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반듯한 웃음을 지었다.“은하 플라자, 세기 플라자, 백야 쇼핑몰, 한량리... 강 대표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자가용 아니면 택시? 택시로 가시겠다면 제가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알랑거리는 말투를 썼다. 강한서는 아첨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한현진이 이 말을 할 때 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유쾌하기까지 했다.‘귀여워 죽겠어.’그는 주먹을 입술에 대고 가볍게 기침한 후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차로 가고, 장소는 그쪽이 정해요.”“그럼 가성비가 좋은 백야 쇼핑몰로 가요.”강한서가 동의하자, 한현진은 이쪽으로 오시라는 제스처를 보냈다.“강 대표님, 올라가시죠. 제가 옷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겠습니다.”강한서가 입술을 깨물었다.“2억이 모자라서 다른 잇속도 챙기려는 거예요?”한현진은 별 생각 없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강한서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옷 갈아입는다는 말이 극히 애매하게 느껴져 귀가 빨개졌지만 기세에서 밀릴 수 없었다.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천상에나 있을 듯한 강 대표님의 값진 몸매를 감상할 수 있다면 저야 좋죠. 잇속을 챙기지 못하는 게 바보라는 말도 있는데...”강한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당신은 태교를 이렇게 해요?”한현진은 멈칫했다.“좋은 게 있는데 챙기지 못하면 멍청이죠.”강한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화가 났는지, 아니면 너무 쌍스러운 말이 싫었는지 그녀를 째려보더니 옷을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현진이 강한서네 집에 산다는 소문은 이내 지인들 사이에 쫙 퍼졌다.대외적으로 강한서가 기억을 되찾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결혼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딸을 목숨처럼 아끼는 송병천인데, 강한서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집에 보냈겠는가?다만 한현진과 주강운의 열애설이 불거지면서 주씨 가문에서도 두 사람을 결혼시킬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
양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바짓가랑이에 묻은 흙물 자국을 닦고 있었다. 흰색 바지를 입은 게 후회되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옆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가게 직원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다 정리하고 고개를 드니 주강운이 훤칠하니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양지원은 깜짝 놀라며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했다.“왔는데, 왜 말을 안 해요?”주강운은 피씩 웃었다.“중얼거리고 있길래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었어요.”양지원은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표절한 사람을 미친 년이라고 욕했고, 또 주강운은 왜 쇼핑몰에 가지 않고 길가의 식당을 골랐냐고 불평했다. 이 길을 걷지 않았으면 바지를 더럽힐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들이 보면 또 뒤에서 지저분하다고 비아냥거릴 텐데 하면서 말이다.“바지가 더럽혀져서 그래요.”주강운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양지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자를 살며시 끌어당겼다.양지원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저 평소에는 안 그래요.”이번에는 맞은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어리둥절해서 올려다보던 양지원은 그의 그윽한 눈에 빠져들어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정말 화근이다.그녀는 손을 가슴에 대고, 좋아하지 않아도 이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인간은 결국 모두 시각적인 동물이다.“참, 저한테 도움 청할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에요?”주문한 후 양지원은 화제를 돌려 먼저 입을 열었다.“급하지 않아요.”주강운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먼저 그쪽 친구분 상황을 얘기해봐요.”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사건은 복잡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양지원의 고등학교 동창이 대학을 졸업하고 인터넷 작가가 됐는데, 얼마 전 저작권 침해를 당했다. 표절자는 그녀의 시나리오, 캐릭터, 복선을 도용해 2차 창작의 명목으로 플랫폼에 작품을 발표하고 불법으로 이익을 챙겼다.게다가 독자들에
주강운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제 어떤 사건을 봐도 놀랍지 않아요. 인간의 어두움은 끝이 없으니까요. 이게 바로 인간이 아닌가요? 인간보다 더 무섭고 나쁜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는 흔히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욕을 하는데, 그건 사실 개와 돼지에 대한 모욕이에요. 돼지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너는 왜 사람처럼 못됐느냐’고 말할 거예요.”양지원은 멍해졌고, 친구 때문에 불평하고 잔뜩 화가 났던 것도 갑자기 풀렸다.주강운은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어쨌든 대신 문의하는 것이니 일부 세부 사항은 당사자가 그녀보다 더 잘 알 것이다.그녀는 주강운의 동의를 얻은 후 그의 카톡 계정을 친구에게 보냈다.마지막에 그녀가 물었다.“주 변호사님, 이 사건은 승소할 수 있나요?”“책 제목, 인물, 이야기 줄거리를 모두 원작 그대로 옮겼고, 자기 입으로 각 플랫폼에서 개작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절과 달라요. 저작권 침해는 틀림없는 사실이고, 중요한 건 친구분이 어떤 효과를 원하느냐예요. 사과만 받으려는지, 아니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지.”“저작권 침해로 얻은 수입을 누가 탐내요? 그 더러운 돈을. 그렇게 맷집이 좋아 인터넷에서 거들먹거리니 고소하고 소환장을 직접 집으로 보낼 거예요. 현실 속의 친척들이 그녀가 인터넷에서 어떤 물건인지 똑똑히 보게. 승소해서 받은 배상금은 소송비를 뺀 후 전액 기부할 거예요.”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는 주강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의 불빛 아래서 준수하고 부드러운 그의 얼굴은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다만 그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쉽다.상담이 끝나고 음식이 나오자 양지원이 다시 한 번 물었다.“주 변호사님, 아까 도와달라고 한 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주강운은 공용 젓가락으로 그녀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먼저 식사해요.”양지원은 더 이상했다. 뜬금없이 갑자기 친절하게 구니 무서웠다.하지만 생각이 단순한 그녀는 이내 안심
