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배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강한서의 체온에 유현진은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흔들림 속에서 저도 몰래 잠이 들었다.폭풍우는 새벽에야 서서히 멈추었다. 유현진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유현진은 몸을 움직이다가 자기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강한서의 팔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침대 시트에 묶여있었다.아마 그녀가 잠들었을 때, 강한서가 불가피한 사고를 막기 위해 묶어놓은 듯싶다.유현진은 강한서를 깨우지 않고 침대 시트를 풀었다. 간단히 씻고 나서 유현진은 선실을 나갔다.갑판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파도로 여러 가지 해산물들이 배로 들어왔고 선원들은 갑판을 정리하고 있었다.유현진은 어르신의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선실에 어르신은 보이지 않고 민경하만이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증조할아버지는요?"민경하가 말했다. "어르신은 갑판에 해산물 주우시러 갔어요. 집에 가서 해물탕 끓여 드실 거래요."…...'증조할아버지 거이 아흔 살 되시는 거 맞지? 컨디션이 어쩜 젊은이들보다 좋네.'유현진은 갑판을 둘러보다 겨우 어르신을 찾았다. 어르신 옆에는 주강운도 보였다.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유현진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바다 거북이가 있었다.어르신은 턱을 만지며 말했다. "내 경험상 이건 아마 암컷 거북이 같네."주강운은 휴대폰을 뒤지며 말했다. "갑각이 길쭉하고 꼬리 홈이 펼쳐진 거로 보아서는 수컷으로 보이는데요.""그럴 리가! 수컷 거북이가 이렇게 작다고?"주강운이 말했다. "혹시 아직 덜 자란 거 아닐까요?""이렇게 큰데 덜 자랐다고?""청 바다거북은 20년이라야 성년이 되죠. 성년이 되면 체구가 80~150센티미터 정도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거북이는 보기에도 대략 40센티미터 정도이니 아직 덜 자란 거 맞아요.""아기 거북이였군." 어르신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몸보신용으로 딱인데."유현진은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증조할
"얼굴도 강한서 그놈보다 잘났더구먼.""현진이 너는 왜 주강운을 안 만난 거야."…...'증조할아버지 왜 이래?'"주 변호사님은 강한서 친구예요. 아무 말이나 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그냥 말해본 거야." 어르신은 느긋하게 말했다. "강한서도 괜찮아. 어제 나랑 장기도 몇 판 뒀어. 그러다가 밖에 비바람이 몰아치니 바로 달려 나가더군. 쓸 만은 해."…...'쓸만은 하다고? 이게 무슨…'그들이 돌아갔을 때 강한서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나왔다.몇 시간 뒤면 배는 선착장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유람선에서의 시간을 즐겼다.송민영은 어제 일을 설욕하기 위해 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다.송민영은 비록 연기는 안 되지만 앨범도 내었던 적이 있는지라 가창력은 좋았다.하지만 노래하는 와중에도 이따금 강한서에게 눈길을 돌리는 모습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다행히도 강한서는 메일을 확인하느라 송민영의 뜨거운 눈길을 느끼지 못했다.유현진은 감귤을 발라 강한서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강한서는 깜짝 놀라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박상에 최고래."…...말을 끝낸 유현진은 이내 감귤을 강한서의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달콤하지?"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신맛이 강한서의 혀끝을 자극했다.하지만 강한서는 뱉어내지 않았다.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송민영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유현진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때 세프처럼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앞에 디저트를 가져다 놓았다.유현진이 말했다. "주문 안 했는데요?"상대는 스페인어로 유현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솰라솰라거렸다. 하지만 이를 알아들은 강한서는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말을 끝낸 상대는 마지막으로 어정쩡한 영어로 말했다. "즐거운 식사 하세요."유현진은 그제야 물었다. "저 사람 뭐래?"강한서는 쌀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강운이가 만든 스파게티 맛있었어?""맛…" 하마터면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정식 입장을 기준으로 하며 정식 입장을 내 놓기 전에는 타인의 이용 거리가 되지 않게 아무런 추측을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타인의 이용 거리라는 말은 무언가를 암시하기에 충분했다.송민영이 '봄의 연인'에 출연한다는 말은 몇 달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다.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송민영은 '봄의 연인'이라는 타이틀로 실검에도 몇 번 올랐다.차이현의 명성과 송민영의 인기가 한데 어우러져 매번 기사가 나갔다 하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당시 송민영은 이러한 기사에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촬영이 시작되었는데 송민영은 촬영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내 이런 입장을 내 놓았으니, 팬들은 제작진에서 송민영을 이용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입장 발표가 나간 뒤, 송민영의 팬들은 분분히 '봄의 연인' 계정에 악플을 달기 시작했다.'봄의 연인' 계정에는 제작진과 스텝을 향한 악플이 수두룩하게 달렸다.