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수는 가부장적인 남자다. 하현주와 다툴 때도 사람들은 뒤에서 하도 유상수가 좋은 여자와 결혼했으니 말이지 아니면 오늘의 성과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하현주가 사고 난 뒤로 유상수는 하현주가 없이도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만 급급했다.유상수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바로 여자 덕을 보았다는 말이다. 유현진은 유상수의 금지구역을 침범해서 백혜주에게 떠넘겼다.유상수는 표정이 차갑게 변해서 말했다. "도와주고 말고가 어딨어, 파티에 함께 온 파트너일 뿐이야."백혜주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지만 애써 꾹 참고는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제가 선을 넘었어요."유현아가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백혜주는 유현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유현아는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 있던 담당 판매원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가씨, 이 팔찌 사시겠어요?"유현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디론 가를 바라보다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내리깔고는 미련 섞인 말투로 말했다. "너무 비싸요. 좀 더 볼게요."유현진이 입을 벌리려는 순간, 한 남자의 조롱 섞인 말이 들려왔다. "2, 000억밖에 안 되는데 언니한테 사달라고 그래. 강씨 가문에서는 기껏해야 몇 끼 식사 비용일 테니. 어릴 땐 필요 없는 물건을 던져줬었는데, 이젠 재벌 집에 시집도 갔고 돈도 많을 테니 동생 챙겨야지."슈트 차림을 하고 유현진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이 남자는 아이돌처럼 얼굴도 잘생겼다. 익숙한 얼굴이라 한참을 생각하던 유현진은 그제야 이 남자가 생각났다. 이 남자는 유현진의 고등학교 동창, 나홍우다.유현진의 표정은 저도 몰래 굳어져 버렸다. 나홍우가 나타나며 그녀는 불쾌했던 과거가 떠올랐다.유현아는 긴장한 듯한 표정과 두려운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얘기하지 말아요. 우리 언니 나한테 잘해줘요."나홍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쓰레기를 너한테 버려주는 게 잘해주는 거야? 어쨌든 널 입양하면서 명예와 이익을 얻었는데 너한테 잘해
갇혔던 아이가 병원에 실려간 뒤, 매일 수많은 기자와 시민들이 병문안을 왔었다.또 아이를 입양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도 종종 찾아오곤 했지만 결국 아이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다.아이는 낯선 사람에게 유난히 거부감을 보였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곁을 내주며 의지했다.카메라 앞에서 아이는 매번 두려움에 유상수의 품으로 숨어들었다.네티즌들은 유상수에게 그 아이를 입양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졌다.어차피 유상수와 하현주는 명예를 쌓으려고 자선 사업을 시작했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기껏해야 숟가락 하나를 더 놓으면 될 일이었다.커지는 네티즌의 목소리에 유상수 부부는 입양 조건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입양해 유현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유현아는 유씨 가문에 입양된 순간부터 사회적인 이슈 거리가 되었다.외부에 더 직관적으로 유현아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해 유상수는 페이스북 계정을 개설해 그녀와의 일상을 공개했다.그러다가 유현아가 중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계정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오랜 시간, 이 계정은 수많은 팔로워를 얻었으며 유현아도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었다.부모가 없던 고아에서 밝고 긍정적인 아이로 자랐다는 이미지는 그녀에게 많은 편리를 주었다.하지만 이는 그저 대중한테 보이는 유현아의 가면일 뿐, 유현진은 그런 수식어가 유현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처음 유현아를 입양한다고 했을 때부터 유현진은 달갑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사업을 핑계로 그녀에게 큰 관심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업이 잘되고 나서 그제야 함께 할 시간이 생겼건만 갑자기 아이를 입양한다고 하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그러다가 하현주가 유현진에게 유현아의 출생에 대해 말해준 뒤로, 유현진은 그래도 같이 놀아줄 동생이 생겼다며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비록 유현진은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짧은 시간의 내적 갈등을 겪고 나서는 이내 유현아에게 마음을 열었다.처음 유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 유현아는 더없이 조심
처음에 그녀는 자기가 민감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한 눈빛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인가부터 그녀의 책상에는 욕으로 된 낙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그녀의 책상에 낙서한 범인은 얼마 안 가 정체가 들켜버렸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홍우였다.그때 나홍우는 깍두기 머리를 하고 담임선생님한테도 예의 없이 굴었다. 결국 담임선생님의 학부모를 부르겠다는 말에 그제야 두려워서 이유를 설명했다.나홍우는 유현아의 골수팬으로 이 일이 발생하고부터 쭉 그녀를 주목했다.나홍우는 유현아가 입양을 간 뒤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들 유현아를 배척했으며 특히 유현진은 남은 음식과 버릴 옷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했다.유현진은 얼떨떨했다. 그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홍우는 유현아의 페이스북을 열었다.[언니가 나눠 준 망고 케이크. 근데 나는 망고가 제일 싫다. 언니는 아마 이 사실을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기억한 적이 없을까.][오늘은 내 생일이다. 다음에는 나도 언니처럼 남은거 말고 새 케이크를 자르고 싶다....][언니가 준 원피스 너무 예쁜데 새것이면 더 좋았을걸.][언니 친구가 나한테 고아냐고 물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엄마 아빠의 친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유현진은 보면 볼수록 마음이 시렸다.이건 누가 봐도 유현아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일 악덕은 바로 유현아의 언니인 유현진으로 말이다.유현진은 확실히 유현아에게 케이크를 준 적 있지만 먹고 남은 것은 아니었다. 사진 속의 흐트러진 케이크는 비 오는 날 유현진이 버스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살짝 뒤집힌 것이다.더군다나 유현진은 뒤집힌 부분은 자기가 먹고 깔끔한 부분을 유현아에게 주었었다.유현아는 단 한 번도 망고가 싫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뭘 좋아하냐는 말에 망고를 좋아하는 유현진을 따라 본인도 망고를 좋아한다고 했기에 생일날 망고 케이크를 주문했다.원피스