그녀는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고개를 쳐들었다.“주 변호사님, 좀 무례한 질문이네요.”“죄송합니다.”그는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 도움을 청하기 곤란해서요.”“남자친구가 있으면 당신을 돕는 데 방해가 되나요?”양지원이 궁금해하자 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제 어머니랑 마주칠까 봐 그래요.”“말 좀 제대로 해봐요.”주강운은 한숨을 쉬더니 설명했다.“집에서 빨리 결혼하라고 자꾸 소개팅을 주선하는데 회피할 수 없어서 먼저 누가 있는 척하려고요. 제 곁에 여자가 있으면 그렇게 재촉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양지원은 계속 눈만 깜박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소개팅을 막아달라는 거예요?”“어떻게 안 될까요?”주강운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강운이 한현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방관자인 양지원은 똑똑히 알고 있다.강한서가 기억을 잃은 지금 빈틈을 노려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는 뜻밖에 아무 동작도 없다.잠시 생각에 잠긴 양지원은 오늘 아침 단톡방에서 본 소식이 생각났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강씨 가문 별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원래 사랑하던 사이인데 한쪽이 잊었다고 해도 설레는 감정은 기억 상실로 인해 사라지지 않는다. 한 지붕 아래에 살다 보면 강한서는 틀림없이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끌릴 것이다.설마 이것 때문에 자신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단념한 것인가?하지만 그녀의 아버지한테 들은 바로는, 주씨 집안의 규율이 매우 엄하고, 주강운이 여태 싱글이었던 것도 집안에서 며느리에 대해 까다롭게 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집안에서 한현진의 돌싱 신분을 꺼려해서 주강운이 집안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건 아닐까?그러고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사리에 밝다. 그녀만 좋다면 못생겼든 신체가 불구이든 다 괜찮다고 하셨다.‘내가 잘되기를 바라면 안 되나.’양지원은 이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짓고는 주강운을 쳐다보았다.“어떻게 막으려고요? 여자
“양지원 씨, 양지원 씨, 주 변호사님은 썸녀와 너무 거리를 두는 거 아니에요?”주강운은 흠칫하더니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몰랐다.양지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그냥 이름 불러요.”주강운은 잠시 주저하더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원 씨.”이 나지막한 목소리에 심쿵한 그녀는 빨리 남자친구를 찾아야지, 안 그러면 계속 이렇게 만나다가 마음이 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식사가 끝나고 주강운은 양지원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둘이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양지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쪽은 한주시의 금융가로, 한주시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거의 모두 이 근처에 있다. 물론 재벌집 아가씨와 도련님들도 이 근처를 많이 돌아다닌다.문을 나설 때 양지원은 벌써 몇몇 지인들을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양지원은 차에 오른 후에야 주강운이 왜 식사 장소를 여기로 정했는지 알았다.오늘 그녀가 동의하든 안 하든 여기서 밥만 먹으면 소문이 날 것이다.구경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나서 뭘 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저 즐길 가십거리가 있는지, 퍼뜨릴 루머가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그들의 입에서 그녀와 주강운은 아무 사이가 아니더라도 무슨 사이가 된다.양지원은 주강운을 힐끗 째려보았다. 이 사람은 그걸 몰랐을까?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차가 백야 쇼핑몰을 지날 때 양지원은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옅은 하늘색 패딩을 입고 꽁꽁 싸맨 여인이 작은 가방을 들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재촉했다.뒤에 있는 남자는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듯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에게 돈을 빚진 것처럼.이게 강한서가 아닌가? 앞의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한현진은 몇 발짝 걷고는 고개를 돌려 몇 마디 하고, 강한서가 다가오면 다시 앞으로 걸었다.차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양지원은 강한서를 힐끗 쳐다보았다.강한서는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줄곧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디자인이 앙증맞긴 하지만 가공 상태가 너무 투박하다. 그리고 이런 싸구려 물건으로 물을 마시면 안전한가?더 이상 물건을 들 수 없는 강한서는 그녀가 또 가게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저는 더 이상 들 수 없어요. 더 사면 당신이 들어야 해요.”“제가 들면 되죠.”한현진은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갔다.임신한 사람 맞아? 