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람이 얼른 대답했다. “닭내장볶음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못 드셔보셨어요?”강한서가 말했다. “전 동물 내장을 좋아하지 않아서요.”말하며 잠시 멈칫하던 강한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번 시도는 해보죠.”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강한서도 먹어보려는 줄 알았던 송가람은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닭내장볶음을 강한서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목이버섯 돼지고기볶음이 한현진 앞으로 돌아왔다. 멈칫하던 한현진이 얼른 음식을 한 젓가락 집었다. 그 뒤로 강한서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 말할 때마다 한현진의 앞에는 그녀가 원하던 담백한 음식이 놓여있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라 오히려 우연 같지 않게 느껴졌다. 한현진은 금세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송병천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계속 그렇게 테이블을 돌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먹으라는 거니?”‘우리 귀한 딸은 좋아하는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오히려 저 자식이 황제처럼 먹고 싶은 걸 다 먹고 앉아 있네.’송병천이 화를 내자 서해금이 입을 열었다. “가람아, 예의를 지키렴.”송가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강한서의 환심을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바로 그때 입을 열며 송가람 편을 들 듯 말했다. “가람 씨 저 안 챙겨도 괜찮아요. 먹고 싶은 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가람 씨도 많이 먹어요. 한 달 사이 많이 야위었어요.”그 말에 송가람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한서 오빠.”한현진은 말문이 막혔다. 전엔 아마 강한서의 마음이 온통 한현진을 향해있고 송가람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송가람은 정말 강한서에게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심지어 송가람에게 음식도 집어주지 않고 그저 많이 먹으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송가람은 감동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음식이라도 집어주면 방부제로 표본이라
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빠, 한서 오빠는 지금 현진 씨를 기억 하지...”“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진이와 아무 사이도 아닌게 되는 거냐?”송가람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송병천이 손을 내저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넌 아줌마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해.”송가람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불만과 억울함은 집어삼켜야만 했다. 주강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현진 씨, 저도 같이 가요.”“괜찮아요. 금방 돌아올게요.”한현진은 말하며 강한서를 잡아당겼다. “제가 안내해 줄게요.”강한서가 한현진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옷을 정리했다. 그는 회사 대표 특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며 말했다. “앞장서시죠.”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몸이 금방 회복된 것만 아니었다면 아까 뜨거운 물을 섞었을 텐데.’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더니 바닥을 쾅쾅 밟으며 길을 안내했다. 몇 분 후, 한현진은 강한서를 핑크빛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강한서가 눈썹을 씰룩였다. “여기가 송민준 방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서늘해진 강한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한현진과 거리를 뒀다. 고개를 돌린 한현진은 방구석으로 도망한 강한서를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멀리 도망가는 거예요?”“왜 저를 현진 씨 방으로 데려온 거예요?”강한서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현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여기가 오빠 방이에요.”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 기억을 잃은 거지 멍청해진 게 아니에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오빠가 다른 사람이 자기 방에 가는 걸 싫어해서요. 제 방에서 해결하시죠.”강한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 갈 거라서요.”그가 말하며 방을 나서려 하자 한현진은 재빨리 움직여 강한서 앞을 가로막았다. “강한서 씨가 스스로 벗을래요, 아니면 제가 벗겨줄까요. 선
말이 끝나자마자 한현진은 강한서의 벨트에 손을 올렸다. 강한서는 마치 감전이 된 듯 장난스레 움직이는 한현진의 손을 꽉 잡았다. 한현진의 맹랑한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강한서는 목부터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마치 한현진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한참을 입술을 씰룩이던 강한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대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는 해요? 한현진 씨, 당신은 정말...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네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뭐가요? 전 단지 아까 제가 약병을 가지려 할 때 주머니에 숨긴 물건이 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대체 뭔데 그렇게까지 숨기면서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강한서는 사실을 왜곡하는 한현진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 분명...”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러나 한현진은 봐줄 생각 없이 오히려 강한서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현진은 쯧 혀를 찼다. ‘섰다는 말도 하지 못하다니. 기억을 잃더니 순진한 대학생이 됐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강한서는 원래부터 그런 비속한 말을 잘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교육을 잘 받았으니까. 천생 도련님이시잖아.’자기가 그런 강한서를 속세의 사랑에 허덕이게 했다고 생각하자 한현진은 어쩐지 성취감이 생겼다. 그녀는 눈으로 강한서의 이목구비를 살피더니 웃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왜 말이 없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본인이 잘 알겠죠.”화가 난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도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화났어요?”강한서가 다시 등을 돌렸다. 한현진을 보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태도였다. 한현진은 다시 자
