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유현진은 며칠 동안 촬영 스케줄이 없었는데 유상수는 귀신같이 기회를 잡았다.다음 날 아침. "사모님, 안녕하세요!"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깜짝 놀라서 다리가 후덜덜 떨려왔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가정부들이 몇 명 보였다.거실과 유리창, 그리고 웨딩 사진까지 아주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모든 게 새것처럼 되어있었다. 마치 그들의 신혼 때처럼 말이다.강한서 왜 안 하던 짓을 하지?아빠의 요구를 들어주는가 하면 심지어 손님방을 다 정리하라고 시킨 듯하네.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 난 편히 있으면 되는 거야.'차 한 잔을 따르고 있는데 강한서가 나타났다.그는 슈트 차림에 머리에 왁스까지 바르고 옷깃을 정리하며 내려왔다.강한서는 비율이 좋았다. 187센티의 키에 다리만 115센티이니 슈트를 입고 서 있으면 모델 저리가라이다.유현진은 강한서의 후덜덜한 비율을 감상하며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이제 출근해?"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출근 안 해."출근도 안 하면서 왜 저렇게 입었대?'유현진이 묻기도 전에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예쁜 옷 갈아입고 나와. 차에서 기다릴게."유현진은 멈칫하며 물었다. "어디가?""당신 아빠가 증조할아버지 모시러 가래."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모시고 온다고 그랬잖아? 근데 왜 모시러 가라고 하는 거지?'유현진의 증조할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사이에 유씨 가문 친척들이 많이 다녀갔었다. 그런데 하현주와는 관계가 안 좋다 보니 유현진도 몇 번 만나보지 못한 사이라 친척들은 유현진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유현진도 그들과의 불필요한 만남이 달갑지 않았다.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설날이었다. 유상수가 기어코 오라고 했지만 강한서는 유씨 가문을 싫어하다 보니 유현진은 혼자 다녀갔었다.유현진은 식사 자리에서 친척들이 자기를 보는 표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유상수는 유씨 가문의 첫 대학생이다. 유상수가 성공한 후, 고향에 많은 돈을 지원해 길도 냈으니, 위신이 높았다.그래서
그러다 하현주는 사고로 눕게 되고 유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했다. 누구도 명문대를 나온 유현진이 가정주부가 될 거라는걸 생각지도 못했다. 친척들은 그제야 운명을 바꿀 기회가 생긴 것이다.올해 유현진의 사촌 동생이 경민 대학교에 석사로 붙게 되었다. 경민 대학교는 한주시에서 태주 대학교 다음으로 유명한 명문대이다.설날 식사 중에 친척들은 아이들이 어릴 적 얘기를 하다가 유현진을 안주 삼아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유현진이 아무리 학생 때 공부를 잘했어도 지금은 가정주부라며 비꼬았다.그날 유현진은 화가 나서 배불렀다.이 진상들을 보니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유현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강한서는 이미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강한서는 평소에 잘 끌고 다니지 않던 링컨을 끌고 나왔다.눈치 빠른 민경하는 그녀의 생각을 읽고 다급히 해석했다. "차에 침대가 있으니, 노인이 타시기에 편해요."오~ 세심한데?'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보았다.이 세심함은 강한서 스타일이 아니지.'"빨리 타."강한서의 재촉에 유현진은 차에 탔다.차가 출발한 뒤에야 강한서가 물었다. "요즘 뭐 하고 있어?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던데.""촬영하고 있지. '법역' 인기 많은 거 몰라? 감독님이 좋게 봐주셔서 계속 촬영하기로 했어."법역' 얘기에 민경하가 관심을 보였다."우리 엄마도 요즘 그거 보시는데, 첫 번째 스토리를 보고 깜짝 놀랐대요. 특히 사모님 연기 부분에서. 엄마가 남자 배우 너무 잘 생겼다고 그러길래 내가 여자라고 그랬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러다 그다음 주 방송의 남자 배우를 보고 첫 회에 나온 배우보다 느낌이 별로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요즘은 인터넷도 할 줄 알아서 맨날 '법역' 인스타그램 계정에 댓글도 남겨요. 사모님 연기를 다시 보고 싶다면서요. 타자도 잘할 줄 몰라서 얼마나 느린지 몰라요. 요즘은 방송국에 전화도 넣을 생각 하시던데요.""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유현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라마도 아닌데 어떻