다행히 차이현의 선견지명으로 촬영에 참여하는 배우들을 공개하지 않았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배우들에게까지 불똥이 튈 뻔했다.송민영은 워낙에 관종이라 관심을 끄는 일을 잘했다. 팬들은 그녀에게 이용당한 줄도 모르고 송민영을 위로했다.차미주가 단체톡방에서 말했다. "촬영이 시작되었을 때도 실검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아무 해명도 없다가 왜 하필 지금 이런 입장 발표를 했을까요?"유현진도 이상했다. 갑자기 이런 입장 발표를 한다는 건 욕 먹으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었다.차이현은 이런 방식을 제일 질색하는 사람이다. 일을 이렇게 키우다니, 송민영은 아마도 앞으로도 차이현의 작품에 출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진희연이 말했다. "혹시 새 작품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일부러 시선 끌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요?"처음에 사람들은 진희연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송민영이 '평화의 세상'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찌라시가 올라왔다.'평화의 세상'은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인기 있는 작품이다.이 소설은 독
사실 송민영의 매니저인 시우진도 송민영이 '평화의 세상'에 출연하는 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어제 송민영이 물에 빠진 뒤, 강한서는 대본 하나를 들고 송민영에게 찾아왔었다.하지만 그 대본은 '평화의 세상'이 아니라 '차상'의 대본이다. 비록 이 작품은 차이현의 '봄의 연인'보다 뒤쳐지지만, 전형적인 여주 원탑의 작품이다. '봄의 연인'은 궁중 세력 싸움을 기반으로 두었지만 '차상'은 말 그대도 찻잎 장사를 하는 세가의 이야기다.여주는 아무것도 모르던 말괄량이로부터 집안의 주인이 되고 나중에 찻잎으로 큰 사업가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 내용이다.사실 이 작품의 여주는 '봄의 연인'의 여주보다 더 몰입감을 주는 성장형 여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하지만 송민영은 제작 회사가 작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작품의 감독은 예술 영화로 많은 상을 받았었지만, 작품성이 너무 뛰어난 탓에 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작품마다 흥행에 실패했다.송민영은 화제성을 중요시하다 보니 차이현의 명성과 퀄리티를 믿고 '봄의 연인'에 출연하고 싶었다.하지만 '차상'은 아무런 배경도 없고 기껏해야 상이나 하나 받고 끝날 작품이라 생각되어 굳이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차상'은 연말에야 촬영을 시작하다 보니 빨라야 내년 여름에야 방송에 나갈 수 있었다. 섬블 컴퍼니와의 계약도 거의 만료되는 데다 차기 작품이 없으니 만약 '차상'에 출연하게 되면 공백기가 생기게 된다.그렇게 되면 대중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니 송민영 같은 관종에게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신인들도 끊임없이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 상황에 송민영은 공백기가 두려웠다.하지만 '평화의 세계'는 달랐다. 제작진과 촬영 규모는 '봄의 연인'과도 겨눌 수 있을 만큼 강대했다. 게다가 촬영 전부터 수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촬영도 이번 달에 시작해 3월이면 크랭크업으로 연말이면 상영할 수 있었으며 출연료도 '차상'의 세배보다 더 높았다.제일 중요한 건 방송 시간대가 '봄의 연인'
강한서는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내가 오해했었네."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 뒤끝 없잖아요. 사과하고 잘 달래주면 용서하실 거예요."…...뒤끝이 없어? 어제도 이불 한 번 당겼다고 내 팔을 바로 물어버리더구먼. 이빨 자국이 아직도 그대로라고.'이 세상에 유현진보다 더 뒤끝 있는 여자는 없을 거야.'강한서는 휴대폰을 다시 민경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송민영 잘 지켜봐요. 약속한 시간 안에는 절대 다쳐서 일내면 안 돼요. 만약 또 한 번 계약 위반하면 내가 준 것들 그대로 돌려받을 거예요.""그럴게요."민경하가 나가자마자 유현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증조할아버지가 당신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을 거냐고 물으셔."강한서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힐끔 보더니 서류 봉투를 닫아버리고 답장을 보냈다. "갈게."강한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르신은 예전과 달리 열정적으로 반겨주었다. "강한서 왔어?"어르신은 활짝 웃었다. 깊게 파인 주름들은 한데 모여 한결 인자해 보였다.강한서는 갑자기 변한 어르신의 태도에 당황해서 그저 간단하게 대답한 뒤에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에는 건드리지 않은 음식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강한서는 미안한 마음에 다급히 해석했다. "길이 좀 막혀서요.""큰 도시가 그렇지 뭐, 길 막히는 건 정상이지.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빨리 손 씻고 같이 밥 먹자고."이번에는 강한서뿐만 아니라 유현진도 의아했다.유현진이 집에 돌아오니 어르신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어르신은 도움을 주려는 유현진을 주방에서 내쫓고는 기어코 그녀에게 강한서한테 연락해 집에 들어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했다. 식사를 다 차린 뒤에도 유현진은 손도 못 대게 하고는 강한서를 기다렸다.어르신은 여태 강한서를 못마땅해했다. 그런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을까?어르신은 손을 씻고 나온 강한서를 빨리 앉으라면서 직접 강한서에게 뜨끈한 국을 떠주었다."뜨거울 때 먹어."유현진도 자연스럽게 국자를 들어 국을 뜨려고 했지만, 어르신은 다급
