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는 여러 시상식에서 대상을 휩쓴 조태일이고 여주도 유명한 지연서이다. 보기에는 동안이지만 사람들에게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노안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눈동자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듯했다. 세상 풍파를 겪어보았지만, 희망에 찬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어떻게 말로 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촬영 진도가 빨라졌다.제작진 중 누군가 말하기를 내년에는 정책으로 인해 사극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니, 차이현은 한가위 전후에 첫 방을 내보내기 위해 속력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 진도가 늦어지면 방영 시간이 언제로 잡힐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심지어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 뒤에는 트렌드도 바뀌기 마련이다.유현진은 파트가 많지 않았지만, 촬영 순서가 안정적이지 않다 보니 항상 대기하다가 언제 필요하면 언제 달려와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그래서 머리에 달린 장신구의 무게만 빼면 별다른 불편한 점은 없었다.차이현이 픽한 배우들은 주연과 조연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성실하게 촬영에 임했다.유현진은 대사를 잘 치지만 표정 방면에서 다른 배우들에 비하면 조금 떨어졌다.하지만 다행히도 차이현은 지도를 잘했고 유현진은 그 지도를 잘 받아들였기에 그녀는 날이 갈수록 연기 실력이 늘었다.요즘 유현진은 촬영으로 인해 분주해지자 강한서는 마음이 복잡했다.매일 강한서보다 일찍 기상하고 강한서보다 늦게 집에 들어오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가끔 한밤중에 집에 들어오는 그녀와 마주치기는 했지만, 매번 하품을 해대며 샤워실로 들어가는 바람에 강한서도 어쩔 수 없었다.이날 밤, 유현진은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집에 들어와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더니 침대에 바로 누워버렸다.예전과 같으면 잠들기 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는데 이젠 휴대폰도 보지 않는다.강한서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랍에서 이어폰과 안대를 꺼내서 청각과 시각을 아예 봉쇄해 버렸다.이 자식은 맨날 11시가 넘어서도 침대에 오르지 않더니
유현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증조할아버지가 강한서를 보고 싶다 하시면 언제 한 번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여기 오시면 우리도 출근이라 같이 있어 드릴 시간이 없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연세도 많으신데 혹시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말을 끝낸 유현진은 혼자 중얼거렸다. "강한서를 봐서 뭐 한다고. 사람이 다 똑같지,뭐."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유상수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어릴 때 증조할아버지가 얼마나 예뻐하셨는데. 좋은 건 너만 주고 네 곁에 꼭 붙어있으셨어. 증조할아버지가 살면 얼마나 더 사신다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야 할 거 아니야? 너희 사는 모습이 궁금하시다는데 그것도 안 돼? 더군다나 한서는 출근하지만, 넌 집에 있을 거 아니야? 이미 네 삼촌 앞에서 그러겠다 장담했는데 인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내 체면이 서겠어? 전화 바꿔, 내가 한서한테 직접 말할 테니까."멋대로 결정하고 내 탓을 해?강한서한테 얘기할 거면 나한테 얘기하는 게 낫지. 강한서가 얼마나 독하고 민감한데 처음 보는 사람을 집에 들여 생활 패턴을 바꾸겠어?곰곰이 생각하던 유현진은 차라리 강한서가 독하게 유상수를 거절하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휴대폰을 강한서에게 넘기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당신한테 할 말 있으시대."강한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전화를 받았다.유현진은 잠이 다깨어서 강한서의 독설을 기대했다.유상수의 말이 끝나자 강한서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내일 손님방 정리하라고 할게요."유현진은 뻥 져 있었다.강한서가 통화를 종료한 뒤, 유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겠다고 했어?"강한서는 휴대폰을 넘겨주며 말했다. "당신 아빠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개뿔!거절 못 해? 예전에는 잘만 하더니, 벌써 잊은 거야?강한서 이 자식 약 먹었어?'유현진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오라고 했으니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내 탓 하지