한성은 국내 과학기술 영역의 핵심 파워로서 직원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다. 올해에는 국내 명문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만들어 인재를 배양하고 있다.본 프로젝트는 선택된 명문대에 가서 강연도 필요했는데 유현아가 마침 프로젝트 모델 중 한 사람이었다.유현아가 다닌 대학교도 이번 프로젝트에 포함되었거니와 유현아는 인기 인플루언서라 대학생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게다가 고아로부터 입양아로, 나중에는 한성의 일원이 되기까지 이야기는 많은 대학생에게 감동을 주었다.유현아와 이 집 아들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사실 경민 대학교보다 낮은 위치인데 유현아는 인턴도 거치지 않고 바로 한성에 들어가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둘째 작은어머니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유씨 가문에서 그래도 현아가 제일 출세했네요. 미래가 창창하네요.""현아 어릴 때 그 장님이 현아 얼굴을 만져보고는 그랬잖아, 이 아이 관상이 참 좋다고. 그 말이 맞았던 거지.""장님이 뭘 안다고요, 아주버님이 잘 가르치신 덕분이죠.""형님이 현진이는 안 가르쳤겠어요? 그 계집애는 학교도 더 좋은 데 갔잖아. 형수님이 그렇게 자랑하더니, 결국 어떻게 됐어? 연기를 배우지 않나, 졸업하고 결혼부터 하지 않나, 죽 쒀서 개 줬지.""현진이 요즘 티브이에 나오던데요. 아이고, 말도 말아요. 남잔지, 여잔지 구별도 안 돼요. 걔 시어머니 부자라면서요? 왜 며느리를 방송에 내보내요?""결국은 자기 돈이 아니잖아. 어떻게 속 편하게 쓰겠어. 어제 형님이 그러는데 할아버지를 현진이한테 보내려고 하니 현진이가 아주 질색하더래. 그게 다 결정권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졸업하고 결혼부터 할 거면 왜 명문대에 다녔대요? 현아 보세요. 대기업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결혼해도 시댁 눈치 볼 필요 없을 거잖아요."유현아는 기분이 흐뭇했다.분명 유상수에게 아부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유현아는 기분이 좋았다. 하현주가 사고 나기 전에는 이런 칭찬은 사실 다 유현진의 몫이었다.유현아
아이는 바로 달려 들어가 높은 소리로 말했다. "현진 언니 왔어요! 현진 언니 왔어요!"둘째 작은어머니는 유지혜의 흥분 된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얘가 정말! 오면 왔지 뭘 그렇게 큰 소리야? 처음 봐?"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한서가 유현진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순식간에 사람들은 얼음이 되어버렸다할아버님을 모셔다드린다더니 유현진이 왜 직접 온 거지? 그것도 남편까지 데리고?'강한서는 한 번도 유씨 가문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도 신미정은 유씨 가문에는 지방 사람들이 많아 자기의 얼굴에 먹칠할까 봐 아예 초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대부분 강한서와는 초면이다.비록 겉으로는 유현진을 돈 많은 남자를 물어 결혼한 앙큼한 년이라 욕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부러웠다.한주 강씨 가문은 보통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는 집안이다.아까 누가 유현진이 집안에서 결정권이 없다고 그랬더라? '강한서의 등장은 많은 사람을 뻘쭘하게 만들었다.안색이 제일 어두운 사람은 유현아다. 하지만 유현아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언니, 형부. 어떻게 오셨어요?"유현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가 말했다. "우리 와이프가 워낙에 가정을 중시해서 말이야. 증조할아버지가 퇴원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앉아서 오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해 특별히 나한테 침대가 있는 차를 가져가자고 하더군."유현아는 기분이 언짢았다.유현진의 예상 밖의 상황에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이 자식, 날 위해 나서는 거야?'유현아는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비록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말속에는 그들을 향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굳이 '가정을 중시한다'라는 말을 꺼낸 거로 보아서는 아까 그들의 말에 반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역시 현진이는 생각이 깊어." 유상수는 강한서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져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빨리 들어와 앉게.""장인 어르신." 강한서가 유상수를 불러세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차에 물건이 좀 많아서요. 물건 내려줄 사람이