강한서는 순간 그날 한현진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송가람을 감싸줄 때마다 난 송가람을 밟아버릴 거야. 그리고 네가 감히 송가람과 만난다면 난 네 후대를 끊어버릴 줄 알아.”강한서의 시선이 다리 사이에 놓인 발로 향했다. 조금 더 위로 향했다면, 정말 대가 끊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계속 집착하는 거, 재밌어요? 한현진 씨는 송씨 가문의 딸이자 아저씨의 금지옥엽이잖아요. 원하는 남자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본인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집착하는 거예요?”며칠간 마음을 굳게 먹은 덕에 한현진은 이미 전처럼 그의 날카로운 말에 쉽게 상처받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그녀는 그저 강한서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럼 강한서 씨는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왜 기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절 쫓아내는 일에만 집착하는 거예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한쪽만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기억하지 못하는 생사를 함께 한 정이라는 건 말이에요, 기억이 없는 사람에겐 부담이라고요.”“거짓말.”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혔다. “너 나 기억하는 거 맞지? 설사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나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잖아. 그렇지? 네가 왜 계속 날 쫓아내려 하는 건지 나 정말 모르겠어. 강한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얘기해 줘. 우리 같이 해결해 나가면 안 될까?”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이상하도록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운이를 이용해 제 화를 돋우거나 그럴 필요 없어요. 좋아하지 않으시면 상처 주지마세요. 민 실장에게 정명석 씨가 한현진 씨 첫사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명석 씨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현진 씨와 나이도 비슷한 것 같던데, 아마 저보다는 더 말이 통할 거예요.”그 말에 한현진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갑자기 강한서의 어깨를 툭 밀쳤다. “강 대표님은 아량도 넓으시네요. 헤어지는 마당에 제가 만날 남자까
강한서가 약병을 주워 들자 한현진은 바로 그것을 빼앗아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 입술을 달싹이던 강한서는 곡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이번엔 한현진이 거절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람을 부르려 하자 한현진이 눈을 감고 말했다. “나가기만 해요.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강한서가 흠칫 몸을 굳혔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현진은 강한서의 무시한 채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한서 씨.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정말 저와의 연을 끊을 생각이에요?”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한현진의 얼굴을 향했던 시선을 내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전 현진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한참을 침묵하던 한현진이 냉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꺼져요. 강한서 씨가 바라던 대로.”한현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깨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현진이 그런 말투로 강한서를 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잠시 후 말했다. “푹 쉬어요.”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문밖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자 한현진은 그제야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얼굴엔 조금 전의 병색 짙던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강한서가 저택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송가람은 종종걸음으로 강한서의 뒤를 따르며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차로 향하는 강한서의 걸음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한현진은 어쩐지 어떤 시선이 유리 넘어 창가에 닿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아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자주 운전하던 벤츠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창가에 한참을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임신 중절 수술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송가람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내연녀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그로 인해 송씨 가문과 멀어지는 일은 더욱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송가람은 강한서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선을 넘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강한서가 먼저 자기에게 고백하는 것일 테였다. 그렇게 되면 욕을 먹고 질책을 받는 쪽은 자기가 아니라 조강지처를 버린 배은망덕한 강한서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송가람은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설사 정말 그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송가람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전 와이프인 한현진과 송가람의 관계를 알게 된 이상 강한서는 절대 송가람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송가람이 자기를 좋아하는 건 근친상간이라고 강한서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었다. 