마침 유현진은 며칠 동안 촬영 스케줄이 없었는데 유상수는 귀신같이 기회를 잡았다.다음 날 아침. "사모님, 안녕하세요!"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는 깜짝 놀라서 다리가 후덜덜 떨려왔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가정부들이 몇 명 보였다.거실과 유리창, 그리고 웨딩 사진까지 아주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모든 게 새것처럼 되어있었다. 마치 그들의 신혼 때처럼 말이다.강한서 왜 안 하던 짓을 하지?아빠의 요구를 들어주는가 하면 심지어 손님방을 다 정리하라고 시킨 듯하네.그래 뭐, 알아서 하겠지. 난 편히 있으면 되는 거야.'차 한 잔을 따르고 있는데 강한서가 나타났다.그는 슈트 차림에 머리에 왁스까지 바르고 옷깃을 정리하며 내려왔다.강한서는 비율이 좋았다. 187센티의 키에 다리만 115센티이니 슈트를 입고 서 있으면 모델 저리가라이다.유현진은 강한서의 후덜덜한 비율을 감상하며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이제 출근해?"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출근 안 해."출근도 안 하면서 왜 저렇게 입었대?'유현진이 묻기도 전에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예쁜 옷 갈아입고 나와. 차에서 기다릴게."유현진은 멈칫하며 물었다. "어디가?""당신 아빠가 증조할아버지 모시러 가래."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모시고 온다고 그랬잖아? 근데 왜 모시러 가라고 하는 거지?'유현진의 증조할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사이에 유씨 가문 친척들이 많이 다녀갔었다. 그런데 하현주와는 관계가 안 좋다 보니 유현진도 몇 번 만나보지 못한 사이라 친척들은 유현진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유현진도 그들과의 불필요한 만남이 달갑지 않았다.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설날이었다. 유상수가 기어코 오라고 했지만 강한서는 유씨 가문을 싫어하다 보니 유현진은 혼자 다녀갔었다.유현진은 식사 자리에서 친척들이 자기를 보는 표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유상수는 유씨 가문의 첫 대학생이다. 유상수가 성공한 후, 고향에 많은 돈을 지원해 길도 냈으니, 위신이 높았다.그래서
그러다 하현주는 사고로 눕게 되고 유현진은 강한서와 결혼했다. 누구도 명문대를 나온 유현진이 가정주부가 될 거라는걸 생각지도 못했다. 친척들은 그제야 운명을 바꿀 기회가 생긴 것이다.올해 유현진의 사촌 동생이 경민 대학교에 석사로 붙게 되었다. 경민 대학교는 한주시에서 태주 대학교 다음으로 유명한 명문대이다.설날 식사 중에 친척들은 아이들이 어릴 적 얘기를 하다가 유현진을 안주 삼아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유현진이 아무리 학생 때 공부를 잘했어도 지금은 가정주부라며 비꼬았다.그날 유현진은 화가 나서 배불렀다.이 진상들을 보니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유현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강한서는 이미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강한서는 평소에 잘 끌고 다니지 않던 링컨을 끌고 나왔다.눈치 빠른 민경하는 그녀의 생각을 읽고 다급히 해석했다. "차에 침대가 있으니, 노인이 타시기에 편해요."오~ 세심한데?'유현진은 강한서를 힐끔 보았다.이 세심함은 강한서 스타일이 아니지.'"빨리 타."강한서의 재촉에 유현진은 차에 탔다.차가 출발한 뒤에야 강한서가 물었다. "요즘 뭐 하고 있어?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던데.""촬영하고 있지. '법역' 인기 많은 거 몰라? 감독님이 좋게 봐주셔서 계속 촬영하기로 했어."법역' 얘기에 민경하가 관심을 보였다."우리 엄마도 요즘 그거 보시는데, 첫 번째 스토리를 보고 깜짝 놀랐대요. 특히 사모님 연기 부분에서. 엄마가 남자 배우 너무 잘 생겼다고 그러길래 내가 여자라고 그랬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러다 그다음 주 방송의 남자 배우를 보고 첫 회에 나온 배우보다 느낌이 별로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요즘은 인터넷도 할 줄 알아서 맨날 '법역' 인스타그램 계정에 댓글도 남겨요. 사모님 연기를 다시 보고 싶다면서요. 타자도 잘할 줄 몰라서 얼마나 느린지 몰라요. 요즘은 방송국에 전화도 넣을 생각 하시던데요.""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유현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라마도 아닌데 어떻
한성은 국내 과학기술 영역의 핵심 파워로서 직원에 대한 요구가 아주 높다. 올해에는 국내 명문대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만들어 인재를 배양하고 있다.본 프로젝트는 선택된 명문대에 가서 강연도 필요했는데 유현아가 마침 프로젝트 모델 중 한 사람이었다.유현아가 다닌 대학교도 이번 프로젝트에 포함되었거니와 유현아는 인기 인플루언서라 대학생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게다가 고아로부터 입양아로, 나중에는 한성의 일원이 되기까지 이야기는 많은 대학생에게 감동을 주었다.유현아와 이 집 아들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사실 경민 대학교보다 낮은 위치인데 유현아는 인턴도 거치지 않고 바로 한성에 들어가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둘째 작은어머니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유씨 가문에서 그래도 현아가 제일 출세했네요. 미래가 창창하네요.""현아 어릴 때 그 장님이 현아 얼굴을 만져보고는 그랬잖아, 이 아이 관상이 참 좋다고. 그 말이 맞았던 거지.""장님이 뭘 안다고요, 아주버님이 잘 가르치신 덕분이죠.""형님이 현진이는 안 가르쳤겠어요? 그 계집애는 학교도 더 좋은 데 갔잖아. 형수님이 그렇게 자랑하더니, 결국 어떻게 됐어? 연기를 배우지 않나, 졸업하고 결혼부터 하지 않나, 죽 쒀서 개 줬지.""현진이 요즘 티브이에 나오던데요. 아이고, 말도 말아요. 남잔지, 여잔지 구별도 안 돼요. 걔 시어머니 부자라면서요? 왜 며느리를 방송에 내보내요?""결국은 자기 돈이 아니잖아. 어떻게 속 편하게 쓰겠어. 어제 형님이 그러는데 할아버지를 현진이한테 보내려고 하니 현진이가 아주 질색하더래. 그게 다 결정권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졸업하고 결혼부터 할 거면 왜 명문대에 다녔대요? 현아 보세요. 대기업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결혼해도 시댁 눈치 볼 필요 없을 거잖아요."유현아는 기분이 흐뭇했다.분명 유상수에게 아부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유현아는 기분이 좋았다. 하현주가 사고 나기 전에는 이런 칭찬은 사실 다 유현진의 몫이었다.유현아