강한서는 멈칫하며 물었다. "무슨 효과요?""정자를 생산하고 보신하는 효과지.""풉-" 유현진은 마시던 국물을 내뿜었다.강한서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어르신이 말했다. "황 씨한테서 들었는데 자네 집에서 아이를 원한다더니만? 하긴 가질 때도 되었지. 우리 현진이는 나이가 어리니 아무 문제 없어. 근데 자네는 다르지 않나. 나이 30대에 매일 사무실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데다 운동도 안 하니 몸이 안 돼. 몸이 약하면 이제 아이를 낳아도 튼튼하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해. 그러면 우리 현진이가 고생할까 봐 내가 특별히 위해 준비했어."어르신은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이 닭은 내가 직접 잡은 산닭이야. 그리고 약재가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데. 오래된 인삼에 복령, 백작, 익지인, 회산약, 당귀, 토사자, 회우 무릎, 음양곽… 아무튼 다 좋은 거야. 일주일에 두세 번만 마시면 아주 소처럼 튼실해질 것이니 애 둘도 낳을 수 있어."유현진은 놀라웠던 데로부터 나중에는 웃음이 터져 나와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증조할아버지 생각이 정상이지. 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여자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난 출산이 한창인 20대인데. 강한서는 30대 초반이 되었으니, 문제가 있어도 당연히 강한서에게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필요 없어요!""에잇, 그러지 마." 유현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증조할아버지 성의를 봐서라도 여보 몸보신 좀 해야지. 이제 30대인데 한밤중에 화장실 세 번씩 가잖아. 그러다 나이 들면 어떡하려고?"어르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뭐? 한밤중에 세 번을 간다고?"강한서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생글거리는 유현진을 노려보았다. "그건 배탈 나서 그런 거예요. 나 아주 건강해요!"며칠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끓인 해물탕을 먹고 장이 약한 강한서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었다. 아마 해물이 잘 익지 않은 듯싶었다.유현진도 이 사실을 알지만 자기가 그동안 불임으로 낙인찍혔었던 것이 분
유현진은 흠칫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강한서의 목과 얼굴을 바라보던 유현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유현진은 웃음을 참으며 놀려줬다. "좋은 거 맞네. 증조할아버지 말씀하시는 거 못 들었어? 한 그릇만 마셔도 쌩쌩해지고 두 그릇 마시면 소도 때려잡는다잖아."강한서는 땀을 흘리며 얼굴을 굳힌 채로 이불을 덮고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보기 힘든 모습에 이때다 싶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강 대표. 삼계탕 마시고 나니 어때? 드라마에서 말한 대로 막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고 그래? 당신 땀나는 것 좀 봐, 덥지? 내가 부채질 좀 해줘?"그녀는 고의로 강한서에게 더 바싹 다가가 작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부채질했다.유현진의 몸에서 바시워시의 향기가 상큼하게 풍겨왔다. 분명 자기 몸에서 나는 향과 같은 향인데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은 강한서의 몸과 마음을 자극했다.강한서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의 입술, 그리고 쇄골로 향했다.투명하다시피 하얀 그녀의 피부는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붉게 피어올라 밤새 내려가지 않았다. 마치 강한서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표기처럼 말이다.강한서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멀리 떨어져!""그건 안되지. 당신이 이렇게 괴로운데 내가 옆에 꼭 붙어있어야지. 아니면 나 위자료 어떻게 편히 받겠어?"강한서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이 가증스러운 표정 좀 봐, 내가 확신하는데. 속으로 아마 재밌어 죽겠지!'유현진은 확실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해 주는 척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몇 달 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 삼계탕이 효력이 이렇게 강하다고? 당신 혹시 연기하는 거 아니야?"강한서는 그녀의 말에 열 받아 몸을 홱 뒤집으며 유현진에게 올라타서 그녀의 턱을 잡고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도 연기하는 거 같아?"유현진은 몸이 굳어졌다. 얇은 잠옷을 입은 그녀는 강한서의 몸에 눌려 그의 단단한 곳을 느꼈다.'내가… 장난이 심했네.'유현진은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님의 칠순 잔치는 둘째 집에서 했으니, 이치대로라면 팔순 잔치는 우리 차례야.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어머님의 뜻에 달렸으니 내일 말조심하고 눈치껏 행동해.""알겠어요."신미정은 몇 마디 말을 더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유현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강한서에게 물었다. "눈치껏 행동하라는 건 무슨 뜻이지? 어머님께서 할머니 팔순 잔치 준비하시겠다는 뜻인가?"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할머니 생신 잔치를 주최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난 싫어." 유현진은 이불을 덮으며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신 잔치를 준비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써야잖아. 주인공 컨디션도 생각해야지 손님들 기분도 체크해야지. 그렇다고 다들 잘했다 칭찬해 줄 것도 아니고. 고생을 사서 하는 거잖아?"강한서도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할머니 칠순 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과 선물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돈 얘기가 나오니 유현진은 강한서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얼마나 들어왔는데?""