유현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자리에 있던 친척들도 할 말을 잃었다.최저 몇억이 넘는 물건들인데 강한서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게다가 특별히 유현진의 출연료를 언급한 거로 보아서는 아마도 유현아가 말한 '돈 많은 남자를 물었다'라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유현아는 강한서가 아까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니 말끝마다 그녀를 조소하는 것이다.유현진의 출연료가 맞는지 아닌지를 떠나 강한서가 유현진과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현진이 강씨 가문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유현진을 껌처럼 씹던 친척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둘째 작은어머니는 유현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고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했다."아주버님, 아주버님은 정말 복 많은 사람이세요. 나는 또 현진이네 부부가 이사 온 줄 알았지 뭐에요. 하긴 사위도 아들과 같다고 그러잖아요."오늘 강한서의 등장은 유상수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주었다. 유상수는 기름기 번지르르한 얼굴로 겸손한 척 말했다. "이게 다 뭐라고, 두 사람이 행복한 걸로 나는 만족해."둘째 작은어머니는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유현아에게 물었다. "현아야, 너 월급 얼마 받아?"속이 말이 아닌 유현아는 그 물음에 이내 둘째 작은어머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작은 엄마, 월급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회사와 계약했어요."둘째 작은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뭐 밖에 나가 얘기하겠어? 가족한테도 말 못 해?"유현아는 화가 올라와 얼굴이 푸르딩딩해졌다.유현진이 선물을 가득 가지고 왔으니 이 기회에 날 엿 먹이는 게 분명해. 유현진의 출연료로는 일 년을 모여도 저것들 다 못 살걸.'"여자들은 말이야. 시집을 잘 가야 해. 돈 많은 남자를 무는 게 물 남자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유현진은 둘째 작은어머니를 싫어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유현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재미있었다.그런데 오늘 강한서 오늘 왜 이래? 이상
동네에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대학교에 붙은 아이가 있으면 다들 그 집으로 찾아가 돈 봉투와 함께 축하를 보냈다.유현진이 태주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현주는 파티를 크게 열었지만, 누구의 돈 봉투도 받지 않았다. 누가 봐도 웅장한 장면이었다.둘째 작은어머니는 아들이 입학통지서를 받자마자 사면팔방에 알리며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돈 봉투만 받아놓고 식사는 집에서 조촐하게 준비했다.집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 셰프를 청하는 돈도 아까워 전골 요리를 사람들에게 대접했다.그것도 집에서 팔다 남은 무와 배추를 가득 넣어서 고기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몇천만 원의 돈 봉투를 받고 전골 요리를 대접하니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그것도 가난한 집안이면 모를까, 이 집안은 유상수 다음으로 잘사는 집안이다.어마어마한 면적의 과수원에서만 해도 몇억의 연 수입을 얻는 데다가 유상수의 동생도 워낙에 부지런하다 보니 유상수 회사에서 관리직을 맡아 연봉 몇천만 원을 받는다.그렇게나 돈이 많으면서도 인색한 행동에 친척들은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그래서 유민성이 경민 대학교 석사 면접에 통과했다는 말에도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보나 마나 돈을 뜯어 가기 위한 수작이 분명했으니 말이다.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 눈에는 친척들이 그저 질투하는 거로 보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넷째 작은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넷째 동서, 진성이는 재수도 했는데 성적이 어떻게 나왔어?"넷째 작은어머니는 그 물음에 답하기 싫어 대충 지나갔다. "자기 일인데 알아서 하겠죠. 안 물어봤어요."둘째 작은어머니가 말했다. "그게 어떻게 걔 혼자 일이야? 가문의 큰일이지. 작년에 그렇게 망쳐놓고 올해 재수를 한 건데 진보는 있을 거 아니야? 우리 민성이 면접 결과도 다 내려왔는데 성적 이미 다 나왔을 거 아니야. 설마 저번보다도 더 말아먹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넷째