아이는 바로 달려 들어가 높은 소리로 말했다. "현진 언니 왔어요! 현진 언니 왔어요!"둘째 작은어머니는 유지혜의 흥분 된 모습을 보며 한마디 했다. "얘가 정말! 오면 왔지 뭘 그렇게 큰 소리야? 처음 봐?"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한서가 유현진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순식간에 사람들은 얼음이 되어버렸다할아버님을 모셔다드린다더니 유현진이 왜 직접 온 거지? 그것도 남편까지 데리고?'강한서는 한 번도 유씨 가문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도 신미정은 유씨 가문에는 지방 사람들이 많아 자기의 얼굴에 먹칠할까 봐 아예 초대하지 않았다.그래서 대부분 강한서와는 초면이다.비록 겉으로는 유현진을 돈 많은 남자를 물어 결혼한 앙큼한 년이라 욕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부러웠다.한주 강씨 가문은 보통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는 집안이다.아까 누가 유현진이 집안에서 결정권이 없다고 그랬더라? '강한서의 등장은 많은 사람을 뻘쭘하게 만들었다.안색이 제일 어두운 사람은 유현아다. 하지만 유현아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언니, 형부. 어떻게 오셨어요?"유현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강한서가 말했다. "우리 와이프가 워낙에 가정을 중시해서 말이야. 증조할아버지가 퇴원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앉아서 오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해 특별히 나한테 침대가 있는 차를 가져가자고 하더군."유현아는 기분이 언짢았다.유현진의 예상 밖의 상황에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이 자식, 날 위해 나서는 거야?'유현아는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비록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말속에는 그들을 향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굳이 '가정을 중시한다'라는 말을 꺼낸 거로 보아서는 아까 그들의 말에 반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역시 현진이는 생각이 깊어." 유상수는 강한서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져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빨리 들어와 앉게.""장인 어르신." 강한서가 유상수를 불러세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차에 물건이 좀 많아서요. 물건 내려줄 사람이
유현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자리에 있던 친척들도 할 말을 잃었다.최저 몇억이 넘는 물건들인데 강한서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게다가 특별히 유현진의 출연료를 언급한 거로 보아서는 아마도 유현아가 말한 '돈 많은 남자를 물었다'라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유현아는 강한서가 아까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니 말끝마다 그녀를 조소하는 것이다.유현진의 출연료가 맞는지 아닌지를 떠나 강한서가 유현진과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현진이 강씨 가문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유현진을 껌처럼 씹던 친척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둘째 작은어머니는 유현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고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했다."아주버님, 아주버님은 정말 복 많은 사람이세요. 나는 또 현진이네 부부가 이사 온 줄 알았지 뭐에요. 하긴 사위도 아들과 같다고 그러잖아요."오늘 강한서의 등장은 유상수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주었다. 유상수는 기름기 번지르르한 얼굴로 겸손한 척 말했다. "이게 다 뭐라고, 두 사람이 행복한 걸로 나는 만족해."둘째 작은어머니는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유현아에게 물었다. "현아야, 너 월급 얼마 받아?"속이 말이 아닌 유현아는 그 물음에 이내 둘째 작은어머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작은 엄마, 월급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회사와 계약했어요."둘째 작은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뭐 밖에 나가 얘기하겠어? 가족한테도 말 못 해?"유현아는 화가 올라와 얼굴이 푸르딩딩해졌다.유현진이 선물을 가득 가지고 왔으니 이 기회에 날 엿 먹이는 게 분명해. 유현진의 출연료로는 일 년을 모여도 저것들 다 못 살걸.'"여자들은 말이야. 시집을 잘 가야 해. 돈 많은 남자를 무는 게 물 남자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유현진은 둘째 작은어머니를 싫어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유현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재미있었다.그런데 오늘 강한서 오늘 왜 이래? 이상
동네에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대학교에 붙은 아이가 있으면 다들 그 집으로 찾아가 돈 봉투와 함께 축하를 보냈다.유현진이 태주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현주는 파티를 크게 열었지만, 누구의 돈 봉투도 받지 않았다. 누가 봐도 웅장한 장면이었다.둘째 작은어머니는 아들이 입학통지서를 받자마자 사면팔방에 알리며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돈 봉투만 받아놓고 식사는 집에서 조촐하게 준비했다.집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 셰프를 청하는 돈도 아까워 전골 요리를 사람들에게 대접했다.그것도 집에서 팔다 남은 무와 배추를 가득 넣어서 고기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몇천만 원의 돈 봉투를 받고 전골 요리를 대접하니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그것도 가난한 집안이면 모를까, 이 집안은 유상수 다음으로 잘사는 집안이다.