나홍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동생 괴롭혔던 얘기 하고 있는데 말이 왜 다른 데로 흘러가?""학대?" 유현진은 학대라는 두 글자를 곱씹다가 유현아에게 질문했다. "현아야, 너 우리 집에 입양오고 나서 내가 너한테 잘해주지 않았던 거야, 아니면 엄마 아빠가 널 잘해주지 않았어?"아직도 유현진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던 유현아는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유현아는 유현진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줄 줄을 생각도 못 했다.유현아는 이내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요. 다들 저한테 잘해줬어요. 언니는 항상 나를 챙겨줬어요. 그러니 홍우 오빠, 그만 하세요."그녀가 이러면 이럴수록 나홍우는 자기가 마치 권선징악을 행하는 용사라도 된 듯이 행동했다."나도 알고 싶어." 유현진은 갑자기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아야, 네가 우리 집에 온 뒤로 나는 널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모든 걸 너와 나누어 가졌어. 내가 좋아하는 원피스도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도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다 너에게 주고 싶었어. 내가 결혼할 때 우리 남편이 나한테 주었던 보석 세트도 지금 네가 하고 있잖아?"유현아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유현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며 팔찌며 귀걸이까지 모두 강씨 가문에서 유현진에게 예물로 주었던 것들이다.당연히 유현진이 줬을 일은 없다. 모두 유상수가 유현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한마디에 유현아에게 주었다.유현아는 유현진을 증오하면서도 보석 세트는 애지중지했다.이 보석 세트는 6억을 훌쩍 넘어섰다. 평소에 그녀는 아까워서 잘 하지 않다가 오늘 주얼리 전시회에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 특별히 하고 나왔는데 유현진한테 바로 걸려버려 꼬투리를 잡혔다.유현아는 표정이 굳어졌다. 강씨 가문 사람들도 있는 자리에서 유현아는 이를 부인할 수 없었다.'유현진, 이 교활한 년.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어.'유현아는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나한테 잘해주었던 일은 늘 기억
그 업체들은 전부 강씨 집안에서 다리를 놓아준 업체들이었기에 유상수는 아마도 강한서가 뭔가를 알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다.그게 아니라 해도 방금 유상수의 발언은 확실히 편애가 맞았다. 아무리 강한서가 유현진에게 쌀쌀하게 군다 해도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유상수는 머리가 지끈해났다. 그는 강한서의 부상이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는데 유현진이 혼자 주얼리 전시회에 참석할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유상수는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말투를 바꿔 말했다. "한 대표님은 무슨 그런 말씀을. 딸이라곤 현진이 하나뿐인데 당연히 현진이를 아끼죠. 하지만 현아는 입양된 아이라 어디 기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신경을 더 쓰는 것뿐이에요. 한 대표님은 아직 아빠가 안 되어봐서 아빠의 고충을 몰라서 그래요."한성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물었다. "듣기론 둘째 따님이 새 차를 뽑으셨다죠? 4억 정도 한다고 그러던데. 한서야, 너 결혼할 때 장인어른이 현진 씨한테 카이엔 사주셨다 그랬지? 그거 얼마나 하지?"강한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1억 6,000만 원."유현진은 예단으로 카이엔을 가져왔지만, 강한서는 평소에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유현진은 다소 놀란 듯했다.한성우가 차 얘기를 꺼내자 유상수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한성우는 예리한 말을 꺼냈다. "친딸의 예단은 2억도 안 되는데 입양된 딸에게는 4억도 넘는 차를 뽑아주시고. 사모님은 6년째에 혼수상태건만 유 대표님은 친딸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을까 걱정하기는커녕 입양된 딸 때문에 친딸을 서럽게 만드셨네요.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요."한성우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더는 유현아를 위해 나서지 못했다.유현진이 예물로 받은 고가의 보석 세트를 하고, 유현진에게 예단으로 사준 차보다 더 비싼 차를 사고서 페이스북에서는 유현진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는 유현아는 누가 봐도 배은망덕한 사람이다."인터넷에서 그렇게 떠들어 대더니, 정말 배은망덕해
"한 대표님, 오해에요. 둘 다 내 딸인데 편애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현진이가 결혼할 때는 나도 상황이 빠듯하다 보니 많이 못 해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현아가 새로 산 차는 사실 날 대신해 산 거예요. 그리고 내가 타던 차를 현아 출퇴근 때 필요하니 줬어요."한성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셨네요. 그러면 이제 유 대표님도 돈 많이 버셨으니 따님 예단 다시 해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한성우의 한마디는 유상수가 빠져나올 곳조차 없게 만들었다. 늘 딸바보 이미지를 지켜왔으니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유상수는 터져 나오는 분노에 표정이 굳어졌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돌아가는 대로 준비할게요."강한서는 유현진이 보던 팔찌를 바라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이거 괜찮아 보이네."