둘째 작은어머니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강한서의 시선은 둘째 작은어머니를 향했다. "그럼 무슨 뜻이죠? 확실하게 얘기해 주세요. 우리 집사람 어린 나이에 나한테 시집와서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도 하고 내가 집일에 신경 쓰지 않고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내조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왜 웃음거리가 됐죠?"유현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강한서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도리어 옆에 있던 유현진의 얼굴이 빨개졌다.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 하루 종일 늦잠.식사 준비 = 먹을 수 없는 요리.내조 = 강한서의 카드로 쇼핑.강한서 처에서 보면 내가 이혼을 얘기하는 게 그렇긴 하네.'둘째 작은어머니는 얼굴이 뻘게져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넷째 작은어머니는 입꼬리를 올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잘난 척하더니. 쌤통이네!'결국 유상수가 중재에 나섰다. "나이가 얼만데 말을 함부로 해, 애들 웃겠어!"둘째 작은어머니는 그제야 표정 관리를 했다.이내 유현아가 어르신을 부축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어르신은 연세가 근 아흔이지만 나이에 비해 몸이 튼튼했다. 그저 허리가 구부정하고 얼굴에 주름이 많을 뿐이지 옷도 새 옷이라 깔끔하고 멀쩡해 보였다.어르신은 모두를 한번 둘러보다가 강한서에게서 시선이 멈추더니 아래 우로 훑어보았다.유상수가 어르신을 부축하려고 하자 어르신은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유상수는 강한서를 소개했다. "할아버지, 이쪽은 내 사위 강한서에요. 전에 사진 보여드렸던 적이 있어요."유상수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말했다. 어르신은 청력이 좋지 않아 목소리가 낮으면 잘 듣지 못한다."나이는?"어르신이 물었다.강한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서른이에요."어르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른에 장가를 가? 어디 문제라도 있는 거야?"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어르신의 말에 모두 손에 땀을 쥐었다.유현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강한서는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물론, 유상수를 욕하는 말이었다. 유현진은 오히려 자기의 증조할아버지가 아직도 너무 정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유상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서가 현진이한테 얼마나 잘하는데요. 현진이가 복 받은 거죠. 그게 어떻게 구렁텅이에요?"어르신은 콧방귀를 뀌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한서가 어려운 걸음을 했으니, 유상수는 기어코 강한서에게 식사하고 가라고 권했다.두 사람은 워낙 어르신을 모시고 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유상수의 만류에 식사하고 얘기도 나누다가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어르신을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편히 누우실래요?" 유현진이 어르신에게 물었다.하지만 어르신은 기어코 앉아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우면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말이다.유현진은 우습기도 했지만 자기 증조할아버지의 뜻이니 그 뜻에 따랐다.어르신은 평생 고향에서 지내시다가 처음으로 한주시에 왔다. 한평생 가장 멀리 온 곳이다.민경하는 운전을 천천히 했다. 움푹하게 파인 두 눈으로 뚫어져라 창밖의 경치를 감상했다. 한주시의 번화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한참 홀린 듯 경치를 감상하던 어르신은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나라도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선 거로 보아 많이 발전했구나."유현진은 그 말에 마음이 짠해 났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증조할아버지만 좋으시다면 오래 계셔도 좋아요."어르신은 웃으며 장난식으로 받아쳤다. "이 나이에 이런 복도 들어오다니."말을 끝낸 어르신은 손을 가슴에 넣고 이리저리 더듬다가 페레로 초콜릿을 꺼내 유현진에게 건네주며 아이처럼 천진한 말투로 말했다. "이거 현아 방에서 가지고 나온 거야. 현아가 이거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나는 이가 다 빠져서 못 먹어. 네가 나 대신 맛 좀 보렴."유현진은 멈칫했다.사실 유현아는 증조할아버지에게 큰 인상이 없었다. 어렸을 때 고향에 내려간 적이 별로 없거니와 가더라도 얼마 못 있고 집에 돌아왔으니, 그녀는 그저 증조할아버지가 옷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던 기억만 희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