어마어마한 면적의 과수원에서만 해도 몇억의 연 수입을 얻는 데다가 유상수의 동생도 워낙에 부지런하다 보니 유상수 회사에서 관리직을 맡아 연봉 몇천만 원을 받는다.그렇게나 돈이 많으면서도 인색한 행동에 친척들은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그래서 유민성이 경민 대학교 석사 면접에 통과했다는 말에도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보나 마나 돈을 뜯어 가기 위한 수작이 분명했으니 말이다.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 눈에는 친척들이 그저 질투하는 거로 보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넷째 작은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넷째 동서, 진성이는 재수도 했는데 성적이 어떻게 나왔어?"넷째 작은어머니는 그 물음에 답하기 싫어 대충 지나갔다. "자기 일인데 알아서 하겠죠. 안 물어봤어요."둘째 작은어머니가 말했다. "그게 어떻게 걔 혼자 일이야? 가문의 큰일이지. 작년에 그렇게 망쳐놓고 올해 재수를 한 건데 진보는 있을 거 아니야? 우리 민성이 면접 결과도 다 내려왔는데 성적 이미 다 나왔을 거 아니야. 설마 저번보다도 더 말아먹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넷째
은서하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건강검진표를 꽉 쥔 채 한현진의 뒤로 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현진의 배로 향했다. 한현진은 회사에 와서부터 항상 허리 라인이 보이지 않는 넉넉한 옷만 입었다. 뒷모습으로 보면 여전히 날씬해 보였고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현진이 특정 동작을 할 때 배가 살짝 불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한현진의 차에 탔을 때 그 모습을 잠깐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살이 찐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임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은서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한현진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혹시 서해금 때문일까?’은서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한현진은 마치 그녀의 발견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받고 몇 마디를 나누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줄을 빠져나갔다.은서하는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한 대표님, 검사 안 하세요?”한현진은 천천히 돌아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올려구요.” 그리고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한현진이 떠난 뒤 이시연이 나타났다. “한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이시연은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은서하가 대답했다. “전화를 받으시더니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가셨어요.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어요.”“그렇군요.” 이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한 대표님과 얘기 해봤어요? 예전에 그 분의 옷을 받고 따돌림 당하고 급여도 깎였다고 했을 때 한 대표님이 굉장히 마음 아파했어요.” “그때 한 대표님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었죠. 후에 그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한 대표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 잘 사과하면 한 대표님이 이해해줄 거예요.”은서하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대표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는 그런 얘길 꺼낼 입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냥 작은 직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이시연과 은서하가 진단서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시연이 은서하의 손을 이끌고 다가오며 말했다. “한 대표님, 여기서 뵙네요. 건강검진 받으러 오신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은서하를 가볍게 훑어본 뒤 다시 이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도 오늘입니까?” 이시연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어제가 제 날짜였는데 어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른 분이랑 바꿨어요. 서하 씨랑 같이 오려고요.” “가족은 안 데리고 왔어요?” 이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직장에서 추가 의료보험을 들어두셔서 제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서하 씨 외할머니의 병은 보험으로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서요.”은서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이시연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주혁에게로 흘러갔다. 주혁은 예민하게 그 시선을 포착했다. 둘의 눈이 맞닿자 은서하는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건강검진 순서가 불리기 시작했다. 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얘기 나누세요. 전 애들 데리고 먼저 검진 받으러 가겠습니다.” 