강한서가 이토록 뼛속까지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송가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한현진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태도를 떠올린 송가람은 곧 한현진과 강한서 사이에 유쾌하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송가람의 말투가 바뀌었다. “현진 씨, 한서 오빠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조급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황 교수님께서 지금 한서 오빠의 대뇌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너무 많은 자극을 받으면 오히려 탈이 난다고 했어요. 한서 오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요즘엔 좀 자제하는 게 어때요? 한서 오빠는 현진 씨 때문에 이렇게 다친 거잖아요. 오빠는 현진 씨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현진 씨는 잠깐 거리를 두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요?”그 말에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강한서의 기억이 차라리 한평생 안 돌아왔으면 좋겠죠?”송가람은 한현진의 말에 부정하려 했지만 한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송가람 씨,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본인의 구역질 나는 탐욕에 핑계를 찾는 건 그만하죠. 송가람 씨가
“본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해요?”한현진의 눈빛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위기의 순간에 구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는 알아야죠.”비록 한현진 역시 당시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강한서의 외모에 한눈에 반했지만 그때의 상황에서 그녀는 전혀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유상수가 강제로 결혼을 부추겨 강한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때의 교통사고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만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현진은 생각했다. 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긴, 아무도 10여 년의 사랑을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심호흡한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는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전엔 현진 씨에게 그랬겠지만, 지금은 현진 씨를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현진 씨는 어떻게 한서 오빠가 저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한서 오빠가 눈을 뜬 그날, 오빠는 사실 대부분 일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오빠는 한눈에 절 알아봤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제일 방황하고 무력할 때 깨어나 처음 본 사람에게 의지하게 돼요. 오랫동안 의지하다 보면, 그 마음이 애착으로 변할지 누가 알겠어요?”한현진은 송가람의 표정을 지켜보며 조금의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송가람 씨 말은, 강한서가 송가람 씨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건가요?”송가람은 한현진의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강운 오빠가 아직도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배웅 안 해줘요?”말을 마친 송가람이 뒤돌아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송가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린 한현진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송가람, 이번엔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지?’옷매무새를 정돈한 한현진은 주강운을 배웅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강운과 송병천은 바둑을 두고 있었
주강운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저씨, 제 친구 중에 찻집을 하는 애가 있는데 거기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요. 궁금하시면 다음에 제가 모시고 갈게요.”그러자고 대답하려던 송병천은 곧 자신의 들쑥날쑥한 바둑 실력을 떠올리곤 괜히 창피할 것 같아 헛기침하며 말했다. “바둑은 조용한 곳에서 두는 게 좋지. 난 그래도 집이 좋아. 언제 시간 될 때 또 나와 바둑 두러 오렴.”주강운이 말했다. “모레 올게요. 모레 오후엔 스케줄이 없거든요.”송병천이 굉장히 기뻐했다. “그럼 잊지 말고 모레 오렴. 아, 그래. 강운이 너 무슨 음식 좋아하니?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현진에게 말해. 그래야 내가 다음에 잘 알고 준비하지.”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게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한현진은 어쩐지 주강운이 먼저 가족을 공략해 한 발 한 발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전략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던 그녀는 주강운을 배웅하는 짧은 길 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주강운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한현진이 드디어 한마디 내뱉었다. “강운 씨, 우리 아빠 어떤 분이신 것 같아요?”한현진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주강운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따뜻하시고 털털하신 분 같아요. 유머도 있으시고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신 분이시죠. 좋은 어른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우리 아빠를 양아버지로 모실 생각 있어요?”“...”질문은 내뱉은 한현진은 바로 후회했다. 워낙 눈치가 빠른 주강운은 한현진의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만약 강한서가 기억을 찾지 못하면 주강운과 만나보겠다더니 오늘엔 바로 그를 양오빠로 만들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주강운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 그는 침을 삼키며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현진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