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번거롭게 약까지 가져다 주시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현진은 주강운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그는 소파 위에 놓았던 옷을 한데 몰려 놓고는 주강운더러 앉으라고 하였다."강운 씨 따뜻한 물 드릴까요?"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현진은 따뜻한 물 한 잔을 주강운에게 건네주었다.주강운은 비닐봉투를 벌려 안에 있는 연고를 꺼내 유현진에게 건네면서 말했다."우선 상처에 발라요."유현진은 연고를 건네받고 웃으면서 고맙다고 전하고는 바로 뚜껑을 열어 연고를 손목에 바르기 시작했다.주강운은 방 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물었다."한서는요?"유현진이 동작을 멈칫하더니 답했다."모르겠어요."방금 전 경호원들이 송민영을 방까지 호송할 때 송민영이 강한서를 붙들고 몇 마디 하더니 송민영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강한서도 뒤따라 나갔다.어딜 가긴 어딜 가? 송민영 찾으러 갔겠지! 유현진이 옷소매를 올리자 팔 안쪽 피부 한군데가 다른 데에 비해 피부색이 어두웠고 매끄럽지 않았다.주강운은 그 한군데 피부를 한참 지켜보다가 물었다."팔 안쪽 조금 어두운 피부는 어떻게 된 거예요?""이거요? 화상 흉터에요."말하고 나니 주강운의 화상이 떠올랐다. 유현진은 멈칫했다. 주강운의 화상에 비하면 자신의 화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화상 화제는 더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주강운 본인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 물었다."어떻게 화상을 입을 거예요?"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이라 유현진은 있는 그대로 답했다."몇 년 전에 엄마와 제가 차사고를 당했어요. 당시 엄마는 엄청 심하게 다쳐서 여태 병원에서 혼미상태로 누워 있어요. 저는 조금 경하게 다쳤고요. 이 흉터도 그때 남은 거예요."유현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실은 그때 사고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유현진이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유상수가 운전기사를 보내 유현진을 학교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일
유현진이 말을 끝낸 뒤에야 주강운은 물었다.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엄마 보러 간 거예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지금은 어때요?"머리를 젓는 유현진의 눈빛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냥 그래요. 숨만 쉬고 계셔요.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주강운은 부드러운 말투로 위로했다. "여태 잘 버텨왔으니, 기적은 꼭 일어날 거예요."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은 반응이 있으세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좋은 징조래요."주강운은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나 해외에서 치료받을 때 알게 된 실력 좋은 의사 친구가 있어요. 필요하면 다리 놓을게요.""고마워요, 필요하면 얘기할게요."유현진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주 변호사님, 소송 건은 어떻게 됐어요?""경고장은 다 완성했어요. 한번 보실래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주강운은 유현진의 휴대폰으로 경고장을 전송해 주었다.경고장의 내용은 유현진이 인터넷에서 봤듯이 구체적이었다.루머를 지우고 지속적인 가해를 멈출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맞아요." 주강운이 갑자기 물었다. "저번에 심리 치료 다닌다 그랬죠?"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유현진은 지난번에 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제출할 때 대충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내 메일을 알아낸 건지 지속해 저주가 섞인 폭력적인 메일을 보내왔어요. 그때 좀 우울했거든요. 내 친구가 이상한 걸 느끼고 날 데리고 심리 클리닉으로 갔어요."병원에서는 그녀가 우울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확실히 유현진은 한동안 우울해 있었고 악몽에 시달렸다. 네티즌들은 그녀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유현진은 매일 밤 저주가 현실이 되는 악몽을 꾸었다.외출하는 날에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를 힐끗 보기만 해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두려워졌다.다행히도 차미주가 일찍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두었다가는 의사의 말처럼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주강운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물었다. "한서는
하지만 상대 기업과 강씨 집안은 절친한 사이였다. 유상수와의 협력 또한 강씨 집안의 신용을 바탕으로 진행했다.그런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게 되자 이 불똥은 결국 한성 그룹으로 튀게 되었다.당시 강한서는 둘째 삼촌인 강단해와 제일 사이가 안 좋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하니 강단해는 바로 이 일을 문제 삼아 강한서의 기세를 눌렀다.강한서는 이 일을 조사하던 과정에 유현진도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와 한바탕 다투었다.하지만 유현진은 정말 억울했다.유현진은 유상수가 자기의 명의로 계약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그날 유상수는 유현진에게 같이 외식도 할 겸 하현주에게 가자고 제안했다.유상수는 한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하현주와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하현주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회복에 도움이 있다고 했었다.그래서 유상수는 이 일을 핑계로 유현진을 속였다.도착하고 보니 두 사람뿐만 아니라 식사 자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유상수는 유현진은 말끝마다 강씨 집안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유현진은 그 자리가 불편해 이내 자리를 떠났다.유현진은 자기의 등장이 유상수의 계약을 도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그 일로 인해 강한서는 강단해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게 되어 골머리를 앓다 보니 유현진의 해석이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자발적이었든 우발적이었든 어쨌든 유현진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니, 말이다.강한서는 회사 일로 바쁘다 보니 유현진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의 일로 다투기까지 하다 보니 강한서는 아예 안방에서 나가 서재에서 지냈다.유현진은 매일 루머와 악플에 시달려 불면증을 앓다가 그날은 수면제 여덟 알을 복용하고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자게 되었다. 잠에서 깬 유현진은 강한서의 한마디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상황에서 잠이 와?"유현진은 강한서에게 자기의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에 유현진은 마음을 접고 말았다.강한서가 그 사실을 안다 해도 그저 '투정 부리지