그가 주상욱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시연이 한현진에게 조용히 제안했다. “한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먼저 채혈하고 나서 초음파 검사하면 순서가 빨라요. 그러면 금방 검사 끝내고 식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현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채혈은 이미 했어요. 먼저 가요. 난 초음파실 앞에서 번호표 뽑아둘게요.” 한현진은 애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주혁이 진짜 주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고 난 뒤부터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심한 척 주혁을 은근히 살폈다. 주혁의 외모는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얼굴이었다.
주혁이 설명했다. “상욱이가 자신이 보낸 그림 잘 받았는지 물어봐요.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해요.”한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주혁에게 물었다. “마음에 든다는 걸 수화로 어떻게 하면 돼요?”주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말하면 돼요. 상욱이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는 게 서툴러요.”사실 주상욱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납치 사건에서 구출된 후 청력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는 청각장애인처럼 생활했으며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지만 또한 납치 당시 겪은 충격 때문에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 능력도 점차 떨어졌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후 보청기를 장착한 뒤 청력은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언어 능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다.한현진은 주상욱에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주상욱은 눈이 반짝이며 수화를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글을 한 문장 써서 한현진에게 건넸다.“나 보라고?” 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주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현진은 고개를 숙여서 화면을 읽었다. [누나, 아빠에게 휴가를 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빠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제 누나 옆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와 엄마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가 아빠를 힘들게 한 거예요. 아빠 대신 사과하고 싶어요. 아빠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한현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아이의 말은 서툴고 순수했지만 그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은 ‘아빠’가 진짜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핸드폰에 글 한 줄을 적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이제 네 아빠를 탓하지 않아.]주혁은 이제 그녀 곁에서
대장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물론이죠. 이미 먼저 주혁 씨에게 연락했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상의한 후 곧바로 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의 집안 사정으로 회사가 이렇게 좋은 혜택을 주는데 그가 신청하지 않겠어요? 절대 그럴 리 없죠.”원율은 잠시 담배를 피운 뒤 담배 끝을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부서에도 더 전해야 하니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대장님, 일 보세요.”원율을 보내고 나서 대장은 다시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혁 씨, 가족이 두 명이니까 연간 십만 원도 안 되게 더 내면 돼.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고 가족이 병원 갈 때 드는 비용은 전부 보장돼. 이 작은 돈 아끼려고 하지 말고 큰 기회를 놓치지 마.”주혁은 돈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싫어한 건 그 돈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위한 보험에 가입하면 이번 주 금요일에 반드시 그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설령 병원이 서대금이 손수 준비한 곳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 사실이 부담스럽고 꺼려지는 일이었다.대장은 계속해서 재촉하며 보험 가입 후의 이점을 설명했다. 결국 주혁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내 아내와 아들도 함께 가입시켜줘. 나중에 주민등록증 사진 보내줄게.”“알겠어. 잘 쉬고 빨리 회복해. 듣자 하니 곧 송가람 씨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서? 잘 됐어. 정해지면 꼭 한턱 쏴.”주혁은 송가람 밑에서 일하게 될 생각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부드러운 감정이 스며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확정되면 한 번 쏠게.”최종적으로 제출된 명단에 주혁의 가족이 포함된 것을 확인한 한현진은 비로소 안심했다. 체크업은 금요일과 토요일로 이틀에 걸쳐 나뉘어 진행되었고 한현진은 주혁이 토요일에 가는 것을 일부러 확인한 후 같은 날에 병원을 가기로 했다.주혁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의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고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한현진이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주혁