열한자리 수, 너랑 결혼하는 데 쓴 돈보다 더 많아."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많으면 많았지, 왜 하필 그 말을 꺼내서는. 내가 싸구려라는 거야, 뭐야?'강한서가 계속 말했다. "생신 잔치를 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돈도 정력도 많이 들어가. 할머니도 잘 알고 계시니 매번 잔치를 열고 나면 손님들의 선물은 한두 가지만 고르고 나머지는 다 주최자에게 넘겼어. 삼촌네 서교에 별장 사셨잖아. 그거 할머니 칠순 잔치 끝나고 사신 거야."유현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쩐지 어머니께서 연락까지 주시며 당부한다고 했어. 생신 잔치를 열어드리고 별장을 얻었으니, 누구라도 이 기회를 잡으려 할 거 아니야?'"저번에 둘째 삼촌네 하셨으니, 이번에는 당신 어머니 차례지?""그건 모르지."강한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환갑잔치는 엄마가 차렸지만, 할머니의 칠순 잔치는 둘째 삼촌 댁에서 차렸어."그 말인즉슨
한현진은 그녀의 호적지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이시연은 오래 기다렸고 그 사이 네 명이 더 끼어든 후에야 은서하가 비로소 돌아왔다. 그녀는 땀에 젖어 얼굴이 여전히 창백했고 얼굴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이시연은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거예요? 의사한테 같이 가줄까요?”은서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장실 갔다 오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이시연은 결과지를 건네며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면 승진하고 나 좀 잘 챙겨줘요.”은서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자리만 지킬 수 있어도 감사하죠. 승진은 꿈도 안 꿔요.”잠시 멈추고선 덧붙였다. “대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그냥 그럭저럭이죠. 서 대표님이 이번에 강력한 카드를 데려왔으니까 우리는 그저 배경일 뿐이죠.” 이시연의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친선 경기라고 보면 되죠 뭐.”은서하는 향료 조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도 좀 더 열심히 해봐야죠. 안 그러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요.”이시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클라우드 아파트 902.“현진아, 이건 어때?”차미주는 흰 티에 청바지 오버롤을 입고 한현진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어때?”한현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그럼 아까 그 꽃무늬 원피스는?”“그것도 괜찮아.”차미주는 눈꺼플이 살짝 뛰었다. “그럼 이 노란 운동복은?”“비슷해.”차미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너 지금 뭐야? 그냥 대충 말하는 거지? 다 비슷하면 난 도대체 뭘 입어야 해?”한현진은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내가 너 대충 대하는 게 아니야. 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너한테 좀 더 격식을 차린 옷을 입힐지 아니면 너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힐지 말이야. 평소에 이렇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니니까 갑자기 정장 스타일을 입으면 길도 제대로 못 걸을 거고 스
한현진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서해금 옆에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벌써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법을 배우셨군요.”은서하의 얼굴이 잠시 창백해졌지만 이내 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 대표님, 저를 싫어하시든 미워하시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주혁이라는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에요.”“주혁 씨가 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냥 운전기사일 뿐인데? 당신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정말로 걱정해서 경고해 주는 건지 아니면 고의로 우리 사이를 흔들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은서하는 더 조급해졌다. “저는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만큼은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하세요. 한 대표님, 당신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아무리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예요.”초조해하는 은서하와는 달리 한현진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도와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죠? 갑자기 등을 돌리지 않았나요? 은서하 씨,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은서하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한 대표님, 저는 겁이 많고 피할 줄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요. 최소한 저를 도와주셨던 대표님을 해칠 수 없다는거요.” 그녀의 진지한 말투에 한현진은 마음이 흔들렸다.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다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럼 주혁 씨를 멀리하라는 이유라고 말해보세요.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설득 될 만한 이유요.”