의아했다.유현진이 집에 돌아오니 어르신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어르신은 도움을 주려는 유현진을 주방에서 내쫓고는 기어코 그녀에게 강한서한테 연락해 집에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했다. 식사를 다 차린 뒤에도 유현진은 손도 못 대게 하고는 강한서를 기다렸다.어르신은 여태 강한서를 못마땅해했다. 그런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을까?어르신은 손을 씻고 나온 강한서를 빨리 앉으라면서 직접 강한서에게 뜨끈한 국을 떠주었다."뜨거울 때 먹어."유현진도 자연스럽게 국자를 들어 국을 뜨려고 했지만, 어르신은 다급
강한서는 멈칫하며 물었다. "무슨 효과요?""정자를 생산하고 보신하는 효과지.""풉-" 유현진은 마시던 국물을 내뿜었다.강한서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어르신이 말했다. "황 씨한테서 들었는데 자네 집에서 아이를 원한다더니만? 하긴 가질 때도 되었지. 우리 현진이는 나이가 어리니 아무 문제 없어. 근데 자네는 다르지 않나. 나이 30대에 매일 사무실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데다 운동도 안 하니 몸이 안 돼. 몸이 약하면 이제 아이를 낳아도 튼튼하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해. 그러면 우리 현진이가 고생할까 봐 내가 특별히 위해 준비했어."어르신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이 닭은 내가 직접 잡은 산닭이야. 그리고 약재가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데. 오래된 인삼에 복령, 백작, 익지인, 회산약, 당귀, 토사자, 회우 무릎, 음양곽… 아무튼 다 좋은 거야. 일주일에 두세 번만 마시면 아주 소처럼 튼실해질 것이니 애 둘도 낳을 수 있어."유현진은 놀라웠던 데로부터 나중에는 웃음이 터져 나와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증조할아버지 생각이 정상이지. 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여자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난 출산이 한창인 20대인데. 강한서는 30대 초반이 되었으니, 문제가 있어도 당연히 강한서에게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필요 없어요!""에잇, 그러지 마." 유현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증조할아버지 성의를 봐서라도 여보 몸보신 좀 해야지. 이제 30대인데 한밤중에 화장실 세 번씩 가잖아. 그러다 나이 들면 어떡하려고?"어르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뭐? 한밤중에 세 번을 간다고?"강한서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생글거리는 유현진을 노려보았다. "그건 배탈 나서 그런 거예요. 나 아주 건강해요!"며칠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끓인 해물탕을 먹고 장이 약한 강한서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었다. 아마 해물이 잘 익지 않은 듯싶었다.유현진도 이 사실을 알지만 자기가 그동안 불임으로 낙인찍혔었던 것이 분
유현진은 흠칫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강한서의 목과 얼굴을 바라보던 유현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유현진은 웃음을 참으며 놀려줬다. "좋은 거 맞네. 증조할아버지 말씀하시는 거 못 들었어? 한 그릇만 마셔도 쌩쌩해지고 두 그릇 마시면 소도 때려잡는다잖아."강한서는 땀을 흘리며 얼굴을 굳힌 채로 이불을 덮고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보기 힘든 모습에 이때다 싶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강 대표. 삼계탕 마시고 나니 어때? 드라마에서 말한 대로 막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고 그래? 당신 땀나는 것 좀 봐, 덥지? 내가 부채질 좀 해줘?"그녀는 고의로 강한서에게 더 바싹 다가가 작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부채질했다.유현진의 몸에서 바시워시의 향기가 상큼하게 풍겨왔다. 분명 자기 몸에서 나는 향과 같은 향인데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은 강한서의 몸과 마음을 자극했다.강한서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의 입술, 그리고 쇄골로 향했다.투명하다시피 하얀 그녀의 피부는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붉게 피어올라 밤새 내려가지 않았다. 마치 강한서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표기처럼 말이다.강한서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멀리 떨어져!""그건 안되지. 당신이 이렇게 괴로운데 내가 옆에 꼭 붙어있어야지. 아니면 나 위자료 어떻게 편히 받겠어?"강한서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이 가증스러운 표정 좀 봐, 내가 확신하는데. 속으로 아마 재밌어 죽겠지!'유현진은 확실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해 주는 척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몇 달 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 삼계탕이 효력이 이렇게 강하다고? 당신 혹시 연기하는 거 아니야?"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열 받아 몸을 홱 뒤집으며 유현진에게 올라타서 그녀의 턱을 잡고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도 연기하는 거 같아?"유현진은 몸이 굳어졌다. 얇은 잠옷을 입은 그녀는 강한서의 몸에 눌려 그의 단단한 곳을 느꼈다.'내가… 장난이 심했네.'유현진은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님의 칠순 잔치는 둘째 집에서 했으니, 이치대로라면 팔순 잔치는 우리 차례야.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어머님의 뜻에 달렸으니 내일 말조심하고 눈치껏 행동해.""알겠어요."신미정은 몇 마디 말을 더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강한서에게 물었다. "눈치껏 행동하라는 건 무슨 뜻이지? 