회의실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자 한현진은 물건을 정리한 뒤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서해금을 향해 파일을 들고 다가갔다. “아주머니, 방금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직원들을 생각해서 한 거니까 당연히 지지해야지. 우리 모두 같은 회사에 있는 한 하나의 팀이니까.” 한현진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제가 먼저 조사를 했다고 문제 삼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집에 보내주신 곤약도 가람 씨 통해 잘 받았어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금은 여유 있게 말했다. “가족끼리 서로 아끼는 거지. 너무 예의 차리지 마.”한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회사에 온 이래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게 해드렸어요. 제가 성격이 직설적이고 고집도 세서 가끔 말이 거칠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도 아주머니께서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무겁고 어쩌면 제가 너무 어리석게 행동했나 싶어요.”“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서해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가 무슨 말이야. 어른이 아이와 다툴 일이 뭐가 있겠어? 현진아, 아주머니는 네 친엄마는 아니지만 너희 어머니와는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 네가 송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아주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뻐.” “지금 네가 집안에서 가람이랑 함께 지내는 걸 보니 젊은 시절 너희 어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가끔 떠올라. 우리가 반평생을 함께 지냈고 너희는 진짜 자매가 된 거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란 거야.”한현진은 속으로 토할 뻔했다. ‘정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고?’만약 당시 아이를 바꾼 일과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모두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온화하고 친절한 여자과 관련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없다면 이렇게 진심 어린 말투를 들었을 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
하지만 이 제안이 실행되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그것을 한현진 덕분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서해금은 아마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서해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은 나쁘지 않지만 실비보험은 본래 회사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보장이기에 만약 직원들에게 요금을 부과하게 되면 일부 사람들은 이를 회사가 급여를 삭감하려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직원들의 가족은 병원을 거의 가지 않아 이 비용이 꼭 필요한 지출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전액을 회사가 부담하게 된다면 일부 직원들이 가족을 허위로 신고해 다른 사람의 보험을 대신 받으려 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을 겁니다.”한현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말하는 방식에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서해금이 자신의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가족을 위한 보험을 구매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자발적입니다. 회사는 강제로 요구하지 않아요. 다만 구매의 문턱을 낮춰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원하는 사람은 구입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은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서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서해금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말문을 열었다. “현진 씨, 구입을 개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은 괜찮지만 보험사와의 협상이 필요해요. 어떤 보험사도 손해 보려고 하진 않잖아요.” 한현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보험사와의 협상은 제가 맡을게요. 지금 여쭤보는 건 서 대표님 개인의 의견이에요. 동의하시는지요?” 서해금은 당연히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 소문이 바로 회사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직원들을 위하는 좋은 상사의 이미지가 무너질 게 뻔했다. 서해금은 절대 자기를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서해금은 잠시 침묵한 뒤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