강한서가 집에 들어왔을 때, 유현진은 이미 잠에 들고 오직 어두운 불빛만이 그를 맞이했다.강한서는 코트를 소파에 벗어 던지고는 침대에 앉았다.유현진은 강한서를 등지고 누워있었지만, 강한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강한서의 몸에는 은은한 향이 풍겨왔다. 송민영에게서 나는 바로 그 향이었다.주강운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짜증이 몰려왔는데 강한서에게서 풍겨오는 향을 맡으니 더 짜증 났다.'개자식, 씻지도 않고 보긴 뭘 봐, 짜증 나게!'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는 이불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유현진이 손을 빼려고 하는 순간, 강한서는 차가운 무언가를 그녀의 손목에 발라주었다.유현진은 깜짝 놀라 다급히 손을 뺐다.강한서는 그녀가 잠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연기 끝났어?"유현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뭐가 연기야? 당신이 여기서 부스럭거리는데 내가 잠이 오기나 하겠어?"강한서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약 발라주고 있잖아."유현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미 다 나았거든."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그제야 침대 머리에 있는 자기의 손에 들려있는 것과 똑같은 약을 보았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사한테 갔었어?""아니." 유현진은 이불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주 변호사님이 가져왔어."강한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주강운이 왜 너한테 약을 가져다줘?"유현진은 이 말에 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당신도 송민영한테 간 거 아니야? 왜, 당신은 되고 다른 사람은 안 돼?"강한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물에 밀어버리고 뭘 잘했다고 그래?"유현진은 멈칫하더니 강한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송민영이 그래? 내가 밀었다고?"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영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전 여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유현진이 송민영을 미는 모습을 보았다.강한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손전등으로 선실을 비추던 강한서는 주저앉은 유현진을 발견했다. 유현진은 빨개진 눈으로 강한서의 이름을 불렀다.강한서는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이내 선실 문을 닫고 큰 걸음으로 유현진을 향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당겨 안전 시트에 앉히려고 했다.하지만 유현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강한서는 화난 말투로 말했다. "지금이 성질부릴 때야?"유현진은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언제 성질부렸다고 그래. 나 다리 아파서 못 움직이겠어."강한서는 손전등으로 그녀의 다리를 비추어 보았다. 유현진의 다리에는 타박상으로 인한 크고 작은 멍이 가득했다.'어쩐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다 했어. 다리를 다쳤네.'"이거 들어."강한서는 손전등을 유현진에게 넘겨주었다. 유현진은 언제 싸웠냐는 듯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강한서는 유현진을 놀려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서러운 표정을 보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그는 몸을 낮추고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유현진은 강한서의 목을 두 팔로 감싸더니 이내 멍해졌다.강한서의 등은 다 젖어있었다.강한서는 멍해 있는 그녀를 안전 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주었다.바로 이때, 선체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서는 넘어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강한서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유현진은 다급한 목소리로 강한서를 불렀다. "강한서!""움직이지 마!" 강한서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는 게 나 도와주는 거야."유현진은 손전등을 켰다. 강한서는 침대 옆에 넘어져 있었다.다행히도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빨리 앉아."유현진이 다급하게 말했다.강한서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순간 선체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한서는 침대 다리를 더 힘주어 잡았다.선체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유현진은 안전 시트에서도 멀미가 났다. 강한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몇 미터 안 되는 거리였지만 강한서는 몸을