어머님께서 할머니 팔순 잔치 준비하시겠다는 뜻인가?"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할머니 생신 잔치를 주최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난 싫어." 유현진은 이불을 덮으며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신 잔치를 준비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써야잖아. 주인공 컨디션도 생각해야지 손님들 기분도 체크해야지. 그렇다고 다들 잘했다 칭찬해 줄 것도 아니고. 고생을 사서 하는 거잖아?"강한서도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할머니 칠순 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과 선물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돈 얘기가 나오니 유현진은 강한서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얼마나 들어왔는데?""열한자리 수, 너랑 결혼하는 데 쓴 돈보다 더 많아."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많으면 많았지, 왜 하필 그 말을 꺼내서는. 내가 싸구려라는 거야, 뭐야?'강한서가 계속 말했다. "생신 잔치를 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돈도 정력도 많이 들어가. 할머니도 잘 알고 계시니 매번 잔치를 열고 나면 손님들의 선물은 한두 가지만 고르고 나머지는 다 주최자에게 넘겼어. 삼촌네 서교에 별장 사셨잖아. 그거 할머니 칠순 잔치 끝나고 사신 거야."유현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쩐지 어머니께서 연락까지 주시며 당부한다고 했어. 생신 잔치를 열어드리고 별장을 얻었으니, 누구라도 이 기회를 잡으려 할 거 아니야?'"저번에 둘째 삼촌네 하셨으니, 이번에는 당신 어머니 차례지?""그건 모르지."강한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환갑잔치는 엄마가 차렸지만, 할머니의 칠순 잔치는 둘째 삼촌 댁에서 차렸어."그 말인즉슨
강한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회사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습니다."신미정은 강한서를 흘겨봤다."현우의 말로는 네가 진작에 회사를 떠났다고 하던데?""걔랑 같은 층에서 일하는것도 아닌데 제가 언제 회사를 떠났는지를 어떻게 알죠?"신미정은 이에 말문이 막혀 화가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불쾌한 어조로"들어와, 너네 둘이 마지막이야."그들이 들어왔을땐 거실엔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강 할머니는 비록 올해에 일흔아홉번째 생신이셨지만 한주시에는 아홉수를 크게 치르는 풍습이 있었기에 여든잔치를 여는것과 비슷했다.강씨 가문은 이에 대해 엄청난 신경을 기울였다, 외국에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고모를 제외하면 집안의 큰 어르신들은 진작 모두 자리에 참석했다.강 할머니께서 상석에 앉으셨고, 왼쪽엔 신미정 강민서 모녀가 앉았고 오른쪽엔 둘째 삼촌 강단해와 둘째 작은 어머니 송민희가 있었으며 강현우는 할머니 반대편 소파에 앉아있었다. 회사에서 생긴 유쾌한 일들을 들려드리는것 같았다."너무 짖궂은거 아니니? 물에 후추를 타는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한거니?""그때는 고작 관리인따위가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걸 참을수 없었어요, 그래서 골탕먹일려고 물에 이상한 짓을 해놓았죠. 근데 그 물도 버리기 아까워할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물론 화장실청소를 한주일동안 더 했지만요."강현우는 한숨을 쉬었다."그래도 마지막까지 견디려고 생각했죠, 다 똑같은 사람이고 남도 하는데 내가 못할리 없잖아요."이에 할머니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송민희는 웃으며 말했다."현우가 이번에 출장을 가면서 진짜로 철이 들었어요. 처음엔 거기서 맨날마다 돌아가게 해달라고 전화가 왔었어요, 시간이 지나더니 그 횟수는 점차 줄어들더니 거기에 적응하더니 그 후의 전화엔 돌아오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배웠던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는게 아니겠어요? 돌아올때 그 곳의 동료들도 아쉬워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그곳의 특산물도 몇 박스나 보내줬고요. 몇개월동안 몰라보게 건
신미정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물었다."무슨 뜻이지?"이 말이 그녀의 아픈곳을 찌른게 분명했다.강한서가 얼마나 우수하든 결국엔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벼락부자의 딸을 데려왔었으니.송민희는 이에 웃으면서"별 뜻 없어요, 그냥 한번 비유해본거예요, 아내를 찾을땐 현명한 사람을 골라라. 비록 현진이가 다른 방면에선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사람이 엄청 현명하고 눈치가 빠르잖아요? 어머님 말고 저도 보고만 있으면 웃음이 나는걸요."유현진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유현진은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신미정과 송민희는 모두 다 그녀로썬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였다, 이것은 그녀가 갓 시집왔을때부터 알고있었다.구체적인 원인이라하면 두 집안간의 상속권 전쟁이라고 할수 있겠다.한성 그룹은 강단한이 손수 일으켜세웠던 회사였고 만약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한성 그룹은 틀림없이 장남한테로 돌아갈게 뻔했다.하지만 강단한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들 딸 모두 나이가 어렸었기에 한성 그룹은 한동안 강단해의 경영하에 있었다. 신미정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였기에 비록 강씨 가문에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없었다 해도 회사에 대해서는 경영권이 없었기에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수밖에 없었다.강한서가 성인이 되기전 다른사람들로부터 사모님이라 불리던 사람도 송민희뿐이였다. 강단해가 회사를 더욱더 크게 만드는 동안 송민희의 지위도 점차 높아져만갔다.게다가 그녀의 본가도 어느정도 실력이 있는 집안이였기에 사교계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자였다, 그 당시 누가 신미정을 거들떠나 봤을까?사교계안의 룰은 간단했다, 누구의 집안이 더 대단한가였다.신미정은 남편을 보내고 그녀의 본가도 한주시에선 유명하지 않았기에 강씨 가문의 맏 며느리라는 칭호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신미정처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평소에 송민희한테 눌리우고 살았으니 얼마나 분했을까?회사에서 강한서의 지위가 높아지고 강단해와 서로 경쟁이 가능한 권력을 가지고 나서야 그나마 그녀는 어