은서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움켜잡은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한현진은 지칠 대로 지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 여기서 나를 걱정한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은서하는 급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서해금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 만약 네가 은서하고 우연히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걸 이용해서 서대금이 나를 잠시라도 회사에서 밀어낼 수 있게 할 수 있어. 그리고 넌 그 기회를 통해 승진하고 월급도 올리고 사장 앞에서 좋은 이미지도 쌓을 수 있어. 그 상황에서 너라면 그걸 참을 수 있겠어?]차미주는 그 말에 감탄하며 말했다. [임신한 채로도 이렇게 계산적이네? 너 아이 낳으면 두 명의 도깨비가 나올까 봐 걱정돼.]한현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럴 리 없을 거야. 강한서가 매일 내 옆에서 를 읽어주고 있어. 맨날 애들한테도 읽어주니까 조금은 성품이 좋을 거야.][강한서 진짜 대단하다. 넌 그걸 듣고 있어?][안 듣지.] 한현진이 대답했다. [난 이어폰 끼고 드라마 봐. 강한서가 애들한테 읽어주고.]차미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국 는 아무 소용없다는 거네.][왜?] 한현진이 물었다.차미주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엄마가 항상 그러셨어. 아이는 유전이 중요하다고.]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용은 용을 낳고 봉항은 봉황이 낳는다고. 네가 도덕이 없다면 강한서이 아무리 를 많이 읽어줘도 소용없어.”[너 진짜!] 한현진이 이빨을 갈며 말했다. [한성우 씨랑 있더닌 이제는 입만 잘 돌아가네.][오래 배운 거 이럴 때 써먹어야지.]한현진은 코웃음을 쳤다. [나랑 연습하면 뭐 해. 능력 있으면 너희 사장한테 가서 연습해.]차미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사장한테서 월급 받아야 해.]차미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있잖아.그 사람이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자고 하는데 네가 봤을 때 첫 만남에 뭘 입고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까? 정말 고민돼.]한현진은 답했다. [내가 경험이 많아 보여?][두 번이나 결혼했잖아. 너가 없으면 누가 경험 있겠어.]한현진은 담담하게
은서하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건강검진표를 꽉 쥔 채 한현진의 뒤로 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현진의 배로 향했다. 한현진은 회사에 와서부터 항상 허리 라인이 보이지 않는 넉넉한 옷만 입었다. 뒷모습으로 보면 여전히 날씬해 보였고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특정 동작을 할 때 배가 살짝 불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한현진의 차에 탔을 때 그 모습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이 찐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임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은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한현진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혹시 서해금 때문일까?’은서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한현진은 마치 그녀의 발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받고 몇 마디를 나누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줄을 빠져나갔다.은서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한 대표님, 검사 안 하세요?”한현진은 천천히 돌아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올려구요.”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한현진이 떠난 뒤 이시연이 나타났다. “한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이시연은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은서하가 대답했다. “전화를 받으시더니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가셨어요.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어요.”“그렇군요.” 이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대표님과 얘기 해봤어요? 예전에 그 분의 옷을 받고 따돌림 당하고 급여도 깎였다고 했을 때 한 대표님이 굉장히 마음 아파했어요.” “그때 한 대표님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후에 그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 대표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 잘 사과하면 한 대표님이 이해해줄 거예요.”은서하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는 그런 얘길 꺼낼 입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냥 작은 직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이시연과 은서하가 진단서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시연이 은서하의 손을 이끌고 다가오며 말했다. “한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 건강검진 받으러 오신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은서하를 가볍게 훑어본 뒤 다시 이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도 오늘입니까?” 이시연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어제가 제 날짜였는데 어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른 분이랑 바꿨어요. 서하 씨랑 같이 오려고요.” “가족은 안 데리고 왔어요?” 