집에 누워 있어도 허리가 시큰거린다던 사람이 몇 시간째 쇼핑을 하면서 점점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강한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따라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판매원이 반갑게 맞이했다.“고객님, 남편분 옷을 사러 오셨나요?”강한서는 그제야 들어선 곳이 남성복 가게라는 것을 알았다.“구경 좀 할게요.”“이쪽은 저희 봄 신상입니다. 양복도 있고 재킷도 있는데, 맘에 드시면 남편분께서 입어보셔도 됩니다.”한현진은 한 번 둘러본 후 강한서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한현진은 그를 힐끗 본 후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 사람은 제 오빠이고, 저는 지금 남자친구 옷을 사려고요.”그러자 얼굴을 다른 데로 돌린 사람의 뒷모습이 굳어졌다.판매원은 당황하더니 급히 죄송하다고 말했다.“남자친구분의 키와 몸무게를 알려주시면 사이즈를 추천해드릴게요.”“키는 저 사람과 비슷하고 몸무게도 아마 비슷할 거예요. 제 남자친구는 파스텔톤을 좋아하니까 추천 좀 해주세요.”판매원은 즉시 그녀에게 몇 벌을 추천해줬다. 한현진은 옷이 어떤지는 아예 보지도 않고 줄곧 강한서를 훔쳐보았다.이 자식이 처음에 몸이 굳어지더니 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다 괜찮은데, 바지는요? 추천할 만한 바지는 없나요?”판매원은 즉시 그녀에게 바지 몇 벌을 추천했다. 강한서는 비싼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판매원은 옷차림을 보고 두 사람이 잘사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대어를 낚을 것 같으니 할인 혜택도 없는 신상만
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생각할 필요 있어요? 옷을 입어볼 때는 부르지 않다가 사은품을 고를 때 부르는데, 무슨 좋은 일이겠어요?”“...”“그 셔츠도 싸지 않아요. 원가가 16만원이에요.”“내가 16만원이 없어요?”강한서는 음침한 얼굴로 귀찮아하며 말했다.“빨리 가요.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는 말하고 밖에 나가 버렸다.“생각나지 않았는데, 화는 왜 내지?”한현진이 혼자 중얼거렸다.판매원이 교환하겠냐고 다시 묻자 한현진은 하겠다고 대답했다.그녀가 물건을 들고 나왔을 때, 강한서는 가드레일 옆에서 전화하고 있었다.한현진이 가까이 가기도 전에 강한서의 말소리가 들렸다.“내일 저녁 괜찮아요.”그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마침 고개를 돌린 강한서가 그녀를 발견하고 조용히 옆으로 옮겨갔다.‘나쁜 자식! 내가 들으면 안 돼?’한현진은 굳은 표정으로 짜증 내며 말했다.“언제까지 통화할 거예요? 안 가요?”강한서는 흠칫하더니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밖에 물건 사러 나왔어요. 네, 그럼 내일 봐요.”한현진은 더 이상 그런 말투를 듣기 싫었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부리나케 걸었고, 강한서는 물건을 들고 급히 쫓아가며 나지막이 말했다.“천천히 걸어요. 연말이라 사람이 많은데 부딪치지 말고.”한현진은 코가 찡해났다. 같은 관심의 말이라도 느낌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예전의 강한서라면 말주변이 없어도 그녀의 손을 잡고 달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강한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의 눈에 그녀는 단지 아이를 위해 얽힌 낯선 사람일 뿐이며, 관심의 말이라 할지라도 책임에서 나온 것이다.임신해서 쉽게 예민해지는지 모르지만, 예전과 다른 지금의 그를 생각하면 한현진은 너무 마음이 서글펐다.멀쩡한 애인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녀는 그의 책임감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장난을 잘 치고 말솜씨가 없는 강한서가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강한서는 처음에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고, 역시 젊어서 그런가?겁도 없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 가람 씨가 아닌 것 같은데?”고개를 드는 여자의 모습을 본 오 여사가 순간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한, 한현진?”‘강한서와 한현진이 헤어졌다고 그러지 않았나? 강한서가 지금은 송가람과 가깝게 지낸다고 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다시 강씨 가문으로 돌아간 신미정은 다시 사모님들 모임에 자주 참석하고 있었다. 부잣집 사모님들은 모두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신미정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성 그룹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잃어 전처럼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인연의 끈을 완전히 잘라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신미정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고 해도 그녀는 어쨌거나 강씨 가문 후계자의 생모였다. 피가 섞인 사이니 강씨 가문에서 진심으로 신미정을 그대로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강한서에게 사고가 생기고 얼마 후, 신미정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갔고 사모님들 사이에서 전처럼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과 파혼하고 송가람과는 단순한 오빠 동생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는 그런 소문은 전부 신미정 쪽에 흘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비록 신미정이 왜 굳이 송씨 가문의 친딸이 아닌 가짜와의 결혼에 기뻐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강한서의 친엄마인 그녀가 그렇게 얘기하니 그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송가람에게 프로포즈는 언제 하냐며 떠들고 있던 그들 눈에 강한서가 전와이프와 백화점,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양시은이 소리 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언니 정보도 그다지 정확한 건 아닌가 보네요. 전 한현진 씨가 아름드리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요.”한현진이 다시 아름드리로 돌아간 일은 양시은만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신미정이 그 소식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송가람의 칭찬만 늘어놓자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꾹 닫고 있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