"나이도 젊은데 친구 몇명정도 더 아는것도 나쁘지 않죠."유현진은 숨을 말뜻을 모르는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한테 말을 걸었다."도련님, 혹시 여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있으시면 형수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소개시켜드릴게요."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대답했다."그럼 이제 형수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송민희는 불쾌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흘겨보았다. 예의를 차리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거에서 신미정이 왜서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신분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유현진은 당연히 바보가 아니였다, 그냥 둘째 작은 어머니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신미정과 송민희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녀는 송민희가 자신을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됐었다."어렵게 모였는데 입 그만 놀리고 다들 자리 찾아서 앉게나."할머니께서 입을 열자 다들 조용해지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강한서가 앉기를 기다리고 할머니는 그의 이마의 푸른 상처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이마의 상처는 뭐니?"유현진은 심장이 내려앉는듯 했다, 강한서의 이마의 상처는 몇일전 유람선우에서 폭풍우때문에 그녀와 부딪혔을때 생긴 상처였다.비록 상처가 유람선에서는 지금보다 더 심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하지만 할머니께서 손자를 엄청 사랑하기에 한 눈에 이상함을 발견했다.강한서는 사건의 범인을 한번 바라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잘때 떨어졌어요.""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어, 내 방에 약이 있으니 좀 이따가 현진이보고 치료해달라고 해."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이 상처는 이마에 난거라 자기 손으로 충분히 할수 있는데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손이 없는것도 아니고.)당연하게도 이건 속으로 말한거였다, 저번에 피임약 일로 할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었는데 어찌 감히 말대답을 할수 있겠을까, 얌전하게 말을 들을수밖에 없었다.강한서에게 물은후 할머니는 차례차례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비록 그녀는 년세가 들
은영선생님은 지금 시대의 국악의 대가로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그의 대표곡은 "백화정" 이였다.유현진도 이 사람을 아주 잘 알고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 하현주가 은영의 광팬이였었고 집안에 은영선생님의 앨범이 잔뜩 보관되여있었다.게다가 그녀는 어릴때 하현주를 따라서 몇번이나 콘서트장에 간적이 있었다, 콘서트장에 울려퍼지는 그의 곡조는 과연 최고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은영선생님은 그녀가 성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그녀는 은영선생님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는 성우의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로 남한테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은영선생님께서 나이가 50이 되던 해에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부터 교육사업에 매진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때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은영선생님은 한번도 무대에 선적이 없었다. 이 기간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초청을 보냈었지만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다 거절을 당했다.(송민희가 그 사람의 제자를 안다 한들 무슨 방법이 있어? 당시에 은영선생님의 가족들과도 친한 사람도 결국엔 실패했잖아.)송민희는 아마도 직접 가보진 않은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비록 은퇴하셨지만 친구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시진 않겠지요? 원래 제가 바로 친구를 찾아가서 초청하려고 했는데 아직 형수님이랑 상의해보진 않았고 또 형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아직까지 미뤘어요."송민희는 숨을 고른후 말을 계속해 이어갔다."듣기론 형수님께서 최근에 미용원에 투자를 하셨다고, 방금 개업해서 신경써야 될 일이 많으시죠? 형수님 번거로울까봐 어머님 팔순잔치는 제가 맡을게요.신미정은 그녀를 흘겨보며"동서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 팔순잔치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 있겠어? 그 미용원은 그냥 심심풀이로 투자 조금 한 것 뿐이야, 대주주도 아니고, 그냥 연말에 보너스 타가는 정도지. 그래서 평일엔 한가해. 그리고 팔순잔치는 당연히 맏며느리가 도맡아 해야지 않겠어? 어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