......강한서는 유현진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우습기도 해서 한참 뒤에야 답했다.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지. 이 상황에 왜 왔냐고? 내가 안 오면 당신 이리저리 부딪혀서 바보라도 되면 어떡하려고. 나 바보랑 살기 싫어.강한서는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계속 말했다. "뭐 부딪히기 전에도 이미 바보였지만.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안전 시트에 가만히 앉아있었겠지."유현진은 기가 막혔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증조할아버지 걱정돼서 나가려고 한 것뿐이야. 이렇게 흔들릴 줄 내가 알았겠어?""네 걱정이나 해. 증조할아버지는 제일 빠른 시간에 구명조끼를 입고 안전 시트에 앉아계시더라.""당신이 어떻게 알아?"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나 거기서 오는 길이야."유현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증조할아버지한테 갔었던 거야?"유현진의 반응에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나 어디가?"유현진은 입을 삐죽였다. '송민영한테 간 거 아니었어?'여기까지 생각한 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비도 많이 오는데 송민영 씨는 어때?"강한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처럼 바보는 아니겠지."…...'송민영한테 간 거 아니었네.'유현진은 점점 궁금해졌다. 강한서는 대체 송민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현진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물에 빠졌으니 저번 자선 파티에서보다 더 많이 다쳤을 텐데… 저번에는 바로 송민영을 안고 나가더니 왜 오늘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더군다나 편애받는 사람은 더 제멋대로 행동할 텐데, 왜 강한서를 쳐다보는 송민영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걸까?난 강한서를 막 대하는데 말이야.'이때 강한서의 휴대폰이 울렸다.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성우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한서야, 두 사람 괜찮은 거지?""괜찮아, 넌 어때?""나 괜찮아. 나 강운이랑 같이 있어. 강운이가 구명조끼 가져왔어. 구명조끼 안 부족해? 강
"나 부동산 계약서 본 적 있어. 당신 그 집 77억에 샀던데 지금은 아마 시세가 올라서 120억은 됐을 거야. 인테리어랑 두루두루 해서 6억은 들었을 거 아니야? 그럼 이렇게 하자. 집 명의 나한테 넘겨주고 위자료 2,000억에서 140억은 빼고 줘. 부부로 지낸 정도 있고 하니 나 너무 독하게는 안 할게."강한서는 기가 막혔다.나쁜 년, 매번 이런 식으로 나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단 말이야.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나 내쫓을 궁리나 하고!140억이라니. 뻔뻔스럽기는!'강한서는 확실히 77억에 집을 구매했지만 때는 8년 전의 가격이다.지역 개발이 잘 되다 보니 가격도 미친 듯이 올라 지금의 시세로는 250억도 훨씬 넘었는데 유현진은 가격을 절반이나 잘라먹고는 착한 척 행동했다.'이 여자 계산 잘하네.'유현진은 확실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때렸다. 한 방면으로는 그 집에 적응되기도 했고 집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뒤에 유현진은 자기의 취향대로 리모델링을 했었다.강한서는 업무가 바쁘기도 했고 귀찮기도 해서 유현진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게 그녀의 취향대로 바뀌었다.유현진은 다른 집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하면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간혹 구조도 좋고 햇빛도 잘 들어오는 집이 있긴 했지만,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집처럼 편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남산 병원과도 20분 거리에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이 집을 고집하는 두 번째 원인이다.이 집의 1층에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안방이 있고 2층에는 헬스 방도 있어서 노인이 살기에는 최고의 환경이다. 혹시라도 하현주가 회복되면 유현진은 헬스 방을 재활 방으로 개조해 하현주의 재활을 도울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더군다나 강한서의 명의로 된 부동산은 수두룩하니 하나 적어져도 그만이다. 그래서 유현진은 요즘 이 말을 꺼낼 기회를 찾고 있었다.강한서가 아무 대답이 없자 유현
유현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지금 눈앞의 강한서는 마치 어린애처럼 삐쳐있었다.그렇지만 유현진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입 밖에 냈다가 강한서가 화날 게 뻔하니 말이다.유현진은 나지막한 소리로 강한서를 다독였다. "강 대표. 미안해, 삐치지 마. 당신 돈 많이 벌어서 나 먹여 살려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이 죽길 바라겠어? 당신 조금만 다쳐도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야. 내가 잡아줄 테니 이리로 와. 일단 안전 시트에 앉고 나서 삐쳐도 돼."유현진의 사과에는 영혼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물론 강한서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달콤한 말에 혹하고 넘어가 버렸다."강 대표, 침대 시트 이리 넘겨줘. 내가 당길 테니까."강한서는 그녀의 가는 팔다리를 보며 말했다. "당길 수나 있겠어?""나 만만하게 보지 마. 내가 얼마나 힘이 센데."강한서는 유현진의 하얗고 가는 다리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다리 힘은 좋긴 하지.'강한서는 손잡이에 묶었던 침대 시트를 풀어 유현진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던지며 말했다. "이거 안전 시트에 묶어."유현진은 강한서가 시키는 대로 했다.강한서는 침대 시트를 당겨보며 안전성을 체크한 뒤 천천히 유현진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모든 게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안전 시트에 도달했을 때, 선체는 또다시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한서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침대 시트를 꽉 당겼다.유현진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 손 잡아."강한서는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유현진의 손이 닿지 않았다. 유현진도 아무리 몸을 앞으로 기울여 보아도 강한서에게 닿지 않았다. 계속되는 흔들림에 강한서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급해진 유현진은 안전 벨트를 풀어버리고 강한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지만 그녀가 기뻐하기도 전에, 파도는 두 사람을 겨냥한 듯 배는 더 격하게 흔들렸다. 유현진은 안전 시트에서 튕겨 나가 강한서의 품에 엎어졌다.강한서는 유현진에게 치여 바닥에 넘어졌지만,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