이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직장에서 추가 의료보험을 들어두셔서 제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서하 씨 외할머니의 병은 보험으로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서요.”은서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이시연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주혁에게로 흘러갔다. 주혁은 예민하게 그 시선을 포착했다. 둘의 눈이 맞닿자 은서하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건강검진 순서가 불리기 시작했다.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얘기 나누세요. 전 애들 데리고 먼저 검진 받으러 가겠습니다.” 그가 주상욱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시연이 한현진에게 조용히 제안했다. “한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먼저 채혈하고 나서 초음파 검사하면 순서가 빨라요. 그러면 금방 검사 끝내고 식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채혈은 이미 했어요. 먼저 가요. 난 초음파실 앞에서 번호표 뽑아둘게요.” 한현진은 애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주혁이 진짜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난 뒤부터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심한 척 주혁을 은근히 살폈다. 주혁의 외모는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얼굴이었다.
주혁이 설명했다. “상욱이가 자신이 보낸 그림 잘 받았는지 물어봐요.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해요.”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주혁에게 물었다. “마음에 든다는 걸 수화로 어떻게 하면 돼요?”주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말하면 돼요. 상욱이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는 게 서툴러요.”사실 주상욱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납치 사건에서 구출된 후 청력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는 청각장애인처럼 생활했으며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지만 또한 납치 당시 겪은 충격 때문에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 능력도 점차 떨어졌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후 보청기를 장착한 뒤 청력은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언어 능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한현진은 주상욱에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주상욱은 눈이 반짝이며 수화를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글을 한 문장 써서 한현진에게 건넸다.“나 보라고?”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주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현진은 고개를 숙여서 화면을 읽었다. [누나, 아빠에게 휴가를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빠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제 누나 옆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와 엄마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가 아빠를 힘들게 한 거예요. 아빠 대신 사과하고 싶어요. 아빠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한현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아이의 말은 서툴고 순수했지만 그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은 ‘아빠’가 진짜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핸드폰에 글 한 줄을 적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네 아빠를 탓하지 않아.]주혁은 이제 그녀 곁에서
대장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물론이죠. 이미 먼저 주혁 씨에게 연락했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상의한 후 곧바로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의 집안 사정으로 회사가 이렇게 좋은 혜택을 주는데 그가 신청하지 않겠어요? 절대 그럴 리 없죠.”원율은 잠시 담배를 피운 뒤 담배 끝을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부서에도 더 전해야 하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대장님, 일 보세요.”원율을 보내고 나서 대장은 다시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혁 씨, 가족이 두 명이니까 연간 십만 원도 안 되게 더 내면 돼.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고 가족이 병원 갈 때 드는 비용은 전부 보장돼. 이 작은 돈 아끼려고 하지 말고 큰 기회를 놓치지 마.”주혁은 돈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싫어한 건 그 돈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위한 보험에 가입하면 이번 주 금요일에 반드시 그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설령 병원이 서대금이 손수 준비한 곳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 사실이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이었다.대장은 계속해서 재촉하며 보험 가입 후의 이점을 설명했다. 결국 주혁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도 함께 가입시켜줘. 나중에 주민등록증 사진 보내줄게.”“알겠어. 잘 쉬고 빨리 회복해. 듣자 하니 곧 송가람 씨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서? 잘 됐어. 정해지면 꼭 한턱 쏴.”주혁은 송가람 밑에서 일하게 될 생각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부드러운 감정이 스며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확정되면 한 번 쏠게.”최종적으로 제출된 명단에 주혁의 가족이 포함된 것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로소 안심했다. 체크업은 금요일과 토요일로 이틀에 걸쳐 나뉘어 진행되었고 한현진은 주혁이 토요일에 가는 것을 일부러 확인한 후 같은 날에 병원을 가기로 했다.주혁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의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주혁