한성우가 이내 말을 이었다. "강 대표, 돌아가서 준비할 것도 없이 이 팔찌를 예단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사람들도 모여있으니 보기도 좋잖아."유상수는 혈압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만 같았다.돌아가서 준비하면 남들은 세부적인 것을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준비하는 것은 유상수에게는 목덜미를 잡을 만한 큰 부담이었다.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함정인 줄 알면서도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아까는 작은 따님한테 사주신다더니, 큰 따님에게 사주시려니 아까우세요?"한성우는 말끝마다 유상수를 공격했지만, 유상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유상수는 판매원을 향해 말했다. "포장해주세요."그러고는 자상한 얼굴로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잘 지내야 아빠 맘이 편해."유현진은 탄식했다. 이 일로 유상수는 유현진을 더 원망하게 될 것이 뻔한데 지금은 억지로 좋은 아빠인 척을 해야 하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자세를 낮추어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말을 끝낸 유현진의 눈길은 유현아를 향했다. 유현아는 질투에 섞인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
강한서의 눈에 비친 그녀는 배부른 새끼 고양이처럼 조금 어리바리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강한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한성우가 먼저 끼어들며 말했다. "형수님, 이 팔찌에 따라오는 사은품은 없어요? 한서가 사은품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강한서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말했다. "뭔 개소리야?"한성우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두 사람 강운이한테 준 양말 때문에 싸웠었잖아?"유현진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은품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자기 물건을 내가 내 맘대로 누군가에게 주는 걸 싫어할 뿐이에요. 일종의 소유욕이죠."소유욕이라...한성우가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유현진은 강한서의 손을 잡고 당겼다. "이리 와서 하나 골라 봐."강한서는 머리를 숙여 유현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보고 있다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강한서는 매번 유현진을 돈독이 올랐다고 했지만, 유현진은 뜻밖의 돈이 생길 때마다 강한서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공유했다.생각을 마친 강한서는 커프스단추의 가격을 보았다. 제일 비싼 게 고작 700만 원이었다.강한서는 멈칫하더니 다시 생각을 정정했다. '공유는 하지. 많이 않하는것뿐.'이 브랜드는 개성화 브랜드로 가격대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판매원은 아주 열정적으로 유현진에게 여러 가지 디자인을 추천했다.유현진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강한서 소매에 대보았다.강한서는 유현진에게 몸을 맡기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홍우라는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됐어?""그 자식, 중등학교 동창인데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 나왔어. 몇 번이나 같은 학급이었다니까.""근데 당신한테 왜 저래?"사실 유현진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한때 유현진과 나홍우는 사이가 괜찮았다. 몇 번이고 한 학급에, 게다가 짝꿍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굳이 따지자면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다.유현진은 학생 때 연애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한창 피 끓는 청춘이니 연애하고 헤어지는
유현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아무렴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었겠어?"강한서는 갑자기 우뚝 서더니 눈빛이 차분해졌다."이걸로 주세요." 유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 어때?"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답했다. "역시 당신의 안목은 말이야."유현진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침 잘난 척하려던 찰나에 강한서의 방정맞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볼품없어."유현진의 웃음 띤 표정은 삽시에 굳어졌다. 그리고 약간 화난 듯이 커프스단추를 풀어 판매원에게 돌려주었다.강한서는 그녀가 다른 디자인을 고르리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도리어 여유롭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구경하러 갔다.반지를 다 본 후엔 목걸이를, 목걸이를 다 보고는 팔찌를. 커프스 단추만 빼고는 다 둘러보았다.강한서는 한참을 따라다니다 결국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커프스단추를 골라준다고 하지 않았어?"유현진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답했다. "나는 안목이 없어서 강 대표 마음에 드는 걸 못 고르겠어. 없던 일로 해."강한서는 눈가가 떨려왔다. '이 여자는 요즘 따라 성질이 더 못돼 먹었어.'강한서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답했다. "골라 줘, 대충 하고 다니지 뭐."'허! 좋다 좋다하니까 끝이 없네.'유현진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며 답했다. "우리 강 대표가 대충 하고 다니는 게 말이 돼? 그럼 내 마음이 편치 않아.""그렇긴 한데, 아니면......" 강한서는 멈칫하더니 눈앞에 있는 옥석들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이아몬드로 골라 봐. 당신 마음이 그렇다면."유현진......'강한서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개자식일까?'이때 멀리서, 유현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유현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원래 유현진이 추태를 보이도록 계획했었는데 결국엔 추태를 보인 사람은 본인이었다. 저기의 귀공자들도 현실적이었다. 방금까지도 열정적으로 그녀와 대화를 주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