회의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한현진은 물건을 정리한 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서해금을 향해 파일을 들고 다가갔다. “아주머니, 방금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직원들을 생각해서 한 거니까 당연히 지지해야지. 우리 모두 같은 회사에 있는 한 하나의 팀이니까.” 한현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제가 먼저 조사를 했다고 문제 삼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집에 보내주신 곤약도 가람 씨 통해 잘 받았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여유 있게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아끼는 거지. 너무 예의 차리지 마.”한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회사에 온 이래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게 해드렸어요. 제가 성격이 직설적이고 고집도 세서 가끔 말이 거칠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도 아주머니께서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무겁고 어쩌면 제가 너무 어리석게 행동했나 싶어요.”“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서해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말이야. 어른이 아이와 다툴 일이 뭐가 있겠어? 현진아, 아주머니는 네 친엄마는 아니지만 너희 어머니와는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 네가 송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아주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뻐.” “지금 네가 집안에서 가람이랑 함께 지내는 걸 보니 젊은 시절 너희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가끔 떠올라. 우리가 반평생을 함께 지냈고 너희는 진짜 자매가 된 거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란 거야.”한현진은 속으로 토할 뻔했다. ‘정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만약 당시 아이를 바꾼 일과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온화하고 친절한 여자과 관련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없다면 이렇게 진심 어린 말투를 들었을 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
하지만 이 제안이 실행되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그것을 한현진 덕분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서해금은 아마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해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나쁘지 않지만 실비보험은 본래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보장이기에 만약 직원들에게 요금을 부과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은 이를 회사가 급여를 삭감하려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직원들의 가족은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아 이 비용이 꼭 필요한 지출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전액을 회사가 부담하게 된다면 일부 직원들이 가족을 허위로 신고해 다른 사람의 보험을 대신 받으려 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을 겁니다.”한현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말하는 방식에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서해금이 자신의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가족을 위한 보험을 구매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회사는 강제로 요구하지 않아요. 다만 구매의 문턱을 낮춰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원하는 사람은 구입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서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서해금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열었다. “현진 씨, 구입을 개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은 괜찮지만 보험사와의 협상이 필요해요. 어떤 보험사도 손해 보려고 하진 않잖아요.” 한현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보험사와의 협상은 제가 맡을게요. 지금 여쭤보는 건 서 대표님 개인의 의견이에요. 동의하시는지요?” 서해금은 당연히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 소문이 바로 회사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직원들을 위하는 좋은 상사의 이미지가 무너질 게 뻔했다. 서해금은 절대 자기를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서해금은 잠시 침묵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